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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7) 후백제가 조선왕조를 낳다- 왕기(王氣) 서린 전주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王都)이고 조선왕조의 관향(貫鄕)이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이면서 왕조의 탯줄인 곳은 전주가 유일하다. 여기서 왕도는 견훤왕이 900∼936년, 37년간 전주에 도읍을 정해 후백제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또 왕조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해 1910년까지 518년간 유지해 온 조선왕조를 가리킨다. 그만큼 전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천년고도다. 왕대밭에서 왕대난다는 말이 있듯 전주는 일찍부터 한 나라를 통치할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곳이라 할 것이다. △ 전주는 왕도이면서 조선왕조의 뿌리였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 전북지역은 전주보다 익산 금마와 정읍 고부가 중심이었다. 고부는 백제의 5방(方) 중 중방성(고사부리성)이 자리하고 있었고 금마는 백제 말기 왕도였다. 익산 금마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망명한 곳이요, 이후 마한의 거점이자 백제 무왕이 마지막으로 천도(別都地)한 곳이다. 당시 전주는 백제의 지방 군현(郡縣) 중 하나로 완산(完山)이라 불렸다. 완산은 인근 몇 개의 현을 관할하는 군에 해당하고, 통일신라 때인 685년(신문왕 5년) 완산주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 통치조직을 개편했는데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총관을 보내 통치했다. 9주 중 오늘날의 전라도에는 완산주(전주)와 무진주(武珍州·광주)를 두었다. 완산주에는 남원소경(南原小京)과 10개 군, 31개 현을 속하게 했다. 완산에서 시작한 고을이 현재의 전주 도심부로 중심이 바뀌게 된 것은 757년(경덕왕 16년) 완산주의 명칭을 전주로 변경하면서 부터다. 통일신라 말에는 견훤왕이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왕도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견훤왕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안을 지키는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진성여왕 때로, 실정(失政)과 흉년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견훤왕은 889년 순천만에서 거병한 후 군사 5000명을 이끌고 892년 무진주를 점령, 자왕(自王)이라 칭했다. 그러나 나주와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들을 포섭하지 못해 해상교통로 장악에 실패했다. 그래서 부득이 전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900년에 백제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풀겠다며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국가 수립을 대외에 선포했다. 견훤왕은 전주 인봉리 또는 물왕멀 일대에 왕궁을 짓고 동고산성, 남고산성 등 성곽 설비를 하는 한편 관부(官府)를 정비했다. 후백제의 영역은 전주를 중심으로 북으로 금강 이남, 남으로 영산강 상류 이북, 동으로 낙동강 이서지역까지 이르렀다. △후백제 견훤왕, 삼한 재통일 의지 불태워 견훤왕은 건국과 함께 중국의 오월(吳越), 후당(後唐) 등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일본, 거란 등에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때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했다. 본격적인 후삼국 패권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견훤왕은 먼저 신라를 징벌하기 위해 927년 경주를 공격해 고려와 가까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이러한 공격에 왕건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고려군을 이끌고 왔으나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에 대패했다. 견훤왕은 공산 전투 직후에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에 걸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이는 견훤왕이 대동강 이남의 삼한을 재통일하겠다는 포부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보면 가슴을 뛰게 하는 대장부의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견훤왕은 930년 고창(古昌·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 크게 패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아들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몰락을 재촉했다. 견훤왕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이 동생들과 모의하여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킨 것이다. 견훤왕은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귀순했고 결국 936년, 건국 45년만에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했다. 이때 안타까운 것은 전주서고가 모두 불탔다는 점이다. 견훤왕은 경주 침공 때 모든 서적을 전주로 옮겨왔는데 고려는 전주성과 함께 전주서고에도 불을 질렀다. 실학자 이덕무는 아정유고(雅亭遺稿)에서 이를 ‘3000년 이래 두 번의 큰 재앙(厄)’이라 애석해 했다. △고려 때 전주는 지방군현으로 위상 낮아져 후백제가 망하자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주는 고려의 지방 군현 중 하나로 위상이 낮아졌다. 고려는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해 군사적 거점으로 삼고 전주성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940년 군현 개편 때 다시 전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유감인 것은 태조 왕건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훈요십조(訓要十條)다. 위작 시비가 없지 않으나 제8조에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이후 호남 차별의 근거 중 하나로 악용되었다. 고려 때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는 1018년(현종 9년)에 행해진 행정구역 개편이다. 이때 지방행정구역을 5도 양계로 개편했는데 전북에 해당하는 강남도와 광주·전남에 해당하는 해양도를 합쳐 지금의 전라도가 탄생한 것이다. 1000년 넘게 이 명칭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주목(全州牧)과 나주목(羅州牧)이 행정의 중심이었다. 한편 고려는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입에다 말기에 들어 왜구의 약탈까지 겹쳐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1380년 왜구는 전함 500척을 앞세워 진포(군산) 앞바에 침입했으나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이들을 격멸했다. 이어 이성계는 이들 잔당과 이미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 들어와 있던 왜구를 남원 황산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때 왜구 토벌에 앞장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는 개성으로 개선하다 자신의 본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일가친척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기분이 좋아 춤을 추며 한(漢)고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역성혁명을 암시했다. 함께 자리에 있던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스러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시(登萬景臺詩)로 읊었다. 곧 이어 위화도 회군을 거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고, 전주는 풍패지향(豐沛之鄕·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서 유래)으로 조선의 뿌리가 되었다. △전주가 없으면 호남도, 국가도 없다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발산(鉢山 또는 發李山) 아래 자만동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영흥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안사가 어린 시절 놀았던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 등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성계는 건국 후 자신의 탯자리인 전주를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켜 전주의 위상을 높였다. 또 성종 대에는 양성지(梁誠之)가 전국에 5경(京)을 세워 통치하는데 그 중 전주를 남경(南京)으로 삼도록 건의했다. 그러다 1589년 전주 출신 혁명가 정여립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면서 호남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만민의 신분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등 대동(大同)사상을 주장했던 정여립은 당쟁의 희생양이었으나,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몰렸으나 이순신 장군과 의병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당시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을 남겨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호남의 중심은 전주였으므로 전주가 없으면 호남도, 국가도 없는 셈이다. 또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은 4대 사고 중 전주사고 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황혼을 예고했다. 처음에 고부에서 일어난 혁명은 부패한 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나아가 반봉건 반외세 투쟁 성격을 띠었다. 동학농민혁명 가운데 주목할만한 점은 집강소의 설치다. 혁명군은 조선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비단 일시적인데 그쳤으나 농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치행정을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선왕조가 기울어가자 1899년 고종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시 왕실의 뿌리인 전주에 주목한다. 오목대와 이목대에 각각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친필을 내려 비(碑)와 비각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영조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데 착안해 1771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 경내에 조경묘를 세우고 시조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1899년 다시 고종은 건지산에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하였다. 후백제는 조선을 낳고 후백제의 왕도인 전주는 1000년 이상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끝> /조상진 전북일보 논설고문

  • 기획
  • 조상진
  • 2023.10.31 16:00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6)후백제 문화유산의 미래전략

후백제는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크고 엄연한 한국사의 범주임에도 36년여라는 짧은 존속기간과 기록의 부족, <삼국사기>에 견훤왕에 대한 부정적 기록 등 때문인지 현재까지 다른 시기 고대 역사보다 문헌사· 고고학 분야 등 모든 부분에 걸쳐 연구 부족과 국가 및 자치단체의 지원과 관심의 대상에서도 소외되었다. 이런 가운데 향후 후백제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한 연구 활성화와 이를 토대로 균형 잡힌 지역 발전을 도모할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2023년 1월 17일 ‘후백제역사문화권’이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9개의 문화권 중 하나로 포함 개정된 것이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제1조(목적)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ㆍ조사하고 발굴ㆍ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제2조(정의) 1. “역사문화권”이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형·무형 유산의 생산 및 축적을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발전시켜 온 권역으로 현재 문헌 기록과 유적·유물을 통해 밝혀진 9개 권역을 말한다고 정의되었다. 후백제역사문화권은 충북, 충남, 전북, 광주, 전남,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후백제 시대의 유적ㆍ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후백제역사문화권 외 8개 문화권은 고구려역사문화권, 백제역사문화권, 신라역사문화권, 가야역사문화권, 마한역사문화권, 탐라역사문화권, 중원역사문화권, 예맥역사문화권이다. 2. “역사문화환경”이란 역사문화권의 생성ㆍ발전의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과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형ㆍ무형 유산 등 역사문화권을 구성하는 일체의 요소를 말한다. 3.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이란 역사문화환경을 조사ㆍ연구ㆍ발굴ㆍ복원ㆍ보존ㆍ정비 및 육성함으로써 지역의 문화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사업을 말한다. 4. “역사문화권정비구역”이란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14조에 따라 지정ㆍ고시된 지역을 말한다. 제3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ㆍ추진하여야 한다. 또한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통하여 지역 간 연계ㆍ협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행정적ㆍ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권 정비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위한 제9조 ① 문화재청장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특별자치시장ㆍ도지사ㆍ특별자치도지사와의 협의 및 위원회 심의를 거쳐 5년 단위의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제9조에서 수립된 정책수행을 위한 역사문화권 보존ㆍ정비의 지원 및 기반조성에 필요한 제27조(역사문화권 연구재단의 설립 등) ①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 정비 및 역사문화환경의 조성과 관련된 각종 활동의 체계적 수행 및 연속성 보장을 위하여 역사문화권 연구재단을 둘 수 있으며, 재단의 사업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출연하거나 지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업을 하기 위해 제28조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 연구와 문화유산의 발굴ㆍ보존 및 관리ㆍ활용 등을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라고 되어있다. △후백제 문화유산의 현황 후삼국 시대에 고려, 신라와 경쟁하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존 문화와 융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발전시킨 후백제는 충북, 충남, 전북, 광주, 전남, 경북 경남지역에 관련된 유물‧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후백제 문화유산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고 특히 무형의 유산은 거의 조사연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어 후백제까지 이용된 유산의 경우 삼국 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유산으로 분류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앞으로 조사연구를 통해 후백제 역사와 문화권의 규명과 재정립을 위해 현재까지 알려진 대표 유산을 소개한다. 후백제역사문화권 유산 현황 : 123개소, 국가지정 : 20개소, 시도지정 : 22개소, 비지정 : 81개소 △후백제 문화유산 조사연구, 정비, 활용의 미래전략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역사문화권’이 포함됨으로써, 문헌 및 고고학 자료들에 의해 왕궁터, 왕릉터, 왕실 사찰 및 도성, 산성 등이 고증되거나 추정되어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후백제역사문화권의 유적‧유물을 보다 종합적으로 연구·조사 및 발굴·복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과 지역개발 추진 시 문화재의 체계적인 발굴 및 보호를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향후 후백제 문화권 내 문화유산의 조사연구, 정비, 활용 분야별 미래전략을 큰 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조사연구 분야는 첫째 후백제 활동무대의 범위 재고를 위해 역사문화권 정비법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강원, 경남, 부산지역까지 확장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연구자의 저변 확대와 후백제 관련 문헌. 고고 자료의 수집과 데이터베이스화가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후백제 역사의 체계적인 조사연구를 위한 후백제문화권 모든 지역 ‘조사연구 종합계획’을 관련 자치단체가 참여하여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셋째 이를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역사문화권법에 있는 후백제역사문화권 연구재단 및 연구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정비·활용 분야 역시 첫째 후백제문화권 모든 지역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후백제문화권 정비·활용 종합계획’을 공동으로 수립하여 각 지자체의 문화유산의 특성과 주제, 주변 자치단체와 연계성. 시너지 효과를 고려하여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정비·활용계획 수립시 문화유산과 주변 지역이 조화되는 경관적 요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전주·완주 지역은 후백제 왕도로서 관련 문화유산과 정체성을 조사 연구하여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고도지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셋째 후백제 역사문화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알리기를 위한 연구, 상징물 조성, 선양사업 등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후백제역사문화권의 조사연구, 정비, 활용사업의 원활하고 빠른 추진을 위해 현재 7개 지역이 참여하고 있는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에 후백제문화권내 자치단체가 최대한 참여하도록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노기환 전라북도청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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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5 09:5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5)   미래지향적인 후백제의 국가적 성격

