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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염제조장 이수자 김인석 대표 "민족의 신약 죽염, 아홉번 구워 만들어야 최상품"

“아내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힘든 나날을 보낼 때 모든 염분을 오로지 선생님이 제조하신 죽염을 통해 섭취했는데 온갖 노력으로 지금 기적을 일구어 나가는 중입니다. 그간 저희 주변에서 모든 과정을 봐오신 분들이 서서히 죽염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체득한 여러 경험 이루 말 할 수 없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캐나다 교포가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23호 죽염제조장 효산 허재근(87) 명인과 그 이수자인 김인석(58) 삼보죽염 사장에게 보낸 메시지 내용이다.천일염을 대에 넣고 아홉 번 구워 만든 죽염(竹鹽)은 제조가 까다롭고 매우 귀해 예부터 민족의 신약(神藥), 또는 완전한 물질 오행단(五行丹)으로 여겨져 왔다. 죽염의 기원은 신라 경덕왕 때 완산주 출신 승려 진표율사가 부안 개암사에서 최초로 전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죽염의 근원지인 전북도는 지난 1999년 개암사 주지를 역임한 효산 선생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한국 최초). 불과 2년 전만 해도 정정했던 효산은 고령에 청력이 거의 쇠했고,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라 한다. 지난 18일 고창과 부안을 찾아 효산과 함께 가장 최근까지 오행단을 빚은 도 죽염제조장 이수자 김인석 사장을 만났다.-효산 스님이 어떻게 죽염과 인연을 맺었는지요.“스님은 1958년부터 1992년까지 남원 실상사와 부안 개암사에서 주지로 계셨습니다. 11살 때부터 개암사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관솔을 따 소금 태우는 심부름을 하셨는데,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야 그게 죽염 제조과정인 걸 알았답니다. 개암사에서 스승이셨던 현응 대종사로부터 죽염 제조 비법을 전수받아 연구·개발하시고, 효능이 뛰어난 죽염 제조법을 제게 일러주셨습니다. 부안 계화면에 ‘죽염제조전수관’을 설립해 홀로 지내시다가, 최근 보살님의 도움을 받고 계십니다.”-스님의 죽염 관련 일화가 궁금합니다.“젊은 시절에도 개암사에 계셨는데 노스님들이 죽염을 상복하셨고 인근에서 환자가 오면 그것을 비방처럼 처방하셨다 했습니다. 또 6·25전쟁 이후 나주에서 모친의 병환 때문에 찾아온 분과 부안에서 술에 절어 살던 분에게 죽염 복용을 권해 건강을 회복시킨 사례 등을 말씀하셨습니다.”-죽염 제조 저반에 깔린 철학은 무엇인가요.“불자들인 만큼 자성불이 보고 있다는 마음에 스스로의 의지와 내 마음과 한번 했던 약속, 초심을 끝까지 지켜나가 바른 공법으로 만들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둡니다. 또 스님은 돈 욕심 내지 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 정신으로 병든 이에 대한 구제를 강조하셨어요. 우리 몸이 갈수록 산화되고 병들어 가는데, 고되고 힘들어도 알칼리성 물질로 신체를 환원해주는 죽염을 만들어 의약품을 오용하는 현대인들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 벌이가 안 되고 힘들어도 이게 나의 소명이라는 의식에 다른 쪽으로 기웃거리지 못하고 있습니다.”-국산 1등급 천일염은 최상품입니다. 그걸 9번 굽는 이유가 무언지요.“천일염을 9번 구워 녹여내면 보라색을 띤 자죽염(紫竹鹽)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염이고 이전 것은 반제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구운 것은 양치나 음식 제조에 곁들이면 좋아요. 9번 굽는 것은 수가 9에서 멈추지 않습니까. 달인의 경지, 바둑도 9단까지 있지요. 퀼리티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나무 수액이 스며들고 매 과정마다 지장수(地奬水)를 뿌리기 때문에 목(대나무)·화(불)·토(황토 가마 및 지장수)·금(9번째 쇠가마)·수(용융) 등 오행이 다 결집됩니다. 소금이라 치부할 수 없는 완전한 물질인 오행단이 되는 것이지요. 오행단은 산삼·녹용과 달리 체질과 상관없이 일상에서 복용해도 몸과 조화를 이룹니다. 경희·부산 한의대 등의 논문이 자죽염의 효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또 요즘 천일염을 현미경으로 찍어보면 유해물질이 많이 붙어있어요. 해수에 축적된 가축 폐수와 환경호르몬이 소금에 남아 구울 때 역한 냄새가 나고 탁탁 튀는 것이지요. 아홉 번 구우면 그게 법제(法製)돼 거의 날아갑니다.”-짜게 먹으면 안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정제염을 먹었지요. 깨끗하고 하야니 그게 좋은 줄 알고. 정제염은 이온법에 의해 결합하는 거라 미네랄이 없고 짠맛만 강해 강산성을 띱니다. 천일염은 오염물질이 있지만, 그래도 중성 정도를 나타내죠. 죽염은 알칼리성으로 일반 소금과는 다른 물질입니다. 그저 무조건 짜게 먹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양질의 염분 섭취에 중점을 둬야한다는 생각입니다.”-유달리 9번째 가마만 다르고, 원료로 국산 대·송·황토·천일염을 고집하시는데.“1500도의 열로 녹여야 자죽염이 용암처럼 흘러나옵니다. 8번째까지의 황토가마에서는 이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수 제작한 스탠 스틸 가마를 사용합니다. 저희는 조선 도공들처럼 장작으로 100% 토종 소나무만 사용합니다. 소나무는 송진 때문에 화력을 극강으로 올릴 수 있어 질 좋은 죽염을 얻을 수 있고, 태울 때 유해가스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나무는 남원·담양·진주(산청)와 거래해 공급에 큰 문제는 없지만, 원가가 상당히 높아 여유 자금을 대밭 조성에 씁니다. 벤지 오래되면 말라 수액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수입하지 않습니다. 황토는 스님이 ‘어머님 품안과 같다’고 말하신 물질로, 흙 중 가장 뛰어난 정화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원래 주산지인 이곳 고창 것을 사용합니다. 천일염은 삼양염전에서 사용하다가 인근에 골프장이 생겨 영광에서 조달받고 있습니다.”-경남의 인산가에서 죽염을 발명했다는 주장을 합니다.“국내 업체 중 인산가의 매출이 가장 많지만 발명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김일훈 선생께서 대체의학자셨던 만큼 죽염 제조법을 전해 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개암사에서 불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대로 해온 것입니다. 밥을 짓거나 김치 담그는 일을 발명이라 하지 않잖아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효산 선생께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산 선생께서 죽염이란 명칭을 1980년대에 처음 사용하신 것은 맞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며 상생의 틀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바람이 있다면“모든 죽염 제조자들이 전통의 방법을 우직하게 고수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죽염의 기능 검증 일에 더욱 치중해서 단시일 내 많은 관련 논문이 나오길 소망합니다. 아스피린은 5만편의 논문이 있는데, 죽염은 아직 20여편에 불과합니다. 죽염이 소금과 다른 물질이란 것이 더욱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끝〉● [죽염은] 소금과 다른 물질 '오행단'·성인병 치료 효과에 탁월대한자죽염연구회는 9번 구운 자죽염은 결코 소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독성과 부작용이 없으며 환원 작용을 통해 체내 부조리를 없애는 만큼 학계는 소금과 차별화하기 위해 ‘오행단’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이로운 각종 미네랄을 함유한 새로운 물질로, 장기 복용할 경우 각종 성인병과 염증 치료 및 미용 등의 효과가 있는데다, 민족 고유 민방제재로서의 전통과 독창성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고귀한 유산이라는 의미다. 중국 바이뚜 백과사전은 죽염을 문화재로 소개하고 있다.실제 죽염은 pH13의 강알칼리성을 띠고 있고, -430~500mV로 -420mV의 수소보다 환원력이 높아 신체 중화에 탁월하다는 한국·일본의 연구 결과가 있다. 몸을 해치는 강력한 산화력을 가진 콜라와 두통약은 각 484mV, 636mV의 수치를 나타낸다.죽염은 6달간 간수를 뺀 1급 천일염으로 만든다. 직경 7~8㎝ 대를 한쪽만 뚫리게 잘라 그 통에 천일염을 가득 넣고 황토 가루를 반죽해 봉한 뒤,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피면 대나무는 소금에 녹아들어 타 없어지고 소금 덩어리만 남는다. 이를 지장수를 뿌리며 잘게 다져 대통에 또 넣고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지장수는 황토 지면을 파고 깊이 약 2자 정도의 구덩이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넣고 휘저어 섞어 그것이 침전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위의 맑은 물을 취한 것으로, 열을 내리고 해독하며 중초(中焦)를 조화시키는 효능을 가졌다.통상 죽염은 치약을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효산 스님이 지도하는 삼보죽염도 치약 원료로 월 5톤 가량을 납품하고 있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5.05.22 23:02

전라삼현승무 문정근 명인 "춤은 인연이자 운명…흐름따라 자연에 맡겨야 "

