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구 곳곳에서 다른 목소리와 생태로 살며 갈등과 경쟁을 하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의지하고, 돌본다. 혼자이든 둘이든 여럿이든, 사회 공동체라는 스펙트럼에 고였다 사라진다. 『똥꽃』은 원시적인 모자간의 이야기이고 둘의 이야기이다. 그 모자(母子)의 일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쫓을 때 독자는 그들의 삶이 아닌 내 삶의 사다리를 조금은 더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똥꽃』 의 저자 전희식은 ‘가족을 돌보고, 요양원을 지키고, 누군가를 챙기느라 수고하는 분들께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15년의 시간차를 두고 개정판’을 냈다 한다. 초판에서 개정판으로 재구성되기까지의 십몇 년의 시간 사이에는 전희식, 김정임 두 저자의 생(生)과 사(死)가 있다. 멀찌감치 파도가 밀려간 해변을 걷다, 이미 사라진 물결의 각인을 발견했을 때의 가슴 아린 그리움처럼 어머니와 아들의 시간이 부려놓는 삶의 깊이에 저절로 숙연해지고 만다. 어머니와 2년 가까운 날의 일상을 초판으로 읽었던 독자라면 어머니와 함께한 6년여의 세월 이후 추모의 시간까지, 숨은 그림처럼 덧붙여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도 있다. 어머니를 돌보던 아들의 깨달음은 수없이 많은 아포리즘으로 완성되어 마치 소설 같기도 한, 두 저자의 이야기는 독자의 가슴에 생생하게 부딪혀온다.
전 권에 흐르는 모자의 에피소드는 큰형님 집에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뵌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의 환각 증상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아들의 말을 거둘 만큼 컸다. 당신 삶의 여정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무시당한다고 느꼈을 어머니의 좌절감을 생각해 본다. 치매란 가족 모두에게 있어 당황스럽고 난처한 일임은 분명하다. 어머니가 그린 똥꽃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고통이나 아픈 감정으로 바로 연결 지어 돌봄이 힘들다는 것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신중해야 할 일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치매를 ‘포기한 삶의 틈새로 끼어든 이물질들’이라고 결론 냄으로써 진정, 어머니의 망각을 ‘잠재된 고의’였다고 이해한다.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든다. 노쇠한 몸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기에 느끼는 참담함에 이어 자신을 수용하는 대신 자신의 기억을 거세시킴으로써 일탈에 성공하는 것이 치매가 아닌가 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온 당신의 존엄을 침해당하지 않기 위한 거스를 수 없는 손실, 꼬리 밟힌 도마뱀이 몸의 일부분을 포기하듯 무의식적 자아가 자신의 기억을 내치는 건 아닐까 하고. 우리가 즐겨하는 ‘알아서’의 코드를 작동시켜, 통제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포들이라서 그랬을 거라고. 인간의 육체에 담긴 가늠할 수 없는 수의 우주의 작업 방식이라고. 모자의 관계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무엇보다 자신의 존엄을 위해서 식물적 삶을 산다고.
두 저자인, 어머니와 아들의 일상을 보면 현재를 재조합하는 설계자가 되는 어머니와 그 세계의 파동으로 같이 순항해 가는 아들의 극적인 돌봄의 경지에서 독자도 덩달아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치매를 겪는 어머니의 세계를 아들이 사는 평행 세계 어디쯤이라고 상상한다면 놀랍게도, 분명 우리가 유레카라고 할 수 있는 존엄의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다. 독자는 어머니 자신과 어머니가 아닌 그 누구의 세계로 각기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정숙인 작가는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백팩'으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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