△후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라는 역사 용어는, 일본인의 서술 중 “이로써 옛적의 고구려‧백제 두 나라가 부흥하여 서로 싸우는 삼국시대 재현의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등에서 연유했다. 그러면 신라는 삼국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을까? 896년의 시점에서 “도적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 바지를 붉은 색으로 입어 스스로를 구분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고 일컬었는데, 주현(州縣)을 도륙하여 해를 입혔다. 서울의 서부인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고 갔다”고 했다.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난 무리들에게 경주 서부 지역까지 한번에 뚫린 것이다. 신라가 자위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905년의 시점에서는 “궁예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변경 읍락을 침탈해 죽령 동북까지 이르렀다. 왕은 땅이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는 깊이 걱정했으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성주에게 명하여 나가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왕명을 내린 대상을 ‘성주’라고 했다. 그런데 ‘성주’라는 이름 자체가 반독립 세력을 뜻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해 정령을 집행하는 지방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명은 공허한 외침이요 허세나 의례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성주는 신라 왕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지 못한 대상이었다. 906년 궁예의 군대는 후백제 군대를 물리치고 상주를 장악했다. 907년에는 “일선군(구미‧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모두 진훤에게 빼앗겼다”고 하였다. 원 신라 지역에서 궁예와 진훤이 격돌한 것이다. 궁예의 영주 부석사 행차도 이루어졌다. 이 상황에서 신라 왕의 통치력이 행사되었거나 저항한 기록도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920년에 왕건이 신라3보를 거론한 것은, 신라로부터의 양위를 염두에 두었다는 징표였다. 상징성 외에는 의미없는 존재로 신라가 전락했음을 뜻한다. 그랬기에 신라는 927년 후백제군의 습격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뿐 아니라 전혀 대응하지도 못했다. 신라 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경애왕이 전적으로 왕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솥발이 버티고 있는 삼국 ‘정립(鼎立)’ 개념을 염두에 둔 ‘후삼국시대’는 적합하지 않다. 현재 한국 학계의 공식 입장은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통합에 대한 의지도 없이 단순 남북 병렬 상황을 남북국시대로 운위하기는 어렵다. 굳이 남북국시대론를 설정한다면 신라와 발해가 아니라 후백제와 고려 사이는 가능할 수 있다. 양국은 동일한 국가 영역에서 성립하여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려 왕건은 후백제 진훤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이것은 곧 내가 남인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고 했듯이 후백제인들을 ‘남인’으로 호칭했다. 진훤 왕은 “군대는 북군보다 갑절이나 되면서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라고 하여, 고려군을 ‘북군’으로 일컬었다. 진훤 왕은 그러면서 “어찌 북왕北王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고려 왕을 ‘북왕’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일컬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를 ‘남인’‧‘북군’‧‘북왕’으로 불러 ‘남북국’의 대치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후백제와 고려의 대치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신라의 존재를 제시하겠지만, 진훤과 왕건이 주고받은 국서에서 공히 신라와 주周를 거론했다. 진훤은 “저의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돈독하고”라고 하여 ‘존왕’ 곧 신라의 신하임을 자처하였다. 왕건은 “의리를 지켜 주周를 높임에 있어”라고 했다. 진훤과 왕건은 모두 신라를 주실(周室)에 견주었다. 익히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주실은 상징성만 있었듯이 당시 영역이 경주에 국한된 신라도 이와 동일했다. 형식상 주실이 엄존했지만 춘추시대로 일컫고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도 엄연히 한실(漢室)이 존재했지만, 위(魏)·촉(蜀)·오(吳) 삼국의 역사로 간주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주周처럼 상징성만 지닌 신라를 제끼고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한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하등 부자연스럽지 않다. 현재 남한과 북한이 대치한 시대를 훗날 남북국시대로 설정한다고 해도 전혀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라와 발해는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동질성도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순히 남북으로 대치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북국시대를 운위할 수는 없다. 주지하듯이 ‘남북국시대론’은 본시 하나였던 정치체가 분열되었지만, 결국 통합을 위한 과도기로 인식한데서 등장한 용어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는 본시 하나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는 하나로 통합되지도 않았다. 고려에 의한 신라 통합과, 제3자인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의 흡수였다. 그 어느 하나도 남북국시대 용어에 부합하지 않았다. △미래를 지향한 국가, 지연과 혈연을 뛰어넘다 후삼국시대, 아니 남북국시대를 선도했던 후백제는, 신라 군인 출신을 수반으로 하고, 백제 유민들을 기층으로 한 국가였다. 6두품 출신들의 가세와 더불어, 다양한 세력이 정권에 참여하였다. 주민 통합과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권 주도층의 범위는 경주 중심에서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소수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 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기회와 참여 폭이 넓은 사회로 넘어가게 하였다. 진훤의 참모들 가운데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전환기에 최치원‧최언위와 더불어, 이른바 3최崔로 일컫는 최씨 성을 가진 최고의 인텔리켄챠 가운데 하나인 최승우가 있다. 즉 “소위 1대 3최가 금방(金牓)에 이름을 걸고 돌아왔으니, 최치원이요, 최인연이요, 최승우라고 한다”고 했던 그 인물이다. 이 중 최승우는 공산 대승 직후 왕건에게 보낼 격서(檄書)를 작성한 당대 최고 문사였다. 최승우의 격서는 웅문(雄文)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신라가 기울어 가는 890년(진성여왕 4)에 당唐에 유학 가서 893년에 시랑 양섭(楊涉)의 문하에서 3년만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서문을 쓴 <호본집(餬本集)>이라는 4‧6병려체 문장의 문집 5권을 남겼다. 『동사강목』에는 “최승우가 당으로부터 돌아오니 나라가 이미 어지러워졌으므로 드디어 진훤에게 의탁하여 ···”라는 글귀가 보인다. 최승우는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주군으로 진훤을 택한 것이다. 선종산문(禪宗山門)들과 더불어 사상계도 경주를 벗어나 재편되는 양상을 띄었다. 그럼에 따라 획일적인 의식과 통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침울하고도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포착된다. 창의성과 더불어, 활기 넘친 약동하는 사회 면면이 후백제가 선도한 시대 기풍으로 평가되어진다. 아자개에 의한 농민 봉기와 진훤의 거병으로 인해 노쇠한 사회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활기찬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고, 전통적인 폐쇄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회와 참여의 폭이 넓어진 사회로 넘어가게 한 시대가 ‘후삼국시대’였다.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이를 선도한 국가가 후백제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고대사, 아니 한국사에서 후백제사가 지닌 위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남북국시대’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분기점으로서 과거제 시행 후백제는, 실질적인 ‘남북국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20여 년 후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를 통해 중세로 넘어가는 교량 역을 했다. 과거제 시행으로써, 그 전까지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지배세력의 권력 계승은 차단되었다. 혈연과 지연을 청산한 능력 본위의 시대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후백제는 승려들에 대한 과거(科擧)인 선불장(選佛場)을 시행하였다. 미륵사 개탑 30주년 기념으로 922년 선불장을 개최한 것이다. 후백제 선불장은 훗날 고려 승과와 상통하고 있다. 후백제 승과 시행은, 승려 선발 과거제를 넘어 인재 등용과 관련한 국가 조직 전반의 체계화를 뜻한다. 진훤 왕 주도의 과거제 실시를 상정할 수 있다. 최승우와 같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유학파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의 한 분과인 승과(선불장)만 별시(別試)로 치러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골품체제를 타파하고 기회 균등을 부여한 것이다. 이 점은 우리 모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시대를 선도했던 진훤 왕과 후백제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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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7 13:14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4)후백제의 역사적 위치,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우리 역사에서 후백제는 백제의 부활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신라의 변방에서 태어났으나 신라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후백제를 필두로 시작된 후삼국시대는 고대사회의 구각을 깨고 중세사회의 여명을 깨우는 새로운 시대였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후백제를 고려를 여는 매개체로 보거나, 견훤을 무력에만 의존하고 인륜을 저버린 망국의 왕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견훤의 후백제는 문화 왕국 ‘백제’의 염원을 계승하여 새로운 사회의 이상과 꿈을 제시한 국가로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 사이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국가가 아니라 중세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국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는 고대 사회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성이 있는 중앙과 지방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성은 지방의 수취물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신라 경주는 대경이라고 불리웠으며, 지방의 도시인 소경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도성이었다. 신라는 지방을 군현제로 통치하였으며, 지방민은 도성의 민과는 차별을 받았다.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 있는 〈신라촌락문서〉에는 서원경과 주변 지역에서 10여 호, 100여 사람으로 구성된 촌이 나온다. 촌 마다 자체의 촌역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에서 사람, 토지, 소나 말 등을 3년마다 파악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 사람의 전출을 국가에서 자세하게 파악할 정도로 촘촘한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신라는 혈연을 기반으로 골품제를 운영하여 진골 귀족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지연과 혈연을 바탕으로 사회가 운영되었으며, 관료조직을 기반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시행하였다. 골품제와 중앙집권을 기반으로 유지되던 신라 사회는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로 대표되는 지배질서가 서서히 붕괴하고 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으며, 세금의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사회를 방어할 필요에서 촌주를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자위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방세력이 성장하여 지방민을 규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변화의 한 가운데에 후백제의 견훤이 있었다. 견훤의 출생은 두 계통이 전하고 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문경) 사람으로 아버지는 아자개였다. 아자개는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며 부를 축적하여 지방의 유력자로 성장하였다. 농민으로 성장하여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장군으로 입신하였다. 견훤을 포함한 그의 아들도 대부분 장군의 지위를 누렸다. 농업으로 쌓은 부를 기반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닦은 대표적인 집안이었다. 다른 기록에는 견훤의 어버지는 지렁이로 나오지만, 외할아버지가 광주 북촌의 부자라고 하여 농사를 지어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서 일치하는 사실은 견훤의 가문이 농사를 지어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장군이라는 지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 말기의 상황에서 부를 축적하는 한편으로 지역민들을 결집하여 다른 공동체나 초적으로부터 지역사회를 방어하였던 것이다. 경제력와 군사력을 보유한 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견훤을 단순히 신라 변방의 장군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성장하는 인물로 설정할 수 있다.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하여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견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공간은 신라의 변방인 서남해였다. 견훤은 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에서 장군으로 지위를 확보하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순천의 해룡산성, 광양의 마로산성 등은 견훤의 초기 근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로산성은 통일신라~고려에 걸치는 유물이 출토되어 견훤이 활동한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청자, 청동거울 등 중국제품, 재갈 등 말갖춤과 더불어 쟁기날, 가래, 따비 등 많은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산성에서 출토된 농기구는 신라 말기 성장하는 계층인 호부층의 경제력과 장군이 가진 군사력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농사를 지어 성장하는 호부층, 군대의 장군이라는 성격과 더불어 해양을 수호하고 국제적으로 교류하는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견훤은 도성 중심의 고대 사회가 가진 도시 구조를 탈피하여 지방의 도시인 완산주나 남원소경 등의 지방 도시를 발전시키고 있다. 후백제는 신라 도성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서남해에서 거병하여 무진주를 거쳐 완산주에서 후백제의 도읍을 옮기면서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동남해 중심으로 발전하는 신라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의 지향점을 알 수 있다. 후백제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견훤은 오월과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왕’을 제수받았으며, 거란과도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견훤은 외교적 관례로 오월과 후당의 책봉을 받는 존재였으나 국내에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독립적인 국가를 표방하였다. 남원 실상사의 편운화상 부도 명문에는 ‘정개’라는 후백제의 연호가 나온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책봉을 받는 (후)백제왕이었으나 국내적으로는 독자적인 국가의 왕을 표방하였다. 견훤이 황제를 칭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정도로 국가적인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중세사회는 고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배웠으나, 이제 후백제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의 이상과 꿈을 자리매김하여야 한다. 견훤이 신라의 관제를 사용하고 신라 왕실과 계보를 연결하는 측면을 보고 고대사회적인 인식을 가졌다고 평가절하하지만, 신라의 변방에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여 동아시아 속의 국가를 지향한 측면을 중시하여야 한다. 후백제가 중세사회인 고려의 특성을 상당 부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김재홍 국민대학교 교수 후백제의 견훤, 매향비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다. 견훤은 서남지역에서 흥기하여 민심을 얻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그가 무리를 모아 신라의 군현을 공격하자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5천여 명이 모였다. 완산주에서 민심을 얻은 것은 기뻐하여 ‘후백제왕’을 칭하였다. 신라 변방의 호족들이 자신의 지역을 근거로 자위조직을 구성한 것에 비해, 견훤은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범위에서 백성을 규합하였다. 통일신라의 통치조직인 군현을 넘어서 국가로 발전시킨 예는 견훤의 후백제가 선구적이었다. 견훤이 무리 5천 명을 단기간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서남해지역에서 새로운 세상을 지향한 움직임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서남해지역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조직이 싹트고 있었다. 군현이라는 지연을 뛰어넘어 결속을 다지는 ‘향도’가 나타나며, 매향비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를 드러내고 있다. 매향비는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면서 향을 묻고 세운 비를 일컫는다. 향을 묻는 행위를 통하여 발원자가 미륵불의 세계로 가기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사회변혁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매향비는 바닷물이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하며, 14~15세기에 세워진 것이 많지만 영암 구림리의 매향비는 신라 원성왕 2년(786)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이며, 신앙을 매개로 지방민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과 교역하기 좋은 입지인 영암지역은 후백제의 초기 근거지인 순천이나 광양 등 서남해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매향비를 세운 주체는 일반적으로 ‘향도’라고 일컬었다. 향도는 신라 변방에서 신라의 지배영역을 뛰어넘어 조직되었다. 신라 경문왕 5년(865)에 철원 도피안사에서 향도가 철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고 명문을 새기고 있다. 거사 1,500여명이 결성한 향도는 군현 단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 조직이었다. 고대사회는 도성과 지방을 구분하는 지연, 골품제라는 혈연을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주민을 군현 단위로 파악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군현이라는 지연을 뛰어넘는 ‘향도’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보여주며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사회 변혁의 구심체로 기능하였다. 견훤이 신라의 군현을 뛰어넘는 범위에서 5천여 무리를 결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향도라는 새로운 사회조직을 기반으로 가능하였다. 향도는 매향이라는 행위를 통해 집단 내 결속을 강화하여 새로운 중세사회의 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 김재홍 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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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0 16:01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3) 후백제 견훤대왕의 역사정통성 확립과 왕권 신성화

후백제는 후고구려(태봉)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은 주역이다. 특히, 후백제왕 견훤은 가장 먼저 신라의 대안으로서 등장하여 새로운 역사를 여는 역할을 시작하였다. 후삼국 시대는 삼국이 통일된 상태에서 240여년간이 경과된 상황에서 다시 옛 경쟁국가의 부활을 통한 국가간 대결이 진행된 독특한 시기였다. 이같은 상황은 앞서 삼국시대 국가간 확장의 결과로 나타난 대립과 중국, 일본까지 연결된 국제적 충돌 양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후삼국시대는 삼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신라의 국가 운영이 한계에 달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국가 내부의 과제 해결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삼국을 통일한 나라가 취해야 할 통합적 융합적 통치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안과 실천력을 갖춘 새로운 세력이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후삼국시대의 특징은 백제,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차별적 통치가 기본적 문제점이었다는 점에서 견훤과 궁예는 과거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기반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즉, 견훤 및 궁예 모두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붕괴시킨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감을 공통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또한 백제, 고구려 복속지역에 대한 차별극복을 현실적 목표로 제기하였다. 즉, 견훤은 신라 사회의 골품제적 한계와 정복지역에 대한 가혹한 수탈 등 신라가 통일된 국가를 운영할 새로운 체계와 방식을 구축하지 못하고 기존 방식을 고수하며 한계를 노출하자 반신라적 입장을 명확히 하고 백제부흥을 통해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였다. △마한-백제-후백제 정통성의 천명 서기 900년 완산주(전주)에 당도하자 주민(州民)이 환영하므로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에 부응하여 제시한 첫 번째 발언이 ’국가의 정통성‘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내용이 아닌 명분의 첫 대목이란 점에서 견훤은 이미 무진주를 출발하기 이전에 전주에서 새로운 국가출범을 준비하였고 그 역사적 명분을 ’정통성 회복‘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견훤은 자신의 후백제 건국의 명분으로 삼국의 시초는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후에 일어났고 따라서 진한, 변한이 따라 일어났다(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㪍興. 故辰·卞從之而興)는 역사정통성의 제시와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회복으로서 백제부흥을 명분으로 제시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 935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발표한 즉위교서에서도 “쇠퇴해가는 말세를 만났으나 천하를 다스릴 것을 자임하였고, 삼한(三韓) 땅을 차지하여 백제를 부흥하였다.(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라는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견훤왕은 쇠퇴한 말세의 어려운 시기를 회복하는 것은 역사 정통성의 뿌리인 마한을 이은 백제의 부흥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제기한 고조선의 정통을 마한이 계승하였다는 정통론적 인식과 현재의 대한민국의 국호 ’대한‘의 뿌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견훤의 마한-백제 인식 표명은 고조선 준왕-마한-백제-후백제로 연결된 정통성 논리에 근거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후백제 개국 연호 ‘정개(正開)’ 반포 900년 후백제를 공식으로 출범시킨 견훤왕은 901년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고, 오월(吳越), 후당, 거란, 왜 등 여러 나라와 주체적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정개(正開)’연호는 2022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남원지역 실상사의 ‘편운화상승탑(片雲和尙僧塔)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개(正開)란 '바른 세상을 연다' 또는 '세상을 바르게 연다'는 뜻으로 후백제의 건국 이념으로 파악된다. 특히, 당시 통일신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치 않은 상황에서 정개(正開)란 연호를 견훤왕이 궁예보다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정개(正開)는 올바름으로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선포해 ’올바른 세상‘이 시작되었고 이를 위해 부정의를 정벌하고 새로운 통치와 법질서를 세운다는 다의적 성격의 정치적 선언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연호란 중국에서 시작된 황제의 통치기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제후왕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결국 후백제 견훤왕은 후삼국 통일을 이루어 제후왕을 거느린 황제를 지향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후삼국시기 새로운 후삼국 통일에 대한 비전과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후백제 견훤왕이 사용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정개(正開)’로 대표됨을 알 수 있다. △후백제 견훤왕, 대왕(大王)을 천명하다. 견훤왕은 927년 신라를 공략해 경순왕을 옹립한 이후 신라를 이미 자신에게 포용된 제후국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이는 927년 경순왕 옹립시 자신을 신라 제후국 왕을 책봉한 ‘대왕(大王)’으로 위상을 격상시켜 명실상부한 후심국 통일대왕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측 사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929년) 5월 17일 신라 견훤의 사자인 장언징(張彥澄) 등 20인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 이에 앞서 1월 13일 탐라도(耽羅嶋)에서 해조(海藻)를 교역하는 신라선이 대마도 하현군(下縣郡)에 표착해 온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마도의 책임자인 판상경국(坂上經國)은 이 표류민들을 안존시키고 식량을 주었으며, 의통사(擬通事)인 장잠망통(長岑望通)과 검비위사(檢非違使)인 진자경(秦滋景) 등을 파견하여 표착민을 전주(全州)로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3월 25일 전주에 도착한 진자경만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주왕(全州王)인 견훤은 수십여 주(數十州)를 병탄하여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있다. 장잠망통(長岑望通)등이 전주에 이르렀을 때 견훤이 자리를 마련하여 기뻐하며 은근히 말하기를, ...." <부상략기> 24 제호 연장 7년 사료는 929년 1월13일 대마도에 표착한 탐라도(제주도) 표류민을 일본에서 의통사(擬通事) 장잠망통(長岑望通)과 검비위사(檢非違使) 진자경(秦滋景) 등을 파견해 3월 표착민을 전주로 돌려보낸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주왕(全州王)인 견훤은 수십여 주(數十州)를 병탄하여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즉 왕(王)에서 대왕(大王)으로 견훤왕의 호칭이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수십여 주를 병탄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국내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 같은 사실은 신라와 고려 왕실 입장에서는 치욕적 상황인 것이므로 관련 사료가 모두 누락되었다고 사료된다. 그런데 일본 기록에서는 이 같은 왕(王)에서 대왕(大王)으로의 호칭변화를 직접 후백제 왕도 전주를 방문한 일본인의 언급에서 확인하고 기록에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 대왕(大王)호의 사용은 이후 935년 정변을 일으켜 등극한 신검이 부친 견훤왕을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자신 또한 ‘대왕(大王)’을 자칭한 것에서 확인된다. 이같이 견훤은 신라의 통치체계 문란으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새로운 대안으로서 정통성에 입각한 백제부흥을 천명하고 정치적 목표로서 ‘정개(正開)’ 연호를 반포하고 대왕(大王) 칭호를 사용해 제후국 신라의 왕을 통솔하는 대왕(大王) 국가 체제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지역과 과거 연고성에 근거한 제한성과 신라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명시되어 표방된 점은 후삼국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한계를 함께 보여준 것이다. 결국 후백제의 역사성격은 현실 모순 타개를 위한 대안 제시와 함께 방법론적 한계를 내포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양대 학장 견훤대왕의 출생 신이성을 부각하다. 후백제왕 견훤의 신성화는 특히, 탄생관련 기록에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먼저 고려시대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전통적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처음 견훤이 태어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숲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에서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왕실과의 연결성을 통한 신라적 정통성과 마한-백제전통에 근거한 ‘용의 아들’ 인식을 부각하였다. ”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이 내용은 견훤이 마한과 백제의 용신(龍神) 설화를 연결해 강조한 ‘용의 아들’ 인식이 후백제 붕괴후 고려왕조에서 ‘지렁이’로 격하시켜 유지된 내용을 파악되는 설황이다. 여기서는 백제무왕이 용의 아들인란 인식을 견훤이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려시대 또 다른 역사서인 <제왕운기>에서는 ‘하늘의 새가 내려와 어린 견훤을 덮어 주었다’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신이성과 연결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와 연결된 시조 및 왕실의 신이성과 정통성을 종합한 존재로서 견훤을 부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법종 우석대학교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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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3 15:2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2)논산지역 견훤왕릉