조지훈 시인의 시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승무(僧舞)는 한국 전통춤의 백미다. 번뇌의 범속(凡俗)을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예술의 경지를 형상화 한, 인간 내면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이지적(理智的)인 춤이 승무다. 관객을 등지고 북을 향한다거나, 머리에 고깔을 써 얼굴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는 등의 동작은 무용수가 자신의 내면에 보다 집중해 예술 본연의 멋을 추구하고 자아낸다는 점에서 더욱 진솔한 메시지를 전한다.승무는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양태로 발전했다. 전라감영 소재지 전주에서는 농삼현(弄三絃)과 민삼현(民三鉉) 음악에 따른 승무가 발달했고, 이를 전라삼현승무라 한다. 잠시 명맥이 끊겼던 전라삼현승무는 문정근(63) 선생에 의해 복원재현돼 오늘에 이른다.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52호 문정근 명인은 이매방한영숙 선생으로부터 현존하는 2종의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승무를 이수했고, 전라삼현승무의 정자선-정형인-전광옥 선생과 정자선-박금슬 선생 양대 계보까지도 모두 섭렵한 유일한 무용인이다. 그를 지난 29일 전주시 덕진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약 60년 춤 세월의 도구가 돼 준 문 명인의 손목과 무릎에는 커다란 압박붕대가 자랑처럼 감겨있었다.버텨준 몸이 고맙습니다. 그래서 몸 마디마디를 고맙다고 만져줄 때가 있어요. 관절이 사실 많이 상했습니다. 수술은 안 했고, 치료 많이 받고 있습니다.-춤과의 첫 인연이 궁금합니다.서너 살 애기 때 할머니가 절 업고 나가면 그 때부터 춤을 추기를 좋아했대요.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 때, 당시 완주 용덕 참 시골학교였는데도 남자인 저를 선생님이 무용을 시키셨어요.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계속 인연입니다. 선이 예쁘거나 하는 게 보이셨는지, 공연히 무용을 시켰겠어요. 5학년부터는 동생들 삼삼오오 모아놓고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를 동작을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제대로 무용학원에 간 것은 고교 때 최선 선생님께 간 것이에요. 그런데 무용과가 아닌 전주교대로 진학했지요.-교단을 떠나 무용인의 길을 걷게 되셨단 말씀인데.교직에 7년을 몸담으며 참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싫지 않았어요. 특히 특별활동에서 무용을 맡아 아이들을 주말에도 불러 지도했는데, 다들 너무 잘하고 저도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운명이 이렇게 이끌었나, 인연 따라 가는 것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아 이게 인연이었구나 하는 생각, 모든 것을 초월했나 하는 생각입니다.(문 명인은 한성대 학부와 경희대 대학원을 거쳐 전북대에서 전라삼현승무 복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선생님께 춤이란 무엇인가요.인연이자 삶입니다. 춤을 좋아했고 열심히 노력했고, 나름대로 소품이든 대작이든 많이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직도 잘 못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아침에 항상 이곳에서 연습을 합니다. 승무는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춤이기 때문에 15분 정도 추면 땀이 이렇게 납니다.-승무에 임하는 마음이 궁금합니다.20대 후반에 가톨릭 신자가 됐는데 오히려 불교 책을 더 많이 읽습니다(웃음). 가톨릭 입교 전부터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간이 왜 왔다 가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 고민, 그래서 그걸 다 깨달으려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선하게 이끌어 누구에게 마음이 끄달리지(꺼둘리지) 않는, 주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잔잔한 텅 빈 마음 자체를 찾아서 가는 것이지요. 사실 젊을 때는 욕심을 내서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 남보다 한 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다 과정 같습니다. 지금은 다 비운 허허로운 상태에서 흘러가는 자연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자연대로 추는 게 좋겠다, 자연의 일부가 돼서 그대로 추는 게 좋겠다는 마음입니다.-전라삼현승무 복원과 재현에 어려움이 크셨을 텐데.지난 2001년 착수해 약 4년 걸렸습니다. 문헌 기록 없이 전승돼 옛 선생들의 후손 주소를 수소문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전광옥 선생님이 무용에 관심이 많아 전주농고시절 추시던 승무를 되살려내 고증을 받고, 이리 저리 해보시고 그 동작을 토대로 제가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과정들 속에서 이게 기네 아니네 하며 마음고생도 많았고, 포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뭔데 전주 승무를 찾겠다고 이 고생을 할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서울 이매방 선생님께는 크게 혼이났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것을 추길 원했는데, 전주까지 오셔서 한참 절 나무라셨어요.-전라삼현승무 복원에 큰 의지가 있으셨군요.예술은 그 지방 생활환경의 표현이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의 춤이, 특히 승무와 살풀이는 뚜렷이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남의 것만 좋게 보입니다. 사실 서울의 춤이 화려하고 작품도 좋아요. 본시 좋은 쪽으로만 따라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것을 잃어버린 거예요. 전라삼현승무가 덜 화려하더라도 찾아내야 하고, 더 좋은 작품으로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원본과 아주 같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동작을 찾아낸 것 자체에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스승 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전주에서는 최선김강수 선생님께 기본을 배웠고, 서울 가서 박금슬조흥동이매방배정혜김진걸 선생님, 김천흥 선생님께는 궁중정제도 배웠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일류 선생님들을 다 섭렵했네요. 한영숙 선생님께 직접 승무를 배운 게 얼마나 큰 복인가요. 이매방한영숙박금슬, 세 승무를 다 뗀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을 겁니다.-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즘 예술 해서 먹고살기 힘들다보니 후배들이 많지 않아요.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서두르지 말고, 편안히 생각하면서 꾸준히 연구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전라삼현승무를 다듬고 발전시킬 수 있는, 춤을 갈고 다듬고 발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문화, 특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듭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서 삶 자체도 힘들어요. 주변의 애정과 응원이 필요합니다.● [전라삼현승무는] 파계승이 번뇌 잊으려는 춤경기 승무보다 강하고 센 맛승무와 전라삼현승무 모두 대삼소삼(大三小三, 강과 약)의 리듬과 춤사위가 오묘하게 조화돼 있다.승무는 불교가 한국에 수입됨과 동시에 전래된 무용으로, 춤사위는 장단의 변화에 따라 7마당으로 구성된다. 정중동동중정이 잘 표현돼 민속 무용의 정수로 꼽히며, 말미의 북 연타는 주술적인 힘을 발휘해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이끈다.승무의 연원은 불교의식무용 중 법고춤 유래설과 민속무용 유래설 등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이 중 민속무용설에는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려고 춘 데서 비롯됐다는 설과,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고 북을 치며 추기 시작했다는 설, 김만중의 구운몽 유래설 등이 있다.문정근 명인에 따르면 전라삼현승무는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는 춤에 가깝다. 내면에 감춰진 정신과 심리적 갈등을 투박하고 당차게, 하지만 치밀하고 멋스럽게 승화시킨 작품이다. 또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의 승무는 경기삼현음악을 쓰지만, 전북의 승무는 전라삼현음악을 사용해 큰 차이를 보인다. 삼현은 거문고가야금향비파의 3가지 현악기를 일컫는데, 전라삼현승무는 전라삼현육각(피리2, 대금1, 해금1, 장고1, 북1)에 맞춰 춘다. 이 중 전주 농삼현은 우조에 가까우며 관아에서 행했고, 백성들의 민삼현은 계면조에 가까웠다.맑고 낭창낭창한 경기 승무에 비해 전주 승무는 강하고 센 맛이 있다. 전라도의 경우 신명나는 농악과 판소리에 비해 풍류음악의 발달은 비교적 더뎠다. 예술은 삶의 반영인 만큼, 지역민들의 삶이 한 많고 힘들었을 것이라는 문 명인의 해석이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5.05.01 23:02

석공예 명장 김 옥수 명인 "신도들이 불상 보며 마음의 평안 얻을 때 가장 보람"

