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사물에게 말 걸기’라는 코너가 있었다. 일상에서 늘 보는 물건을 관찰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액자’에게 말을 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아내와 나는 신혼 때 많은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액자 걸기’였다. 아내는 눈높이에 걸자고 했고 나는 천장에 가깝게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아내가 말하는 높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낮은 것 같았다. 벽에 붙어있는 액자라는 사물을 처음 인식한 것은 물론 어려서이다. 그때 액자란 고개를 뒤로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경험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아내와의 견해차이는 그보다는 내가 살았던 부안의 옛집 천장이 낮아서 높게 걸렸다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당시 아버지가 벽에 붙은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을 때 의자 위에 올라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옛집에는 시계와 함께 돌아가신 조부모 사진도 천장과 벽의 모서리를 이용해 거의 45도 각도로 걸려 있었다. 어른을 우러러보라는 뜻이 있는 것 같고, 조상님들이 방안의 우리를 지켜보니 삼가라는 뜻도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대단히 권위적이지만, 시계나 유리 액자를 높이 다는 데는 위험한 물건이나 중요한 물건을 키 작은 어린아이가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까닭도 있었으리라.
액자란 무엇일까? 사람이 보기 위해 벽에 거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 거는 것으로 충분하다. 액자 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포함한 내용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일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위험한 물건은 경우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어른 키높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사물의 쓸모가 잊혀져 도리어 주인 행세하는 경우가 있듯이 사회의 제도도 그 본질을 잃고 인간을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안존하려는 관성과 타성 탓도 있지만 그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본질을 애써 외면하려는 점도 있다. 한 지붕 안에 사는 부부도 의견이 다를진대 직장, 지역, 국가, 세계 등 크고 작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나로 모여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각기 다양함을 인정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견 차이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가부간 판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정부, 국회, 법원에서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같은 호모사피엔스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좁혀지지 않는 골을 두고,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AI)에 판단을 맡기자는 의견이 나올 만도 한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축구나 야구 경기에서 불완전한 인간 심판 대신 기계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간의 판단을 번복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렇다고 숫자와 양으로 계량할 수 없는 가치 충돌의 세계에 인공지능을 내세워 그 판단에 순복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인공지능이 판단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가치를 숫자로 환원하면 되지 않은가 하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 단계에 오면 과연 “인공지능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본질과 쓸모를 보는 눈에도 주관이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거나 수습해야 할 목적을 지닌 법과 제도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 그 자체만으로 문제의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액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처럼.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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