호남·영남·충청을 아우르는 '후백제 왕도복원 프로젝트'. 올초 '역사문화권 정비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역사문화권이 새로 지정되면서 후백제 역사문화 관련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전주시‧문경시‧상주시‧논산시‧완주군‧진안군‧장수군 등 7개 시·군은 지난 2021년 11월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를 구성해 활동하면서 후백제 관련 유물유적을 보전하는 데 머리를 맞대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전주에서 전라·경상·충청권 7개 시·군의 단체장들이 모여 '후백제역사문화권 지정 기념식'을 개최하고 후백제 역사문화 복원을 위한 협력을 약속하기도 했다. 경북 문경 출신인 견훤왕은 전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충남 논산에 잠들었다. 문경시는 견훤 탄생 설화의 마을에 후백제 민속촌과 테마영상 전시관을 조성하고, 견훤과 관련된 유적지를 둘레길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논산시는 견훤왕릉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서 2000년 견훤왕릉보존위원회를 발족했으며, 해마다 왕릉제를 지내면서 견훤왕을 기리고 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완산이 그립다'고 했던 견훤왕의 마지막을 따라가보기 위해 후백제 왕도였던 전주에서 길을 나섰다. 선선해진 바람 끝으로 가을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견훤왕릉을 찾았다. 충남 논산군 연무읍 금곡리 산18-3번지. '견훤왕릉공원'이라고 표시된 넓은 공터에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오르면 왕릉이 있는 언덕으로 갈 수 있다. 널따란 터에 홀로 자리한 직경 10m, 높이 5m 규모의 봉분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두커니 홀로 있는 능 앞에 서서 바라보니 어쩐지 쓸쓸한 감상이 들면서도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마치 호위무사처럼 주변을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어 든든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후백제의 왕 견훤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뜻에서 '전견훤묘'라고도 불린다. 견훤은 900년에 완산(현재의 전주)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40년 가까이 후백제를 다스렸던 그는 936년 죽음을 앞두고 "완산이 그리우니 이곳에 무덤을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강너머로 모악산이 바라보이는 곳. 1970년 견씨 문중에서는 그를 기려 '후백제왕견훤릉'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견훤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 논산시 문화예술과 문화재팀 관계자는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왕위계승 문제 등으로 걱정이 심해 등창이 생기면서 황산에 있는 불사에서 죽었다고 돼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견훤의 묘가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다고 기록돼있다"며 "현재 개태사에 있는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던 터를 황산 불사의 터로 보거나, 왕건이 통일을 하면서 황산 불사 터에 개태사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개태사는 어떤 곳인가.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은 연산의 황산에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하면서 부처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절을 세웠다. 통일기념사찰이자 개국사찰으로서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 정기를 받아 '태평성대를 연다'는 뜻으로 창건했다. 현재 논산시에서는 개태사를 '논산 8경'의 하나로 지정했으며, 보물 제219호인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다. 1992년 완공한 극락대보전은 석존삼존여래입상을 보호하기 위한 불전이다. 대대로 백제인이 살아온 황산 땅에 왕실사찰을 지은 배경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 대화엄도량 개태사' 자료를 보면 "백제와 후백제의 자취가 완연한 황산의 이름은 천호산으로 바꾸고 그 산자락에 왕실에서 막대하 재원을 투입해 대규모 국찰을 지었다"며 "마치 고려의 힘과 국력을 자랑하는 듯 격전지에 왕실사찰을 지어 후백제의 그림자를 지우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보고 있다. 견훤이 황산 불사에서 종말을 고한 배경과도 연관이 있다는 설명이다. 완산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는 건국 36년 만에 황산에서 종말을 고했다. 왕건이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은 '황산'과 견훤이 임종을 맞이한 '황산 불사'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황산과 황산벌을 연산면 일원으로, 황산성을 연산면 관동리 산성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동사강목'의 기록 등으로 보면 개태사 이전에 사찰이 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견훤은 울분과 번민으로 종기가 난 지 며칠 만에 황산(지금의 연산 동쪽 5리에 있다)의 절에서 졸하니, 나이 70이었다. 견훤의 묘는 지금의 은진현 남쪽 12리 풍계촌에 있는데 세상에서 왕묘라고 한다." 견훤이 황산의 사찰에서 죽었으며, 후백제를 멸하고 삼한을 통일한 왕건이 그 마지막 전쟁터에 있던 옛절을 새롭게 크게 지어 승리를 기념했다는 것이다. 개태사는 936년 착공해 4년 만인 940년 완공했으니, 그야말로 고려왕실의 국력과 재정이 총동원된 왕실사찰이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의 지극한 불심과 의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왕건은 개태사 완공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친히 발원문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개태사 관계자는 "개태사는 통일 이후 최초로 지방에 세워졌고, 왕건이 직접 세운 왕실사찰로서 위상이 매우 높았다"며 "게다가 왕의 어진을 모신 진전사찰이기 때문에 보호와 안전, 방어 체제가 구축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개태사의 영역은 '개태사지'와 현재의 '개태사' 등 2곳으로 구분하고 있다. '개태사지'는 고려초 왕건이 세운 사찰의 중심지로 사찰의 본당과 진전이 있었던 곳이다. 완만한 구릉지에 사찰의 핵심기능을 하는 '중심사역'과 부속시설이 있는 '주변사역'으로 구분했다. 그중 동쪽에 자리한 중심사역에는 중문, 금당, 탑, 진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유구가 확인됐다. 국보 제213호 금동대탑, 부여박물관의 초대형 금고(쇠북), 충남무형문화재 제91호 비로자나석불도 이곳에서 출토됐다. 현재는 문화재구역 및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며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개태사지로부터 남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개태사'가 있다. 높이 4m를 웃도는 석조여래삼존입상 본존상, 둘레 910cm의 개태사 철확(쇠솥), 지름 102cm의 개태사 금고(쇠북) 등 문화재를 살펴보면 개태사의 방대한 규모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더욱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의 '개태사'와 당초 사찰의 중심지인 '개태사지'를 중심으로 지난 1986년 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6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전주를 바라보며 잠든 견훤왕 견훤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견훤왕릉'은 산 전체가 '왕묘'라고 불린다. 후백제를 일으킨 완산을 그리워한 그의 유언을 따라 묫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견훤왕릉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는 전주의 뒷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이곳은 1981년 충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다. 전주시는 후백제 문화 중심의 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 후백제 역사문화도시를 조성해나가고 있다. 국립 후백제 역사문화센터를 건립해 후백제 연구의 기반을 다지고 후백제 역사공원과 후백제 마을을 조성해 '후백제 왕도'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견고하게 세운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는 올해 '역사문화권 정비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역사문화권이 지정됐으며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개정된 덕분이다. 앞으로 전주가 고도로 지정되면 후백제 왕도라는 전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되찾는 기회가 보다 확장될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후백제사에 대해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고, 전주시도 이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특히, 전주시의 역점 사업인 '왕의궁원 프로젝트'의 항해를 시작하면서 후백제를 비롯한 역사문화유산이 커다란 돛이 돼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견훤왕이 남겨준 후백제의 역사문화유산. 이는 비단 전주시만의 일이 아니라 문경, 상주, 논산, 완주, 진안, 장수 등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에 몸담고 있는 다양한 지자체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 더이상 패배로 기록된 역사가 아니다. 원대한 기지로 후삼국시대를 이끌었던 견훤대왕의 원대한 꿈이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 전주
  • 김태경
  • 2023.09.19 17:5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1) 남원 일대 후백제 문화유산 가치

“전쟁은 누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남을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말이다. 과거 인간의 존엄마저 위협하는 전쟁 앞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이기는 쪽 편에 서야 했다. 그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백제와 통일신라가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국경 지역은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원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견훤은 통일신라 말 혼란기에 전주를 도읍으로 백제 계승을 기치로 후백제를 세웠다. 901년 후백제는 남원을 점령하면서 신라 세력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 혼란은 불가피했다. 천년사찰이자 호국사찰인 남원 실상사는 후백제 통치 시기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피할 길이 없었다. 당시 난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원 실상사에는 후백제 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가을을 재촉하는 9월에 불교미술에 관한 연구를 해온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전주에서 남원으로 발길을 옮겨 실상사로 향했다. 먼저 그와 함께 찾아간 곳은 실상사에 자리한 편운화상탑이다. 이른 아침에 방문한 실상사는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실상사 내에는 지난해 12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된 편운화상탑이 자리하고 있다. 편운화상탑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91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운화상탑은 네 개의 돌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82cm다. 탑 표면에는 ‘실상사 창건조인 홍척화상의 제자로 안봉사를 창건한 편운화상의 부도,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운다’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편운화상에 대한 공양과 추모의 의미가 반영된 조형물로 명문에는 후백제 연호인 정개가 새겨져 있다. 이로써 후백제의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 실장은 “편운화상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형태이다”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팔각형태와 달리 원형으로 조성돼 통상적인 승탑은 물론 다른 석조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901년 후백제의 대야성 침공 이후 신라 왕실과 후백제 사이에서 혼돈에 빠진 실상사 내 세력들은 대응 전략 가운데 하나로 편운화상탑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혼란스러웠던 시기 실상사 내에는 기존 친 신라 세력에 맞선 후백제 세력이 후백제의 지원을 희망하며 편운화상탑을 조성했고 명문에 후백제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905년 수철화상탑의 조성 때와 달리 5년 뒤 조성된 편운화상탑은 기교면에서 떨어진다고 학계는 판단한다. 이는 실상사 내 친 신라 세력이 수철화상탑을 조성할 당시에는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편운화상탑 조성 당시에는 실상사가 후백제 시기 정권과 결탁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후백제 정권에게 실상사는 이미 친 신라 세력으로 낙인찍혀 지리산 권역의 중심 사찰로 화엄사를 택했고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면 편운화상탑 조성 당시에는 후백제 정권의 변변한 후원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진 실장은 “편운화상탑은 후백제 정권이 실상사를 통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후백제 왕실의 지원이 필요했던 실상사 내 친 후백제 세력의 몸부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후삼국 시기 실상사에서 볼 수 있는 친 신라 세력과 친 후백제 세력 간 대립 구도에서 조성된 후백제 문화유산은 비단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운봉고원 전체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점이 바로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다. 지리산 정상 부근인 정령치 바래봉 부근에 조성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보니 총 12기의 불상을 이루고 있는데 3구는 비교적 잘 나타나있지만 나머지 9구는 마모가 심한 편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존상은 마애여래입상으로 높이가 4m 가량인데 전체 불상 중 중심 격으로 추정된다. 진 실장은 “대체적으로 마모가 심해보이지만 명문에는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월의 연호인 천보가 새겨져있다”고 설명했다. 명문에 쓰인 ‘천보 10년’을 토대로 하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조성 시기는 917년에서 923년 사이로 보여진다.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운봉고원의 친 후백제 세력이 920년을 전후해 조성한 것으로 학계는 판단한다. 진 실장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에는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월의 연호가 새겨져있다”며 “하지만 불상 양식의 왜곡과 형식의 변형을 봤을 때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과 마찬가지로 후백제 왕실이나 호족의 후원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완벽하지 않은 비례와 왜곡된 세부 표현 등을 감안하면 조형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단순히 모방했던 비숙련 장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진 실장은 판단했다. 이번 여정에 함께한 일행은 후삼국 시기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과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에서 현존하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단순히 남원 일대에 남아 있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후삼국이 힘을 겨루던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후백제 문화유산이 조성된 배경과 당시의 정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실상사 편운화상탑은 그 형태의 독창성으로 주목되나 그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하지만 후백제 연호가 새겨진 유일한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도 전북의 소중한 후백제 역사 자료로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향후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현재까지 남아 있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제대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이다.

  • 기획
  • 김영호
  • 2023.09.12 16:1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0)백제 계승의 상징, 후백제의 불상과 석탑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한 견훤은 900년 전주로 천도한다. 그에 앞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금마산에서 창건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내가 도읍을 전주에 정해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일갈한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완산주 민중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망국(亡國)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歸巢意識)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무진주에서 자립하였으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견훤은 비로소 완산주의 주민들에 의해 각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 계승을 공언한 것이다. 국호도 ‘백제’로 정한다. 그런 만큼, 백제를 연상시키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완주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존불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이다. 완주 봉림사지 보살상. △후백제 교통로에 만든 백제 계승 상징물,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 완주 봉림사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로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나말여초 즉 후백제 때부터 조선에 이르는 기와·청자·분청사기·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곳에는 삼존불, 오층석탑, 석등 등이 있었는데,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으로 옮겨졌고, 석조삼존불은 196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본존불과 좌·우협시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영향이 강하다. 안동지역 특정 불상의 형식도 보인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광배(光背)다. 광배는 9세기 통일신라 불상 광배와 같은 형태와 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백제 불상인 익산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 광배의 화불(化佛)과 유사한 고식(古式)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본존불 좌우에 있는 보살상도 9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같은 6세기 후반 보살상의 천의와 같은 X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이로써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에 백제 불상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봉림사지는 전주의 북동쪽인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서 대둔산 쪽으로 2.4km 정도에 떨어진 완주 지역경제순환센터(구 삼기초등학교) 뒤편 인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 앞으로는 전주에서 대둔산을 거쳐 금산으로 가는 국도가 있다. 이 길은 후백제 때에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 백제를 침공할 때 활용되었던 추풍령로(秋風嶺路)와 연결되어,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聞慶)까지 연결된다. 즉 왕도 전주에서 후백제의 주요 전장인 경북 북부지역으로 가는 북방로(北方路)의 중요 거점에 조성된 사찰이 바로 봉림사였다. 그곳에 백제 불상의 특정 요소를 연상시키는 삼존불은 900년 전주로 천도할 때 견훤이 밝힌 백제 계승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백제 계승 완수의 기념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900년 전주로 수도를 옮긴 견훤은 첫 번째 군사 행동으로 901년 대야성을 공격한다. 대야성은 7세기 전반 백제와 신라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군은 드디어 642년에 대야성을 함락한다. 그런데, 당시의 대야성 성주는 후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때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자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추진한다.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은 642년 사건에 대한 보복 전쟁 성격이 짙다. 백제사에서 642년의 대야성은 백제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대야성을 지목하고, 천도 직후 최초의 군사 행동으로 그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901년 공략은 물론 916년의 제2차 공격도 실패한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920년 견훤은 대야성을 함락한다. 비로소 이때 의자왕은 원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갈양사(葛陽寺)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따르면, 920년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직후 922년 후백제는 ‘미륵사 개탑’을 거행한다. ‘미륵사 개탑’과 같은 국가적 의식을 견훤이 백제의 개국지로 지목한 금마산에서 국가적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후백제가 백제의 계승을 완수했음을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920년 대야성 함락과 뒤이은 922년의 미륵사 개탑으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는 900년의 약속을 지킨 견훤은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의 부활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후백제 정권은 미륵사와 제석사 등 백제 때 만들어진 절들을 보수하는 한편, 백제의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탑, 즉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웠다. 왕궁리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얇고 넓으며 처마가 만나는 곳이 살짝 들려 있는 지붕돌은 영락없이 대표적인 백제 석탑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구성과 결구 수법이 9세기 후반 문경과 상주 일대 단층 기단 석탑과 같아 백제 때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9세기 말~10세기 초에 제작된 금동불이 기단에 봉안되었다는 점은 이 석탑이 후백제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백제는 백제 때의 석탑 기술을 복원하지는 못하였지만, 백제의 옛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특징들이 최대한 드러난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이제 백제가 부활했음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고려 석탑과 불상에 영향을 끼친 후백제 불교미술 936년 백제 계승자로서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던 후백제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흔히 ‘백제계’로 일컬어지는 백제 복고양식(復古樣式) 석탑은 물론 석불이 조성되었다. 백제 석불의 영향이 강한 고려 석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태안 마애불,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등 백제 때 불상을 연상시키는 남원 지당리 석불입상이다.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한 것들을 꼽자면, 익산과 가까운 군산 죽산리의 삼층석탑과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공주 계룡산 청량사지(靑凉寺址) 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러한 석탑은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부재(部材)의 수가 많고 탑신에 비해 낮은 단층 기단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귀기둥[隅柱]과 탱주(撑柱)에 목조건축물의 전형적인 형식인 ‘민흘림 수법’과 ‘안 쏠림 현상’이 적용된 점이나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4장 혹은 8장으로 구성된 점 또한 같다. 앞서 열거한 대표적인 백제 복고양식 석탑이 세워진 곳은 백제의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수도, 지방 거점도시, 지방사원이 있던 곳이다. 부여, 공주, 익산은 백제의 왕도였다. 은선리 삼층석탑은 백제의 중방(中方)이었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과 인접한 곳에 있다. 성북리 오층석탑 인근에서는 백제의 기와 가마터와 절터[개복사지(開福寺址)]가 확인된 바 있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끝낸 고려는 불교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런 만큼 많은 불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불사는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이 그 불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성향이나 역사적 경험과 인식이 석탑과 불상 등 불교미술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옛 백제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왜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석탑을 만들고 만들었을까.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예속된 백제의 옛터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백제를 연상시키는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차츰 백제에 대한 연고 의식이 사그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 계승을 내세우며 등장한 후백제는 그들에게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을 다시금 샘솟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후백제가 그러했듯 백제 석탑을 모델로 지극정성 탑을 쌓고 또 쌓았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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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5:26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9)후백제 견훤의 불교 사상-미륵신앙과 선종

