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5월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서정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을 떠올려본다. 핍박 받는 사람들과 가난한 생명을 위해 제 여분을 나눠줄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열강의 전쟁과 약소국의 내란은 자신과는 먼 일이라는 시대적 양심의 부재 혹은 시대의식의 결핍의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2020년에 반체제적 저항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칫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라며 다소 짓궂은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실 백학기 시전집 <가슴에 남아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에서 시인이 시적 소재로 삼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계엄령 거리, 총과 대포, 삼팔선, 전쟁, 혁명……. 특히 장시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는 이광웅, 김영춘, 정인섭 등 이미 잊힌 해직교사나 참교육을 외친 시인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이 가는 이유는 무얼까. 지배세력의 탄압 같은 정치적인 문제 말고도 인간성의 문제, 즉 파탄나버린 시대의 불행한 죽음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시인의 자괴감을 시에 반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시적 화자는 “법원에서 손 묶인 채 웃고 있는 이광웅 형”을 떠올리며 “너무 높아 서글픈 하늘”을 보고 “봄 산에 들면 미치고 싶다”고 말한다. 그 구절이 암시한 자괴감은 일차적으로 독재정권의 탄압과 허위성에 대한 반감에 연유했으리라.
쓰라린 회한과 그 자괴감은 시대적 모순과 암울한 현실과 우리 삶의 도덕적 허위를 폭로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거나 이미 끝장 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위선자로 규정한다. 여기서 위선자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역사의 희생자가 된 분들에 대한 죄스러움, 타락한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한 부끄러운 삶을 반성하는 타락자를 상징한다.
“그대의 작은 키가/때로 작게만 보이지 않는다 (…) 조선 새야 새야/눈 퍼붓는 날/밤 이슥토록 내 귓가에 와서/울어라 (…) 바람 불면/바람 부는 그곳까지 나 또한 불어가서/아프다 (…) 너는 어디에 숨어서/청계의 봄을 기다리고 있느냐/어린 시인아 (…) 너무 높아 서글픈 하늘/만경길 새벽술 마시며 걷다/동트다 (…) 수유리에서 불어오는/바람/내 빈 가슴을 텅텅 울리고” -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中
오늘날, 시리아 내전의 희생자를 기억하거나 세계적인 문제에 절실한 공감을 느끼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서글픈 하늘”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세계이다. 특히 비인간적인 정치와 자본의 권력이 줄기차게 대물려 이어지는 이 시대엔 더욱 그렇다. 이 작품집을 정독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진정 회복해야 할 시대적 양심 혹은 남의 나라 일이라고 지나쳤던 일들이 통렬한 자기 문제로 언젠가는 닥쳐올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 이길상 시인은 2001년 전북일보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시와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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