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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3) 후백제 견훤대왕의 역사정통성 확립과 왕권 신성화

후백제는 후고구려(태봉)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은 주역이다. 특히, 후백제왕 견훤은 가장 먼저 신라의 대안으로서 등장하여 새로운 역사를 여는 역할을 시작하였다. 후삼국 시대는 삼국이 통일된 상태에서 240여년간이 경과된 상황에서 다시 옛 경쟁국가의 부활을 통한 국가간 대결이 진행된 독특한 시기였다. 이같은 상황은 앞서 삼국시대 국가간 확장의 결과로 나타난 대립과 중국, 일본까지 연결된 국제적 충돌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후삼국시대는 삼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신라의 국가 운영이 한계에 달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국가 내부의 과제 해결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삼국을 통일한 나라가 취해야 할 통합적 융합적 통치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안과 실천력을 갖춘 새로운 세력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후삼국시대의 특징은 백제,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차별적 통치가 기본적 문제점이었다는 점에서 견훤과 궁예는 과거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기반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즉, 견훤 및 궁예 모두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킨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감을 공통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또한 백제, 고구려 복속지역에 대한 차별극복을 현실적 목표로 제기하였다. 즉, 견훤은 신라 사회의 골품제적 한계와 정복지역에 대한 가혹한 수탈 등 신라가 통일된 국가를 운영할 새로운 체계와 방식을 구축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을 고수하며 한계를 노출하자 반신라적 입장을 명확히 하고 백제부흥을 통해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였다. 

 

△마한-백제-후백제 정통성의 천명

서기 900년 완산주(전주)에 당도하자 주민(州民)이 환영하므로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에 부응하여 제시한 첫 번째 발언이 ’국가의 정통성‘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내용이 아닌 명분의 첫 대목이란 점에서 견훤은 이미 무진주를 출발하기 이전에 전주에서 새로운 국가출범을 준비하였고 그 역사적 명분을 ’정통성 회복‘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견훤은 자신의 후백제 건국의 명분으로 삼국의 시초는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후에 일어났고 따라서 진한, 변한이 따라 일어났다(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㪍興. 故辰·卞從之而興)는 역사정통성의 제시와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회복으로서 백제부흥을 명분으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 935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쇠퇴해가는 말세를 만났으나 천하를 다스릴 것을 자임하였고, 삼한(三韓) 땅을 차지하여 백제를 부흥하였다.(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라는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견훤왕은 쇠퇴한 말세의 어려운 시기를 회복하는 것은 역사 정통성의 뿌리인 마한을 이은 백제의 부흥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제기한 고조선의 정통을 마한이 계승하였다는 정통론적 인식과 현재의 대한민국의 국호 ’대한‘의 뿌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견훤의 마한-백제 인식 표명은 고조선 준왕-마한-백제-후백제로 연결된 정통성 논리에 근거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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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편운화상부도에 새겨진 후백제(910년) 연호 정개(正開),

 

△후백제 개국 연호 ‘정개(正開)’ 반포

900년 후백제를 공식으로 출범시킨 견훤왕은 901년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고, 오월(吳越), 후당, 거란, 왜 등 여러 나라와 주체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정개(正開)’연호는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남원지역 실상사의 ‘편운화상승탑(片雲和尙僧塔)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개(正開)란 '바른 세상을 연다' 또는 '세상을 바르게 연다'는 뜻으로 후백제의 건국 이념으로 파악된다. 특히, 당시 통일신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치 않은 상황에서 정개(正開)란 연호를 견훤왕이 궁예보다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정개(正開)는 올바름으로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선포해 ’올바른 세상‘이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부정의를 정벌하고 새로운 통치와 법질서를 세운다는 다의적 성격의 정치적 선언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호란 중국에서 시작된 황제의 통치기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제후왕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결국 후백제 견훤왕은 후삼국 통일을 이루어 제후왕을 거느린 황제를 지향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후삼국시기 새로운 후삼국 통일에 대한 비전과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후백제 견훤왕이 사용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정개(正開)’로 대표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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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화상승탑 탑본 創祖洪陟弟子 安峰創祖 片雲和尙浮屠 正開十年庚午歲建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후백제 견훤왕, 대왕(大王)을 천명하다.

