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후백제는 백제의 부활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신라의 변방에서 태어났으나 신라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후백제를 필두로 시작된 후삼국시대는 고대사회의 구각을 깨고 중세사회의 여명을 깨우는 새로운 시대였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후백제를 고려를 여는 매개체로 보거나, 견훤을 무력에만 의존하고 인륜을 저버린 망국의 왕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견훤의 후백제는 문화 왕국 ‘백제’의 염원을 계승하여 새로운 사회의 이상과 꿈을 제시한 국가로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 사이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국가가 아니라 중세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국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는 고대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성이 있는 중앙과 지방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성은 지방의 수취물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신라 경주는 대경이라고 불리웠으며, 지방의 도시인 소경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도성이었다. 신라는 지방을 군현제로 통치하였으며, 지방민은 도성의 민과는 차별을 받았다.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 있는 〈신라촌락문서〉에는 서원경과 주변 지역에서 10여 호, 100여 사람으로 구성된 촌이 나온다. 촌 마다 자체의 촌역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에서 사람, 토지, 소나 말 등을 3년마다 파악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 사람의 전출을 국가에서 자세하게 파악할 정도로 촘촘한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신라는 혈연을 기반으로 골품제를 운영하여 진골 귀족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지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사회가 운영되었으며, 관료조직을 기반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시행하였다. 골품제와 중앙집권을 기반으로 유지되던 신라 사회는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로 대표되는 지배질서가 서서히 붕괴하고 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으며, 세금의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사회를 방어할 필요에서 촌주를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자위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방세력이 성장하여 지방민을 규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변화의 한 가운데에 후백제의 견훤이 있었다. 견훤의 출생은 두 계통이 전하고 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문경) 사람으로 아버지는 아자개였다. 아자개는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며 부를 축적하여 지방의 유력자로 성장하였다. 농민으로 성장하여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장군으로 입신하였다. 견훤을 포함한 그의 아들도 대부분 장군의 지위를 누렸다. 농업으로 쌓은 부를 기반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닦은 대표적인 집안이었다. 다른 기록에는 견훤의 어버지는 지렁이로 나오지만, 외할아버지가 광주 북촌의 부자라고 하여 농사를 지어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서 일치하는 사실은 견훤의 가문이 농사를 지어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군이라는 지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 말기의 상황에서 부를 축적하는 한편으로 지역민들을 결집하여 다른 공동체나 초적으로부터 지역사회를 방어하였던 것이다. 경제력와 군사력을 보유한 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견훤을 단순히 신라 변방의 장군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성장하는 인물로 설정할 수 있다.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견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공간은 신라의 변방인 서남해였다. 견훤은 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에서 장군으로 지위를 확보하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순천의 해룡산성, 광양의 마로산성 등은 견훤의 초기 근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로산성은 통일신라~고려에 걸치는 유물이 출토되어 견훤이 활동한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청자, 청동거울 등 중국제품, 재갈 등 말갖춤과 더불어 쟁기날, 가래, 따비 등 많은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산성에서 출토된 농기구는 신라 말기 성장하는 계층인 호부층의 경제력과 장군이 가진 군사력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농사를 지어 성장하는 호부층, 군대의 장군이라는 성격과 더불어 해양을 수호하고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견훤은 도성 중심의 고대 사회가 가진 도시 구조를 탈피하여 지방의 도시인 완산주나 남원소경 등의 지방 도시를 발전시키고 있다. 후백제는 신라 도성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해에서 거병하여 무진주를 거쳐 완산주에서 후백제의 도읍을 옮기면서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동남해 중심으로 발전하는 신라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후백제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견훤은 오월과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을 제수받았으며, 거란과도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견훤은 외교적 관례로 오월과 후당의 책봉을 받는 존재였으나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독립적인 국가를 표방하였다. 남원 실상사의 편운화상 부도 명문에는 ‘정개’라는 후백제의 연호가 나온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책봉을 받는 (후)백제왕이었으나 국내적으로는 독자적인 국가의 왕을 표방하였다. 견훤이 황제를 칭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정도로 국가적인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중세사회는 고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배웠으나, 이제 후백제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의 이상과 꿈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견훤이 신라의 관제를 사용하고 신라 왕실과 계보를 연결하는 측면을 보고 고대사회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평가절하하지만, 신라의 변방에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여 동아시아 속의 국가를 지향한 측면을 중시하여야 한다. 후백제가 중세사회인 고려의 특성을 상당 부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김재홍 국민대학교 교수
후백제의 견훤, 매향비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다.
견훤은 서남지역에서 흥기하여 민심을 얻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가 무리를 모아 신라의 군현을 공격하자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5천여 명이 모였다. 완산주에서 민심을 얻은 것은 기뻐하여 ‘후백제왕’을 칭하였다. 신라 변방의 호족들이 자신의 지역을 근거로 자위조직을 구성한 것에 비해, 견훤은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범위에서 백성을 규합하였다. 통일신라의 통치조직인 군현을 넘어서 국가로 발전시킨 예는 견훤의 후백제가 선구적이었다. 견훤이 무리 5천 명을 단기간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서남해지역에서 새로운 세상을 지향한 움직임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서남해지역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조직이 싹트고 있었다. 군현이라는 지연을 뛰어넘어 결속을 다지는 ‘향도’가 나타나며, 매향비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를 드러내고 있다. 매향비는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면서 향을 묻고 세운 비를 일컫는다. 향을 묻는 행위를 통하여 발원자가 미륵불의 세계로 가기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사회변혁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매향비는 바닷물이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하며, 14~15세기에 세워진 것이 많지만 영암 구림리의 매향비는 신라 원성왕 2년(786)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이며, 신앙을 매개로 지방민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과 교역하기 좋은 입지인 영암지역은 후백제의 초기 근거지인 순천이나 광양 등 서남해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매향비를 세운 주체는 일반적으로 ‘향도’라고 일컬었다.
향도는 신라 변방에서 신라의 지배영역을 뛰어넘어 조직되었다.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철원 도피안사에서 향도가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고 명문을 새기고 있다. 거사 1,500여명이 결성한 향도는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 조직이었다.
고대사회는 도성과 지방을 구분하는 지연, 골품제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주민을 군현 단위로 파악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군현이라는 지연을 뛰어넘는 ‘향도’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보여주며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사회 변혁의 구심체로 기능하였다. 견훤이 신라의 군현을 뛰어넘는 범위에서 5천여 무리를 결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향도라는 새로운 사회조직을 기반으로 가능하였다. 향도는 매향이라는 행위를 통해 집단 내 결속을 강화하여 새로운 중세사회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 김재홍 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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