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 묘사와 알록달록한 색으로 윤기가 나는 질감, 빛에 나타난 순간의 색을 포착한 그림은 조선인의 눈을 훔쳤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미술은 손재주를 지닌 청년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도내에서는 일본 유학파를 시작으로 서양화가 그려졌다. 이후 공교육과 사설 미술연구소를 통해 작가가 길러지고 본격적인 보급이 이뤄졌다. 광복 뒤 그룹 활동과 미술대학의 신설 등으로 현재 도내 미술계의 진용이 갖춰졌다. 도내 서양미술사를 조망해 문화예술의 맥을 가늠해 본다.
△유학파 통한 신미술 전파
도내 서양미술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1세대 작가를 통해 통해 이뤄졌다. 이순재, 김영창, 진환, 이경훈, 박병수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도내 첫 유학파 서양화가는 이순재(19 04~1958) 작가다. 그는 전주 출신으로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왔다. 도내 최초로 제7회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이른 봄’으로 입선하는 등 여러 차례 입선했다. 하지만 당시 서양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풍토와 작품에 대한 주체 의식의 약화 등은 그를 선구자에 그치게 했다.
반면 1950년대 이후 현대미술이 유입되기 전 일본이라는 제한된 통로로 유화를 접하고 작업 활동을 했던 이들에게 실험적인 작품을 기대하기 보다는 신미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게 미술 전문가의 의견이다.
비슷한 시기 이 작가에 이어 박병수, 김영창, 이경훈, 문윤모, 권영술, 김해, 진환, 정석용, 박두수 등도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
박병수 작가는 임실 부호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스즈키사구미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는 광복을 맞은 해 전주 고사동에 이순재, 김영창 등과 지역 최초의 사설 화실인 동광미술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다. 당시 일제 유산에 대한 비판과 반성과 함께 새로운 창작 의식을 다졌다. 이 화실에서 이의주, 천칠봉, 배형식, 이준성, 허은, 하반영, 소병호, 전영래 작가 등이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박병수 작가는 1948년 월북한 뒤 북학에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박두산 창작단 촬영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인상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룰 때 표현주의 화풍을 보여준 이가 진환(1913~1951) 작가다. 그는 고창 무장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자퇴하고 1934년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한 뒤 동경 유학 중인 이쾌대, 이중섭, 최재덕 작가와 교류하며 수학했다. 이후 부모님의 권유로 집안이 설립한 무장농업학원의 초대 교장으로 근무했지만 1948년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붓을 잡는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1951년 고향 뒷산에 피신해 있다 빨치산 소탕 과정에서 38살에 요절했다. 작업 기간도 10여년에 그치고 현재 남아있는 작품도 30여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 진보적인 작업으로 꼽힌다. 그도 이중섭 작가처럼 ‘소’를 즐겨 그렸으며, 민족의 강인함을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공교육 통한 작가 배출
일본 유학파가 당시 도내에 신미술을 보급할 때 교육기관을 통해서 서양화가들이 양성된다.
1925년 전주고보에 일본 중견작가인 모리린페이, 1929년 전주여고보에 프랑스 유학파인 오스이 츠지가 부임하면서 전통회화를 벗어난 서양화라는 문화가 교육에 도입된다. 1937년에는 전주사범학교에 우라자와 히로시, 이도 마사아키를 통해 공교육을 중심으로 미술학도들이 나왔다.
전주고보에서 김용봉·추광신 등, 전주사범에서 유경채·고화흠·추교영·한소희·김현철 등의 작가가 일본 유학파 이후 도내 화단에서 활동했다. 유경채(1920~1995) 작가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떨쳤다.
1970년대 도내 미술대학이 차례로 설립된다. 1970년 원광대 미술교육과 이후 1973년 전주대 미술과, 군산전문대 생활미술과, 1981년 전북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가 신설됐고 이곳의 졸업생들이 도내 화단에서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술인 뜻모은 전북예술회관 건립
해방 이후 미술인이 모여 만든 창작 그룹이 생겼다. 도내 최초로 1950년 ‘녹광회’가, 이어 1954년 신상미술회가 창립돼 서양화 붐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해방 뒤 추상미술이 국내 화단에 바람을 일으킬 때 도내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이를 받아들여 보수성을 나타냈다는 의견도 있다. 1974년 ‘물꼬회’에 이르러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도내 미술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전북예술회관의 건립이다. 도내 미술인과 예술인의 의지를 하나로 묶으며 전례가 없는 사례로 남았다. 국전이 출범한 지 20년이 지난, 1969년 제1회 전북미술대전이 열린다.
하지만 갈수록 출품작이 많아지자 1974년 예술회관 건립추진회의를 조직해 전국의 원로·중진 작가가 그림을 내놓아 기금을 마련했다. 1975년 12월13일에서 18일까지 서울 국립공보관 전시실에서 한국화, 서양화, 서예 등 도내·외에서 168명이 180점을 전시했다. 당시 도민 성금과 전시 수익금 등으로 2000만 원을 모아 건립 비용에 보태 1982년 2월9일 전북예술회관이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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