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독립은 연합국의 승리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일본패망후 연합국측이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가장 거대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이다. 2019년 올해는 그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올해는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독립 쟁취에 관한 민족적 자신감과 함께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해가는 강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거족적 운동이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무단통치를 접고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으며, 학생들은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펼쳤다. 동시에 평양 의주 원산 등 북쪽의 주요도시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중남부지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2만 1천매 정도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전주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 두가지 루트이다. 그 하나는 천도교측 인종익이 2월 28일 열차를 타고 다음날 3월 1일 이리에 이르러 전주행 경편철도를 타고 12시경 전주에 도착하여 천도교 전주교구로 가서 독립선언서 1천 8백매를 전달하였다. 3월 2일 전주교구는 관할인 임실, 진안, 장수, 김제, 고산 등의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고, 전주부내 상관, 소양 등 지역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 한 루트는 기전학교 출신으로 천안 양대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임영신이 기독교계 책임자인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전주에 전달하였다. 임영신은 흰 상복을 입고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을 찾았고, 이돈수장로는 독립선언서를 서문교회 김인전목사와 청년의사 신일용에게 전달하였다. 서문교회 이돈수장로집, 천도교 박태련집, 신흥학교 등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전주지역 만세운동은 3월 13일 정오경 남문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첫 시위 날자를 12일로 보는 기록도 있다. 3월 2일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음에도 13일에 가서야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3일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일경에 발견되어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3월 13일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일어난 첫 번째 만세운동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공립보통학교 학생, 천도교도들을 주축으로 밤 11시까지 다섯차례 이어졌다. 참여인원은 기록에 따라 1만명에서 수천명, 150명까지 차이가 크다. 150명은 전라북도장관이 보고한 것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만세운동에 전주권번의 예기조합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기생 중 4명이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3.1운동은 천대받던 머슴, 기생들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3월 14일에 3시경에 다시 만세시위가 있었다. 완산다리 부근으로부터 다수의 학생들을 앞세우고 천여명의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시내 중심인 식산은행(산업은행)까지 진출하였다.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 1개 중대가 14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시내의 만세는 잦아들었지만 전주 외곽 초포, 봉동, 삼례 등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4월초까지 이어졌다.
4월 3일 김봉근은 일장기를 달고 장사를 하고 있는 남준식의 가게로 찾아가 “전 조선의 상인들이 독립을 부르짖고 철시 중임에도 일본의 국기를 달고 영업하다니 묵과할 수 없다”고 힐난하고 일장기를 강제로 떼려고 하였다. 구금된 기전여학생들은 단식으로 저항하였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 의하면 전라북도의 3.1운동 시위 참가 연인원은 총 121회에 17만 5천명이다. 횟수가 가장 많은 곳은 전주와 군산 21회, 남원이 19회이다. 참여인원은 전주와 남원이 각각 5만명, 군산이 2만 5천 8백명, 정읍이 1만 8천명이다.
사망자는 남원이 34명, 옥구 32명, 군산 21명, 익산 16명이다. 전주는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종자는 남원이 가장 많아서 142명이고 그 다음이 익산으로 50명이며, 전주는 15명으로 적은 편에 든다. 피해 인원은 전주가 434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군산으로 145명이다.
전주는 시위횟수와 참여인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망자는 없고 실종자도 적은 편이다. 이는 곧 전주 시위가 다소 평화적이고 과격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주시는 출판과 기록의 도시로 매년 민간 기록물을 공모 수집하고 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해 2018년에는 3.1운동 관련 기록물을 수집하였다. 3.1운동 기록물들이 귀해 많은 기록물들이 수집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수확이 있었다.
꽃심상을 받은 ‘민족선언서’는 족자 형태로 길이가 1m에 이른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3.1절을 맞아 선포한 것으로, “우리는 삼일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정기를 다시 진흥함으로써 남북통일을 맹서하고 이를 실천완수하기 위하여 이에 민족선언을 선포하노라.”라고 시작된다. 삼일운동 정신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듯이, 결연한 정신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것으로 한국전쟁 중의 삼일절을 읽어볼 수 있다.
풍류상을 받은 『도왜실기(屠倭實記)』는 1932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김구 선생이 약술하고 1946년 엄항섭이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이다. 내용도 대단하지만 제일 뒤에 독립선언서를 싣고 거기에 부기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역사적 공적을 남긴 기미운동 당시의 독립선언서”라고 크게 쓰고, 작은 글씨로 “이것이 28년후 조선해방의 원동력이 되었으니 씨앗은 반드시 뿌려야 할 것이요 뿌려진 씨앗은 결국에 결실이 되고만 다는 교훈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위대하도다 33인의 선열이여!”라고 써놓았다.
대동상을 받은 ‘3·1운동 태극기’는 19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날의 정취를 담아 삼일운동의 정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올곧음상을 수상한 ‘유관순 표지 숙제장’은 어렸을 때 많이 본 공책이다. 삼일운동의 상징으로서 유관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읽어 볼 수 있는 정겨운 노트이다.
사라지는 민간 소장 기록물을 수집 보존하는 것은 의미가 큰 일이다. 특히 기록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주에서 민간 기록물을 수집해 보존해 간다는 것은 더욱 뜻있는 일이다. 『도왜실기』 에 3.1운동과 광복을 두고 ‘씨는 뿌려야 하고 뿌려진 씨앗은 결실을 맺는다’고 한 것처럼 전주에서 민간기록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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