견훤이 미륵신앙과 언제,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서남해 지역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자립을 선언한 것이 바로 농민 반란이 일어난 889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과 한 달만에 5천 여 명이라는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대부분이 농민이었음에 눈길이 간다. 견훤이 농민의 호응을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상적으로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견훤이 자립을 선언할 무렵 그곳에는 진표의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옛 백제 지역의 농민들은 진표의 미륵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고 백제 부흥운동을 외치며 일어난 견훤에게 크게 호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견훤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진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표의 미륵신앙의 특징은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곧바로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윤회전생하여 다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라도, 이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진표의 반신라적인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소망을 견훤이 나름대로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견훤은 미륵불이 하생하는 용화세계의 구현을 내세움으로써 반신라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던 서남부 지역의 농민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은 견훤은 서남해 지역에서 광주로 옮겼고, 광주 호족세력과 결합을 통해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그 결과 견훤은 호족세력과 연결된 농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고 진표의 미륵신앙의 근거지였던 금산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견훤이 금산사를 중창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후백제를 건국한 초기에 미륵신앙을 주된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후백제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고 생각된다. 견훤이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한 것은 900년의 일이었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도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김제의 금산사보다는 익산의 미륵사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가 익산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익산 지역의 미륵신앙은 무왕의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좀 더 설명하면 진표의 미륵신앙은 농민층이 주된 계층이었으나,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은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이후 그가 스스로 왕을 내세운 것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이 불만층의 농민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익산 미륵사에서 개탑 의식은 군주로서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견훤의 미륵신앙에 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미륵신앙을 익산의 미륵사를 통하여 새롭게 흡수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견훤은 국가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이후 미륵신앙만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불교계에서 유행하는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 아침에 선종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일찍부터 선종에 관하여 일정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견훤이 태어나기 전에 그곳에는 선종 승려인 혜소선사와 무염선사(800∼888)가 연이어 활동하였고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두 선승은 모두 당에 유학하였으며 신라 왕실로부터 상주에 머물면서 그곳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주문받았다. 이와 같이 견훤이 태어난 상주는 일찍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도헌선사(824∼882)가 개창한 희양산문도 견훤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가 상주를 떠나 중앙군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교종보다는 선종 불교와의 친연성이 더 하였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견훤이 광주 서남해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때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유명하던 선종산문은 체징에 의해 개창된 가지산문의 보림사, 혜철 선사에 의해 개창되었던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다. 비록 산문의 개산조는 이미 열반에 들고 없었지만 그들의 제자들이 왕실과 연결되어 산문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은 옥룡사의 도선국사(827∼898)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선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견훤은 그를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로 풍수지리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세우는데 사상적 이념으로 삼았다고 보아진다. 무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실상산문과도 연결하였다.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오월과의 수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실상산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이전 편운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즉위하자 태안사를 주도하던 윤다선사가 왕건에게 갔다. 그러자 견훤은 당에서 귀국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이 경보를 우대한 것은 성주산문과 굴산문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경보가 두 곳의 선종 산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온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은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선종 불교와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남원 실상사(사적 309호-홈페이지) 견훤과 경보 선사 통진대사 경보는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선승이다. 그는 속성이 김씨이고, 구림(현재 영암) 출신이다. 10세 무렵에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아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부인사(夫仁寺)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선종으로 눈을 돌려 백계산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찾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무렵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도선국사의 허락을 받아 여러 곳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성주산의 무염대사와 굴산문의 범일선사를 찾아 깨우침을 더하였다. 두 선지식을 방문한 것은 선종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 중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4세 무렵에 중국 유학을 떠나 무주(撫州)의 소산광인화상으로부터 조동종을 전수받았다. 광인화상은 그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불법을 구하는 자로서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동쪽에서 온 사람중에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자는 오직 그대 뿐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실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인화상을 떠나 강서의 노선화상을 배알하고 또 마음의 법을 전해받았다. 그리고서는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깨우친 바를 실행하다가 53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중국에 유학가서 머문 기간이 무려 3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신라 출신의 선승들이 당에 머문 기간과 비교해 보면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921년 전주 임피현으로 귀국하자 견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견훤이 마련한 남복선원을 물리치고 스승인 도선국사가 지냈던 광양의 옥룡사에서 머물렀다. 그는 견훤의 뜻을 이해하고 국사가 되었으며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서로 연결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936년에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으로 향했다. 그러므로 견훤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기간은 대략 15년 정도였다. 개경으로 간 대사는 왕건 및 그의 아들인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그리고 정종 2년(947)에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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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9 16:07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8) 한국 청자문화 발상지, 진안 도통리 유적

한반도에 언제 청자로 대표되는 도자기가 생산되었는가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초기청자의 등장은 가마의 등장 배경, 운영 주체, 제작 시기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가 분출하고 있으나, 현재에는 고려가 중국의 오월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10세기 중반경에 처음으로 청자를 제작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러한 견해는 1980년대 이후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청자가마들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더불어 북한지역 황해남도의 배천 원산리 청자 가마등의 조사 성과를 인용하여 고려의 청자가마들이 중국 오월과의 교류, 오월의 멸망으로 인한 월주요 장인들의 고려 이주를 통해 중국의 벽돌가마를 모방하여 벽돌가마를 조성하여 최초의 한국 초기청자 가마는 벽돌가마이며, 그 시기는 대략 950년경으로 설정하였으며, 지역적으로는 초기 청자가마인 벽돌가마가 경기도와 북한의 황해남도 지역에 분포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시하며 호남의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지역으로 하는 후백제가 우리나라 초기청자 가마의 운영 주체세력이었다는 새로운 견해가 최근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최근 조사가 진행된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초기청자 가마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해석하여 기존 학설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나온 결론이다. 후백제는 후삼국기 고려 보다도 훨씬 먼저 중국의 청자 주요 생산지인 월주요를 포함한 오월(吳越)과 서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 교류를 밀접하게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국가 수립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 및 장보고의 청해진 해체 이후 사라진 청자 수입과 공급이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00년 완산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 건국을 선포한 후 다시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후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오월과의 계속되는 교류는 백제-장보고로 연결된 국제 해양교류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오월은 월주요(越州窯)의 성장을 통해서 번영하였고, 중국 청자의 본향인 월주요 도자 특징은 중국식 해무리굽과 벽돌가마로 대변된다. 중국에서 청자기술이 도입된 후 초창기에 제작된 청자를 소위 ‘초기 청자’로 일컫는다. 초기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는 축요재(築窯材)에 따라 벽돌이 사용된 벽돌 가마와 진흙, 석재, 갑발 등으로 축조된 진흙가마로 나뉘는데, 중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벽돌 가마가 진흙가마보다 이른 시기에 운영되었다. 전라북도의 내륙 중에서도 가장 내륙이라 할 수 있는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초기 청자가마는 2013∼2022년에 걸쳐 총 6차례 조사 되었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터에서는 이른 시기의 선해무리굽 및 중국식해무리굽 청자완들과 함께 한국식해무리굽 청자완이 수습되었으며, 진흙가마 2기와 벽돌 가마가 1기가 완벽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2022년의 시굴조사에서도 민가 앞마당에서 벽돌가마의 일부가 확인되어 정밀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2017년에 완벽하게 전모를 드러낸 벽돌 가마는 길이가 43m로 확인되어 호남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가마로 확인되었다. 2016∼2017년에 걸쳐 확인된 벽돌 가마는 초기의 벽돌 가마에서 점진적으로 진흙가마로 변화되는 과정을 한 곳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가마로, 한국 초기 청자의 변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1, 2호 가마의 운영시기는 10세기 초 ·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다가 퇴화형해무리굽이 생산되는 11세기 중반에 폐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확인된 제3호 가마인 진흙가마는 확인된 길이가 13.4m로 이 가마에서는 한국식 및 퇴화형해무리굽의 청자들이 수습되어 가마의 운영시기는 대체로 11세기 중엽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로 보면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의 운영시기는 10세기 초·중반인 930∼50년경에서 약 11세기 중반 경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초기청자 가마인 벽돌가마는 현재까지 가마유구가 확인된 곳이 8개소에 이르는데, 진안 도통리 및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터를 제외하면 경기도에 시흥 방산동와 용인 서리 등 3곳과 북한지역인 황해남도의 배천 원산리 청자가마터 3곳 등 총 6곳이다. 기존에 조사된 6곳의 가마터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백자가마가 존재하거나 백자가마터가 확인되지 않았어도 가마의 퇴적층에서는 청자와 백자편들이 동시에 수습되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 벽돌가마 인근에는 도자기 가마와 구분되는 도기 가마가 별도로 운영된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6곳 중 배천 원산리, 시흥 방산동, 용인 서리 가마터에서는 초기 청자의 시대구분에 중요한 단서로 일부 도자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요도구인 점권들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에서는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청자가마에서 확인되는 백자가마터 및 백자편의 존재, 도기가마터와 점권이 확인된 사례가 아직까지는 없는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 중서부지방에서 확인된 벽돌가마군과 전북의 초기 청자가마터는 성격이 전혀 다른 집단에서 운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아직 제작 연대를 가름할 정확하고 명확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로 보면 도자사적 측면에서는 고려시대 초기에 운영되었던 한반도 중 · 서부지역의 가마들과 여러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어 고려와 다른 집단이 운영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치 및 군사적 · 경제적 상황 등으로 판단하면 후백제 견훤시대에 제작된 한반도의 초기 청자가마 중에서 가장 이른 가마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가마가 후백제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이들 가마는 중국 오월과의 교류관계 속에서 탄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상기(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후백제와 고창 반암리 청자 가마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에서는 청자요지군은 일부분만 조사되었지만, 2021년 조사된 구역에서는 벽돌가마 1기, 진흙가마 4기, 건물지 2기가 확인되었으며, 2022년 조사에서는 벽돌가마 1기, 진흙가마 5기, 건물지 2기가 확인되었다. 청자가마는 구릉의 사면부에, 건물지는 주로 평탄면에 입지하고 있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일부분만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현재까지의 조사성과로도 한국 도자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고창 반암리 유적에서는 벽돌 가마에서 진흙가마, 다시 진흙가마에서도 중층을 이루어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초기 청자가마의 밀집과 중첩양상은 다른 유적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반암리 청자요지에서 집중적으로 청자생산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따라서 반암리 청자요지는 초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우리나라 청자의 도입과 전개과정을 밝히는데 주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지금까지의 조사 성과와 후백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들 보다는 늦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기서 제작된 청자류들은 서해안과 금강수로등을 이용해서 충정도 등 내륙으로 운반되어 후백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까지의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들의 조성시기와 성격을 규명하여 보면, 벽돌 가마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인 벽돌편들의 상태를 보았을 때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의 벽돌 가마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가마 축조 형식도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가가마의 형태인 기반층을 사선으로 굴광한 다음 벽돌을 쌓아올려 축조한 형식이다.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 청자가마가 기존의 벽돌 가마의 내부 폭을 줄이는 방식으로 후대의 진흙가마를 운영한 반면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는 기존의 벽돌 가마 위에 진흙가마를 조성하여 운영하는 방식으로 추정되어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고창 반암리 청자가마는 진안 도통리 청자가마 보다는 늦은 시기에 운영되다가 고려에서 어느시기까지는 계속적으로 가마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후백제와 중국 오월의 교류관계, 그리고 진안 도통리 중평마을과 고창 반암리 청자 가마 유적의 성격을 볼 때 고창과 진안 지역의 벽돌가마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의 벽돌가마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 시차를 두고 운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중국 오월과 교류하여 청자 가마를 독자적으로 운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기(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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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3 09:23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7)전주성 유적을 톺아보다

'후백제의 왕도(王都)'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간직한 전주. 전주에는 성곽, 건축물, 생산지, 분묘, 생활 유물 등 다양한 유적이 산재해 있다. 초록빛 녹음이 우거진 8월 남고산성과 동고산성 등 후백제 고성벽지를 따라 걸었다. 이번 여정에는 전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재직 당시 『전주시 후백제 유적 정밀지표조사』에 참여한 강원종 서경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이 동행했다. △조선시대 피난성, 남고산성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일원에 자리한 사적 제294호 '남고산성'. 이 산성은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아서 '고덕산성'이라고도 부르며, 후백제 견훤이 도성인 전주를 지키기 위해 쌓아서 '견훤성'이라고도 부른다. 서암문 천경대와 서문 만경대를 포함한 역사길은 오늘날 전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코스가 됐다. 현재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이 보존돼 있는데, 남고사에 있는 남고진 사적비를 보면 당시 산성 내부의 건물 수와 규모가 나와 있다. 남고산성이 조선시대 피난성이라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산성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산성을 방어하기 위한 지휘소로 '남장대'와 '북장대'를 뒀다. 성벽 위의 담장인 '여장'과 적으로부터 은닉하기 위해 그 사이 사이에 만든 '총안'도 확인할 수 있다. 누각에 대포를 설치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포루'는 천경대(남포루), 만경대, 억경대(서포루)로 나눠진다. 이름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경관이 좋은 정도라는데, 이곳에 오르면 전주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성의 가장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는 '암문'을 두었다. 적들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이다. 아치형태인 남고산성 서암문의 높이는 발굴조사에 의해 높이 2.1m, 길이 4.7m인 것으로 밝혀졌다. 가파른 경사와 맞서 싸우듯 남고사를 향하는 길을 오르다 보면 남고산성의 서쪽 성문인 '서문지'를 마주하게 된다. 길이 6m, 폭 2.9m이며 석축으로 된 이 성벽 통로 위에는 문루가 설치돼 있다. 성벽 뒷편에는 남고사가 있고, 동편에는 창암 이삼만이 쓴 '남고진 사적비'가 남아있다. 강 연구위원은 "조선시대 추정 행궁터로 알려진 계곡 주위에는 평탄대지와 함께 초석이나 기단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와 기와편이 수습됐다"며 "계곡부에 물과 관련된 집수정 시설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고 설명했다. △천년고도 전주성, 동고산성 후백제 전주성 '동고산성'은 전라북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돼 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이 접한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이루고 있으며 <전주부사>에 '승암산성지'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는 주건물터를 비롯해 건물지 13개소가 남아있는데, 이 중 성황당 뒷편에 있는 주건물터에서 '전주성(全州城)'이라고 적힌 막새기와 등이 출토되면서 900년경 견훤왕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운 근거로 보고 있다. 지난 1980년 전영래 원광대 교수가 진행한 동고산성 개괄조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암막새(쌍봉황문, 쌍무사문) 등 유물에서 전주성명이 확인된다. 동고산성의 정문 역할은 동고산성 내부의 주건물지와 같은 중심선상에 있는 서문지가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돌출된 형태로 날개처럼 양쪽에 쌓아 가운데에 있는 성의 기능을 보조하는 '익성'이 있는 것도 동고산성의 특징이다. 북익성은 기린봉 가는 길에 있고, 남익성은 승암산 방향에, 동익성은 동남쪽에 지어졌다. 서문지는 남익성과 북익성 사이에 있다. 동고산성 남익성 동편 능선에는 7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의 둘레에는 차양칸이 둘러져 있는데 차양칸 초석이 한 칸씩 건너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남익성 동쪽으로 가다보면 치명자산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나오는데, 이곳을 남문지 위치로 추정하고 있다. 성벽 능선을 따라 계속 산을 올랐다. 작은 공터가 나와 한숨 돌려보니 승암산에서 바라본 시가지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반겨준다. 강 연구위원은 "동고산성 높은 곳에서는 남고산성 억경대, 기린봉, 오목대, 이목대, 용머리고개, 고추산 등 전주시내에 있는 후백제 관련 유적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며 "후백제 유적 중 가장 실체가 명백하게 밝혀진 동고산성은 왕성이자 후백제 유적으로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후백제 궁성과 도성벽을 따라서 강원종 연구위원은 후백제 궁성에 관한 설을 3가지로 요약했다. 지방행정의 요충지였다는 '전라감영설', 전주부사에 기록된 '물왕멀설', 이전에 궁성이 있었다는 '인봉리설' 등이다. 이 중 완산구 중노송동 일원은 현재 후백제 궁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인데, 현재는 대부분 도심화가 이뤄져 성벽의 흔적을 육안으로 찾아보긴 어렵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에 왕성을 두른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확인했으며,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뒷편의 토축을 궁성벽으로 제시했다. 인봉리 일원으로 추정되는 궁성지는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띠고 있으며 시굴조사 결과 이 일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 각종 유물이 나와 성벽으로 보고 있다. 특히, 기자촌 일원 대지면적 399㎡에 이르는 후백제 궁성 추정지에는 목책이나 망루 등과 같은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4개 구역에 도랑을 만들어 궁성 관련 유적을 조사한 결과 주공의 일부가 확인됐다. 완산구 교동 일원 오목대에서는 후백제 도성의 남쪽 성벽의 흔적을 확인했다.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인 오목대 일원에 자리한 도성벽지의 실체를 밝히려면 이 일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실시한 시굴조사에 의하면 이 일원에서 후백제시대의 토성벽이 확인된 바 있다. △우아동 사지와 무릉 고분군 무릉마을 남쪽 암석골 인근에 위치한 우아동 사지는 우물지와 석축의 흔적과 함께 다량의 기와편이 확인된 곳이다. 마을 뒷산과 앞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는데, 아중저수지 인근 산 정상부에서 인위적으로 조성돼 정연하게 배열된 숯 조각이 확인됐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로 후백제 분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정밀조사하고 있다. 현재 무릉을 2곳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덕진구 우아동에 왜망실 재전마을과 용계마을 사이에서는 와요지가 확인된다. 이곳에서 생산된 기와는 주로 관아에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도요지가 있다. 주변에서 확인된 숯과 가마벽체, 토기편 등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왕궁터는 어디에 후백제 왕궁터 위치를 비정하는 과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수년간 연구 끝에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 등으로 정리되고 있다. <전주부사>에 의하면 물왕멀은 전주시청 동쪽의 고산방면의 도로와 전주고등학교 사이의 언덕 일대를 가리킨다. 지금은 전주도시혁신센터의 동쪽지역부터 동초등학교 서쪽지역 일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가옥이 밀집해 있어 궁성이나 관련 시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전주의 주산을 기린봉으로 삼고 제일고등학교 부근을 혈처로 보아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설이다. 전라감영설은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실시한 전라감영지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 유구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배수시설, 담장 기초시설이 확인된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통일신라 때 지금처럼 이 일대에 전주천의 물줄기가 흐른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명문와도 출토돼 오랫동안 관청과 관련된 시설들이 자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명기와는 동고산성 출토품과도 유사한 형태를 띤다. 2013년 전주도성 정밀 지표조사 때 구전으로 후백제 왕궁 터로 정해지는 곳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인봉리설이 주목받았다. 2014년 이 일대에서 왕궁을 두른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됐다. 인봉리 일대 왕궁의 존재는 <전주부사>에서도 언급된다. 왕성의 북벽은 현재 중노송동 기자촌과 문화촌을 경계로 대부분 주택단지가 개발됐는데도 자연 지형이 그대로 살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항공사진에 의하면 왕성의 북벽으로 추정되는 산줄기 정상부가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것처럼 평탄한데, 지금도 그 뼈대가 그대로 남아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룬다.