익산(益山) 금마(金馬)면 일원은 옛 삼한 중 최대 세력을 자랑했던 마한(馬韓)의 중심부였고, 백제 말기의 수도였으며, 왕궁리 유적지와 동양 최대의 절터 미륵사지를 보유한 한반도의 고도(古都)이다.국내 정치문화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 지역에서는 예부터 돌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전탑과 목탑이 발달한 중국일본에 비해 석탑이 발달한 한국에서 석재 자원이 풍부한 익산이 과거에 주목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난 15일 익산 일심석재를 찾아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이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6호 김옥수(61) 명인을 만났다.사람이 살면서 발 디디는 모든 것에 돌을 필요로 합니다.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깔고 항만을 만들고 석축을 쌓고 댐을 막는데도 70%가 돌이 들어갑니다. 한국에 돌이 흔하니 사람들이 소중함을 모르는데, 돌은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입니다. 김 명인은 돌의 가치를 강조하며, 특히 수 천년에 이르는 한국 석재문화 형성에 익산의 황등석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강조했다.-석공예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시골에 살면서 부모님이 경제적인 문제로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보성군 득량면에서 14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5월 보리 벨 때 낫 던지고 도망 나와 무작정 상경했지요. 고향 선배들을 찾아가 처음 1년간 삼양동과 장충동 등지에서 간장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15세) 망우리에 가 석재기술을 배웠어요. 3년 3개월만에 기술을 마스터했습니다. 손재주가 좋기도 했지만, 쇠자로 맞아가며 도제식으로 정말 혹독하게 배웠습니다.-익산에 정착하신 계기도 궁금합니다.익산에 온지 딱 30년 됐습니다. 이곳은 황등석 산지이기 때문에 자재 조달이 쉽고, 자유수출지역이 있어 일본으로 수출한다던가 하는 판매 여건이 예부터 좋았습니다. 사업 조건이 좋은 셈이지요. 1985년 당시에 직원이 약 200명 있던 동양석재라는 일본인 회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스카웃 돼 4년을 근무했어요. 그 이후 일심석재를 설립했습니다. 사업자 등록은 1992년이지만, 3년 정도 앞서 시작했지요. 옛날엔 다 그렇게 했습니다.-요즘도 절 등에서 석불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작업을 직접 하시는지.그럼요. 사찰에서 여전히 많이 필요로 합니다. 전국 웬만한 사찰의 불상이나 석탑, 석등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산소일이나 조형물 등 돌과 관련된 작업은 다 합니다. 요즘 진폐증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으니 중요한 부분 위주로 작업합니다. 불상은 얼굴이 중요합니다. 모든 예술은 얼굴 묘사가 가장 어렵습니다. 동물상과 달리 사람 얼굴은 여차하면 할아버지 얼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분만은 직접 작업합니다.-작업을 하시며 담는 정신은 무엇인가요. 철학이 궁금합니다.사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천직으로 생각하는 만큼 정말 훌륭한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작품이 소비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좋은 제품이 되길 바라는 게 제 평생의 지론입니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러 와서 기분 좋게 갈 수 있도록, 니즈(needs)를 만족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석공도 예술인만큼, 이를 위해서는 정성과 바른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사람 손으로 깎아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불상을 다루는 사람을 불모(佛母)라 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도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유지한 채 작업합니다. 그래서 내가 전에 부처님을 모신 후 수많은 신도들이 올 때, 불상을 보며 다들 좋아하고 내게 감사한 마음을 표할 때 참 뿌듯합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생기는 제일 보람된 순간이지요.-한중일 3국 불상의 특징이 다른 것으로 아는데.우리나라 불상은 이른바 동양적인 얼굴입니다. 한국인들은 좀 둥글고 통통한 걸 좋아하지요. 반면 일본인들은 불상이 갸름하고 날씬한 걸 좋아합니다. 삼국 중 한국 불상에서 편안함이나 자비로움이 제일 많이 읽힙니다. 한국인 성향에 중국 불상은 안 좋게 생각합니다. 눈이 튀어나오고 표현이 강하거든요. 온화한 표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지척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 복원이 지체되고 있습니다.사실 미륵사지 때문에 잡음이 많습니다.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어요. 지역에 가까이 계시는 분들께 자문과 협조를 구하면 좋은데, 그동안 그런 게 아주 부족했지요. 내 지역 제일가는 석재 문화재 아닙니까. 시간이 되면 언제든 같이 상의 할 텐데, 안 불러주는 석공이 가서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술력이 없어 복원을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의견 충돌이 잦다 보니 일이 지연되고 중단되는 거예요. 안타깝습니다.-석재 산업발전에 걸림돌이라면.황등석을 그간 많이 채취해 매장이 풍부하지 않습니다. 익산에 아직 미개발 석산이 꽤 있기 때문에 새로 개발하면 좋은데, 돌을 캔 후 복구비가 너무 비싸다 보니 사업자들이 석산 개발 엄두를 못 내요. 가로 세로 30㎝ 당 2년전에 비해 2000원이 올랐습니다. 이처럼 원자재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면 돌(원석) 값이 계속 오릅니다. 인건비도 오르죠. 하지만 완제품 판매 단가는 그 비율로 올릴 수가 없어요. 석재 업체들이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 기능공 양성이 안 되고 있어요. 돌이 많아도 기능공이 없으면 제품을 생산할 수가 없지요. 제가 2000년도 이전부터 기능공 양성 학교를 세워보려고 무척 노력을 했는데, 행정력이나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이 안 됐습니다. 국가에 건의를 해보면 그 순간만 넘어가 버리고 유야무야 돼요. 기능공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시설이 있어야 수 천년을 이어온 한국 석재 문화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숙제입니다.△김옥수 명인의 돌 사랑김 명인은 사)돌문화보존회를 12년째 이끌고 있다. 기능공 양성국보급 문화재 석재 보수각종 석재 사업 관련 정보 교환기술력 강화 등을 꾀하는 단체다. 이곳을 중심으로 민속 돌 다루기를 추진하고 있다. 민속 돌 다루기란 과거 산에서 돌을 채취해 운반하고 가공해 터를 다져서 세우는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다.그는 민속 돌 다루기 과정이라는 책자도 발간했다. 돌 다루기 놀이 전(全) 과정과 영차 영차하는 노동요 등을 작사했다. 그는 한국 석재 산업이 수 천년 동안 찬란했으며, 훌륭한 민속놀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2010 전북 민속예술축제에서 익산 돌 다루기 놀이(탑성놀이)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익산 '황등석'- 쓰임새 제일 많은 국내 최고 화강암익산시 황등면과 금마면함열읍 등 전북 최북단에서 생산되는 황등석은 화강암으로, 국내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고 유명한 돌로 꼽힌다. 김옥수 명장에 따르면 국내에 있는 150여 가지의 돌 중 황등석의 쓰임새가 다방면에 걸쳐 제일 많다. 하얀 회백색인 황등석은 물을 뿌리거나 비를 맡으면 쑥색 비슷한 색이 나와 미관상 보기가 매우 좋다. 철분 함유량이 적고 돌 강도도 좋아 건축 자재나 조각, 각종 석재 조형물에 적합한 재질로 평가받는다. 생산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고, 익산지역에 미개발 석산도 많은 상황이다. 익산지역 화강암의 매장 규모는 1072㏊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익산의 석재산업은 1915년 이리역 개통으로 인해 익산이 전라도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또 1973년 수출자유지역 지정도 산업 부흥에 큰 몫을 했다. 지난 1992년에는 익산의 석재 생산량이 전국의 70% 가량을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익산 외 전국 유명 석재 산지로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경기 포천시전남 고흥군경남 거창군 등이 꼽힌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5.04.17 23:02

