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을 유럽 배낭여행 전문 인솔자로 활동하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을 유럽여행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의 패턴이나 유행도 시간에 따라 변해 가는데 초창기에는 대표 관광지 위주로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섭렵해 가는 ‘도장 깨기’ 스타일의 여행을 주로 했다. 경험이 반복되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더 많은 곳을 두루두루 보길 원한다.
사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유럽 배낭여행객들은 이런 스타일의 여행에 익숙해 있었다. 그 후 여러 매체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홍수가 온 이후에는 맛집 투어나 본인의 관심사에 따라 작은 것을 집중적으로 둘러보는 여행자들이 증가했다. 필자도 투어마다 관심사를 정해 그곳만 둘러보는 투어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는데, 가령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는 클림트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랄지 커피 소비가 많은 북유럽에서는 유명 커피숍 투어를 하고 영국에서는 축구장 탐방 등 모든 것을 다 보는 것보다는 한두 곳에 집중하는 투어가 만족도가 훨씬 높다.
최근의 관심사는 공간의 본 모습을 살려 새롭게 재구성해서 멋진 공간으로 변신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인데 최근 인상 깊었던 곳은 조지아 트빌리시의 파브리카 트빌리시(Fabrika Tbilisi)라는 장소다. 원래 재봉공장이던 건물 두 동을 게스트하우스와 공방, 패션숍, 식당가와 펍 및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는데 트빌리시 최고의 힙스터들이 모여드는 젊은 공간이자 꾸준하고 다양한 문화 공연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이색적인 게스트하우스로 관광객까지 흡수한 그야말로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의 조지아라는 나라에서 여기만 컬러가 입혀진 듯 반짝반짝 빛나던 이곳이 많이도 부러웠다.
하지만 한국도 다양한 형태로 재생 건축물들이 늘어나면서 관련된 프로젝트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 목포는 귀촌한 청년들이 ‘괜찮아 마을’이란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삶에 지친 청년들을 목포로 불러 모은 뒤 6주 간의 합숙과 교육,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실패해도 괜찮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버려진 유휴시설들에 새 숨을 불어넣어주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행정안전부의 사업으로 처음 시작하는 이 프로젝트는 2회에 걸쳐 30명씩 총 60명을 입주시킬 예정이다. 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로 앞으로 변신할 목포의 모습이 기대된다.
서울 문래동에는 유명한 철공소 거리가 있다. 1970년대 활발하던 철강산업을 뒤로하고 쇠퇴기에 접어들자 슬럼화되었던 이곳은 예술가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예술거리를 형성하였다. 이색카페와 레스토랑들도 하나씩 늘어 지금은 문래동 예술 창작촌으로 불리고 있다. 음침하던 동네는 이제 주말이면 관광객을 모으는 재미난 동네가 되었다. 전주 팔복동에도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한 팔복예술공장이 있다. 한때 아시아 전역으로 수출까지 하던 카세트테이프 공장은 CD와 MP3의 개발로 인하여 수요가 줄자 사업을 정리한 후 버려졌다. 25년동안 고요하던 공장은 2016년 예술로 채워지며 전국의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는 명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농협창고의 공간 재구성이 눈에 띈다. 1961년부터 종합농협은 농업창고업법에 의해 창고사업을 시작했다. 영농자재 등을 성수기이전에 미리 비축하였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기도 하고 생산한 농산물을 비수기에 저장하였다가 적기에 배출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창고는 1970년대 통일벼의 보급으로 정부양곡보관량이 늘자 덩달아 늘어나서 전국에 1만개 이상이 건설되었다. 2000년대 들어 여러 이유로 감소하던 창고들은 이후 다양한 공간으로 변신을 시작했다.
순천의 양곡창고는 2017년 청년창업 공간 및 복합문화공간인 ‘청춘창고’로 재탄생 되었다.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을 3차에 걸친 심층 면접 후 입점자를 선정하였고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스스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2~3년의 사업 후 독립해 나갈 수 있도록 꾸준한 관리와 교육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유독 카페가 많은 담양은 ‘서플라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인테리어를 하던 사장이 자재보관용으로 찾은 공간을 카페로 리모델링한 특이한 경우다. 농협창고는 아니지만 개인양곡창고를 개조한 ‘담빛 예술창고’도 미술관과 카페로 운영되며 담양의 커피로드를 이루고 있다.
아직도 꽤 많은 양곡창고가 남아 있는 순창은 그 중 하나를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군민의 미술문화 향유와 관광객들을 위하여 1978년에 건립됐던 양곡저장창고는 옥천골미술관이 됐다. 지역작가와 일반인들의 작품을 순환 전시함으로써 예술의 벽을 낮추고 친근하게 대중에 다가서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보다 먼저 동김제에는 창고 두 동을 로컬푸드 종합시설로 개업했다. 하나는 직매장과 카페가 들어서고 다른 하나는 레스토랑과 제빵공간으로 재생되었다. 주민 스스로 자신의 삶터를 가꾼다는 개념으로 시작한 이곳은 시간이 갈수록 필요한 시설들을 늘려 점차 발전하고 있다.
가장 최근 개조된 창고를 찾다 군산의 미곡창고를 알게됐다. 한걸음에 달려간 카페는 평일임에도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바빴다. 한쪽은 갤러리로 입구에는 커피로스팅실과 베이커리로 꾸며놓은 공간은 양곡창고 특유의 개방감을 십분 활용하여 100평 공간을 세분화시켰다. 커피로서도 최정상에 오른 장동헌 대표는 문화와 함께 가는 공간을 꿈꾼다. 다양한 문화공연과 강연 등을 소개하고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개업 초기부터 꾸준히 인기몰이를 하여 이젠 군산 여행의 한 꼭지를 카페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듯 다양하게 변신한 공간들은 새 생명을 얻었다. 지자체에서 개발한 창고는 문화예술과 지역민을 위한 시설로, 민간이 개발한 곳은 관광객에게도 사랑 받는 공간으로 지역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도시재생과 재개발 붐을 타고 오래 된 것들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이러한 재생건축은 스토리텔링을 만든다. 여행객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유럽의 많은 건물들은 재생되고 있다. 500년된 맥주집이 흔한 체코는 오래 됨이 곧 관광명소다. 절과 궁궐 이외에 오래 됨이 남아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 지금부터 만들어 가는 공간들이 오래 됨을 넘어 관광명소가 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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