  • 전주
  • 김태경
  • 2023.08.15 16:3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6)고고학으로 후백제 왕도를 복원하다

견훤은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건설하는데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부사』의 고성벽지(古城壁址)는 도심화로 인해 성벽의 흔적이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구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후백제 도성벽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후백제의 도성을 복원해 보변 반월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에 기린봉을 주산으로 하여 뻗어내린 산줄기 등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자연지형을 이용하였기에 부분적으로 삭토와 판축의 토성 축조법이 보이고 있다. △전주, 후백제 왕도(王都)였다 1980년 9월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개괄조사는 후백제 흔적 찾기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사를 담당한 고(故) 전영래 교수님은 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의 둘레와 형태, 내부 시설 등 조사내용을 보고하는 한편 동고산성은 견훤이 쌓은 후백제 산성임을 주장하였다. 동고산성 조사 이후 전주지역에서는 20여개소의 크고 작은 후백제 유적이 발굴조사 되었다. 또한 2017년과 2022년에는 전주지역 일원을 대상으로 한 정밀지표조사에 의해 성곽유적, 궁궐유적, 건축유적, 생산유적, 분묘유적 등 다양한 후백제 유적이 확인되었다. 후백제 도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1942년 전주부윤 구로키요스케〔黒木儀壽圭〕가 편찬한『전주부사(全州府史)』를 들 수 있다. 이 책의「전주부경역연혁도(全州府境域沿革圖)」에는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와 함께 고성벽지(古城壁址)가 표기되어 있다. 이 고성벽이 어느 시대에 축조된 성벽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전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성벽이 축조될 시기는 후백제의 도읍기 이외에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왕궁은 왕이 거주하면서 정사(政事)를 살폈던 권위와 권력의 중심지로서 기능적으로는 정사공간·생활공간·정원공간 등으로 구분되는데 왕궁의 위치는 당시 왕도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견훤은 AD 900년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하면서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문헌자료의 부족과 인식의 결여, 도심화로 인한 지형의 변화, 그리고 11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후백제 왕궁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견훤 왕궁의 위치 비정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대표적으로는 물왕멀, 동고산성, 전라감영, 인봉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후백제 도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는 인봉리 일대가 궁성벽의 흔적과 주공(柱孔) 및 해자(垓字)의 확인 등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후백제 왕궁 터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적잖은 근거를 갖게 되었다. △견훤왕, 왕궁을 어디에 두었을까 후백제 왕궁의 위치 비정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전주부사』이다. 1938년 6월 조선총독부 도서관장 오기와라 히데오가 사각형의 커다란 석재와 천석 1만 여개를 목격하였고 연화문 막새가 수습되며 임금이 성을 둘만 한 사신상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물왕멀 일대를 견훤왕궁지(甄萱王宮址)로 비정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33 전주부 고적 고토성조에는‘전주부성 북쪽 5리에 견훤이 쌓은 고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물왕멀이 견훤의 왕궁터라는 주장은 견훤이 축조한 고토성이 왕성 역할을 했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물왕멀 일대는『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고성벽을 후백제의 도성벽으로 보면 도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해그랑블아파트 건립 때 물왕멀 부근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왕궁과 관련된 어떠한 고고학 자료도 확인되지 않았다. 1990년과 1992년에 진행된 동고산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정면 22칸 측면 4칸의 대형 건물지 확인과 함께 건물지에서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동고산성이 견훤의 왕궁터로 주장되었다. 이후 2020년까지 8차례의 크고 작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3개의 문지와 13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에서는 관(官)·천(天)·왕(王)자 명문와와 선문·무문·격자문 등의 후백제 평기와가 출토되어 후백제 때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고산성은 승암산의 정상부에 입지하고 있으며 조사된 건물지에서 겨울 난방을 위한 구들시설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이 유지되었음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고산성은 후백제 산성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산성의 축조 목적은 피난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전라감영설은 2005년 전라북도청이 효자동의 신청사로 이전되면서 2007년과 2017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담장, 부석시설과 보도시설, 배수로,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쌍사자무늬 전(磚)을 비롯하여 동고산성 출토품과 유사한 관(官)자와 전○(全○)자명의 기와가 출토된 것 등을 근거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전라감영터의 맨 아래층에서 확인된 건물지의 규모와 축조 양상,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완산주(完山州)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은 추론이 가능하지만 후백제 왕궁으로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노송동 인봉리 일대가 후백제 왕궁터로 비정된 것은『전주부사』전주부경역연혁도의 후백제 도성벽으로 추정되는 고성벽 내에 자리하고 있고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인보성체수도회-전주삼마교회-우성해오름아파트-기린봉아파트입구-전주제일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사다리꼴 형태의 추정 궁성벽이 확인되며, 동쪽에 위치하여 서쪽을 향하는 좌동향서(坐東向西)의 위치와 방향은 미륵신앙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인봉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추진하였으며 이후 2017년 12월부터 2023년 5월까지 5차례 이루어졌다. 후백제 추정 궁성지의 북동벽에 해당되는 삼마교회 인근 부분에서는 토성의 축조에서 보이는 풍화암반토의 삭토와 함께 판축으로 쌓아올린 흔적이 확인되는 한편 크고 작은 주공(柱孔)이 열을 이루고 있는 상태로 드러나서 목책이나 망루와 같은 성벽시설의 존재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남쪽주차장 부지는 추정 궁성지의 남벽과 서벽이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는 풍화암반토를 다듬고 점토로 성토한 인위적인 흔적과 함께 궁성의 서벽 추정지 외곽에서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해자가 조사되었다. 해자의 바닥에는 모래와 점토, 잔자갈을 섞어 다진 점토 다짐층이 확인되며 회청색경질토기편, 후백제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왕궁의 후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정원석이 어렵지 않게 목격되고 뻘흙과 함께 가공 석렬이 노출되고 있으며, 다량의 후백제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후백제 고도(古都) 복원 프로젝트 남고산성 내의 남고진터로 알려져 있는 계곡 주위에는 평탄대지와 석축과 우물 등이 남아있다. 평탄대지에서는 초석과 기단석 등의 석재와 궁(宮), 관(官)자가 새겨진 후백제 기와가 수습되고 있어 후백제 행궁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추정 행궁지의 남쪽에는 반월형의 갈대숲이 자리하는데 행궁과 관련된 연못의 가능성이 높다. 동고산성은 동문지·서문지·북문지와 함께 성 내부에서 13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유구와 출토된 다양한 후백제 기와 등을 통해 볼 때 가장 확실한 후백제 산성으로 여겨진다. 기린봉의 동쪽인 아중 저수지 주변에서는 왕릉급의 무덤과 돌을 사용한 무덤들이 확인된다. 무릉마을 내 아중산장 뒷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무릉고분은 외관상 산의 형태인데 마을 주민에 의하면 고분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민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팠을 때 다량의 숯이 깔려있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 숯은 고분의 축조와 관련된 것으로도 추정되며, 봉분의 규모로 본다면 왕릉급에 해당한다. 견훤은 국찰(國刹)을 어디에 조성하였을까? 도성에서 멀지않은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린봉의 동쪽 기슭인 무릉마을 남쪽의 암석골 안쪽에는 비교적 넓고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 곳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최근까지는 민가가 있었다. 주변에서 소량의 와편들이 수습되는데 바로 이 사찰 터가 후백제의 원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도성의 필수 요소로는 산성, 왕궁, 외곽성, 왕릉, 불교사찰 등을 든다. 익산은 왕궁〔왕궁리유적〕, 사찰〔미륵사지〕, 분묘〔무왕릉〕유적 등이 조사되어 백제 고도(古都)에 포함되었다. 이제 전주도 도성, 왕궁, 무덤, 사찰 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한 고도(古都)에 포함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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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9 09:16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⑮ 후백제 장수(長水)의 높은 위상

자유에 대한 강한 열망의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사람은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나라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남긴 건물과 유물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전북 동부지역은 후백제의 국력이 화수분처럼 솟아났던 거점이었다고 학계는 내다보고 있다. 동부지역에서도 장수군은 침령산성, 합미산성과 같은 후삼국시대의 맹주였던 후백제 랜드마크가 잘 남아있는 지역으로 여겨진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폭염 속에서 우리 일행은 전상학 전주문화유산연구원 부장과 함께 전주에서 전북 동부의 중심지에 위치한 장수군으로 길을 나섰다. 전북에서 가장 작은 자치단체인 장수군은 무진장(무주군, 진안군, 장수군)으로 불리는 곳 중 하나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에 속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 지역에는 1500여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백두대간 육십령휴게소(장수군 장계면 육십령로 1012)에 위치한 팔각정으로 올라가니 험준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흐리지 않은 탓에 침령산성(장수군 계남면 침곡리 산 73-2)과 합미산성(장수군 장수읍 용계리 산 26-1)이 자리한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후백제 산성들은 대개 규모를 확장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는 리모델링에 초점을 뒀다고 알려졌다.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 산성들이 집중 배치된 모습을 직접 확인하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백두대간에 자리한 후백제 산성들은 아직도 그 위용을 간직한 채 동부지역 방어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핵심 철산지인 대적골 제철유적(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342)을 보호하고자 했던 의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장수군은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알려져 있는 철을 생산했던 제철유적의 보고이다. 최근 장수군 일원에서 대략 50여개소의 제철유적이 조사됐는데 그 밀집도와 분포범위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후백제는 이처럼 중요한 장수군 일원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대규모의 산성 개축을 단행하고 병력을 주둔시켰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최근 발굴조사가 이뤄진 합미산성과 침령산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장수 합미산성은 후백제 산성의 최고봉으로 통한다. 팔공산(해발 1147m)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 능선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전 부장은 “산성의 남쪽에는 후백제의 교통로에서 임실군 오수면, 성수면에 이르는데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전주도성에 곧장 닿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방문에서 합미산성은 적에 대한 감시,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팔공산에서 정상부와 남쪽의 계곡을 감싸는 형태의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었다. 후백제의 국력을 담은 장수 침령산성은 후백제 도성이었던 전주에서 영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장수군의 동쪽을 에워 쌓고 있는 백두대간 못지않게 산세가 험준하고 전주도성의 동쪽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침령산성은 둘레 500m 내외로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돼 있는 고대 산성 중 최대 규모다. 전 부장은 “성벽의 일부 구간이 붕괴됐지만 성벽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며 높이 7m 내외의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성벽의 축조기법을 잘 살펴볼 수가 있다”고 밝혔다. 우리 일행은 다음 장소인 삼봉리 가야고분군과 동촌리 고분군, 삼고리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가야사가 후백제사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야와 후백제의 역학관계를 알 수 있으리라.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백화산(해발 850m) 자락에 자리한 가야 수장층의 묘역으로 직경 20∼30m 내외의 대형고분 20여기가 분포돼 있다. 두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내부에서 다양한 가야토기를 비롯해 철제마구, 꺾쇠, 교구 등 피장자의 위상이 매우 높았었음을 짐작케 하는 최상급 가야유물이 출토됐다. 전 부장은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던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이 타 지역의 가야 소국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일제 때 유물을 도굴한 바람에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특히 이번에 방문한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이번 여름 집중 호우로 고분 일부가 훼손된 모습을 볼 수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동촌리 고분군은 장수군 장수읍 마봉산(해발 723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83개의 무덤으로 이 고분군은 5세기 초~6세기 초 무렵 가야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수장층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재갈을 비롯 마구류와 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은 동촌리 고분군은 전북지역 가야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동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편자, 재갈, 둥근 고리 자루칼, 은제 귀걸이, 휴대용 화살통 등 가야계 수장층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종류와 유사한 양상에 따라 장수지역 가야계 수장층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장수군 천천면에 위치한 삼고리 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20여기의 가야 중대형 고총과 주변 기슭에 가야계 석곽묘가 분포하고 있다. 고분 내부에서는 가야 토기와 백제, 신라, 마한 등 토기가 함께 출토됐다. 2018년 장수군과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긴급 발굴로 토기류 외에 금제 귀걸이와 채색 유리구슬, 마구류 등 피장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위세품이 출토된 곳임을 확인했다. 일행은 다음으로 장수군 장계면 탑동마을에서 후백제와 관련해 개안사지 사찰 터와 유물을 살펴봤다. 2020년 조선문화유산연구원은 탑동마을 내 개안사지의 위치, 범위, 성격 등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사찰 터, 석등지, 탑지 등을 확인했다. ​전 부장은 “탑동마을 사찰 터는 건물지 형태나 출토유물에 미뤄 후백제와 관련이 크다”고 말했다. 사찰 터에서는 귀면 문양을 입체감이 적고 평면으로 단순화한 귀면 기와가 출토됐다. 이는 남원 실상사에서 나온 귀면 기와와 비슷해 후백제와 관련성이 제기된다. 이번 방문을 통해 후백제 시대 장수의 높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사찰 규모임을 알 수가 있었다. 전 부장은 “개안사지를 통해 가야 이후 후백제 양식의 사찰이 있었고 지금은 3층 석탑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며 “탑 재료를 복원한다고 추정해보면 후백제 양식이 맞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장수지역을 돌아본 일행은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웅을 겨뤘던 중심 세력인 가야를 확인해보고 후백제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문화재를 국가유산이란 용어로 바꿔나가는 등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 전 부장은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제부터라도 전북에서 후백제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문화권 정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발걸음을 빠르게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8.02 00:17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⑭전북 동부, 후백제 거점이었다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전북을 동쪽의 산악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로 갈라놓아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룬다. 전북 동부는 무진장, 임순남 등 낙후지역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금광·은광·동광·철광이 공존하는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의 보고이다. 오늘날 포항제철과 그 의미가 똑같은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과 국내 유일의 제동유적도 전북 동부에 자리한다.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에서 후백제와의 연관성이 검증되어, 전북 동부는 후삼국의 맹주 후백⑭제 국력의 화수분이자 거점이었다. △전북 동부 후백제 철산지였다 인간의 지혜와 자연의 철광석이 하나로 합쳐져 다시 탄생된 것이 제철유적이다. 최고의 생산유적으로 평가받는 제철유적은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인 숯, 첨단기술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전북 동부는 철분의 함유량이 월등히 높은 화강 편마암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으며, 기원전 2세기 말 장수 남양리에서 첨단기술의 전래도 입증되었다. 가야사 국정과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북 동부에서 한 개소의 제철유적도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반파가야 봉화의 완전성을 위해 제철유적을 찾는 지표조사가 기획되었다. 지금도 전북 동부 제철유적 및 봉화를 찾는 추가 지표조사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전북 동부 문화요소의 유전자는 철(鐵)이다. 우리나라 단일 지역 내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운봉고원은 기원전 84년 지리산 달궁계곡을 피난지로 삼은 마한 왕이 첨단과학의 전달자이다. 기문가야가 동북아를 아우르는 위세품을 거의 다 모은 국제성도 철의 힘이다. 남원 아막성 집수시설에서 나온 용광로 벽체와 슬래그도 신라의 철산개발을 실증한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에 기반을 둔 반파가야는 봉화 왕국이다. 1500년 전 전북 동부에 봉화망을 구축하려면 국력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국력의 원천은 철이다. 반파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최고의 철제품인 말발굽이 나와 철의 생산과 유통을 유물로 입증하였다. 게다가 반파가야 영역에서 발견된 250여 개소의 제철유적도 그 개연성을 더 높였다. 장수 삼고리 고분군은 반파가야의 요람이다. 반파가야 백성들이 잠든 사후 안식처로 한강 이남의 최상급 마한계와 백제, 가야, 신라토기를 한 자리에서 실견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 물물교환의 증거물로 철산지만의 정형성이자 자랑거리이다. 우리나라에서 도굴의 피해가 가장 심한 반파가야 고총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제철유적의 발굴조사가 기획되었다.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제철유적은 철의 제련부터 가공, 정련까지 이루어진 종합제철소이다. 이곳에서는 철광석을 캐던 반달모양의 채석장, 철광석을 녹이던 제련단지, 철제품을 만들던 가공단지, 숯을 굽던 숯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후백제 문화층에서 붉게 그을린 기와편과 청동제 소형 동종이 출토되어, 전북 동부 제철유적이 후백제에 의해 운영되었음을 실증해 주었다. △후백제, 전북 동부에 국력을 쏟았다 후백제 축성술의 비밀이 드러났다. 고구려 백암성을 쏙 빼닮았는데, 그 전수자는 고구려 유민들이 금마저에 세운 보덕국이다. 후백제 축성술은 줄을 띄운 줄 쌓기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들여쌓기, 한자 품(品)자형 쌓기로 상징된다. 성돌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고 그 길이가 상당히 길어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을 닮아 견치석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 산성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을 지킨 산성들로 후백제는 산성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 후백제의 동쪽 방어체계 구축과 함께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 등 전북 동부 철산지를 방비하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 투영되어 있다.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어 전주까지 이어진 옛길이 통과하던 방아다리재 남쪽에 장수 침령산성이 있다. 반파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쌓은 테뫼식 산성을 신라가 4배 이상의 포곡식 산성으로 확장하였다. 후백제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거나 남쪽에 치를 두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집수시설에서 수백 점 이상의 후백제 유물이 쏟아져 후백제 박물관을 연출하였다. 금남호남정맥을 넘어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던 자고개 북쪽에 장수 합미산성이 있다. 후백제 축성술의 랜드마크로 반파가야와 백제, 후백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가 산성의 터를 닦고 후백제가 확장한 테뫼식 산성으로 90% 이상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장수군이 후백제의 동쪽 거점으로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와 후백제 중국 청자의 본향이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이다. 후백제 견훤왕은 오월을 세운 전류와 왕 대 왕으로 양국의 국제외교를 거의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후백제가 오월에 말을 보내자 오월은 반상서를 대표로 사절단을 후백제에 파견하였다. 양국의 국제외교 결실로 오월의 도공과 중국식 벽돌가마를 만드는 전축공이 후백제에 파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후백제 도읍 전주에서 가까운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가 조사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오월 월주요 상림호처럼 아주 정교하게 벽석을 쌓았다. 그러나 시흥 방산동 벽돌가마는 아주 거칠고 조잡하게 쌓아 오월, 후백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검출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일관되게 후백제를 가리켰다.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가 처참하게 파괴된 뒤 전혀 검증되지 않은 길이 43m의 진흙가마를 다시 앉혀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길다.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는 그 운영주체가 후백제로 판단된다. 전주 동고산성과 인봉리, 장수 침령산성 등 후백제 산성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똑같은 초기청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진안 도통리는 후백제 최첨단국가산업단지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 동부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철기문화 못지않게 도자문화도 후백제가 후삼국 맹주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안 도통리, 고창 반암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차(茶) 문화를 중시하던 선종(禪宗)의 후백제 지지를 이끌어낸 촉매제였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후백제, 전북 동철서염 완성하다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소금과 철의 공헌도가 탁월하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전북가야를 거쳐 후백제까지 전북은 소금과 대규모 철산지였다. 새만금 등 전북 서해안에서 200여 개소의 패총과 전북 동부에서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이를 실증한다. 이제까지 전북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에 근거를 두고 전북의 역사를 ‘동철서염(東鐵西鹽)’으로 표방하려고 한다. 기원전 202년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마지막 왕 준왕의 남래 때 철기문화가 바닷길로 곧장 만경강유역에 전래된 것 같다.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요람으로 한강 이남에서 청동문화가 가장 융성하고 철기문화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마한의 핵심세력은 해양세력으로 전북 서해안에서 토판천일염으로 소금이 생산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북혁신도시를 테크노밸리로 일군 선진세력이 철광석을 찾아 전북 동부로 대거 이동한다.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와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마한세력의 이동이 포착되었다. 전북 동부에 정착한 마한세력은 가야문화를 받아들여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기문가야와 반파가야로 상징되는 전북가야는 120여 개소의 가야 봉화를 전북 동부에 남겼다.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가야 봉화는 전북가야의 본바탕이자 아이콘이다. 전북가야는 동북아를 아우르는 최고급 위세품과 최상급 토기류를 거의 다 모아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알렸다. 통일신라 때 남원경 설치의 역사적 배경도 전북 동부 철산개발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철불의 효시로 평가받는 운봉고원 내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도 전북 동부 철기문화의 정수이자 최고의 걸작품이다. 후백제는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전북 동부의 철기문화와 서부의 해양문화를 하나로 응축시켜 전북의 ‘동철서염’을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하였다. 요즘 전북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후백제 문화유산은 그야말로 풍성하고 월등하기 때문에 후백제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요청된다. 후백제사가 복원될 때까지 후삼국의 맹주 후백제를 꼭 기억하였으면 한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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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25 15:04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⑬후백제 초기 유적지 순천·여수·광양 일대