국내 옻칠 분야 1인자 김을생 명인 "목기 본 고장에서 목공예 전승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지리산(智異山) 자락에 위치한 남원(南原). 이곳에서는 예부터 목기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실상사라는 큰 절이 있는 산내면은 자천타천 이 나라 목기의 원조, 발생지로 거론된다. 현재 8점의 보물이 있는 실상사는 한 때 1000명이 훨씬 넘는 스님들이 머물던 대규모 사찰로 많은 양의 목기를 필요로 했다. 또 목기장옻칠장들이 다양한 나무와 옻을 구하기에 넉넉한 지리산은 더 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지난 1일 산내면 백일리 금호 공예를 찾아 국내 옻칠분야 1인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김을생(80) 명인을 만났다.목기의 본 고장에서 목공예를 전승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분야에 정성을 다하여 사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늘 이후 자손들은 가업이 길이 빛나도록 갈고 닦고 할지어다.30년 전 유훈으로 써놓은 이 글은 자신의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옻칠 작업 중 가지시는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천직이라는 소명 의식입니다. 자기 분야에 열심히 사는 것, 그게 인생의 전부인 겁니다. 돈을 잘 벌고 그런 게 아니라 일 평생 한 번 나서 살다 죽는데, 자부심과 많은 긍지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만족하기가 쉽지 않지만 소소한 곳에서 만족을 찾으면 그게 좋은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대도 더 정성을 들여서, 돈을 잘 벌건 못 벌건 혼신의 힘을 다 해 이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옻칠과 목기 제작 일을 가문에서 3대째 이어오고 있는데요.이제 외아들 연수(45) 4대째입니다.(웃음) 사람이 자기 분야를 떠나면 안 됩니다. 일본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 몰두하는 성향이 강한데, 일본이 우리한테 못된 짓을 하긴 했지만 그건 참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1972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만42년째가 됩니다. 1969년에 공병대위로 예편했는데 군에 입대 할 때만 해도 이 분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전통 가업을 중시하고, 가업을 대대로 이어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고, 전라목기기술중학교(1951~1968년)에서 배운 고향의 목기를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내가 전라목기기술중학교 제1회 졸업생입니다. 이후 전주공고에 들어갔지요.-옻은 어디서 구하시나요.한반도에서는 옻나무의 3대 주산지로 평북 태천과 강원 원주, 지리산 자락의 경남 함양 마천면을 꼽습니다. 태천은 이북이니 거래를 할 수가 없고, 원주마천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산내면에서 목기가 발달한 것은 마천과 인접해 나무와 옻을 구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목기도 직접 만드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힘들지는 않으셨나요.힘들었지요. 옻나무에서 칠을 내려면 세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무에 흠집을 내고, 칠을 긁어내고, 그릇에 담는 사람이 필요한데, 옻 내는 사람은 꼭 문둥병자처럼 피부가 좋지 않습니다. 작업도 힘들기 때문에 누가 일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이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제일 문제입니다.-전통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많습니다.비단 목기만 그렇겠습니까만, 요즘 우리 전통문화가 많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 같습니다. 희망이 있고 돈을 잘 벌면 기술을 앞 다퉈 배우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또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려 하다 보니 전통 공예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겁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은 조상들이 물려주는 문화입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그 문화를 유지를 해야 긍지를 가질 수 있고 국격도 나오는 겁니다. 그저 돈으로만 판단해 전통문화를 없애버리면 국격이 안 서고 근본이 없어져요. 관이나 일반인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여줘서 전통의 명맥을 잇는 게 좋지 않냐는 생각입니다.-요즘 웰빙 바람이 불어 목기 수요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플라스틱이나 스테인레스가 없던 옛날에는 목기가 주가 돼서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목기 팔아서 학교를 세운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은 장사 속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작품으로 만들어서 파는 사람도 있고 한데, 홈쇼핑은 공업용이 많을 겁니다. 우리 같은 노인은 손으로 닦고 칠하고 그러지요. 또 목기가 중국과 거래하기 전에는 아주 잘 팔렸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교류하면서부터 값싼 목기가 들어와서 상당히 타격을 많이 입어 목기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섰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은 잘 몰라요. 중국산인지 남원산인지.-중국산과 국산 목기가 품질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품질은 사실 대동소이하고, 값은 중국산이 5배 정도 저렴합니다. 그 사람들 인건비가 적게 들고. 목기 소재를 구하기도 좋으니까 값이 저렴한 겁니다. 우리는 원재료도 비싼데다(옻 50g당 12만원) 구하기도 힘들고, 인건비 비싸고, 그러니 가격이 오르는 것이죠. 중국에서 옻칠을 가장해 화학 안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공예품의 품질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옻칠이 1000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옻의 장점은 무엇인가요.옻은 첫째 방수 역할을 합니다. 물속에도 잘 견뎌 냅니다. 중국이 옛 송나라 때 신안 앞바다에서 무역선이 뻘 속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발견된 옻칠된 목기가 모두 멀쩡하니 좋더라 이 말입니다. 송나라가 700년 전 이야기아닙니까. 또 옻은 침투력이 강합니다. 한 번 나무에 칠하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강력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벗겨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한 번 딱 칠해놓으면 불에 내화성이 또 있습니다. 불에 잘 안 탄단 말입니다. 넷째 세월이 갈수록 목기에 윤기가 흐르고 색상이 좋아집니다. 또 의학적으로는 옻을 먹기도 하잖아요. 구충제 역할도 하고 위장이 좋아져 혈색도 좋아집니다. 끝으로 옻칠한 목기에 음식을 담아두면 잘 상하지를 않아요. 밥그릇으로 사용하면 속에 있는 미생물이 죽는다고 합니다.-후학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은사람이 너무 돈 갖고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80평생을 살아 보니 많이 벌려 한다고 한 번에 돈이 벌리는 게 아니고, 자기 분야에 신경을 쓰고 몰두를 하고, 그렇게 자기 사업에 실패를 겪어 봐야 그 다음에 성공이옵디다. 나도 한 때 죽을 마음도 먹었습니다. 단, 전통문화를 이어간다는 차원에서 국가에서 좀 지원을 확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전남에서 무형문화재를 위한 환경 조성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주 그런 지역에서 아주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원 옻칠 목기는 통일신라 실상사서 첫 시작, 조선시대 궁궐 제기로 사용옻칠이란 옻나무의 수액을 칠한 것을 말한다. 옻칠을 한 목기는 방수와 방습, 심지어 화학적 반응에조차 탁월한 보존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까닭에 옻칠 목기는 수명이 천 년에 이른다. 실제 옻은 한국과 중국일본에서 금속이나 목공도장용(木工塗裝用) 도료로 가장 소중히 여겨졌다.남원의 옻칠목기는 산내면에 있는 통일신라의 사찰 실상사(흥덕왕 828년)에서부터 시작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궁궐에서 사용한 제기는 모두 남원 목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목기라도 표면에 옻칠을 하지 않으면 목기의 내구성이 약해 갈라지거나 변색되는 약점이 있다. 남원 목기가 지존의 지위를 누린 것은 뛰어난 옻칠 기술로 이를 뒷받침 한 옻칠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전북에는 김을생 명인을 비롯해 김광열노동식김영돌박강용안곤 등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목공예옻칠 장인들이 살고 있다. 특히 지난 2011년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유네스코 각국 대사 등을 대상으로 사찰음식체험행사를 개최하며 행사에 사용한 발우(鉢盂바리)를 모두 선물했는데, 여기에 쓰인 발우 110세트는 모두 김을생 명인이 제작한 것이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5.04.03 23:02

전주 부채'단선'·'접선'의 명인들 "태극선은 혼을 담은 그릇…합죽선은 음양의 조화 표현"

전주(全州)부채는 전국 제일이다. 질 좋은 한지가 나는 전주는 객사에 선자청이 있어 부채와 연관된 문화가 곳곳에 깊이 배여 있다. 전주 월드컵경기장도 부채를 본 딴 모습이다. 또 전주 부채의 명맥은 오늘날에도 고고히 이어지고 있다. 장인들은 사비를 들여 3층 규모의 부채 전시관과 사설 부채 박물관을 운영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단선과 접선 분야의 명인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조충익(67)엄재수(52) 선자장(扇子匠)을 만났다. 엄재수 명인은 고(故) 엄주원 명인에 이어 2대째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기도 하다. 선자란 부채를 뜻한다.● 조충익(태극선) 선자장- 태극선은 나의 영혼이란 글귀가 인상적입니다.이걸 만드는 데 있어서 제 혼을 넣습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뒤 내 부채를 보며 날 평가합니다. 태극선은 내 혼을 담는 그릇입니다.-태극선의 매력에 빠진 계기는.삼(三) 태극이란 한국의 근본이자 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매력에 빠져서 돈을 떠나서 하게 됐습니다. 또 나는 정말 열심히 스스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천직으로 생각했고,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몰두했습니다.-부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온고지신이라고 하지요. 근본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만 따져서 처음부터 그대로 답습만 하면 발전이 안 돼요. 고려 때 청자가 있었지만, 조선으로 오면서 분청사기도 나오고 백자도 나옵니다. 하나의 예술품이 또 되는 거예요. 그게 발전입니다. 조선인데 고려 때 얘기만 하면 안 되듯, 이제는 대한민국이니 고려조선을 토대로 대한민국에 맞는 걸작을 창출해야 됩니다. 예술품이란 새로운 미의 창조입니다. 옛 재료와 기법기능에 나의 새로운 생각을 덧댄 것입니다. 기능인에 머물지 않고 예술가로 승화돼야 합니다.-만드신 태극선이 많이 사용되는 곳은 어딘가요.국제 체육행사 때 선수들 태극선을 꾸준히 만들었는데, 남북 교류 활성화로 남북한이 동시입장하면서 한반도기를 사용해 납품이 끊겼어요.(웃음) 지금은 한국관광공사에서 홍보물로 국제회의를 한다든지, 그런 곳에 기념품으로 종종 보냅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전주를 예향, 전통문화와 예절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는 말 같습니다. 가령 시(市)나 도(道), 국가차원에서 외부에 선물을 할 때 의뢰를 하지 않아요. 경제적 문제를 떠나 자부심을 갖고 활동하는 기능장에게 주문해서 선물을 하면 주는 사람이 얼굴이 나고,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기능장도 체면이 서는 겁니다. 이 부문이 아쉽습니다.-전통문화 계승이 보다 원활하게 될 방안은 뭐가 있을까요.문화재를 사회에서 별로 인정을 안 해줍니다. 후세에게 지금은 이렇지만 나중에 괜찮을 것이다이런 말이 안 먹혀요. 체계적인 정책을 세워서 문화재나 기능장이 되면 명예를 얻고 먹고 사는 문제가 보장 된다고 한다면 이거 하지 말라고 해도 젊은 사람들 물밀 듯 하려 할 겁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가항력이란 게 있어요. 내 힘으론 할 수 없는 걸 국가에서 정책을 세워서 노력해야합니다.● 엄재수(합죽선)선자장-합죽선이 음양의 조화를 표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재료 대부분이 음의 기운을 가졌습니다. 대나무도, 한지도 그렇지요. 문양의 경우 박쥐는 중성입니다. 낙죽에는 양의 첫 꽃인 매화를 많이 그리고요. 그런데 이걸 음력 5월 5일, 양의 기운이 가장 큰 시기부터 사용을 하지요. 음의 기운을 가진 것을 겨울에 만들어서 여름에 사용해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천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가업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 접함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어요. 남들보다 빨리 배우고 색다르게 만들고, 이런 것들이 선친 눈에 띠었지요. 유물 사진을 보고 그걸 복원하는 과정이 있는데, 옛 사진만 보고도 이리저리 했겠다라는 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쉽게 잘 하는 게 천직 아닐까요.-과거 부채를 복잡함과 사치스러움의 미학이라고 표현하셨어요.만드는 과정 자체가 복잡하고 치밀합니다.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아 귀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가령 합죽을 0.4㎜로 얇게 깎아내고, 7가지 종류의 겉대를 붙여서 이렇게 하나를 만듭니다. 복잡하지요.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갑니다. 완전한 수작업으로 색다르고 특이하게 하다 보니 똑같은 게 나오지 않고 느낌이 다른 부채들이 나와요. 또 부채는 조선시대에도 사치품이었습니다. 합죽선은 양반들이 의관 중 하나로 여길 정도로, 자신의 첩으로 여길 정도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고리 같은 걸 금 무늬로 만들기도 했고, 선추(부채에 다는 노리개)의 경우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합니다. 쌀이 귀했던 당시에 부채 한 자루가 쌀 한가마니 가격이었다고 합니다.-합죽선 가격이 적당하다고 보시는지.저가품도 있지만 약 25만원에 일반품은 구매 가능합니다. 황칠선은 50만원으로 시작해서 400만원까지 하고요. 황칠선은 기본적으로 4개월 정도 공들여 만듭니다. 일반품은 3개월 정도 걸리지요.-부채에 전주의 얼이나 혼이 들어가 있다고 봐도 될까요.얼이란 역사성과 맞물리는 겁니다. 선자청이 중앙에 없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려는 의지가 컸다는 것입니다. 왜란 때 전주사고가 있어서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듯, 우리 완전한 도시에서 부채를 지켜오며 그 부채 속에 담는 옛 정신도 지켜온 것입니다.-부채를 만드는 기준이 있다면.사용할 수 없는 부채는 안 만듭니다. 부채는 생활 속에서 쓰는 거고, 그게 예술적으로 승화가 돼야 합니다. 사용과 휴대가 편한 부채를 만드는 것이 제가 부채를 꾸준히 만드는 기준입니다.● 전주 부채는 각종 국제행사 의전 단골, 반기문 총장에게도 선물부채는 크게 단선(團扇, 둥글부채)과 접선(摺扇, 쥘부채)으로 나뉜다.단선 중 유명한 것은 올림픽 개막식 등에서 선수들이 입장할 때 흔드는 태극선(太極扇)이고, 접선 중에서는 대나무 겉대를 얇게 깎아 합하여 만든 합죽선(合竹扇)이 최상품이다.전라도 감영 소재지로 선자청(扇子廳)이 있던 전주는 부채의 수요가 많아 다수의 선자장들이 생활했다. 또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명성의 전주 한지와 수많은 대가들의 선면화(扇面畵, 부채그림) 역시 전주가 부채 특산지로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옛 단오진선에서도 전주 부채는 단연 으뜸이었다.근래에도 이 같은 문화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7년 송하진 당시 전주시장은 반기문 UN사무총장에게 엄재수 선자장이 제작한 합죽선을 선물했다. 또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의 실험 퍼포먼스에 사용된 합죽선도 전주에서 만든 것이다. 과거 LA서울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 체육행사에 선수단 개막식 의전용으로 조달된 태극선은 조충익 선자장 작품이다.조충익엄재수 선자장은 전주에서 죽전선자방, 부채박물관이라는 사설 부채 전시관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후기부터 일제 강점기, 산업화 시대에 이르는 부채의 변천사를 되짚어 볼 수 있고, 세계의 부채도 관람할 수 있다. 부채는 무더운 여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조상들의 멋스런 삶의 양태가 배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늘도 전주에서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올곧게 외길을 걷는 명인들이 예술혼에 휩싸여 부채를 제작한다. 문명의 이기로 전통의 가치가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 전통문화가 명맥을 이어가는 현장인 것이다.

