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가 작아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쉼 없이 존재감을 보여줘야 했던 나라. 바다보다 낮은 땅을 가져 나막신이 발달한 나라. 네덜란드 국민들이 척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대응하는 기질은 삶의 방식으로 녹아들었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에서 네덜란드가 가장 혁신적이고 기술개발·변화에 선도적인 이유다.
네덜란드의 유연하고 혁신적인 시민정신은 오늘날 ‘리빙랩’ 정신과 맞닿아 있다. 네덜란드가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 리빙랩 선도국가가 된 가장 큰 원동력이다. 네덜란드는 전라북도와도 닮았다. 세계 2위 규모 농업 수출량을 자랑하는 농업강국인 동시에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인복지 요구가 높고 활발하다.
△ 노인은 ‘치유’를, 소농은 ‘농장 운영’을 원한다
스마트팜(smart farm) 선진국인 네덜란드가 주목한 새로운 형태의 농업, 바로 케어팜(care farm)이다. 케어팜은 노인이나 발달장애인·자폐·약물중독자·노숙자 등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머물거나 거주하며 농장을 활용한 복지 서비스를 받는 돌봄 시설이다.
네덜란드 케어팜 전문가인 조예원 바흐닝언 케어팜 연구소장은 “스마트팜이 농업 생산량의 폭발적 증대를 위한 고효율화 기술이라면, 치유농업이라고도 하는 케어팜은 소농들에게 좀 더 적합하고 진입이 쉬운 농업”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노인들은 요양원에서 누워 지내다 생을 마감하길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삭막하고 누워만 지내는 요양원, 의료기관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을 만들고 싶었어요.” 거주형 케어팜 ‘레이헤르스후퍼’를 운영하는 헨크 스미트(Henk smit) 원장 등 케어팜 운영자들의 의견이다.
이렇듯 케어팜은 소규모 농업인들과 노인들의 요구가 맞물려 탄생했다. 케어팜 형성 과정 자체가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전문 기술·산업이 발전된 ‘리빙랩’인 것이다.
현재 네덜란드에 1200여 개 케어팜이 존재할 정도로 번성했다. 농장주의 가치관과 운영 방식과 노하우, 수요층 등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농장이 환자에게 주는 집 같은 편안함
네덜란드 하임스커크(Heemskerk) 외곽에 위치한 거주형 케어팜 레이헤르스후퍼(DeReigershove). 2미터가 넘는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화로운 농장이 펼쳐졌다. 한가운데 넓은 밭에는 갖가지 식물들이 심겨 있고, 양옆에는 양과 돼지, 토끼, 닭 등 동물에게 여물을 주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청소년 자원봉사자와 함께 작물에 물을 주고 있는 노인들도 있었다.
한켠에 조성된 놀이터가 시끌벅적했다. 이곳에 사는 한 노인의 가족이 놀러온 터였다. 노인은 벤치에서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며 놀이터에서 뛰노는 손자들을 구경했다.
공동 공간 1층에서는 노인들이 옛날 음악을 함께 들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요양사는 이들을 방해하지 않고, 이따금 아픈 곳은 없는지 식사를 하고 싶은지를 챙겼다.
케어팜 대부분이 방문형 활동 위주이지만 ‘레이헤르스후퍼’는 드물게 중증 치매환자들이 말년을 보내도록 마련된 거주형 시설이다. 2013년 10월 설립된 이곳은 현재 노인 27명이 4개 그룹으로 나눠 집 4채에서 살고 있다.
원장인 헨크 스미트는 “환자를 침대에 묶어두고 치료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죽이는 것과 같다. 요양시설이 아닌 집에서 생활하는 것 같은 환경을 만들어 또 다른 삶의 가치를 만들어주고 싶었다”며, “환자들이 원하는 방식의 치료와 사회활동을 최대한 반영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노인돌봄 가치관에 부합한 것이 바로 ‘치유농업’이었다. 요양시설처럼 의사·요양사의 치료와 돌봄을 받지만 집 같은 편안함과 휴식을 준다. 식물·동물 등 녹색 환경을 보며 심리적 안정을 주는 동시에 농장에서의 어렵지 않으면서도 규칙적인 활동을 하며 성취감·사회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곳에서 노인들이 여물 주기·작물에 물을 주고 잡초 뽑기·작물 재배 등 농장 일 외에 미술·공예·목공·미용·음악 감상 등 다양한 취미·신체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헨크 스미트는 “인기가 높아 지금 입주를 신청해도 1년 후에나 가능하다”며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복지가 아니라 누구나 올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누구나 ‘케어팜’을 보편적 서비스로 누릴 수 있는 제도·시스템 구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심 속 유휴지가 치유·소통 농업 공간으로
대도시 위트레흐트((Utrecht)시에 있는 케어팜 ‘푸드포굿(Food for Good)’.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네덜란드 안에서도 특별한 사례로 꼽힌다. 노인·장애인·장기실업자 등을 돌보는 시설이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반기는 주민들이 얼마나 될까.
이 지역 역시 반대가 컸다. ‘푸드포굿’ 운영자 한스 페일스(Hans Pijls)는 “버려진 시유지(市有地)를 무상임대해 재생시키는 것인데도 주민들은 노인, 실업자 등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케어팜이 가장 곁에 필요한 곳이 바로 도심 아파트단지”라고 말했다.
도시에 사는 독거노인, 가족이 일하는 동안 돌봄이 필요한 노인 등이 노인정처럼 머물며 활동하고, 심리적으로 우울한 시민들의 재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또 주민들에게도 모임이나 취미 활동을 하며 지역 노인들과도 교류하는 커뮤니티 공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푸드포굿에서는 공동 농작물 재배와 함께 지역주민과 피자만들기·생산물 이용한 요리 교실 등 다양한 워크숍을 한다. 한스 페일스는 “케어팜은 노인 복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노인을 비롯해 시민들의 사회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한동숭 전주대 지역혁신센터장은 “‘푸드포굿’형태는 전북에서도 조건이 비슷해 충분히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거주형 케어팜의 경우는 텃밭이 있는 한국 요양시설에서 케어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며, “네덜란드 노인돌봄 리빙랩은 도시재생과 사회복지, 혁신이 함께 가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하임스커크·위트레흐트=김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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