동아시아의 해상왕 장보고가 암살 당한 후 서남해안은 해적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이미 국운이 기울어진 신라 조정은 이를 통제할만한 힘이 없었다. 이때 신라군에 입대한 견훤왕은 서남해를 방수(防守)할 임무를 띠고 이곳에 파견되었다. “장성하면서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고, 뜻과 기상이 빼어나서 평범하지 않았다. 군대를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다. 서남해로 부임하여 수자리를 지켰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가 항상 사졸의 으뜸이 되도록 일하였기에 비장(裨將)이 되었다.”<삼국사기> 권 50. 견훤전 견훤왕은 수도인 경주에서 강주(康州 진주)를 거쳐 순천지역에 부임했다. 경상남도 서부지역인 강주를 거쳐오는 동안 따르는 무리가 대규모로 불어나면서 처음으로 신라에 반심(叛心)을 품고 신국가 건설의 꿈을 키웠다. 이때가 889년으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세력을 키운 후 892년 무진주(武珍州 광주)로 옮겨 나라를 세우게 된다. 서남해안지역, 즉 순천과 여수 광양 등 전남 동부는 견훤왕이 후백제 건설의 초기 토대를 쌓은 곳이다. 이곳 일대를 취재하기 위해 일행은 전주를 출발해 순천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쏟아붓던 장대비도 차츰 약해지더니 순천에 도착하니 딱 그쳐주었다. 일행으로 갔던 송화섭 교수(전 중앙대)가 “그것 봐라. 내말이 맞지 않느냐”고 어깨를 으쓱한다. 출발 전, 비를 걱정하자 “내가 가면 비가 그친다”고 장담했던 터여서 한바탕 웃었다. 일행은 순천대박물관에서 최인선 교수를 만나 동행키로 했다. 최 교수는 대학박물관을 만들고 관장으로 7년간 재직한 바 있다. 이때부터 전남 동부 일대의 유적 발굴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먼저 일행은 박물관에 들러 설명을 들었다. 고고역사실에는 전남 동부지역의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과 유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물론 이 중에 눈길이 간 것은 백제와 후백제 관련 유물이었다. 최 교수는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득량만과 순천만, 광양만 등을 가리키며 이 일대의 중심은 순천이었다고 강조했다. 최근 ‘여수 밤바다’ 등 관광지로 뜨고 있는 여수는 조선 500년 동안 잠깐을 제외하고 폐현(廢縣)이 돼 순천 관할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천의 별호는 승평(昇平) 사평(沙平) 평양(平陽) 강남(江南) 승주(昇州) 등 11개에 이른다고 귀뜸했다. 이어 검단산성,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 옥룡사지, 금둔사지 등과 이와 관련된 고분, 부도, 기와 출토 유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전시물 중 보물로 지정된 금둔사지 석불비상과 석탑은 후백제 시기인 907년에 조성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형 부도라고 해서 기억에 남았다. 일행은 박물관을 나와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 순으로 답사코스를 잡았다. 이들 산성은 견훤왕이 서남해안 방수군으로 왔을 때 주둔했을 가능성이 높아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시간이 나면 여수 진례산까지 가기로 했으나 불발로 그쳐 아쉬웠다. 우선 찾은 곳은 해룡산성(海龍山城). 해룡산성은 명칭에서부터 바다냄새가 묻어났다. 순천시 홍내동, 홍두·내동·통천마을 일대에 위치한 이 산성은 국가정원 1호로 지정된 순천만의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반달(半月) 모양의 토성으로 해발 76m의 높지 않은 지형이다. 후백제 당시 승평항으로 비정되는 내동마을 등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일제때 간척 이전까지 주변이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둘레가 2085m에 이르는 꽤 큰 규모의 성으로, 백제 후기에 초축되었으며 후백제때 리모델링 되었다. 고려시대까지 방어 시설 기능과 읍치(邑治)의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룡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 이 지역 대호족 박영규(朴英規)다. “박영규는 강남군(江南君)의 후손이다. 견훤의 사위였고 이 땅의 군장(軍長)이었다.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고(옛날에는 사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강남악부> 박영규 가문은 일찍부터 순천만 일대에서 해상활동을 하는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다. 견훤왕이 이 일대에서 세력이 커지자 혼인관계 등을 통해 최측근이 되었다. 나중에 장인인 견훤왕이 고려에 귀부(歸附)하자 그를 따라 귀부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중앙에서의 성공은 당대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947-975)이 왕권강화 정책으로 그의 외손 두명을 죽인 것으로 보아 그렇다. 그럼에도 순천에 남아있던 순천박씨 일족은 조선시대까지 지역 유력자로서 번성을 구가했다. 해룡산성은 2002년 순천대박물관이 지표 및 시굴조사를 한 게 전부라고 한다. 대부분 경작지와 민묘로 뒤덮여 있고 여름철이라 그런지 수풀이 무성해 성벽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상이나 중요성에 비해 대접이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발굴 등을 통해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고 순천만 국가정원과 연계해 역사공원화하는 게 시급해 보였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마로산성. 이 성은 광양시 광양읍 해발 208m의 마로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섬진강 하구와 광양만 등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탁월한 입지다. 둘레는 550m에 불과하지만 순천대박물관이 2001∼2006년 5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해 기와와 토기 등 많은 유물을 수습했다. 성곽 일부를 복원해 놓았는데 치(稚)가 눈길을 끈다. 치는 성곽에 바짝 붙어 접근하는 적을 정면 뿐 아니라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보다 바깥쪽으로 돌출하여 쌓은 시설로, 후백제 때 처음 도입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또한 산성은 무엇보다 물 확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집수정을 설치하는데 규모가 꽤 큰 방형(方形)과 원형(圓形) 6개를 볼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와 물이 차 있었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또 특이한 것은 흙으로 만든 말 인형인 토제마 300여 점이 출토된 점이다. 바다로 나가기 전 제사의례를 행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머리나 꼬리를 잘라 주변에 뿌린 것이라고 한다. 마로산성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다시 순천 봉화산성으로 향했다. 이곳은 순천시민들이 산책코스로 애용하는 곳 중 하나다.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상당히 멀어 땀을 흠뻑 쏟았다. 봉화산성은 후백제 시대 성황당이 있어 성황당산으로 불렸다. 경호실장 격인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견훤왕을 섬겼던 김총(金摠)의 사당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들어 봉화대를 조성하면서 이름이 봉화산으로 바뀌었다. 봉화산성에 대해서는 문헌상 기록이 없으나 2018년 순천대박물관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해 명문기와 등을 수습했다. 그러면 견훤왕은 무진주에 입성하기 전 889∼892 3년 동안 어디에 주둔해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이도학 교수는 “순천만을 끼고 있는 해룡산성은 광양만 등지의 마로산성이나 검단산성을 관하 진성(鎭城)으로 예하에 두었던 것”이라며 “견훤왕이 무진주에 도읍하면서 자신의 근거지였던 해룡산성 일대를 박영규 가문에게 맡긴 것”으로 추정한다. 강봉룡 교수는 김총을 광양만을 배경으로 한 해양세력으로 본다. 이에 비해 최인선 교수는 해룡산성, 마로산성, 봉화산성을 모두 견훤왕의 근무 후보지로 꼽는다. 좀더 연구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순천의 3성황신 성황(城隍)신앙은 고려 초기 중국에서 도입되었다. 이전부터 내려오던 산천(山川)신앙과 함께 성황신앙은 국가적인 위기나 재난을 극복하는데 음조(陰助)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 오악(五嶽)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고 산천신과 성황신에게 봉작을 내릴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고려 중기부터는 지방세력에 의한 신사(神祠) 건립이 이루어졌다(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이경엽 교수). 곳곳에서 이들을 모신 신사가 건립되는데 순천의 경우 3개가 집중돼 관심을 끈다. 모두 역사적 인물을 신격화해 모셨다는 점도 특징이다. 순천 해룡산사 박영규, 여수 진례산 성황사 김총, 순천 인제산사 박난봉이 그들이다. 박영규는 견훤왕의 사위로 순천박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김총은 견훤왕의 인가별감으로 순천김씨의 시조다. 또 박난봉은 고려 중기 인물로 박영규의 후손이다. 이중 김총의 성황사는 당초 순천 봉화산에 있다 조선시대 여수 상암동 진례산으로 옮겼다. 해룡산사는 18세기 중엽, 성황사는 19세기 중엽까지 유지되었다. 성황신 김총의 영정은 지금도 전해진다. 인제산사는 조선 초기에 없어졌다 17세기 말 재건되었으나 곧바로 폐쇄되었다. 이들 성황신은 지역에 세거해온 후손들에 의해 고을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지역민을 결집하고 지방사회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제의가 수행된 것이다.

  • 기획
  • 조상진
  • 2023.07.18 15:49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⑫후백제의 발원지, 순천만 유물 유적