  • 문화
  • 이영준
  • 2015.03.18 23:02

30년간 죽력고 빚어온 식품명인 송명섭 씨 "자연스럽게 익힌 죽력고…개인소유 아닌 한국의 전통문화"

전북을 대표하는 멋 중의 하나가 풍류다. 풍류에서 술이 빠질 수 없다. 전북에는 이강주, 송순주, 과하주, 송죽오곡주 등 전통 명주들이 즐비하다. 명주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이를 지켜온 명인들의 숨은 노력과 열정이 있었다. 죽력고가 오늘날 전북의 대표 명주로 각광받는 데는 송명섭 명인(58)이 있었다. 대한민국 식품명인이며, 전북도 무형문화재인 송 명인은 30연년간 전통주를 빚어온 장인이다. 죽력고(竹瀝膏) 빚는 법을 어머니로부터 자연스럽게 문화로써 체득한 그는 죽력고가 개인의 것이 아닌 한국의 고유문화라고 강조했다.-가문에서 언제부터 죽력고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기자님들이 공통적인 질문을 합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했느냐. 저는 아 이거 언제부터 한 게 아닌데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전 무형문화재 입니다. 문화란 저 혼자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게 문화입니다.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은 기술이죠. 우리 집 대대로 내려왔다 이건 기술입니다. 전 인간문화재이기를 바라지, 기술자이고 싶진 않습니다. 문화는 제 것이 아니며, 저라는 매개체는 문화를 후세에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 집안에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몇 대에 걸쳐 내려왔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죽력고와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죽력고는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김치 담그는 것도 문화여서 아는 것이지,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지는 않지 않습니까. 환경에 따른 자연습득입니다. 김치의 경우, 한국인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김치를 담그니 그것을 어떻게 따로 가치를 표시해 놓지 않잖아요? 또 순창 고추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할머니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추장을 담근 게 아니란 말이지요. 맛이 좋아서 널리 퍼지다 보니 문화적 차원으로서 어떤 게 나온 것이지 모두 자연습득입니다. 그런 길고 깊은 인과관계가 있는 문화를 줄이고 줄여 내 것인 듯 이야기 할 순 없지요. 죽력고는 민족이 다 같이 가졌던 문화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가진 것은 문화적 가치가 없는 기술입니다.-예부터 죽력고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는 말씀이신데.제가 우암 송시열로부터 27대손인데, 송시열 선생이 죽력고를 드시고 진시절미 하다란 표현을 하셨습니다. 또 전북지역이 배경인 춘향전에도 상차림 중 죽력고가 등장합니다. 노래 가락 중 하나인 의부가에도 죽력고가 나오고, 정약용 선생도 죽력고를 너무 많이 만들어 대나무가 부족하니 고관대작들이 좀 자제하란 내용을 남기셨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죽력고와 관련된 일화가 있고요. 즉, 죽력고는 이미 조선시대에 널리 퍼진 하나의 문화였으며, 정치를 하시는 분도 드셨고, 노랫가락에도 있고, 소설에도 나오고 그랬던 바로 그 술입니다. 지금도 가양주로 죽력고를 빚는 집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전라도에서 특히 죽력고가 유명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재료 확보에 어려움은 없으신지요.전라도에 대나무 없는 마을이 거의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대나무가 자라기 좋은 여건입니다. 주변에 있는 대나무를 활용합니다. 가까운 선산에도 대나무 밭이 있고요. 장작은 구매합니다. 가격의 고하를 떠나서 장작이 있어야 술의 발생 자체가 자연스럽습니다. 인위적으로 특정 온도를 맞춰놓으면 그 온도의 맛이 나오는데 장작을 때면 온도의 기폭이 커져 술로 변해 나왔을 때 모양새가 다양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일부러 장작을 땝니다. 참나무의 비중이 많고, 일부 잡목이 들어갑니다.-죽력고가 전국적인 명성을 가지면서 사회적 관심도 많아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일본이나 유럽 쪽은 무형문화재가 사는 곳을 무장경관 2명이 24시간 보호를 해요. 문화를 귀히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은 문화가 많다보니 귀중한 것인데도 제 피부로 느끼기에 귀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고의성이 없게 홀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가 깊고, 속이 차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문화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지 않으면, 프랑스 와인이 칠레 와인에 뒤처지는 일이 생기듯 자기 것을 뺏길 수도 있습니다. 분명 각 국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는데 우리는 그게 무엇인가요. 이것은 사회 지도층이 우리 술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더구나 일정 때 문화 말살의 일환으로 술 자체도 못 빚게 했습니다. 이제 나라를 찾고 독립을 했으면 문화도 독립을 해야하는데 문화는 여지껏 그대로 있습니다. 문화는 아직도 독립되지 못했다고 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요즘 젊은이들의 관심이 기성세대보다도 훨씬 크다는 점입니다.-죽력고가 고유문화로서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 하나를 꼽으신다면.국가에서 전수를 하라고 하는데, 조건이 뭐냐면 전수자가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수자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한 달에 10만원 나오고 있어요. 앞으로는 20만원이 된다는데 그 사람이 그거가지고 어찌 생활을 합니까. 지금 3명째 전수 중입니다. 문화 전수자는 무수히 많아야 합니다. 지정을 하는 그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고작 세 사람 갖고 문화가 이뤄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전수자에 한해 그 사람이 적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는 줘야합니다. 이대로는 문화 전달이 아니라 세습밖에 안 됩니다.● 죽력고는 전봉준 장군도 마셨다는 술, 조선 3대 명주로 전국 명성전라도의 죽력고(竹瀝膏)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평양의 관서감홍로, 전주의 이강고(이강주)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은 최상급의 전통술이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이 일본군에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쇠잔해 있을 때, 죽력고를 세 잔 들이키고 기운을 차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울로 압송됐다는 매천 황현의 기록은 유명하다. 죽력은 청죽 토막을 항아리에 넣고, 사흘에서 닷새간 불을 지폈을 때 흘러내리는 진액이다.한방에서는 죽력고를 어린이가 경풍으로 갑자기 말을 못할 때 구급약으로 사용했고, 생지황계심석장포를 넣어 제조하기도 했다. 또 죽력은 옛 한의서에도 간과 심장위폐 등의 질환에 작용하는 치료제로서 혈압을 다스리고 중풍 등 혈관계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나온다.송명섭 명인은 죽력고를 빚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대나무를 얇게 썰어 항아리에 넣는 것이라며 항아리 안에 빈틈없이 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대나무를 담은 항아리는 땅에 뭍은 단지 위에 거꾸로 얹히게 된다. 그 뒤 항아리 입구를 물 먹인 한지로 감싸고 황토 진흙으로 전체를 덮은 후, 그 주변에 말린 콩대를 두르고 불을 지핀다. 그러면 항아리 아래에 있는 단지에 3리터 정도의 죽력이 고이게 된다. 항아리를 황토 진흙으로 감싸는 이유는 항아리가 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같은 정성을 들여 얻는 죽력에 약재를 넣어 증류해 빚는 술이 바로 죽력고다.진하고 깊은 맛을 품은 죽력고는 현재 국내 유일한 장인이 옛날 방식 그대로 생산해내고 있다. 심지어 과음을 해도 부작용이 없고, 날이 갈수록 몸이 개운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송명섭 명인은 술에 약재를 직접 넣지 않고 맛과 향을 간접적으로 우러나게 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약주로도 알려진 죽력고의 고(膏)는 최고급 약 소주에 붙이는 명칭이라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이영준
  • 2015.03.11 23:02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이일주 명창 "판소리 가장 큰 매력은 다섯바탕에 담긴 삶의 철학"

