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는 선후로 오월, 일본, 후당, 거란 등 정권들과 대외관계를 추진했었으나 오월과의 외교관계가 제일 성공적이었다. 오월국(吳越,907-978)은 당나라 말기 중국 강남지역에 세워진 지방정권이다. 건국의 시조는 전류(錢鏐)이다. 지배영역은 와신상담, 토사구팽, 오월동주 등 익숙한 역사전고(歷史典故)들이 발생했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옛 강역을 아울렀기에 국호가 오월이다. 오늘날 익히 알려진 상해, 항주, 소주, 영파 등 중국 유명도시들을 아우르는 오월지역은 우월한 지리환경과 기후 조건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해상무역이 발달한 대외교류의 주요 창구였으며, 당 후기에는 중원과 비견되는 중국의 또 다른 경제문화 중심지로 부상된 곳이다.
△오월과의 해상통로 장악
한반도와 오월지역의 해상항로는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개성-군산도-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사단항로를 연상한다. 그러나 최초 양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항로는 백제 남해안-소흑산도-명주을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해상항로는 7세기 중엽에 개척되었으나 9세기경 당-신라-일본 간 민간무역이 흥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여수반도와 광양만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로산성 유적지에서 9세기 중후기 월주청자, 해수문포도방경 등 당나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여수반도 남쪽 앞바다 연도에는 아직도 당으로 가는 포구라는 당포(唐浦) 지명이 남아있다. 당포의 위치는 여수, 순천지역 해상세력들이 오월로 떠날 때 방양(放洋: 항해에 적합한 바람을 기다려 먼 바다로 출발을 의미함)하던 곳일 것이다. 이 유적과 유물은 순천 박영규과 여수 김총 등이 대오월 해상무역에 참여했음을 의미하며 이들을 통해 남해안 해상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견훤은 서남해 지역 방수군 비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해상세력들을 흡수하고, 해상통제권도 장악하였다. 900년 후백제 도읍이 전주로 정해지면서 정치의 중심이 서해안으로 이동하였고, 해상항로도 전주-서해안-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해상항로로 바뀌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해상항로는 변형된 연장형(延長型) 해상항로다.
△오월과 외교관계 결성
<삼국사기>열전에는 900년 견훤이 오월에 사신를 파견하여 후백제와 오월 간 외교관계가 시작된다. 오월이 견훤에게 검교태보를 더하고 기타는 예전과 같다는 관직을 내려 양국 간 교류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비문에는 건녕 3년(896)에 입절사(入浙使) 최예희가 명주(영파)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견훤이 파견한 것이다. 이 해는 전류가 893년 진해(鎭海)절도사 이어 진동(鎭東)절도사에도 임명되어 오월(절강)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 지위에 오른 해이기에 입절사는 견훤이 전류에게 보낸 축하사신이었을 것이다. 견훤과 전류 두 군주는 이미 건국 전에 서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국 후 양국은 서로 정치적으로 지원하면서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918년 오월과 양오(楊吳) 간 전쟁을 앞두고 한창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견훤은 전류에게 특별히 말(馬)을 보내어 성원의 뜻을 표시했다. 이에 927년 견훤과 왕건이 전쟁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전류는 후백제에 반상서 사신을 파견하고 견훤을 통해 왕건에게 조서를 전달하여 전쟁을 중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933년에도 견훤이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는 존속기간 내내 오월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불교문화교류
양국 간 우호관계는 경제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 중후기 남종선이 중국 남방, 특히 오월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흥성하자,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새로운 선종사상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다. 선종 9산문 중 반수 이상 후백제 영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양 지역 간 불교문화교류는 사단항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에서 30년간 수행한 경보스님은 921년에 오월 지역을 떠나 전주 임피현 신창진 포구로 귀국한 후 견훤의 요청으로 전주 남쪽 남복선원에 주석하였다. 또한 당에서 25년간 수행한 긍양스님은 924년에 줄포만 희안현 제안포로 입국한 후 강주 백암사에 머물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후백제시기 불상 양식에서도 양국간 해상교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군산 불주사 금동불입상, 김제 옥산리 금동불입상,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입상의 원형 좌대 형태, 세장한 비례, 편불화 현상 등은 하나같이 오월국 수도 항주 영은사 경당 오존불, 소주 호구탑 금동좌불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유사성은 오월지역의 불상양식이 후백제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청자생산기술 도입