견훤은 장성하자 군대를 따라서 왕경(경주)에 들어갔다가 889년(진성여왕 3) 서남해안을 지키는 방수군이 됐다가 공을 세워 비장(裨將)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군사를 일으켜 무주(武州, 현 광주광역시)를 습격하여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견훤이 무주를 점령하자 그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서남해안·무주의 동남쪽 즉 전남 동부지역은 견훤의 근무지였을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견훤의 적극적인 후원세력이 되었다. 후백제 초창기 견훤과 관계를 맺은 호족세력은 무주성주 지훤(池萱), 승주장군 박영규(朴英規), 인가별감 김총(金摠) 등이었다. △견훤의 사위이자 순천의 호족인 박영규 <승평지> 인물 박영규조에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다. 훤의 아들 신검이 훤을 금산사에 가두자 곧 훤이 금성의 태조에게 도망가니 태조가 온 것을 위로하고 상부(尙父)로 존경하였다. 영규가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말하기를 “만약 의기(義旗)를 들면 청컨대 내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고 그 사자를 후히 대접하고 돌려 보냈다. 신검을 죽이자 좌승(左承)의 직을 내렸다.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라 하였다. 후백제와 고려초기의 인물인 박영규는 순천지역의 호족이었으며, 고려 태조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이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는 점은 박영규를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의 생활 공간이 바로 순천 해룡산 일대였음을 의미한다. 후기의 기록이지만 1784년에 조현범이 지은 <강남악부> 인제산조에 ‘박영규는 해룡산 아래 홍안동(옛 성터가 있다)에 웅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순천 호족 박영규의 거점성 - 해룡산성 해룡산(해발 76.1m)은 순천시 홍내동 뒷산으로 현재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낮은 야산이며 바다와 접해 있었다. 이 산의 남쪽에 전체 길이 약 2000m 정도의 대규모 토성이 있다. 해룡산성의 시굴조사 결과 일부 구간은 판축기법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성토법으로 축성되었고, 초축 이후 증축이 이루어진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판축기법으로 축성된 토성 구간은 외측을 증축하고 하단을 4단 정도 쌓은 석열이 노출되었으며, 석열 밖으로 약 55cm 정도의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와적층과 성토법으로 축성된 구간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격자문・선문・무문・수지문・복합문 등으로 같은 형식이었다. 따라서 이 토성은 처음 백제에 의해 좁게 축성되어 사용되다가 후백제시기 박영규 집단에 의해 대규모로 증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좌관초(左官草)'‧'우관초(右官草)'‧'관조(官造)' 등의 명문와이다. 이 기와들은 후백제시대 지방관아에 군사조직과 비슷한 좌관, 우관과 같은 행정관서의 존재를 암시하는 유물로 그 의미가 크다. △여수 성황신으로 추앙받은 김총 장군 김총은 견훤을 섬겨 관직이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으며, 죽어서는 순천도호부의 성황신이 되었다. 혹은 김별가(金別駕)는 영웅적 인물이었으며 살아서 평양(平陽, 즉 순천)의 군장(君長)은 하지 못하였지만, 죽어서는 곧 성황신이 되었다는 짧은 문헌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인가별감이란 직책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관직으로서 견훤의 호위를 담당하는 등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로 짐작된다. 성황신을 모신 성황사란 사당은 여수 진례산(進禮山, 현 영취산) 아래에 있었으며, 진례산과 그 주변에 장군동굴, 성주골(城主谷), 군장 마을, 제당산(祭堂山)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김총은 진례산 곧 여수 출신임이 분명하다. 순천부 관아에서 유생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여수 성황사는 1802년 무렵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 순천 봉화산 중턱으로 옮겨 김총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성황사가 훼철되자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방축 마을)에 있던 동원재(同源齋)의 평양군영당(平陽君影堂)으로 그의 영정이 옮겨졌다. 김총은 사후에 ‘평양군(平陽君)’으로 추봉되었다고 하며, 평양(平陽)은 순천의 고려시대 별호였으므로 ‘평양군’은 곧 ‘순천군(順天君)’을 의미하고 김총 장군을 가리킨다. 김총의 본향은 순천으로 순천김씨의 시조이다. 여수현이 조선 초기에 폐현되어 순천도호부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김총의 본향이 여수가 아니라 순천이 되었다. △후백제시대의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된 광양 마로산성(馬老山城) 마로산성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용강리·죽림리 등 3개 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후기에 초축되어 마로현(광양시의 백제시대 관호)의 치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전남지역의 다른 백제산성과 달리 후백제시대까지 계속해서 운영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성벽, 문지, 건물지, 우물지, 집수정, 수혈유구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후대의 유구가 많아 후백제시기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唐)나라에서 제작된 해수포도문방경(海獸葡萄文方鏡)과 중국제 청자와 백자 등은 활발한 대외교역의 산물이다. 939년에 세워진 경기도 양평 보리사(菩提寺)의 대경대사비문에 의하면 대경대사 여엄(麗嚴)은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운거 도응(道膺)에게서 전법하고 909년 7월에 무주의 승평항으로 입국하였다. 9세기 중엽 완도의 청해진이 혁파된 후 다양한 국제항이 서남해안에 운영되었는데 승주항도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를 통해 대외교류가 이루어졌고 그 산물이 바로 중국제 동경과 자기가 입증하고 있다. 마로산성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기와이다. 특히 수막새는 30여 종이 넘는데, 그 문양이 특이하여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방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징적인 수막새의 문양은 능형문(菱形紋), 원문(圓文), 운문(雲文), 파문연화문(巴文蓮花文), 파문당초문, 다양한 연화문 등으로 통일신리시대의 연화문 막새와 크게 구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대변하고 있다. 마로산성은 백제 후기에 초축된 이후 8세기에서 10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줄무늬병, 덧줄무늬병, 편병, 사각병, 철제초두, 철제자물쇠, 중국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AD.750, AD.930년의 절대연대 측정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마로현에서 희양현(曦陽縣)으로 개명된 광양은 승평군(통일신리시대의 순천)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승평군 호족 즉 박영규 집단의 관할 아래에 있었을 것이며, 경주와 다른 문화를 창출하여 이 지역의 호족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호족시대의 대표적인 산성 – 순천 봉화산성.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세력들을 소위 ‘호족(豪族)’이란 용어로 한국사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 전 시기와 아주 다른 형식의 성곽들이 축성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산성이 순천 봉화산성이다. 순천시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봉화산(해발 355.9m)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봉화산성은 순천만과 광양만이 잘 조망되고 있는 곳에 있다. 산성의 규모는 길이 1250m, 형식은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협축식 산성으로 내·외벽의 너비는 710~730cm로 넓은 편이다. 섬진강유역의 백제산성처럼 테뫼식형식으로 협축식에 의한 축성기법을 보인 점은 같지만 산성의 규모가 크고, 내·외벽의 너비가 넓은 점이 다르다. 이 시기에 축성된 산성은 백제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증축한 산성, 완전히 새로 축성한 산성 등 3가지 유형이 있다. 백제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한 산성은 광양 마로산성, 장수 합미산성 등과 같이 성곽의 둘레가 500m 내외로 작은 규모이다. 증축한 전주 동고산성과 새로 축성한 순천 봉화산성 등은 그 둘레가 1km를 넘는 대형이다. 이러한 대형 성곽은 성 내부에 대형 건물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 체성 축조기법의 특징은 장대석을 이용한 지대석의 등장, 체성의 들여쌓기 방법, 잘 다듬은 성돌로 ‘품(品)’자형 쌓기 등을 들 수 있다. 봉화산성의 내부 대형건물지에서 ‘회창오년(會昌五年)’, ‘을축오월(乙丑五月)’, ‘사평관(沙平官)’, ‘丁亥年(정해년)’명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회창 5년은 서기 845(신라 문성왕 9)년으로 을축년이다. 연호와 간지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형 건물지는 845년에 건립되었던 것이며, 축성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해’명은 박영규가 견훤정권에서 크게 활약하던 시기였던 927년(丁亥年)에 개와를 했고, ‘사평관’(사평은 순천의 백제시대 관호)은 이 산성이 당시 치소성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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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1 15:31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⑪후백제 해양문화의 거점, 고부(古阜)

서기 900년,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도성이었던 전주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 바로 고부였다. 지금이야 정읍시 북서부에 있는 작은 면단위 행정구역에 불과하지만, 그 역사를 되돌아보면 가히 호남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고부면은 동진강과 고부천을 끼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넓은 충적지와 나지막한 구릉지가 조화롭게 형성되어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해, 호남의 3호(湖) 중 으뜸으로 알려진 벽골제와 눌제를 기반으로 한 방대한 농업생산력은 고대사회의 정치·문화·행정의 거점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며, 동진강 하구·줄포만의 통해 서해안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은 고부지역이 해양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고부, 호남평야의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성장 그간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보면, 고부지역을 비롯한 동진강 유역에는 다수의 선사~고대 문화유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초기국가가 성장하기 시작하는 원삼국시대에 동진강 유역에는 적어도 4개 이상의 마한 소국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고부면 일대에는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알려진 분구묘의 밀집도가 매우 높다. 특히 천태산 자락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지류의 정상부에 위치한 운학리 분구묘는 원형의 대형 분구를 갖춘 석실무덤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백제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강력한 토착집단이 존재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고부천 유역에 위치한 백산성(국가 사적)에서 마한의 대규모 취락유적이 발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백산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백산기포(白山起泡)의 무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본래 학계에는 백제의 토성으로 보고되어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2~4세기경에 조성된 마한의 집 자리 17기를 비롯하여 집 자리를 둘러싼 환호(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그 주위에 두른 도랑)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광활한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마한 사람들의 사회상을 복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대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해양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했던 동진강 유역의 문화양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급부상 마한의 전통을 이어받은 백제는 5세기 중반부터 고부를 비롯한 동진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한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마한의 지배자 무덤인 분구묘는 점차 사라지고, 영원면 은선리 일대에 백제의 중앙묘제로 알려진 횡혈식 석실분이 급증한다. 현재까지 육안으로 확인된 고분의 수량만 120여 기에 이른다. 천태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은선리 고분군에서는 정연하게 가공된 대형 석재를 가구식으로 짜 맞춘 이른바 ‘능산리형 석실분’은 상당수 확인된다. ‘능산리형 석실분’은 백제 사비기 왕릉군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무덤의 축조기법 및 재료, 구조 등이 유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무덤은 부여나 익산 등 백제의 고도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으로, 피장자의 신분이 매우 높았음을 증명해주는 고고학 자료이다. 2014년 은선리 고분군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영원면 갈선마을에서 2점의 그릇받침을 서로 맞닿게 가로로 눕힌 특이한 형태의 백제 독무덤이 발굴되었다. 독무덤으로 사용된 그릇받침은 외면에 고사리모양의 장식대가 부착되어 있고, 하트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이와 유사한 그릇받침은 지금까지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신리 유적 등 백제 고도에서 확인된 바 있다. 백제 중앙묘제의 확산과 위세품의 존재는 백제 웅진기 이후 고부를 비롯한 동진강 유역이 백제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백제~후백제 역사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사부리성 538년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긴 백제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수도 사비를 제외한 영토를 중방, 북방, 남방, 동방, 서방 등 5개의 구역으로 나눈 5方 체제를 실시한다. 5방 중 동방과 서방, 남방의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방(정읍 고부 일대), 북방(충남 공주)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거의 없다. 백제 중방의 방성으로 지목되고 있는 곳이 바로 고부면 소재지의 배후에 있는 고사부리성(국가 사적)이다. 고사부리성은 성황산의 두 봉우리를 한 바퀴 두른 석성이다. 2006년 이후,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사비기~후백제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통해 동진강 유역의 역사성과 문화양상을 복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백제의 대표적인 성문 형식으로 알려진 어긋문이 확인되었고, 수원확보를 위한 대규모 집수시설도 조사되었다. 고사부리성의 성벽은 옥수수 알갱이 모양으로 정연하게 다듬어진 화강암을 사용하여 틈새가 거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축조되었다. 이 성벽을 백제의 초축 성벽으로 보기도 하지만, 후백제에 의해 개축된 성벽으로 보는 견해 역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고사부리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상부상항(上部上巷)’명 인장와와 백제 기마무사의 모습이 새겨진 평기와이다. 이 유물들은 고사부리성이 백제 중방의 방성으로 비정되고,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신라 왕경의 6부 중‘본피부(本彼部)’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本彼官’명 기와와 초기청자 등도 주목된다. 특히 초기청자의 경우, 후백제 때 해양문화의 거점으로서 고부지역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로 인식되고 있다. 발굴조사 당시만 하더라도 고사부리성에서 출토된 초기청자는 통일신라시대 중국 월주요에서 수입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최근 후백제의 도성이었던 전주의 동쪽에 인접된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했던 벽돌 가마가 발견되면서, 초기청자의 생산과 유통이 후백제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후삼국 중 후백제는 청자의 본향으로 알려진 중국의 오월(吳越)과 가장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국가대 국가의 정식 외교기록만 5차례에 이른다. 그 횟수만 보면 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후백제의 존속기간이 40년에 불과하고, 같은 기간 고려 또는 신라와 오월국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오월과의 국제교류는 후백제가 주도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국제교류를 통해 오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익산 왕궁리, 미륵사지, 장수 합미·침령산성, 광양 마로산성, 전주 동고산성 등 호남지역에서 초기청자가 확인되고 있는 유적들 모두 후백제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은 곳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증명한다. 고사부리성이 있는 정읍시 고부면 일원은 지정학적으로 후백제의 도성인 전주에서 동진강, 줄포만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기 위한 해상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며, 후삼국시대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려의 왕건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나주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고부지역에 대한 견훤의 관심이 지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고부가 백제 중방의 치소이자,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였다는 역사성은 백제 계승의지를 천명한 견훤이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후백제 외교의 관문이자 해양문화의 거점으로 고부지역이 선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부면의 서쪽에 남-북으로 흐르는 고부천은 동진강의 최대 지류로서 예전에는 조수가 드나들 정도로 큰 하천이었다. 현재 고부의 북쪽에 인접해 있는 영원면 앵성리 수성마을은 본래‘수성지(水城址)’로 알려져 있는데, 백제 때 고부천변에 형성되어 있던 큰 포구를 지키던 성터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고부군, 산천조에는‘大浦在郡 四十里 訥堤川下流 潮水往來’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백제의 유산을 이어받은 후백제의 거점 포구 역시 이곳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루 빨리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후백제 해양문화 양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조명일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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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4 15:30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⑩ 고창·정읍 유적과 부안 포구

역사란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가. 인류 최고의 철학자 중 한사람인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과거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희극과 비극이 반복되는 영욕의 순간들이었다. 찬란한 건국의 시기와 멸망을 비껴가지 못했던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후백제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크고 작은 영광과 부침의 세월을 겪어야만 했다. 일행은 과거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에서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를 만나 고창으로 이동했다. 그 이유는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인 후백제가 자리했던 전북에서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는 고려시대 이전에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귀중한 보고이자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4월부터 2022년 9월까지 조사기관인 (재)조선문화유산원구원이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산4-1번지 일대에 위치한 반암리 청자요지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우리나라 초기청자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임이 밝혀졌다. 고창 반암리 청자요지는 계명산(해발 191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말단부에 입지한다. 학계는 우리나라에서 황갈색을 띠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청자를 초기청자라 부른다. 천하제일의 상감청자로 유명한 부안청자보다 200여 년이 앞선다. 진안 도통리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최상급으로 진안청자라 이름 지었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오월이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오월과 가장 돈독한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이다. 고창 반암리에서도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가 쏟아져 후백제와 초기청자의 연관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고려는 오월과 국제외교가 거의 확인되지 않지만 후백제는 40년 이상 오월과 혈맹적인 국제외교를 펼쳤다고 전해진다. 송 전 교수는 “학계에서 후백제와 오월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문화가 후백제로 곧장 전래된 것은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창 반암리 초기청자 가마유적지에서 서쪽으로 220m 지점에는 용산천이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주진천으로 합류해 서해안으로 빠져나간다. 유적과 용산천 사이는 충적지가 형성됐고 현재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다. 송 전 교수는 “청자 연구에서 후백제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의 초대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며 “국보급 도공들은 비록 떠난 지 오래지만 앞으로 국보급 사적으로서 전북에서 검증된 고고학 자료로 후백제 초기청자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행은 고창을 지나 정읍으로 향했다. 정읍은 아직도 백제의 양식이 돋보이는 석탑과 고분이 남아 있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일으켰다면 전라도에서는 견훤이 민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는 선언도 전라도 지역 백제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백제 역사의식을 계승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읍 은선리 삼층 석탑(보물 제167호)은 백제시대 탑의 양식을 모방해 만든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지붕들은 평면으로 처리해 간결하고 소박하다. 2층 몸돌의 남쪽 면에 문 두 짝을 단 방 모양이 있는데 문짝을 하나만 새기는 다른 탑과 비교하면 특이하다. 2011년에 탑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시대 기와가 많이 나왔는데 이것으로 볼 때 이곳에 백제 때부터 사찰과 관련된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읍 천곡사지(泉谷寺址) 칠층석탑(보물 제309호)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이다. 1층은 네 개, 2층과 3층은 두 개, 4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다. 정읍에 있는 유일한 칠층석탑이다. 이 탑 옆에는 오층석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무렵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칠층석탑은 남승의 탑이고 일본인들이 가져간 탑은 여승의 탑이라고 한다. 발길을 돌리면서 바라본 칠층석탑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채 신비롭고도 고요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인 조재곤(78) 씨는 말없이 칠층석탑을 바라보더니 “종종 산책을 나와 보는데 석탑의 웅장한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정읍 은선리와 도계리 고분군(古墳群)은 지표조사 결과 백제 고분 275기가 확인됐는데 전북지역에 위치한 백제 고분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지역에 굴식돌방무덤이 밀집돼 있어 백제 지방 통치의 영역 확장 양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은 백제의 사비 시기 고분이 대다수이지만 일부 웅진 시기 고분도 확인된다. 송 전 교수는 “웅진 시기에서 사비 시기로 이어지는 백제 굴식돌방무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일행은 정읍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찾았다. 고사부리성은 후백제 산성으로 현재는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송 전 교수는 “통일신라가 고사부리성에서 물러난 후 후백제의 견훤이 고사부리성을 접수한다”고 말했다. 당시 영주성(瀛州城)이라고도 불린 고사부리성은 백제시대 지방 통치의 중심인 오방성(五方城) 중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으로 사용된 이후 1765년(영조 41년)까지 읍성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정읍시 고부면 성황산(133m)에 위치해있다. 성황산 정상부와 서쪽 봉우리를 기점으로 둘레는 1055m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5차례 발굴 조사했다. 조사결과 고사부리성은 백제 때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내부시설 중 대표적인 것은 장방형 집수시설이다. 집수시설은 백제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통일신라시대 확장 개축된 것으로 파악됐다. 성벽의 축조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석재가 사용됐다. 백제 중방성으로 알려진 고사부리성에서 후백제에 의해 개축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확인됐다. 견훤왕은 고사부리성을 리모델링했던 것이다. 고사부리성이 위치한 정읍 고부 일원은 지정학적으로 후백제 도성인 전주에서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대 중국 교류의 관문에 해당한다. 견훤왕은 고부를 후백제의 제2도시로 육성할 구상이었다. 후삼국시대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고려 왕건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주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사부리성의 중턱에 올라 낮아 하늬바람을 맞으니 어느새 더웠던 날씨로 땀방울이 맺혔던 이마도 금세 시원해짐을 느꼈다. 일행은 고사부리성을 떠나 고부 눌제(訥堤)로 향해 그곳에서 곽형주 향토사학자를 만났다. 당시 견훤왕은 국가 경쟁력과 농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실제 견훤왕은 고부 눌제를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정읍 눌제와 함께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를 ‘3제’라 불렀을 만큼 당시 눌제는 큰 규모를 자랑했다. 눌제는 제방을 축조해 농경을 이루고 도로 역할도 해 부안 줄포면 방면으로 나룻배를 이용하도록 했다. 축조연대는 영주지(瀛州誌)에 후백제 견훤왕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주(瀛州)는 지금의 고부라고 한다. ​눌제를 지나 일행은 또 하나 주목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후백제의 군사적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교통로를 살펴보고자 부안으로 이동했다. 고부의 정방향에 ​검모포(黔毛浦)가 위치하는데 검모포는 부안의 포구 이름이다. 현재 보안면 구진마을에 위치해 있는 검모포에 대해 송 전 교수는 “현재 구진마을에는 해양 방어 체제인 토성과 군함을 만들었다는 조선소 흔적이 있다”며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200여평의 석축과 석축을 지지하는 200여개의 나무기둥이 조선소 자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의 구진마을을 가보면 도로도 닦여있고 소문난 빵집도 생겨 정돈된 분위기다. 하지만 옛 자취가 사라졌다고 송 전 교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신형주 시인의 시 ‘별’을 보면 “가슴에 별을 간직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옛것을 간직해야만 지역 소멸 위기인 어두운 터널에서도 후대는 결코 길을 잃지 않으리니. 후백제의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짧지 않은 여정에서 일행은 한때 반짝였던 후백제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6.20 17:3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⑨후백제와 오월국의 외교와 교류