이일주(79) 명창이 춘향가의 한 구절을 들려주며 묻는다. (첫 번째) 나는 모른다 나는 몰라. 끝났어. (두 번째) 나는 모른다 나는 몰라. 뭐 어떤 게 좋아? 조심스레 두 번째 소리가 좋았다고 하니 얼라? 소리 들을 줄 아나 비네라고 한다. 앞은 겉 목으로 소리했지만, 뒤는 힘을 꽉꽉 담아서 불렀다는 설명이 덧붙었다.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인 이일주 명창은 판소리를 하는 데 있어 감정 즉, 진심을 가장 중요시한다. 소리의 감정 전달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그에게 동초제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예술 가운데 판소리만큼 어려운 게 없어. 판소리는 호흡에 따라서 감정을 집어넣는 거여. 그래서 관객들을 울릴 때 울리고, 웃길 때 웃기고 다 자기 재능대로 하는 거지. 자득(自得)으로 마음대로 웃고 울 수 있는 것이 판소리야.193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옥희. 증조부는 서편제 명창 이날치, 부친은 소리꾼 이기중 선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서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군산으로 옮겨온 14살 때부터 부친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평소 김연수, 임방울, 신영채 등과 교류해 온 부친을 따라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 참여하게 된다.우리국악단 해산 뒤에는 박초월 선생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김소희 선생에게 심청가와 춘향가 토막 소리를 배웠다. 이 두 명창에게 배운 판소리로 당시 전주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였지만, 동초제 다섯 바탕에 대한 갈증이 늘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오정숙 선생을 만나 동초제 다섯 바탕을 이수하고 완창이라는 개념을 깨우치게 된다. 오정숙 선생에게 판소리를 사사한 지 4년 만인 1979년 전주대사습 장원의 영예를 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8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가 됐다.박초월, 김소희, 오정숙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운 그는 제자들을 많이 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리를 잘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을 때 제일 기쁘다는 그는 오정숙 선생이 1977년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간 뒤 전주에서 김연수의 판소리를 가르쳤다.그는 동초제 오바탕을 끝내고 죽는다는 각오로 절치부심해 오바탕을 완성했다.오정숙 선생님하고 죽어도 오바탕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갈고 했어. 오정숙 선생이 했는디 내가 안 하면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오바탕 완창 발표를 다 하고 음반까지 냈지.실제로 이 명창은 1995년 킹레코드에서 춘향가, 2003년 신나뮤직에서 심청가흥보가, 2005년 수궁가, 2007년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음반으로 냈다. 이렇게 그는 김연수, 오정숙에 이어 판소리 다섯 바탕 모두를 음반화한 세 번째 명창이 됐다.그는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으로 소리의 더늠이 모두 다른 점과 다섯 바탕에 담긴 삶의 교훈철학성 등을 들었다. 동초제는 논리적으로 기승전결이 완벽한 것은 물론 사설의 논리성, 소리의 이면성 등이 큰 장점이라는 것.춘향가는 열녀, 심청가는 효, 수궁가는 충신, 흥보가는 우의, 적벽가는 믿음 등 판소리는 단순한 음악 예술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삼강오륜을 다 포함하고 있어. 또 동초제는 부정확한 오자(誤字)가 없어. 가사가 귤 인디 잘못 배운 사람은 겔이라고 말하지. 판소리는 글과 문장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표현력이나 전달력이 분명해야 해.판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을 묻자 소리하는 사람은 타고난 목구성이 좋아야 해. 목구성이 없으면 오바탕이든 토막 소리든 사람들이 듣기 싫어서 도망가 버려. 사람의 오장을 건드려야 혀. 목구성이 된 다음에 시청도 나오고, 통성도 나오고, 하청도 제대로 쓰고, 중간 목도 제대로 쓰고 다 그리여.보통 소리꾼은 자신의 소리에 미쳐야만 소리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는 자정 12시, 갑작스레 귀신처럼 목소리가 나오면 신이 나 새벽 3~4시까지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랬던 그는 이제 정오의 태양보다 지는 태양이 더욱 붉게 타오른다는 일명 패티김 정신을 외치며 직접 무대에 서는 것보다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그러나 아쉬움도 남는다. 크게 아쉬운 점으로는 스타 판소리꾼 부족과 귀 명창의 감소를 꼽는다. 판소리 전설을 만들어야 하지만 최근에는 감동을 주는 명창이 극히 일부에 그친다는 것. 또 귀 명창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이제는 2시간가량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양적인 풍요 속 질적인 빈곤을 맞은 상황이다.그는 판소리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향유하는 데 그치지 말고, 안에 담긴 정신까지 계승해야 한다며 제자들이 판소리를 제대로 배워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랄 뿐이라고 강조한다.끝으로 다시 태어나도 판소리를 공부하겠냐라는 고리타분한 질문을 던지니 이 명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난 대통령 하라고 해도 안 혀 소리하지. 대통령은 5년이면 끝나잖어(웃음).

  • 문화일반
  • 문민주
  • 2015.03.04 23:02

'무용계 원로' 최선 씨, 80세 현역…"철학 속에 혼이 담겨야 바르고 진실된 춤"

어머니의 한 손에는 아들의 자그마한 손이, 다른 손에는 지푸라기로 정성스레 엮은 달걀 두 줄이 쥐어져 있었다. 달걀 하나 구경하기 힘들었던 1945년, 어머니는 열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전주의 김미화무용연구소를 찾아갔다. 이후 어머니는 완산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을 위해 다시 달걀 두 줄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달걀 두 줄에 얽힌 일화다.국악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따라 무용에 발을 붙인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무용가들의 스승이자 버팀목이 됐다. 황무지에 가까웠던 전북의 무용계에서 자신만의 무용 분야를 개척한 그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 호남살풀이춤 최선(80본명 최정철) 명인.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김미화 선생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고, 전주에 남은 학생들은 무용 연구소에 모여 연습을 이어나갔다. 사라져 가는 조선 춤을 배우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그는 전주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던 추월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조선 춤에 대한 발 디딤, 걷기, 손동작 등 기초적인 동작을 익히고 동초수건춤을 비롯한 산조춤, 법고춤 등을 배웠다. 당시 사사한 동초수건춤은 호남살풀이춤의 바탕이 됐다.입춤인 동초수건춤은 작은 돗자리 위에서 여자는 손수건, 남자는 줄부채를 들고 추는 춤을 뜻해요. 동초는 동기(기생집에서 시집을 가지 않은 기생)와 초립의 합성어죠. 당시에는 춤음악이 없어서 추월 선생의 장구 가락이나 구음에 맞춰 춤을 췄어요. 고등학생 형들을 따라다니면서 춤을 배우기도 하고, 경찰학교 악단과 함께 산간 지역 위문 공연도 다니곤 했죠.추월 선생이 떠난 625전쟁 직후 그는 전주에서 정읍농고 출신 은방초(본명 은종협)를 만나게 된다. 부인들의 춤바람을 통해 1950년대 여성들의 사회적 욕구를 풀어낸 자유 부인 시절, 그는 은방초와 무용 연구소를 차렸다. 어찌 보면 전주 최초의 무용 학원을 설립한 셈이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조선 춤이 발달하면서 여성들이 10명씩 무리 지어 춤을 배우는 게 유행이었다.곱고 예쁘장한 남자 두 명이 손잡고 전주 시내를 돌아다니니 매번 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죠. 당시에는 조금만 이상해도 도민증 검사를 하던 시절이라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니까요.이후 최선은 정인방 선생을 만나 학춤과 무당춤, 살풀이춤 등 다양한 춤을 배웠다. 1960년에는 전주 도립극장에서 처음으로 무용 발표회를 개최했다. 1961년에는 최선 무용 연구소를 개설해 후학을 양성하고 세계 각국으로 무용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6년에는 전북 무형문화재 호남살풀이춤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그가 늘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철학 속에 혼이 담긴 춤을 추라는 것.혼이 없는 춤은 고무풍선에 지나지 않아요. 속이 빈 고무풍선은 둥둥 떠다니면서 빨강, 파랑, 노랑 등 화려함만을 내비치죠. 혼이 있는 춤은 속이 꽉 차 있어서 무겁지만 깊은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어요. 무릎을 한 번 치면서 얼씨구!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춤이야말로 바른 춤이라고 할 수 있죠.전주 지역에는 조선 시대 교방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와 익산, 군산 일대에 일제 시대 기생의 조합인 권번이 있어 살풀이와 승무, 검무 등의 무용이 전북 지역에서 발달해 왔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최선이 스승들에게 배운 춤 가락을 기반으로 살풀이장단에 인간의 한을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로 풀어내는 호남살풀이춤을 만들었다. 호남살풀이춤은 살풀이장단에 맞춰 무당이 추던 무무(巫舞)가 기생집 예인에 의해 발전한 전북의 대표적인 전통 무용이다. 기생집 무용에 뿌리를 둔 호남살풀이를 최선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무대화한 춤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그래서일까. 그는 춤의 뿌리에 관해 누누이 말했다. 1980~90년대 한국무용이 활황을 맞았을 때는 전국무용대회에 나가기 위해 전주에서 버스 한 대를 전세해 참가할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무용계 자체의 규칙과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무용 인구와 활동 영역마저 줄어 침체기에 빠진 듯해요. 그러면서 많은 젊은 무용가들이 창작 무용에 도전하고 있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전통 무용과 창작무용을 구분해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즉, 전북의 전통 무용은 뿌리를 찾아 옛것의 모습 그대로 보존할 때만 빛을 발하죠.그는 오는 6월 초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맥의 터를 주제로 한 80주년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춤의 황무지였던 전주에서 씨를 뿌려 꽃과 열매를 맺은 최선의 춤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다.이길주(원광대 교수호남산조춤)는 초등학교 6학년, 김광숙(예기무)은 13살, 문정근(전라삼현승무)은 고등학교 때 나에게서 무용을 배웠어요. 이외에도 장인숙(널마루무용단 대표), 허순선(광주대 교수) 등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성장해서 전국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 뿌듯해요.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는 그는 자신의 예명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연극인 황철 선생이 제 나이 열아홉 살 때 착할 선(善)을 쓰면 그 이름이 널리 퍼질 것이라며 지어 줬어요. 그동안 바르고 진실한 춤을 추기 위해 좋아도 슬퍼도, 웃어도 울어도 춤을 췄어요.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저는 춤만을 추려고 해요.

