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요업(窯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가 확인됐다. 고려시대 왕실에 진상한 최상급 도자기를 만들던 사적 제69호로 등록된 전북 부안 12호 유천리 요지. 과거 유천리 토성이 반원형으로 둥글게 둘러앉아 있던 곳이다. 옛날에는 낮은 야산구릉의 요지 앞으로 현재의 논 대신 탁 트인 바다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기골이 살아 있고, 잘 발달한 광대뼈처럼 적절한 위엄과 고졸함도 있다.
유천리 요지는 무려 150년 동안 흑백의 안료로 무늬를 새겨 넣은 상감청자가 나오는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 도공들이 처음 창안한 아름다운 비색 상감청자는 유일하게 부안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구름이나 학, 꽃과 같은 무늬를 그려 조각칼로 파내고, 그 파낸 곳에 백토(白土)와 자토(紫土) 안료를 넣어 긁어낸 뒤 유약을 발라 구워낸다. 그러면 백토는 하얗게, 자토는 검은색으로 무늬가 나타난다.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도자기 장식기법의 ‘상감(象嵌)’. 그러기에 더욱 희소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는, 독창적이며 고귀한 자산이 되어 왔다.
그러나 지나치게 뛰어나도 삶이 거칠어지는 건 사람처럼 터나 도자기나 매한가지일 게다. 1929년 조선총독부 노모리켄(野촌健)에 의해 최초로 보고되었던 부안 유천리 요지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에 의해 도굴과 훼손이 지속되다가, 해방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지가 갈가리 찢기듯 나누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으로 치면 거혈형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
그러던 것이, 소달구지로 실려 나가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유적에서, 이번에는 거대 건물지가 발굴된 것이다. 청자를 구웠던 가마 1기와 함께 발견된 건물지 2동. 그리고 건물지 기와에는 특이하게도 관청을 뜻하는 ‘官’자와 ‘客舍’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동안 그릇을 만들던 초가 형태의 공방지가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 주변에서 일부 조사된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고려시대 기와 건물터가 발견된 예는 드물어요. 기와에 새겨진 글자로 보아 부안 유천리 고려청자가 관의 주도 하에 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지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청자는 고려 13세기 경 고려왕실 혹은 최고위층에게 공급되었던 곳으로, 이번 학술조사를 통해 여실히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사이를 두고 뒤늦게 발견된 ‘大寺’자로 보아 어쩌면 큰 사찰일 가능성도 있다고, 부안청자박물관 한정화 학예사는 말한다. 조사 지역인 유천리 요지 3구역은 요장(窯場) 전체를 몇 개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있다. 조사지역 중앙에 위치한 석축은 동서로 길이가 약 38m, 잔존 높이는 최대 42㎝, 현재 약 4단 정도 잔존해 있다. 석축의 내측으로 정면 5칸, 측면 1칸의 대형 건물지를 시설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용무늬가 새겨진 1m 가까운 상감용무늬매병과 벽에 부착하는 5mm 두께의 청자 타일, 원통형 의자, 구름 학무늬 화분, 생활용구와 건축용구까지 600상자 분량의 파편들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기존에도 발굴된 바 있는 청자상감물가풍경무늬찻잔은 절반으로 쪼개져 위아래로 겹쳐진 채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사적 발굴로 유출이 많아 더 나올 게 없다는 입장이 있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발굴을 해야 한다는 한정화 학예사의 주장으로 작년 12월 3차 발굴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물감 대신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구리 성분 안료를 가지고 동화청자를 만든 곳도, 왕이나 왕비를 상징하는 봉황무늬가 새겨진 상감백자가 나온 곳도 바로 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더욱 가깝게 다가들어 자꾸 되새김을 가져야만 하는 중요한 요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특히 동화청자는 연꽃잎이나 모란꽃잎 끝에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장식한, 우리나라 도자사는 물론 고려청자 중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더욱 다행인 것은 이번 부안 유천리 요지 발굴조사를 통해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자기 제작공정과 운영실태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기 요지의 경관을 복원하고, 부안지역 청자 유적지의 성격과 위상을 높이는 데 있어서도 보다 구체적인 교두보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보안면 유천리도요지 터에 위치한 부안 청자박물관에는 유천리와 우동리, 진서리에서 출토된 청자 및 청자 편들이 전시되어 있다. 2011년 에 개관한 부안청자박물관은 개관하여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참 부지런히 부안 고려청자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나라 청자 도요지 가운데 전남 강진이 유명세를 치르고 있지만, 전북 부안은 그에 버금가는 최상품의 상감청자를 생산했던 곳이며, 고려청자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라는 것이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 셈이다.
고려시대 부안은 최상품의 청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이었다. 질 좋은 흙과 적송과 같은 나무가 풍부한데다, 청자를 운송할 수 있는 해상교통이 발달했다. 즉 평야와 산간, 해안 지대를 두루 섭렵하여 만들어진 것이 부안 고려청자이다. 77곳이나 되는 청자 가마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리적, 환경적 여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터.
고려청자는 주로 왕실과 중앙의 귀족이 사용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홍성, 태안, 강화를 거쳐 개성까지 실어 날랐다. 그 출발점이 고려시대 조창이 있던 안흥창 인근이다.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가마터는 그 동안 위치를 몰랐던 안흥창 터로서도 유력하다. 전국의 세곡과 함께 고려청자를 왕실에 진상하기 위해 가마터 옆에 자리 잡은 것이다. 고려사와 동국여지지 등 당시 문헌에 기록된 부안 유천리 안흥창 위치와 거의 일치한다.
천하사는 살고 죽는 두 길에 그치는 법이다. 대형 건물지가 어깨가 높고 이마가 밝은 기골로 우뚝, 우리의 발 앞에 와 있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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