견훤왕은 927년 신라를 공략해 경순왕을 옹립한 이후 신라를 이미 자신에게 포용된 제후국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이는 927년 경순왕 옹립시 자신을 신라 제후국 왕을 책봉한 ‘대왕(大王)’으로 위상을 격상시켜 명실상부한 후심국 통일대왕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측 사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929년) 5월 17일 신라 견훤의 사자인 장언징(張彥澄) 등 20인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

이에 앞서 1월 13일 탐라도(耽羅嶋)에서 해조(海藻)를 교역하는 신라선이 대마도 하현군(下縣郡)에 표착해 온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마도의 책임자인 판상경국(坂上經國)은 이 표류민들을 안존시키고 식량을 주었으며, 의통사(擬通事)인 장잠망통(長岑望通)과 검비위사(檢非違使)인 진자경(秦滋景) 등을 파견하여 표착민을 전주(全州)로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3월 25일 전주에 도착한 진자경만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주왕(全州王)인 견훤은 수십여 주(數十州)를 병탄하여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있다. 장잠망통(長岑望通)등이 전주에 이르렀을 때 견훤이 자리를 마련하여 기뻐하며 은근히 말하기를, ...." <부상략기> 24 제호 연장 7년

사료는 929년 1월13일 대마도에 표착한 탐라도(제주도) 표류민을 일본에서 의통사(擬通事) 장잠망통(長岑望通)과 검비위사(檢非違使) 진자경(秦滋景) 등을 파견해 3월 표착민을 전주로 돌려보낸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주왕(全州王)인 견훤은 수십여 주(數十州)를 병탄하여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즉 왕(王)에서 대왕(大王)으로 견훤왕의 호칭이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수십여 주를 병탄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국내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 같은 사실은 신라와 고려 왕실 입장에서는 치욕적 상황인 것이므로 관련 사료가 모두 누락되었다고 사료된다. 그런데 일본 기록에서는 이 같은 왕(王)에서 대왕(大王)으로의 호칭변화를 직접 후백제 왕도 전주를 방문한 일본인의 언급에서 확인하고 기록에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 대왕(大王)호의 사용은 이후 935년 정변을 일으켜 등극한 신검이 부친 견훤왕을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자신 또한 ‘대왕(大王)’을 자칭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같이 견훤은 신라의 통치체계 문란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새로운 대안으로서 정통성에 입각한 백제부흥을 천명하고  정치적 목표로서 ‘정개(正開)’ 연호를 반포하고  대왕(大王) 칭호를 사용해  제후국 신라의 왕을 통솔하는  대왕(大王) 국가 체제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지역과 과거 연고성에 근거한 제한성과 신라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명시되어 표방된 점은 후삼국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한계를 함께 보여준 것이다. 결국 후백제의 역사성격은 현실 모순 타개를 위한 대안 제시와 함께 방법론적 한계를 내포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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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양대 학장 

 

견훤대왕의 출생 신이성을 부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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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세운 것으로 파악되는 완주 봉림사지 석등 간주석에 묘사된 용의 모습. (현재 군산 발산초등학교 위치) 

후백제왕 견훤의 신성화는 특히, 탄생관련 기록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고려시대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전통적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처음 견훤이 태어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숲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에서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왕실과의 연결성을 통한 신라적 정통성과 마한-백제전통에 근거한 ‘용의 아들’ 인식을 부각하였다. 

”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이 내용은 견훤이 마한과 백제의 용신(龍神) 설화를 연결해 강조한 ‘용의 아들’ 인식이 후백제 붕괴후 고려왕조에서 ‘지렁이’로 격하시켜 유지된 내용을 파악되는 설황이다. 여기서는 백제무왕이 용의 아들인란 인식을 견훤이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려시대 또 다른 역사서인  <제왕운기>에서는  ‘하늘의 새가 내려와 어린 견훤을 덮어 주었다’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신이성과 연결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와 연결된 시조 및 왕실의 신이성과 정통성을 종합한 존재로서 견훤을 부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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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 #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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