  • 문화일반
  • 문민주
  • 2015.02.04 23:02

'전북농악 산증인' 이리농악 김형순 "화려한 기교보다 혼이 담긴 멋스러움이 본질"

1933년에 태어난 한 소년은 7년 뒤 부안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바지저고리 차림에 새끼줄을 꼬아 장구 끈으로 사용했던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생계를 위해 익산으로 넘어왔다.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삶의 양식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해 그는 ‘풍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평화동 25번지로 오라’는 단원 모집 공고문을 익산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열흘 뒤 14명의 단원이 모였고 이 모임은 호남우도농악의 대표 이리농악의 출발이었다. 1953년 풍물계로 조직된 단체는 이후 김제와 정읍, 부안 등의 전문적인 우도 굿잽이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리농악단을 설립하고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 김형순(82) 보유자의 60여 년에 이르는 이리농악 외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난 27일 오전 이리농악전수관에서 김 선생을 만났다. 그는 전북 농악의 전통을 코끼리 걸음에 비유했다.“코끼리가 터벅터벅 걸어가도 그곳에서 미(美)가 나오듯이 전통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항시 어른들에게 귀가 먹먹하도록 들었던 말이에요. 기술적으로 농악을 화려하게 흉내 낼 수 있지만 본질에서는 ‘멋’이 담겨야 해요.”그는 전북 농악의 특징으로 ‘멋스러움’을 강조한다. 농악이라 하면 으레 현란한 가락을 떠올리지만, 농악은 무용과 음악, 연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상쇠의 부포와 장구의 맵시 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락을 잘 내더라도 춤과 연주, 호흡을 통해 신명과 멋이 도출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농악이 아닌 게 된다.“농악은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의 피로를 풀고, 풍년을 기원하는 등 농경 생활과 관련해 발달한 마을 단위의 축제였지요. 이리농악은 유군들이 치는 농악으로 신앙과 결부돼 축제 형식으로 치러지고, 무엇보다 느리고 섬세한 가락이 많아 춤이 발달했습니다.”농악이 발달한 호남 지역은 호남 안에서도 호남우도와 호남좌도농악으로 나뉜다. 우측의 서부 평야 지대인 익산·김제·정읍·고창·영광·장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농악을 우도농악이라 칭하고, 좌측 내륙 산간지대인 임실·순창·남원·곡성·여수 등에서 전해지는 농악을 좌도농악이라 일컫는다.“옛 어르신들은 종종 ‘논 한 필지를 갚는다’는 말을 썼지요. 똑같은 가락을 쳐도 멋있게 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었어요. 지방마다 농악의 특성이 다르지만, 이리농악은 장구 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멋 중심의 공연이고, 임실필봉농악(중요무형문화제 제11-마호)은 산간에서 전승돼 전통적인 마을 농악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죠.”특히 호남 농악의 상쇠들은 상모 위에 다는 날짐승의 깃털 장식인 부포에서 차이를 보인다. 호남우도농악의 상쇠는 뻣뻣한 ‘뻣상모’를 쓰고, 호남좌도농악의 상쇠는 부들부들한 ‘부들상모’를 착용한다. 소고춤은 모자에 따라 춤도 다르다. 우도농악의 고깔 소고춤은 상모에 꽃을 달고, 좌도의 채상소고춤은 상모를 돌리면서 추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또 이리농악은 비교적 느린 가락을 쓰고, 풍류굿과 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리듬 기법을 쓰는 등 가락의 기교가 뛰어나다. 판굿(마당놀음) 가운데 꽹과리 가락을 치면서 둥글게 도는 오채굿은 이리농악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판제는 첫째 마당, 둘째 마당, 셋째 마당과 뒷굿으로 각기 구분돼 있다. 특히 뒷굿으로는 도둑잽이굿, 상쇠놀이, 설장구놀이, 고깔 소고놀이, 채상소고놀이, 열두발 상모놀이, 기놀이 등이 펼쳐진다.그는 1985년 1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됐다. 초창기부터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것이 아닌 도내 전체의 우도농악 전문인들이 합세했기 때문에 단체는 전문 농악적인 성격이 짙었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는 사는 것 같았지”라고 되새겼다.“운이 좋았습니다.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만 해도 농악 공연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을 피할 수는 없었죠.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소규모 연희인 농악은 점차 대규모 연희에 밀리고, 이후에는 농악의 변형된 형태인 사물놀이나 난타 등이 등장하면서 농악은 점차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그는 전북의 모든 농악은 ‘혼’과 ‘얼’이 담겨져 내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수제비 하는 사람이 칼국수도 할 수 있다는 말처럼 호남우도농악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다른 농악도 연주할 수 있어요. 선조들이 전해 준 전통을 보존해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저에게 남은 임무라고 생각합니다.”한편,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구성해 서로 협력하면서 일할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주로 마을 축제와 공동 노동에서 행해졌다. 꽹과리와 징, 장구, 소고 등의 타악기를 연주하는 민속예술로 굿, 매구, 풍장, 금고, 취근 등으로도 불린다.전국적으로는 이리농악과 임실필봉농악, 진주삼천포농악, 평택농악, 강릉농악, 구례잔수농악 등 6개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농악분야에 지정된 상태다. 지난해 11월에는 유네스코의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에서 인류 무형유산 등재는 17번째로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15.01.28 23:02

