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⑫후백제의 발원지, 순천만 유물 유적
견훤은 장성하자 군대를 따라서 왕경(경주)에 들어갔다가 889년(진성여왕 3) 서남해안을 지키는 방수군이 됐다가 공을 세워 비장(裨將)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군사를 일으켜 무주(武州, 현 광주광역시)를 습격하여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견훤이 무주를 점령하자 그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항복하여 복속되었다. 서남해안·무주의 동남쪽 즉 전남 동부지역은 견훤의 근무지였을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견훤의 적극적인 후원세력이 되었다. 후백제 초창기 견훤과 관계를 맺은 호족세력은 무주성주 지훤(池萱), 승주장군 박영규(朴英規), 인가별감 김총(金摠) 등이었다. △견훤의 사위이자 순천의 호족인 박영규 <승평지> 인물 박영규조에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다. 훤의 아들 신검이 훤을 금산사에 가두자 곧 훤이 금성의 태조에게 도망가니 태조가 온 것을 위로하고 상부(尙父)로 존경하였다. 영규가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말하기를 “만약 의기(義旗)를 들면 청컨대 내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조가 크게 기뻐하고 그 사자를 후히 대접하고 돌려 보냈다. 신검을 죽이자 좌승(左承)의 직을 내렸다.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라 하였다. 후백제와 고려초기의 인물인 박영규는 순천지역의 호족이었으며, 고려 태조와 정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이 죽어서 해룡산신이 되었다는 점은 박영규를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의 생활 공간이 바로 순천 해룡산 일대였음을 의미한다. 후기의 기록이지만 1784년에 조현범이 지은 <강남악부> 인제산조에 ‘박영규는 해룡산 아래 홍안동(옛 성터가 있다)에 웅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순천 호족 박영규의 거점성 - 해룡산성 해룡산(해발 76.1m)은 순천시 홍내동 뒷산으로 현재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낮은 야산이며 바다와 접해 있었다. 이 산의 남쪽에 전체 길이 약 2000m 정도의 대규모 토성이 있다. 해룡산성의 시굴조사 결과 일부 구간은 판축기법으로 백제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성토법으로 축성되었고, 초축 이후 증축이 이루어진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판축기법으로 축성된 토성 구간은 외측을 증축하고 하단을 4단 정도 쌓은 석열이 노출되었으며, 석열 밖으로 약 55cm 정도의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와적층과 성토법으로 축성된 구간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격자문・선문・무문・수지문・복합문 등으로 같은 형식이었다. 따라서 이 토성은 처음 백제에 의해 좁게 축성되어 사용되다가 후백제시기 박영규 집단에 의해 대규모로 증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좌관초(左官草)'‧'우관초(右官草)'‧'관조(官造)' 등의 명문와이다. 이 기와들은 후백제시대 지방관아에 군사조직과 비슷한 좌관, 우관과 같은 행정관서의 존재를 암시하는 유물로 그 의미가 크다. △여수 성황신으로 추앙받은 김총 장군 김총은 견훤을 섬겨 관직이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으며, 죽어서는 순천도호부의 성황신이 되었다. 혹은 김별가(金別駕)는 영웅적 인물이었으며 살아서 평양(平陽, 즉 순천)의 군장(君長)은 하지 못하였지만, 죽어서는 곧 성황신이 되었다는 짧은 문헌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인가별감이란 직책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관직으로서 견훤의 호위를 담당하는 등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로 짐작된다. 성황신을 모신 성황사란 사당은 여수 진례산(進禮山, 현 영취산) 아래에 있었으며, 진례산과 그 주변에 장군동굴, 성주골(城主谷), 군장 마을, 제당산(祭堂山)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김총은 진례산 곧 여수 출신임이 분명하다. 순천부 관아에서 유생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여수 성황사는 1802년 무렵에 폐지되었으며, 그 후 순천 봉화산 중턱으로 옮겨 김총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성황사가 훼철되자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방축 마을)에 있던 동원재(同源齋)의 평양군영당(平陽君影堂)으로 그의 영정이 옮겨졌다. 김총은 사후에 ‘평양군(平陽君)’으로 추봉되었다고 하며, 평양(平陽)은 순천의 고려시대 별호였으므로 ‘평양군’은 곧 ‘순천군(順天君)’을 의미하고 김총 장군을 가리킨다. 김총의 본향은 순천으로 순천김씨의 시조이다. 