자기(瓷器)는 흙의 선택에서 유약, 온도, 소요(燒窯) 축조, 장식기법 등 다양한 고급기술이 집약하여 만들어지는 고부가치 생활용품이자 공예품이다. 고대 중국 대외무역에서 천년이 넘도록 줄곧 효자상품을 담당했던 3대 수출상품(비단, 차, 자기)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다문화(禪茶文化)로 사찰의 승려들이 다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점차 왕실, 귀족층으로 확산되었다. 다기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산화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중국 오월지역의 월주요 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한 사람이 견훤이다. 그동안 월주요 청자는 중국청자로서 고려청자의 기원으로 알려졌을 뿐 언제 누가 월주요를 한반도에 처음 도입하였는지 학계에 의견이 분분할 뿐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한국의 초기청자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북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단되는 오월지역 월주요과 같은 40미터 내외의 대형 전축요(塼築窯)가 발굴되었다. 이 전축요는 오월에서 청자기술자가 후백제에 들어와 직접 축조한 것으로 판명하고 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와 초기청자는 10세기 도요지로 판명되었고, 따라서 후백제 견훤이 오월국과의 대외교류를 통하여 월주요 청자기술을 도입하여 현지생산을 주도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고창 아산 반암리에서도 33미터에 달하는 대형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는 전주 수도권에 청자를 공급하는 요지라면, 아산 반암리 유적은 해로수송이 용이한 지역 임을 감안하면 초기청자를 후백제 전역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는 듯하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초기청자, 견성(甄城) 그리고 견훤
<고려사> 지리지에 전주는 견성(甄城)이라는 별칭이 등장한다. 견성은 견훤과 같은 견자를 사용하여 후백제시기에 생겨난 별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견성은 ‘견훤의 도읍’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왔다. 군주의 성씨를 도시 이름을 따서 명명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견훤은 원래 이씨(李氏)였다가 견씨(甄氏)로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가 농부로 살다가 光啓(885-887)연간에 장군으로 자칭했을 당시 이씨 성을 가졌을 것인데, 언제 왜 아버지의 성씨를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18년 후백제 왕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최대 적수인 왕건에게 귀강(歸降)하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견씨 성을 택한 것일까? 옥편에 견(甄)자는 질구릇 구울 견,성씨 진이라고 나온다. 부수에서 기와 瓦자 사용은 도기생산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의 여러 성씨를 고증한 송의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1161)에 의하면 견씨는 순(舜)임금의 후손이었다. 일찍 순임금 시절에 한 곳에서 질 좋은 도기를 생산 유통시켜 지역경제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읍(城邑)이 형성되었고, 도기를 생산 판매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견성(甄城)으로 명명하였다(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견성현이다). 순임금 자녀 중 도기를 생산 관리하는 견관(甄官)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견을 성씨로 삼았다. <계륵편鷄肋篇>(송)에 의하면 견자에 ‘진’이라는 새로운 발음이 생긴 이유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무열왕 손견(孫堅)과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피휘(避諱:국왕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때문이었다.
최근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정되는 오월지역 월주요의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도통리 초기청자 유적은 견훤이 오월과 교류에서 제일 먼저 월주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청자 국산화를 시작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당시 청자는 고급기술이 복합화된 고부가 상품이기에 수도 전주가 청자의 생산과 유통 총책을 맡는 중심도시 역할을 담당하면서 견성의 별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자기(瓷器)가 조선 전기까지 전주특산물이었다는 사실은 후백제 청자생산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예컨데 견(甄)자는 순임금의 고귀한 혈통과 최첨단 기술력이 함축한 글자로서 견훤의 개성(改姓) 취지와 한반도에 최초로 청자생산을 현지화하고 유통시킨 자부심을 잘 반영시킨 글자라고 하겠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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