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도시에는 시간을 함께해온 오래된 공간이 축적되어 있다. 그 공간들은 세월에 묶여 사라지거나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오래된 공간의 변신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어느 공간은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시재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과 인구 감소를 경험한 일본은 일찌감치 도시재생에 눈을 떴다. 쇠퇴하는 오래된 도시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며 찾아낸 해법 중 하나가 도시재생이다.
낡고 방치된 공간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살려낸 도시가 적지 않다. 그 사례를 찾아 규슈지역의 도시를 돌아보았다.
지역의 전통 자산을 도시 마케팅으로 연계해 성공한 사가현의 도자기 마을 <아리타 세라>, 1600년대부터 200년 동안이나 일본의 유일한 국제무역 창구였으나 기능이 약화되면서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버려졌던 공간을 복원사업을 통해 도시의 관광 콘텐츠로 거듭나게 한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거기 있다. 지역을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기 위해 도시가 활력을 찾을 방법을 고민하며 얻은 기쿠치의 랜드마크 <기쿠치 중앙도서관>,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를 세계적으로 주목하게 만든 흥미로운 공간 <다케오시립도서관>, 상인과 장인의 공방이 된 150개의 전통 건물 거리 <야메후쿠시마>,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구마모토현의 랜드마크가 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도 주목할만한 사례다. 지역의 문화자산을 예술과 접목해 브랜드를 만들고 그것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발전시켜가는 <벳푸 프로젝트>도 흥미롭다. 쇠락하는 도서관을 재생시켜 아름다운 건축물로 만들어낸 <오이타 아트플라자>, 한때는 일본의 3대 항구로 꼽혔으나 쇠락의 길을 걷다 행정과 민간의 협력으로 새롭게 태어나 관광지로 변신한 <모지항 레트로>도 있다.
지역이 가진 가치를 새로운 시선으로 주목해 동력을 만들어낸 이 도시들의 노력이 일궈낸 결실이다. 그들은 어떤 가치와 철학으로 도시를 살리는 동력을 만들었을까.
오래된 공간과 사라지는 전통 문화유산을 활용해 문화의 생명력을 키우고 사람을 불러 일자리를 만드는 이 도시들이 답을 준다.
△도자기의 전통, 다시 세계에 이름 알리는 <아리타 세라>
아리타(有田)는 일본 규슈 북서부 사가현에 있다. 사가현은 오래전부터 도자기 산지로 전통을 이어온 아리타 덕분에 이름을 더 널리 알렸다. 아리타 도자기는 한때 유럽 전역에 수출될 정도로 번성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인 도자기다. 사가현에는 아리타 외에도 이마리, 가라쓰 등 각각의 이름을 내세운 도자기의 전통을 가진 지역이 많지만, 아리타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가장 많이 찾아오는 도자기 도시로 꼽힌다.
공교롭게도(?) 아리타 도자기의 뿌리는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 뿌리다. 일본으로 끌려가 사가현 아리타에 정착하게 된 이삼평은 아리타의 이즈미 산에서 질 좋은 고령토(백토)를 발견하고 도자기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도자기였다. 그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는 400년 역사와 전통을 갖게 됐다. 오늘에 이르러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추앙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삼평이 도자 가마를 연 후 아리타 지역뿐 아니라 이마리, 하사미 등 사가현의 여러 마을이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해 본격적인 도자 마을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아리타 도자기는 도자공예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아리타 도자기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어야 했다. 아리타에서 생산되지 않은 상품들이 아리타 이름을 내세워 시장을 어지럽히고 중국 도자기들은 싼 가격으로 밀려와 자리를 빼앗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타 사람들은 400년 전통을 이어온 도자의 뿌리라는 자긍심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냈다. 도공들이 밀집해있던 거리에 세계 최대의 도자기 판매점 ‘아리타 도자 마을 플라자’를 조성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아리타 세라>는 바로 이곳, ‘아리타 도자 마을 플라자’를 개편해 2018년 4월 더 새롭게 문을 연 공간이다.
아리타 시내에서 자동차로 불과 5분 거리.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아리타 세라>는 아리타 지역의 도자기 공방 스물 두 곳의 도자기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문적인 도자기 공방 거리다. 언뜻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쇼핑 거리처럼 보이지만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차장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오며 가며 쉴 수 있는 크고 작은 공간을 만들어 마치 작은 공원과도 같은 환경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에 자리 잡은 공방과 가게마다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는 특성이다. 판매를 위한 공간이면서도 각 공방의 가치와 철학을 담아낸 다양한 물건과 형태의 전시 기법은 이들 공간에 특별함을 더한다. 이미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으로 아리타 도자기의 진가를 알리고 있는 공방도 적지 않은데, 그들 중에는 세계 각 도시와 연계해 매장을 확산해가고 있는 공방도 있다.
<아리타 세라>는 2018년 문을 연 이후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코로나의 급습으로 위기를 맞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공간의 환경은 암담했다. 다행히 코로나 팬데믹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올해 초부터 <아리타 세라>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 말에 찾았던 <아리타 세라>는 아직 한적했다. 코로나 후유증이 가져온 풍경이었지만 지난 3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는 <아리타 세라> 사람들의 의욕은 넘쳐 보였다. 이곳을 아리타의 관광 거점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도자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육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시설과 숙박을 위한 호텔을 갖추는 로드맵도 흥미로웠다.
지역의 전통 자산을 도시의 성장 동력으로 활용해가는 이들의 지혜가 어떤 성과를 가져올지 궁금해진다.
△시간의 정취를 간직한 거리의 변신 '야메 후쿠시마'
야메시는 후쿠오카현 남서부에 위치한다. 중남부는 평야, 북동부는 삼림이 점하고 있는 야메 지역의 중핵 도시다.
에도시대에는 야메 지방의 물산 집적지로서 정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지금은 야메차, 국화, 표고버섯 등 농산물 생산이 활발한 농업도시로 알려졌지만,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제종이 와시, 불단, 제등 등 전통 수공예로 이름을 알린 장인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 야메시의 중심에 '역사적 건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된 거리 <야메 후쿠시마>가 있다. 수많은 전통가옥과 수로를 끼고 이어지는 거리 풍경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621년 후쿠시마 성이 무너졌을 때 이 주변에 있던 성곽 마을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후 야메 지역의 교통 중심이 되어 물산 집결지로 자리 잡은 <야메 후쿠시마>는 에도-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를 거쳐오면서도 150여 개의 전통 건물이 그대로 남아 상인과 장인의 공방으로 변신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전통가옥과 거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민의 노력 덕분이다. 주민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열리는 지역 축제를 이어가며 도시를 알렸다. 다양한 전통 놀이를 통해 무형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하얀 벽 거리 풍경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빈집을 잘 보존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나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드는 일에도 발 벗고 나섰다.
행정적 지원도 주효했다. 야메시는 <야메 후쿠시마>의 보존을 위해 세 가지 정책을 앞세웠다. 기술자의 확보, 활기를 되찾을 소프트웨어 구축, 그리고 시 전체의 문화경관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의 역사를 조사하고 기준에 근거한 설계나 시공을 위해 장인을 육성하는 일은 야메시의 중요한 과제로 안겨 있다. 주민과 행정이 연계해 빈 상점이나 가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기 위한 시스템 구축도 거리의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야메시의 중요한 정책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아간 <야메 후쿠시마>에서 기대했던 활기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순환형의 지역사회 만들기를 내세워 시민과 행정이 나서고 전문가들이 지원하는 정책을 만들어 실행해나가는 야메시의 노력은 오래된 도시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가옥의 거리 <야메 후쿠시마>의 내일이 기대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은정 선임기자,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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