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일본 리얼리즘의 대가인 우치다 도무와 앞선 세대와 단절을 선언하고 영화적 혁신을 추구한 젊은 동인 운동을 이끈 이장호 감독을 재발견했다.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시도한 우치다 도무의 무성영화 2편이 국내 처음 소개되며, 사회적 리얼리즘과 영화적 형식미 탐구에서 족적을 남긴 이장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 글은 전북일보가 발행하는 '2012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중 '우치다 도무 회고전'과 '영상시대와 이장호 특별전'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 미지의 거장…日 성찰하는 거울
- 우치다 도무 회고전
1970년 우치다 도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국의 유명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는 '서구에는 아직 덜 알려진 일본의 베테랑 감독이 사망했다'라는 짤막한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그만큼 세계의 영화계가 우치다 도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후 4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아마도 전주국제영화제가 아니라면 그의 영화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치다 도무는 1898년에 태어나 일본영화의 창세기에 활동을 개시했고, 1920년대 무성영화를 거쳐 1930년대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였다. 이번에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하는 빈농의 삶을 그린 〈흙〉(1938)은 이 시기 최고의 사실주의적인 작품으로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들 대부분은 일본에서도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무성영화 2편(〈땀〉(1929), 〈경찰관〉(1933))은 여전히 미지의 작가인 우치다 도무의 영화경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치다 도무의 상대적인 무명성과 경력의 부침은 그의 격렬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첫 번째 시기는 1920~30년대 청춘의 유랑시절이다. 그는 1920년에 영화사에 입사해 영화경력을 시작했지만, 회사의 파산으로 배우들과 지방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어 니카츠 영화사에 입사해 영화를 만들었지만 회사의 방침과 맞지 않아 새로운 회사의 설립을 시도하다 파산해 어려움을 겪었다. 부유한 사내가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하층민의 고된 생활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그린 무성영화 〈땀〉(1929), 경찰관과 친구의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그린 〈경찰관〉(1933), 소작농의 빈곤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봉건제와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한 〈흙〉(1939)이 주요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전쟁의 발발로 영화작업이 중단되었던 시기로, 우치다 도무는 패전 후에도 8년간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로서는 공백기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쟁의 비참과 방황의 시간이 이후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53년 우치다 도무는 10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시기이자 새로운 전성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시대극과 장르성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전후 복귀 제일작인 〈후지산의 혈창〉(1955)은 전편에 감도는 살기와 역동성이 뛰어난 사무라이극이다. 그의 사무라이 영화는 활극의 장쾌함과 격렬함이 있지만 주로 약자에게 시선을 향하고 지배계급·빈부의 차이에 분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활극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사회에 대한 우치다 도무의 생각은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패전 후 미군 점령기의 일본사회를 그린 〈내면의 굴레〉(1955)와 일본 하층계급의 원한의 감정을 소설로 썼던 미즈카미 쓰도무의 원작을 영화화한 〈기아해협〉(1964)이다. 특히 〈기아해협〉은 우치다 도무의 절정의 작품으로, 전후 혼란기에 극단적인 빈곤 속에서 작은 범죄로 전과자가 된 한 남자가 방화, 절도, 살인이라는 범죄에 무심코 우연히 가담하게 되면서 점점 더 큰 범죄자가 된 한 남자와 그를 추적하는 노형사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묘사한다.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는 전편에 패전 후의 일본의 황량한 세상과 인심이 강한 리얼리즘으로 재현되고, 그러기 때문에 따뜻한 구원을 바라는 처참한 염원이 작품 전체에 아름다운 비애감으로 흐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성욱(영화평론가·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 파격적 영상미와 리얼리즘
- 영상시대와 이장호 특별전
친구인 소설가 최인호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별들의 고향〉으로 당대 최고의 한국영화흥행기록을 세운 1974년에 이장호는 아직 20대의 나이였다. 그는 신상옥의 조감독 출신이었으나 실은 감독으로서 현장을 어떻게 지휘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일종의 아마추어리즘, 기성 제도에서 전혀 훈련받지 않은 이장호의 새로운 감성은 한국영화계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별들의 고향〉의 영화문법과 리듬은 동시대의 다른 한국영화들과는 달랐다. 〈별들의 고향〉의 음악을 맡은 가수 이장희는 러쉬필름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음악을 만들었고, 주제가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데도 화면에 계속 흘렀다. 기성 영화인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밀어붙인 이장호의 뚝심과 새로운 감성은 이장호와 비슷한 나이대 젊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힘이 됐다. 이장호는 '영상시대'라는 또래의 젊은 감독들과 일종의 동인제 시스템으로 몇몇 영화를 공동기획하고 연출했으며, 오랫동안 숙련된 장인 제작 시스템으로 굴러가던 한국영화계의 고인 물 같은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듯 했던 이장호의 경력은 대마초 파동으로 자격정지를 당하면서 일시 중단된다. 수입된 서구 청년문화의 유행을 경계하던 유신정권 아래서 짧지 않은 동면의 세월을 보낸 이장호는 야인으로 지내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됐다. 복권된 후 그가 재기작으로 연출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한국영화사에서 〈별들의 고향〉 이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였다. 재개발 열풍에 쌓인 강남을 무대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흘러든 세 시골청년의 삶을 에피소드 구성으로 차곡차곡 포갠 이 영화는 한 두 명의 주인공을 축으로 스토리가 펼쳐지는 기성관습을 완전히 혁신한 리얼리즘 영화였다.
작가적 명성은 계속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충무로의 기피 인물이 되다시피 했던 이장호는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무릎과 무릎사이〉, 〈어우동〉같은 에로티시즘 영화나 〈이장호의 외인구단〉처럼 만화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대박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장호의 예술적 권력은 하늘을 찔렀고 극장개봉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직감과 본능에 기초해 찍은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 시기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작가의 무의식과 시대의 공기가 기적적으로 만나 말로 요약되기 힘든 풍경을 펼쳐놓는 이 영화적 진경의 경지는 이장호라는 예술적으로 민감한 안테나를 지닌 감독이 자신을 해방시켰을 때 어느 경지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이장호의 전성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아쉽게도 〈명자 아끼꼬 소냐〉 이후에 〈천재선언〉을 끝으로 1990년대의 이장호의 영화경력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억압적인 정치현실을 견뎠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장호의 그런 예술적 담대함은 누구도 넘보지 못한 그만의 성취를 이루게 해주었다. 그 전성기가 좀 더 길게 이어졌더라면 한국영화의 질적 유산은 그만큼 풍부해졌을 것이다. 이장호 영화의 진짜 예술적 매력은 실패로 끝난 작품일지라도 흥미로웠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김영진(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