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잔디'는 묘지나 정원에 최적인 잔디로 (사)고창군귀농귀촌협의회 김한성 회장이 운영하는 '옛날잔디영농조합법인'의 브랜드명이다. 김한성 회장은 2009년 3월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고창군 고수면 고향으로 귀농했다. 아이들 교육 문제 등으로 반대하던 아내는 그해 8월에 세 자녀와 함께 내려 왔고, 4년이 지난 지금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생명력이 강한 잔디는 재배가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잡초제거를 손으로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일손이 많이 가는 작목이다. 2만평 넓은 잔디밭을 볼때는 아득하지만 어느 새 일이 마무리 되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보람을 느낍니다. 잔디는 묘에 많이 쓰는 작물이라 납품시간을 절대 어겨서는 안됩니다. 납품시간을 맞추기 위해 이른 새벽에 자동차 불빛만을 의존해 온 가족이 작업을 해야 하는 때가 많습니다."
김 회장이 잔디농사를 시작하게 된 인연은 20여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년 전 김 회장의 아버지는 우연히 잔디 집산지(전남 장성군 삼서면)를 지나가다 잔디를 갈아 엎는 걸 보게 됐다. "옛날 잔디는 키가 작고 병충해에 강하지만, 생육 기간이 길어 수익이 맞지 않아 신품종으로 바꾸기 위해 갈아 엎는다"는 농부의 말을 듣고, '키가 작고 병충해에 강한 옛날잔디의 장점을 이용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김 회장 아버지는 4~5년이 지나면 썩음병으로 죽는 요즘 잔디에 비해 생명력이 강한 옛날 잔디의 장점을 부각 시킨다면 판매가 괜찮을 것으로 판단하고 잔디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장묘 문화의 변화로 판매량이 줄어들고 힘이 들어 농사일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4형제 중 아무도 승계하지 않으면 잔디 농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아버지의 말씀을 쫓아 김 회장은 귀농을 결심했다. 김 회장은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힘들게 일군 사업에 너무 쉽게 손을 대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평소의 생각과 미래의 농촌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귀농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물론 그도 모든 귀농인들이 겪듯이 시골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시키면서 가족에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오랜 세월 동안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시작했음에도 정착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트랙터, 진동롤러 등 기계화로 부족한 일손을 채웠으며, 형님을 설득하여 귀농하게 했다.
고창군농업기술센터의 귀농귀촌학교를 통해 정착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김 회장은 "농사도 중요하지만 귀농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며, 이런 문제를 서로 공유하고 노하우를 나누는 것이 귀농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김 회장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곧바로 후배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동료들과 우여곡절을 거쳐 (사)고창군귀농귀촌협의회를 설립하고, 임기 3년의 초대회장을 맏아 귀농귀촌인들의 중심에서 그들의 성공적인 농촌 정착을 돕고 있다.
김 회장은 "고창군은 복분자, 수박, 불루베리, 인삼, 고추, 땅콩, 고구마, 풍천장어, 오디 등 특산물이 많아 귀농지로 선택하는데 유리하다."며 "이미 작목반이나 연구회를 통해 기술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고, 판로도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며, 또한 귀농귀촌T/F팀의 영농상담과 귀농 정보 제공 등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이곳으로의 귀농을 권한다.
그는 또 "직업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귀농에 도전해 보라"며 "앞으로 몇년 후면 지금 귀농한 사람들이 각 마을을 이끌어 가게 될 것이며, 부지런한 귀농귀촌인이 늘어 갈수록 농촌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이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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