후백제는 선후로 오월, 일본, 후당, 거란 등 정권들과 대외관계를 추진했었으나 오월과의 외교관계가 제일 성공적이었다. 오월국(吳越,907-978)은 당나라 말기 중국 강남지역에 세워진 지방정권이다. 건국의 시조는 전류(錢鏐)이다. 지배영역은 와신상담, 토사구팽, 오월동주 등 익숙한 역사전고(歷史典故)들이 발생했던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의 옛 강역을 아울렀기에 국호가 오월이다. 오늘날 익히 알려진 상해, 항주, 소주, 영파 등 중국 유명도시들을 아우르는 오월지역은 우월한 지리환경과 기후 조건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해상무역이 발달한 대외교류의 주요 창구였으며, 당 후기에는 중원과 비견되는 중국의 또 다른 경제문화 중심지로 부상된 곳이다. △오월과의 해상통로 장악 한반도와 오월지역의 해상항로는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개성-군산도-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사단항로를 연상한다. 그러나 최초 양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항로는 백제 남해안-소흑산도-명주을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해상항로는 7세기 중엽에 개척되었으나 9세기경 당-신라-일본 간 민간무역이 흥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여수반도와 광양만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로산성 유적지에서 9세기 중후기 월주청자, 해수문포도방경 등 당나라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여수반도 남쪽 앞바다 연도에는 아직도 당으로 가는 포구라는 당포(唐浦) 지명이 남아있다. 당포의 위치는 여수, 순천지역 해상세력들이 오월로 떠날 때 방양(放洋: 항해에 적합한 바람을 기다려 먼 바다로 출발을 의미함)하던 곳일 것이다. 이 유적과 유물은 순천 박영규과 여수 김총 등이 대오월 해상무역에 참여했음을 의미하며 이들을 통해 남해안 해상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견훤은 서남해 지역 방수군 비장으로 활동하면서 이 해상세력들을 흡수하고, 해상통제권도 장악하였다. 900년 후백제 도읍이 전주로 정해지면서 정치의 중심이 서해안으로 이동하였고, 해상항로도 전주-서해안-흑산도-명주를 연결하는 해상항로로 바뀌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의 해상항로는 변형된 연장형(延長型) 해상항로다. △오월과 외교관계 결성 <삼국사기>열전에는 900년 견훤이 오월에 사신를 파견하여 후백제와 오월 간 외교관계가 시작된다. 오월이 견훤에게 검교태보를 더하고 기타는 예전과 같다는 관직을 내려 양국 간 교류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비문에는 건녕 3년(896)에 입절사(入浙使) 최예희가 명주(영파)로 넘어갔다고 하였는데, 이는 견훤이 파견한 것이다. 이 해는 전류가 893년 진해(鎭海)절도사 이어 진동(鎭東)절도사에도 임명되어 오월(절강)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 지위에 오른 해이기에 입절사는 견훤이 전류에게 보낸 축하사신이었을 것이다. 견훤과 전류 두 군주는 이미 건국 전에 서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국 후 양국은 서로 정치적으로 지원하면서 돈독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918년 오월과 양오(楊吳) 간 전쟁을 앞두고 한창 전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견훤은 전류에게 특별히 말(馬)을 보내어 성원의 뜻을 표시했다. 이에 927년 견훤과 왕건이 전쟁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전류는 후백제에 반상서 사신을 파견하고 견훤을 통해 왕건에게 조서를 전달하여 전쟁을 중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933년에도 견훤이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후백제는 존속기간 내내 오월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불교문화교류 양국 간 우호관계는 경제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 중후기 남종선이 중국 남방, 특히 오월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흥성하자,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새로운 선종사상을 배우고 귀국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쳤다. 선종 9산문 중 반수 이상 후백제 영역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양 지역 간 불교문화교류는 사단항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에서 30년간 수행한 경보스님은 921년에 오월 지역을 떠나 전주 임피현 신창진 포구로 귀국한 후 견훤의 요청으로 전주 남쪽 남복선원에 주석하였다. 또한 당에서 25년간 수행한 긍양스님은 924년에 줄포만 희안현 제안포로 입국한 후 강주 백암사에 머물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후백제시기 불상 양식에서도 양국간 해상교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군산 불주사 금동불입상, 김제 옥산리 금동불입상,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입상의 원형 좌대 형태, 세장한 비례, 편불화 현상 등은 하나같이 오월국 수도 항주 영은사 경당 오존불, 소주 호구탑 금동좌불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불교문화의 유사성은 오월지역의 불상양식이 후백제 불상양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청자생산기술 도입 자기(瓷器)는 흙의 선택에서 유약, 온도, 소요(燒窯) 축조, 장식기법 등 다양한 고급기술이 집약하여 만들어지는 고부가치 생활용품이자 공예품이다. 고대 중국 대외무역에서 천년이 넘도록 줄곧 효자상품을 담당했던 3대 수출상품(비단, 차, 자기)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다문화(禪茶文化)로 사찰의 승려들이 다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점차 왕실, 귀족층으로 확산되었다. 다기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산화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중국 오월지역의 월주요 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한 사람이 견훤이다. 그동안 월주요 청자는 중국청자로서 고려청자의 기원으로 알려졌을 뿐 언제 누가 월주요를 한반도에 처음 도입하였는지 학계에 의견이 분분할 뿐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힘입어 한국의 초기청자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북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단되는 오월지역 월주요과 같은 40미터 내외의 대형 전축요(塼築窯)가 발굴되었다. 이 전축요는 오월에서 청자기술자가 후백제에 들어와 직접 축조한 것으로 판명하고 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와 초기청자는 10세기 도요지로 판명되었고, 따라서 후백제 견훤이 오월국과의 대외교류를 통하여 월주요 청자기술을 도입하여 현지생산을 주도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고창 아산 반암리에서도 33미터에 달하는 대형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진안 도통리 전축요는 전주 수도권에 청자를 공급하는 요지라면, 아산 반암리 유적은 해로수송이 용이한 지역 임을 감안하면 초기청자를 후백제 전역에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는 듯하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초기청자, 견성(甄城) 그리고 견훤 <고려사> 지리지에 전주는 견성(甄城)이라는 별칭이 등장한다. 견성은 견훤과 같은 견자를 사용하여 후백제시기에 생겨난 별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견성은 ‘견훤의 도읍’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왔다. 군주의 성씨를 도시 이름을 따서 명명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견훤은 원래 이씨(李氏)였다가 견씨(甄氏)로 고쳤다. 아버지 아자개가 농부로 살다가 光啓(885-887)연간에 장군으로 자칭했을 당시 이씨 성을 가졌을 것인데, 언제 왜 아버지의 성씨를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18년 후백제 왕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최대 적수인 왕건에게 귀강(歸降)하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견씨 성을 택한 것일까? 옥편에 견(甄)자는 질구릇 구울 견,성씨 진이라고 나온다. 부수에서 기와 瓦자 사용은 도기생산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중국의 여러 성씨를 고증한 송의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1161)에 의하면 견씨는 순(舜)임금의 후손이었다. 일찍 순임금 시절에 한 곳에서 질 좋은 도기를 생산 유통시켜 지역경제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읍(城邑)이 형성되었고, 도기를 생산 판매하는 도시라는 뜻에서 견성(甄城)으로 명명하였다(지금의 산동성 하택시 견성현이다). 순임금 자녀 중 도기를 생산 관리하는 견관(甄官)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견을 성씨로 삼았다. <계륵편鷄肋篇>(송)에 의하면 견자에 ‘진’이라는 새로운 발음이 생긴 이유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무열왕 손견(孫堅)과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피휘(避諱:국왕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때문이었다. 최근 진안 도통리에서 10세기 초로 판정되는 오월지역 월주요의 전축요가 발굴되었다. 도통리 초기청자 유적은 견훤이 오월과 교류에서 제일 먼저 월주청자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청자 국산화를 시작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당시 청자는 고급기술이 복합화된 고부가 상품이기에 수도 전주가 청자의 생산과 유통 총책을 맡는 중심도시 역할을 담당하면서 견성의 별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자기(瓷器)가 조선 전기까지 전주특산물이었다는 사실은 후백제 청자생산의 연장선으로 이해된다. 예컨데 견(甄)자는 순임금의 고귀한 혈통과 최첨단 기술력이 함축한 글자로서 견훤의 개성(改姓) 취지와 한반도에 최초로 청자생산을 현지화하고 유통시킨 자부심을 잘 반영시킨 글자라고 하겠다. /백승호(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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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3 15:14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⑧덕진포 해전과 나주, 광주 생용동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이에 대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H. 카는 “역사는 불가피하게 일종의 성공담이라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후삼국 역사 역시 철저한 승자의 성공담이다. 특히 견훤왕과 왕건이 서남해안 장악을 위해 영산강을 둘러싸고 벌이는 전투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여실히 웅변해 준다. 가는 곳마다 승자인 왕건을 칭송하는 지명으로 도배돼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몽탄강, 파군교, 주룡나루, 용봉마을, 왕자봉 등등. 무진주(광주)에서 900년 전주로 옮겨, 도읍을 정한 견훤왕은 국가체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영산강 유역과 서남해안 공략에 나선다. 이곳은 뱃길로 중국·일본 등과 바로 통하는 대외교류의 창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심도시 나주는 인근 물산이 모이는 경제적 요충지였다. 영산강 일대 제해권을 둘러싼 물고 물리는 공방전은 909년부터 914년까지 6년에 걸쳐 8차례 벌어진다. 당시 영산강 일대는 1981년 영산강하구둑을 막기 전까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왔다. 내해(內海) 또는 만(灣)을 이룬 것이다. 일행은 광주 한국학호남학진흥원에서 박해현 교수(초당대)를 만나 나주로 향했다. 나주에서는 박경중 전 나주문화원장(77)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원장은 자신이 자란 용봉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들은 용봉마을이 견훤왕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마지막 격돌했던 장소라고 소개했다. 이 마을은 지금 광주시 광산구 용봉동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나주군 관할이었다. 견훤왕은 광주 쪽에서 내려오고 왕건은 나주 쪽에서 올라와 승촌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용봉마을 앞 왕자봉에는 왕건의 군대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보이는 견훤봉에는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 원장은 “그 앞 들판을 견훤뜰로 불렀는데 싸움이 치열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積屍如山), 핏물이 한 달을 흘렀다”고 들려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912∼913년쯤일 것”이라고 거든다. 여기서 용봉마을의 용은 왕건을 가리킨다. 일행은 용봉마을 얘기를 뒤로하고 덕진포해전이 벌어졌던 영암군 덕진면으로 향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은 후백제의 뒷마당에 해당한다. 후백제 입장에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목 뒤에 비수를 든 적을 두고 있는 셈이다. 덕진포 해전은 909년 1차, 912년 2차에 걸쳐 일어났으며 1차 해전은 견훤왕과 왕건이, 2차 해전은 견훤왕과 궁예왕이 붙은 싸움이다. 1차 덕진포 해전을 위해 견훤왕은 직접 선단(船團)을 이끌고 서해를 거쳐 영산강 내해로 진입했고 무주 성주 지훤은 육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수륙병진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견훤왕은 서남해 부속도서를 먼저 점령한 후 영산강 하구를 거쳐 내해로 진입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궁예왕은 바다를 잘 아는 왕건을 나주지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왕건 가문은 송악과 그 일대 서해안의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다. 왕건은 서해를 따라 내려오다 염해현(鹽海縣 지금의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부근)에서 진용을 정비했다. 이곳에서 후백제군과 교전을 하지 않고 염탐활동을 하다 견훤왕이 중국 오월국으로 보내는 국서를 휴대한 선박을 붙잡아 마진으로 돌아갔다. 내친김에 궁예는 왕건에게 2500여 군사를 주어 다시 내려보냈다. 왕건은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한 후 영산 내해로 진입했다. 그때 이미 후백제군은 목포(지금의 나주 영산포)와 반남현 석해포, 그리고 주력부대가 포진한 덕진포 등 3곳에 배치돼 있었다.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함들을 포진시켜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전함이 서로 종횡으로 연결되고, 바다와 육지에 군사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다. 그것을 보고 우리 장수들은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태조는 ‘근심하지 말라’ 며 (중략) 급히 공격하니 적선들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바람의 흐름을 타서 불을 놓으니 적들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중략) 견훤은 작은 배(小舸)를 타고 도망했다.”(<고려사> 권1) 우세했던 후백제군은 <고려사>에서 기술하듯 적벽대전과 같은 화공작전에 걸려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고려사>의 내용은 사실일 수 있으나 승자인 당당한 왕건과 초라한 견훤을 대비시키고 있어 작위적 느낌도 없지 않다. 몽탄지역에 내려오는 설화 역시 왕건 편이다. 몽탄은 지금의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시 동강면 사이를 연결하는 나루다. 설화에 따르면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 영산강의 한 구간인 몽탄강(夢灘江) 부근에서 포위되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신이 나타나 강물이 빠졌으니 피하라고 해서 허겁지겁 도망해 살았다는 것이다. 이후 왕건은 자신을 추격하는 후백제군을 파군천(破軍川)에서 격파했다. 1차 덕진포 해전 이후 후백제군은 석해포-성주산-자미산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다음 해인 910년, 견훤왕은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나주성을 공격했다. 여기서 나주성은 후대에 축성된 나주읍성이 아니라 금성산성으로 추정된다. 나주성을 10여일 동안 맹렬히 공격하자 궁예는 수군을 보내 후백제군의 배후를 기습했다. 또다시 후백제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후백제군이 열세에 몰린 것은 오다련 등 서남해 호족세력을 끌어안지 못한 게 원인이 아닐까 한다. 이후에도 영산강을 둘러싼 공방전은 계속되다 912년 제2차 덕진포해전이 일어난다. 견훤왕은 나주와 서남해안을 잃음으로써 항상 뒷마당이 불안했다. 912년 다시금 군사를 일으켜 덕진포에서 격돌하게 된다. 이번에는 궁예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왔다. 이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결국 후백제는 영산강 일대를 내주고 만다. 또 914년에는 견훤왕이 군소 호족세력을 포섭해 반기를 들도록 하자 궁예왕는 다시 왕건에게 3000명의 병력을 주어 평정케 한다. 이후 후백제는 15년이 지난 929년에야 서남해 일대를 차지했다. 1차와 2차 덕진포해전에서 사용한 후백제 배는 재목이 울창했던 부안 검모포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덕진포는 지금 조그만 하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월출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이는 등 마한 백제 때 꽤 큰 항구였다고 한다. 김한남(76) 영암문화원장은 “이곳은 해남 등 남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사람의 왕래가 잦았다”며 “다리가 없어 불편했는데 통일신라 말(후백제)에 강변에서 주막을 하는 덕진이라는 여인 덕분에 다리가 놓아졌다”는 설화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1.5㎞ 떨어진 곳에 장보고가 태어난 선암마을이 있다고 알려준다. 일행은 견훤왕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는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성을 들른 뒤, 광주시 북구 생용동으로 향했다. 이곳은 순천만과 광양일대에서 거병하여 여수, 고흥. 곡성,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한 후 오늘의 광주인 무진주로 호응을 받으며 입성한 곳이다. 892년 처음 자리를 잡아 세력을 키우다가 나중에 무진고성 옆 시가지로 치소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실린 ‘광주 북촌’의 지렁이 설화를 근거로 이곳이 견훤왕의 탄생지라는 주장도 있으나 다수 학자들은 혼인설화가 탄생설화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견훤왕이 이곳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지며 토착 호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해석이다. 이와 관련해 동행한 송화섭 교수는 “지렁이 설화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당초 용자(龍子)설화를 패배자인 견훤왕을 비하하기 위해 변이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용이 태어난 동네’라는 생용동에는 용(龍)자가 들어간 지명이 10개가 넘는다. 구룡(九龍) 생룡(生龍) 복룡(伏龍) 오룡(五龍) 신용(辛龍) 청룡(靑龍) 용강(龍江) 용두(龍頭) 용산(龍山) 용전(龍田) 등이 그러하다. 생용마을 뒤, 죽취봉(竹翠峰) 쪽으로 가파른 구릉을 따라가면 토축으로 쌓은 성터 흔적이 나온다. 예부터 견훤대 또는 후백제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은 광주 시가지에서 보면 산들로 가려 있어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다. 금성 범씨(范氏) 25대 손으로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범희인(87)씨는 “성안에는 견훤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조련대, 공부를 가르친 서당골, 잘못하면 감옥에 가둔 옥도골 등 당시 명칭이 지금도 전해 온다”고 들려준다. 만일 견훤왕이 성공한 군주였다면 이곳은 역사적 명소로 가꾸어졌으리라. 끝으로 찾은 곳은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에 자리한 무진고성. 이 성은 광주시 산수동 오거리에서 원효사 쪽으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잣고개’라는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다. 잣고개는 ‘성이 있는 고개(城峙)’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 양편으로 길게 쌓아 올린 성벽이 마치 새의 양날개처럼 날렵하게 복원돼 있다. 남북 1㎞, 동서 500m의 장타원형으로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둘레는 3.5㎞다. 박 교수는 “광주제일고 생활관 신축과정에서 1994년 나온 누문동(樓門洞) 및 무진고성 유물로 보아 후백제 치소성으로 보기는 부담스럽다”며 “피난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광주·전남의 후삼국 당시 지역별 분포를 보면 광주와 나주 및 서남해안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상류지역의 호족들은 견훤왕을 지지해 끝까지 견훤왕과 운명을 같이했다. 반면 나주와 영산강 중하류의 호족들은 왕건을 지지해 고려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상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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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23.06.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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