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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아픔 대신한 '외침'

박노해 '노동의 새벽'…정동철 교수 서평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막사 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느린 걸음 펴냄)을 읽고 있었다. 첫 휴가를 나갔다가 부대 내무반에 몰래 들여온 책 중에 한 권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슬픔과 분노 때문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시집 한 권을 통털어 좋은 시 5편만 읽을 수 있으면 책값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첫장부터 끝장까지 숨 한번 크게 쉬지않고 읽어내려갔다. '새벽쓰린 가슴 위로 찬소주를 붓는다'라는 구절에서 밀려오는 슬픔이 '손무덤'에서는 분노가 '이불을 꿰매며'는 내 삶에 대한 반성이, 가슴 속 깊이 들숨처럼 들어왔다가 탄식이 되어 허공으로 뿌려졌다.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하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감동'이라고 얘기한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장르에서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에 문제가 있거나 감상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예술작품의 경우 특별히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만. 感動, 말 그대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입대 전, 그해 봄은 유난히 더웠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공대생이었고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고등학교 문학반 시절부터 신춘문예 주변을 얼쩡거렸다. 문학은 동경이자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대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달팠다. 1980년 5월 광주가 휩쓸고 간 대학은 전쟁터였다. 나야 한없이 좋았지만, 수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끔 시위가 벌어지면 무슨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공중에 하얗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최루탄들, 학생들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고, 전투경찰 최포조들이 뒤따라오고, 그러다, 시위를 구경하던 학생이 얼떨결에 대신 연행되기도 했다.

 

나는 가방 한구석에 시집 몇 권을 넣고 다니면서 수업거부가 있던 날은 나무 그늘이 있는 벤취에 앉아 읽곤 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모임에 참여했다. 매주 정해진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중남미혁명사부터 시작해서 당시 금서로 지정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 많은 책을 읽어댔고 시위를 따라나서기도 했다.

 

그날도 독서모임이 끝나고 막걸리 한 잔 걸치는 자리였는데 느닷없이 한 선배가 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엄중한 시절에 시집이나 들고 다니는 나약한 자유주의자적인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욱 하는 성격으로는 절대 뒤지지 않는 필자도 그게 뭐가 어떠냐고 되받아쳤다. 어수선했던 그 모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정말 자유주의자인지, 시대의 모순을 눈감아 버리는 비겁한 지식인인지 고민 하기도 했다.

 

시집 한 권을 선물받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10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했다. 최소한 그 당시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문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호였고 외침이었고 분노였다. 문학도 데모도 시원찮아졌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군대를 갔다.

 

나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군대에서 1년이 '노동의 새벽'을 받아들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는 박노해 이후 소녀 취향적인 문학관을 버릴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박노해 시인이 6년 여의 수감생활 이후 전향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무슨 상관인가? 계절마다 제철 과일이 있듯이 시대에 따라 시인의 세계관이 변한다고 해서 시인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그 시대의 유정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유정란은 그 시대가 품고 보살펴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일 뿐이다.

 

 

정동철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2006년 전남일보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전기전자공학과장, 기획팀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으로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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