[전북 근현대 서양미술의 맥] 1950년대 미술인 창작 그룹 창립으로 '서양화 활기'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 묘사와 알록달록한 색으로 윤기가 나는 질감, 빛에 나타난 순간의 색을 포착한 그림은 조선인의 눈을 훔쳤다. 일제 강점기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미술은 손재주를 지닌 청년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도내에서는 일본 유학파를 시작으로 서양화가 그려졌다. 이후 공교육과 사설 미술연구소를 통해 작가가 길러지고 본격적인 보급이 이뤄졌다. 광복 뒤 그룹 활동과 미술대학의 신설 등으로 현재 도내 미술계의 진용이 갖춰졌다. 도내 서양미술사를 조망해 문화예술의 맥을 가늠해 본다.△유학파 통한 신미술 전파도내 서양미술은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1세대 작가를 통해 통해 이뤄졌다. 이순재, 김영창, 진환, 이경훈, 박병수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도내 첫 유학파 서양화가는 이순재(19 04~1958) 작가다. 그는 전주 출신으로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미술전문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돌아왔다. 도내 최초로 제7회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이른 봄으로 입선하는 등 여러 차례 입선했다. 하지만 당시 서양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풍토와 작품에 대한 주체 의식의 약화 등은 그를 선구자에 그치게 했다.반면 1950년대 이후 현대미술이 유입되기 전 일본이라는 제한된 통로로 유화를 접하고 작업 활동을 했던 이들에게 실험적인 작품을 기대하기 보다는 신미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게 미술 전문가의 의견이다.비슷한 시기 이 작가에 이어 박병수, 김영창, 이경훈, 문윤모, 권영술, 김해, 진환, 정석용, 박두수 등도 일본 유학을 감행했다.박병수 작가는 임실 부호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스즈키사구미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는 광복을 맞은 해 전주 고사동에 이순재, 김영창 등과 지역 최초의 사설 화실인 동광미술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다. 당시 일제 유산에 대한 비판과 반성과 함께 새로운 창작 의식을 다졌다. 이 화실에서 이의주, 천칠봉, 배형식, 이준성, 허은, 하반영, 소병호, 전영래 작가 등이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박병수 작가는 1948년 월북한 뒤 북학에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박두산 창작단 촬영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졌다.당시 인상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룰 때 표현주의 화풍을 보여준 이가 진환(1913~1951) 작가다. 그는 고창 무장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자퇴하고 1934년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한 뒤 동경 유학 중인 이쾌대, 이중섭, 최재덕 작가와 교류하며 수학했다. 이후 부모님의 권유로 집안이 설립한 무장농업학원의 초대 교장으로 근무했지만 1948년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붓을 잡는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1951년 고향 뒷산에 피신해 있다 빨치산 소탕 과정에서 38살에 요절했다. 작업 기간도 10여년에 그치고 현재 남아있는 작품도 30여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 진보적인 작업으로 꼽힌다. 그도 이중섭 작가처럼 소를 즐겨 그렸으며, 민족의 강인함을 상징한다는 해석이다.△공교육 통한 작가 배출일본 유학파가 당시 도내에 신미술을 보급할 때 교육기관을 통해서 서양화가들이 양성된다.1925년 전주고보에 일본 중견작가인 모리린페이, 1929년 전주여고보에 프랑스 유학파인 오스이 츠지가 부임하면서 전통회화를 벗어난 서양화라는 문화가 교육에 도입된다. 1937년에는 전주사범학교에 우라자와 히로시, 이도 마사아키를 통해 공교육을 중심으로 미술학도들이 나왔다.전주고보에서 김용봉추광신 등, 전주사범에서 유경채고화흠추교영한소희김현철 등의 작가가 일본 유학파 이후 도내 화단에서 활동했다. 유경채(1920~1995) 작가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떨쳤다.1970년대 도내 미술대학이 차례로 설립된다. 1970년 원광대 미술교육과 이후 1973년 전주대 미술과, 군산전문대 생활미술과, 1981년 전북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가 신설됐고 이곳의 졸업생들이 도내 화단에서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미술인 뜻모은 전북예술회관 건립해방 이후 미술인이 모여 만든 창작 그룹이 생겼다. 도내 최초로 1950년 녹광회가, 이어 1954년 신상미술회가 창립돼 서양화 붐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하지만 해방 뒤 추상미술이 국내 화단에 바람을 일으킬 때 도내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이를 받아들여 보수성을 나타냈다는 의견도 있다. 1974년 물꼬회에 이르러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는 해석도 나온다.도내 미술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전북예술회관의 건립이다. 도내 미술인과 예술인의 의지를 하나로 묶으며 전례가 없는 사례로 남았다. 국전이 출범한 지 20년이 지난, 1969년 제1회 전북미술대전이 열린다.하지만 갈수록 출품작이 많아지자 1974년 예술회관 건립추진회의를 조직해 전국의 원로중진 작가가 그림을 내놓아 기금을 마련했다. 1975년 12월13일에서 18일까지 서울 국립공보관 전시실에서 한국화, 서양화, 서예 등 도내외에서 168명이 180점을 전시했다. 당시 도민 성금과 전시 수익금 등으로 2000만 원을 모아 건립 비용에 보태 1982년 2월9일 전북예술회관이 개관했다.

  • 문화일반
  • 이세명
  • 2015.01.21 23:02

[프롤로그] 최승범 시인에게 듣다

전북의 예술혼(藝術魂)은 어디에서 새어나와 어디로 흘러가는가. 전북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한 단어, 한 문장으로 단언할 이는 없을 듯하다.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예술가의 정신에 각 장르의 시각이 더해져 전북의 예술혼이 완성된다. 본보는 새해를 맞아 전북의 예술혼 찾기에 나섰다. 역사적으로 한국 문화예술의 한복판에 서온 전북 문화예술의 힘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모색하는 기획이다. 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열정을 쏟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통해 전북의 예술혼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처럼 가장 전북적인 예술혼을 찾는 여정에 나서기 전, 현대시조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고하(古河) 최승범(85) 시인(전북대 명예교수)을 지난 5일 고하문학관에서 마주했다.최승범 선생에게 여행길의 문을 가볍게 열어 주길 청하자 기대할 것 없어라는 대답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30초, 1분, 2분. 이따금 들리는 거친 숨소리와 문틈으로 몰아치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에 답했다. 최 선생은 먼지마저 세는 눈빛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말문을 열었다.전북은 멋과 맛, 풍류가 있는 고장이야. 역사를 훑어볼 때 멋이 있는 고장이고 맛을 챙겨 온 고장, 그리고 풍류의 마음을 잃지 않고 가꿔온 곳이지. 구닥다리 얘기지만 전북의 고로(古老)들에 의해 전해 오는 이야기 중 사불여(四不如)라는 말이 있어. 관리는 아전만 못하고, 아전은 기생만 못하고, 기생은 소리만 못하고, 소리는 음식만 못하다는 얘기로 남도의 음식 맛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표현이지.-선생님, 풍류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풍류(風流)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야. 전북의 문화 예술에서 풍류라는 말을 챙기고 싶어. 풍류는 본디 바람의 흐름과도 같은 것으로 벽에 막혀도 막히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지. 풍류는 문화 예술의 정신적인 뿌리로 이어져. 일찍이 고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라는 글에서 유교와 불교, 도교를 포용하고 융합하는 풍류도를 고유한 전통으로 제시하고 자연 이치와의 조화를 강조했지.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여 우리 고유의 사상이면서 사람들을 접화하는 것, 인문 정신의 핵심이기도 해.-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와 현재의 풍류 의미에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어. 뒤로 내려오면서 이 말에도 속기가 끼어들었고 사전에 따라서는 기루(妓樓), 염사(艶事), 정사(情事)로까지 풀이한 것을 볼 수 있어. 풍류는 혈류의 도로, 속기가 끼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문화 예술은 풍류에 바탕해서 나아가야 해. 청풍명월, 청산녹수와 같은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높이 살 수 있는 마음이어야만 풍류를 꽃처럼 피워 낼 수 있는 법이지.-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사상, 풍속들이 많이 사라지고 왜곡된 현실입니다.선비는 글이나 글자를 아는 식자인(識字人)인데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많아. 가까이 알고 있는 분들 가운데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를 들라면 조선왕조 500년의 저자 신봉승 선생을 꼽고 싶어. 주고받은 편지나 격식 모두 본받을 만한 분이지. 풍류가 조선의 선비 정신으로 그 명맥이 일부 이어진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생활 바탕에서 풍류를 챙기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처지를 바꿔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해. 전북 문화 예술은 내세워 자랑할 만한 곳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면이 부족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봐야 할 시점이야.최승범 선생은 매일 오전과 오후 2차례씩 우체국에 들른다. 자택과 고하문학관으로 배달돼 쌓인 원고나 서적, 편지를 읽고 일일이 나름의 답장을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매일매일 전달되는 서적과 편지가 책상에 쌓여 있어 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마땅치 않은 것도 있지만 여하튼 봐야 해. 일단 받아 대충 보고 내 나름의 편지를 하지. 젊은 시절부터 늘 원고를 보면 우체국으로 향했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서는 안 돼.편지는 보내기 전 복사해 파일에 받은 편지와 함께 보관한다. 편지 따위를 꽂아 두는 물건을 뜻하는 고비에서 이름을 따와 뒤에 숫자를 붙인다. 지난 1998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고비는 어느새 190이라는 수를 뒤에 뒀다.-전북대 정년퇴임 때 다시 태어나도 이 고장,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유효한지 궁금합니다.전북은 살아보니 살만한 고장이야.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가거지(可居地) 즉, 가히 사람(선비)이 살만한 땅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등 4가지 요소를 충족한 지역에 전북이 포함돼 있어.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후학들이나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씀해 주신다면.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나부터도 후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할 처지는 못돼. 낙낙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조급하지 않고 여유 있게 살아가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야 해. 이만 줄이겠습니다(웃음).● 최승범 시인은 이병기 선생 수제자신석정 시인 사위최승범 시인은 원로 시조시인이자 풍류를 지닌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존경받고 있다. 1931년 남원 사매면 서도리에서 태어나 1954년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정년 퇴임때까지 40년간 전북대에서 재직했다.1958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을 사사해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가 됐다. 고(故) 신석정 시인의 사위이기도 하다.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전북지부장,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전북지부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 등을 지냈고, 현재는 고하문학관 관장으로 있다.정운시조문학상, 한국현대시인상, 학농시가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목정문화대상, 한국문학상, 민족문학상, 한국시조대상을 수상했다.저서로는 한국수필문학연구, 시조에 깃든 얼, 남원의 향기, 시조 에세이, 풍미기행, 한국을 대표하는 빛깔,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 소리,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듣다등이 있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15.01.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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