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3·1만세운동 전후 전북의 항일독립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
전북일보와 JTV전주방송,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사)독립운동가 박준승선생기념사업회가 18일 전북일보사 2층 공자아카데미에서 주최한 ‘호남 지역의 3·1 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 투쟁상황 전국 학술강연회’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자리였다.
전북일보 윤석정 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 독립을 목을 터져라 부르짖었듯, 우리 모두 애국선열의 충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사)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 위원장은 “전북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박준승 선생 등 최고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지역”이라며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치신 순국선열 애국지사께 머리 숙여 추모 인사 올린다”고 했다.
이날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은 ‘호남지역 3·1운동 성격과 전북 동부지역의 투쟁상황’, 동국대 천지명 연구교수는 ‘3·1운동 전후의 항일운동 양상’, 최성미 전 임실문화원장은 ’임실 지역의 동학, 천도교와 3·1운동’ 을 주제로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이 나섰다.
“전북 항일 운동 배경… 일제 수탈 동맥 구실 한 탓”
나종우 회장은 전북에서 항일 운동이 활발해진 이유를 식민지 시기 수탈에서 찾았다.
식량·해양 자원이 풍부했던 호남은 19세기 일제 식민지 시기 경제적 침탈의 주된 표적이 됐기 때문이다. 목포와 군산항 개항 전후로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 창구가 됐고, 호남선과 전라선, 목포-신의주 국호 1호선 등은 일제 수탈의 동맥 구실을 했다.
나 회장은 “이런 현실은 전북민들에게 지속적인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이런 저항의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도 전북이 천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데 기인했다. 전주·정읍·익산·임실·남원 등지에 각각 종리원(宗理院)이 설치됐고, 동학 접주였던 임실의 박준승은 이준·윤효정 등과 함께 헌정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 같은 활동은 3·1운동 당시 조직적 저항으로 이어졌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경로를 보면 알 수 있다”며 “서울에 상경했던 천도교도들이 독립선언서를 지역으로 가져와 3·1운동 전부터 시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전북 동부 지역의 투쟁도 활발히 전개됐다. 임실·순창·남원·장수·진안·무주에서는 종교계,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투쟁의 발생건수는 220여 회, 동원된 연인원도 3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제에 기소된 인원도 1131명에 이른다.
나 회장은 “전북 지역 3·1 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분석은 조선총독부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실상과 거리가 멀다”며 “종교계, 학생, 농민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해 1920년대 이후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의 계층을 다양하게 하는 토대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3·1운동이 임실에서 활발했던 이유는 천도교
최성미 전 원장은 동학농민운동이 3·1운동으로 조직적으로 이어진 근원으로 임실의 천도교를 주목했다. 1873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벌였던 포교활동으로 동학이 사회운동화됐고, 당시 활동했던 인물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 진보회 전주지부장을 맡았던 김영원 선생은 1919년 2월 상경해 의암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과 숙의를 한 후, 임실교구를 거점으로 독립선언서를 전주, 남원, 순창, 진안 등지에 전달했다”며 “이에 따라 각 시군에서 3월 10일을 기점으로 독립만세운동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고 설명했다.
천도교가 중심이 된 항일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는 게 최 전 원장의 설명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할 때, 천도교 4세 교주 박인호 춘암상사는 수제자와 배일운동 투쟁위원회를 조직했고. 1938년부터는 멸왜운동(滅倭運動)을 벌여나갔다.
최 전 원장은 “천도교인들은 8·15해방되던 날까지 멸왜운동을 계속했다”고 밝혔다.
전북청년운동 1923년부터 전국단위 운동 전개
천지명 교수는 3·1운동 이후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청년운동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전국 단위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 국내 항일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해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전북 청년운동은 192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이전은 실력양성에 기반을 둔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기, 이후는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기간이다.
천 교수는 “1920년대 중반부터 전북 지역 청년운동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의 연관 속에 성장했다”며 “특히 1922년 10월 조직된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익산 출신 임종환을 지역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또 “이 시기는 조선청년총동맹 단계로 전국 단위 청년조직 산하에서 조직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며 “1925년부터 전주, 남원, 김제, 군산 용담 5개 청년회가 모여 도 단위의 통합전선 운동을 시작했다”부연했다.
3.1운동사 외연 확장 필요
전북일보 김원용 논설위원은 토론회 자리에서 “3.1운동에 대한 지역사 연구가 많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는 감이 있다”며 “구체적인 활동 상황을 담은 더 많은 사료 발굴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3·1운동사 외연확장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김 위원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고창 출신의 백관수, 의병활동 지원과 노동·농민운동 변호로 일제에 저항한 순창 출신 김병로, 전주 3.1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목사 등 전북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펼친 활약은 대단하다”며 “이들의 활동은 전북 항일운동 역사의 큰 자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이들 지도자급 항일운동가와 지역사회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때 전북 항일운동사는 더욱 알차고 풍성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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