여수현이 조선 초기에 폐현되어 순천도호부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김총의 본향이 여수가 아니라 순천이 되었다. △후백제시대의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된 광양 마로산성(馬老山城) 마로산성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용강리·죽림리 등 3개 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후기에 초축되어 마로현(광양시의 백제시대 관호)의 치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전남지역의 다른 백제산성과 달리 후백제시대까지 계속해서 운영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성벽, 문지, 건물지, 우물지, 집수정, 수혈유구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후대의 유구가 많아 후백제시기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唐)나라에서 제작된 해수포도문방경(海獸葡萄文方鏡)과 중국제 청자와 백자 등은 활발한 대외교역의 산물이다. 939년에 세워진 경기도 양평 보리사(菩提寺)의 대경대사비문에 의하면 대경대사 여엄(麗嚴)은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운거 도응(道膺)에게서 전법하고 909년 7월에 무주의 승평항으로 입국하였다. 9세기 중엽 완도의 청해진이 혁파된 후 다양한 국제항이 서남해안에 운영되었는데 승주항도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를 통해 대외교류가 이루어졌고 그 산물이 바로 중국제 동경과 자기가 입증하고 있다. 마로산성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기와이다. 특히 수막새는 30여 종이 넘는데, 그 문양이 특이하여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방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징적인 수막새의 문양은 능형문(菱形紋), 원문(圓文), 운문(雲文), 파문연화문(巴文蓮花文), 파문당초문, 다양한 연화문 등으로 통일신리시대의 연화문 막새와 크게 구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양상을 대변하고 있다. 마로산성은 백제 후기에 초축된 이후 8세기에서 10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줄무늬병, 덧줄무늬병, 편병, 사각병, 철제초두, 철제자물쇠, 중국 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AD.750, AD.930년의 절대연대 측정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마로현에서 희양현(曦陽縣)으로 개명된 광양은 승평군(통일신리시대의 순천)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승평군 호족 즉 박영규 집단의 관할 아래에 있었을 것이며, 경주와 다른 문화를 창출하여 이 지역의 호족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호족시대의 대표적인 산성 – 순천 봉화산성.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세력들을 소위 ‘호족(豪族)’이란 용어로 한국사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 전 시기와 아주 다른 형식의 성곽들이 축성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산성이 순천 봉화산성이다. 순천시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봉화산(해발 355.9m)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봉화산성은 순천만과 광양만이 잘 조망되고 있는 곳에 있다. 산성의 규모는 길이 1250m, 형식은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협축식 산성으로 내·외벽의 너비는 710~730cm로 넓은 편이다. 섬진강유역의 백제산성처럼 테뫼식형식으로 협축식에 의한 축성기법을 보인 점은 같지만 산성의 규모가 크고, 내·외벽의 너비가 넓은 점이 다르다. 이 시기에 축성된 산성은 백제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증축한 산성, 완전히 새로 축성한 산성 등 3가지 유형이 있다. 백제의 성곽을 그대로 이용한 산성은 광양 마로산성, 장수 합미산성 등과 같이 성곽의 둘레가 500m 내외로 작은 규모이다. 증축한 전주 동고산성과 새로 축성한 순천 봉화산성 등은 그 둘레가 1km를 넘는 대형이다. 이러한 대형 성곽은 성 내부에 대형 건물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 체성 축조기법의 특징은 장대석을 이용한 지대석의 등장, 체성의 들여쌓기 방법, 잘 다듬은 성돌로 ‘품(品)’자형 쌓기 등을 들 수 있다. 봉화산성의 내부 대형건물지에서 ‘회창오년(會昌五年)’, ‘을축오월(乙丑五月)’, ‘사평관(沙平官)’, ‘丁亥年(정해년)’명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회창 5년은 서기 845(신라 문성왕 9)년으로 을축년이다. 연호와 간지가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형 건물지는 845년에 건립되었던 것이며, 축성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해’명은 박영규가 견훤정권에서 크게 활약하던 시기였던 927년(丁亥年)에 개와를 했고, ‘사평관’(사평은 순천의 백제시대 관호)은 이 산성이 당시 치소성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인선(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