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문화자산을 예술과 접목해 만든 브랜드
△벳푸 프로젝트
규슈 오이타현의 벳푸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온천 도시다. 온천이 솟아나는 곳은 자그마치 2,800여 곳. 그곳에서 솟아나는 1일 온천의 양은 13만 7,000t으로 일본에서 용출량이 가장 많다. 온천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 수도 단연 1위. 관광이 벳푸의 주요 산업이 된 배경이다. 그러나 벳푸는 산업 환경이 변하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않는 도시, 정체되고 쇠락해가는 도시가 됐다. 산업 대부분이 서비스업에 치중되어 있는 데다 종사자들의 낮은 임금이 원인이었다. 온천에 기대고 있던 벳푸의 산업 환경은 변화가 절실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온천에만 기대어 온 산업 구조를 바꾸고 쇠락해가는 벳푸의 도시 환경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나섰다.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벳푸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벳푸 프로젝트>는 예술을 앞세운 민간비영리 기구(NPO)다. 단체 사무실이 있는 노구치 오토마치는 벳푸의 중심지이자 번화가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구도심의 마을이다. 옛날에는 배가 정박하는 항구가 있어 물산이 풍부했고, 시청 등 관공서와 상가, 영화관 등 다양한 시설들이 밀집해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항구가 이전하고 시청도 옮겨가면서 도심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상권이 붕괴하자 주민들이 떠나가기 시작하고 빈집이 늘어났다. 이 단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도 1927년에 지어져 시가 오랫동안 사용했으나 시청을 새로 마련해 이전해간 이후 비어 있던 것을 관광협회 등 벳푸를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단체들이 입주해 <창조교류발신거점>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벳푸 프로젝트>는 2005년 단체를 만들고 그다음 해에 비영리기구로 법인화했다. 먼저 주목한 것은 구도심을 살리는 일이었다. 빈집을 활용해 거리를 바꾸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꾸리기 시작했다.
첫번째 프로젝트는 예술을 활용한 이벤트였다.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국제행사를 유치해 공공미술을 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이 참여하는 시민문화제를 기획해 문화와 예술을 일상화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썼다. 온천에 의지한 관광 산업을 지역적 특성에 예술을 입히는 관광 산업으로 폭을 넓히는 것이 목표였다.
벳푸는 직장을 가진 인구의 80%가 서비스업에 종사할 정도로 관광 산업 비중이 높은 도시. <벳푸 프로젝트>는 2006년 지역의 관광 여건을 먼저 조사했다. 당시 일본은 여행 패턴이 여성, 젊은 세대, 개인으로 변하는 시점이었지만 벳푸의 여건은 완전히 달랐다. 관광객의 70%가 여전히 남성이고 단체 중심의 관광이 절대적으로 비중이 높았다. 단체가 아닌 개인 중심의 여행 대상지, 젊은 여성들이 찾아오는 관광도시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인구 11만 명의 도시 벳푸의 변화가 시작됐다. 벳푸가 가진 유형무형의 자산에 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사업은 도시에 새로운 매력을 더했다. <벳푸 프로젝트>를 이끄는 나카무라 쿄코 대표는 “새로운 승부를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했다. 경쟁력을 갖추는 일은 벳푸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느 사이엔가 벳푸는 온천의 도시로만이 아니라 예술이 숨 쉬는 도시 감성이 넘치는 도시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이나 개인 블로거들의 발신이 벳푸를 알리는 중요한 홍보 수단이 됐다. 개인 여행객들이 벳푸의 매력적인 공간을 여행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오래된 빈집과 사용하지 않는 시설들을 활용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한 결과였다.
마을의 빈집을 예술가들의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자 국내외의 예술가들이 찾아왔다. 아예 이주해오는 예술가들도 늘어났다. <벳푸 프로젝트>는 낙후된 지역의 빈집을 예술가와 기업 등에 연결하고, 예술인들이 이주하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오래되어 낡고 방치되어 있던 아파트를 예술가들의 생활공간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외형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개조한 키요시마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전쟁 시기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오랫동안 빈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새로운 입주자(?)들의 터전이 됐다. 주민들은 모두 벳푸로 이주해온 예술가들. <벳푸 프로젝트>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120여 명의 예술가가 이곳을 거쳐 갔거나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벳푸시도 이러한 움직임을 주목해 이주해오는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아티스트 이주 정주 계획’을 만들었다.
<벳푸 프로젝트>는 18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대부분이 20~30대 젊은 층이다. 오이타현청과 벳푸시, 문화재청, 기업 등과 손을 잡고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벳푸 프로젝트>는 벳푸를 새로운 매력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들은 인적 자원을 발굴하고 지역 정보를 발신하며, 지역 제품을 개발하고 오래된 공간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사업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이 가진 힘을 보편화한다.
농산물 생산자들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브랜드 ‘Oita Made’나 낡은 호텔에 미술작품을 결합해 창조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Creative Platform Oita’는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벳푸 프로젝트>는 위로부터의 변화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한다. 주어진 정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주민들이 나서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더해지면 도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카무라 대표는 "매력적인 것을 발신하는 장소이자 창조적이고 재밌는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로서의 가치를 높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소개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가치 살려낸 도서관의 변신
△오이타 아트플라자
오이타현의 현청이 있는 오이타 시에는 이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가 설계한 <오이타 아트플라자>가 있다. 확실한 자기 언어와 철학으로 한 시대, 일본의 건축을 대표한 그가 건축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설립한 후 독립적으로 작업한 첫 번째 작품이다. 1962년 착공해 1966년에 완공된 이 건축물의 전신은 오이타 현립도서관. 오랫동안 지역주민들의 도서관으로 기능했으나 지난 1996년, 현립도서관을 새로 지어 이전하면서 쓰임을 잃었다. 오이타시는 오이타현으로부터 토지와 건물을 인수해 새로운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한때 전체 철거 혹은 일부 철거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건축적 가치를 살려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내부의 일부는 개조해 시민들의 문화 정보 교류 장소인 <오이타 아트플라자>로 재개관했다.
1960년대 일본에서 활발했던 메타볼리즘 운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건축물의 외관은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돼 낡고 녹스는 등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특징. 도서관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아트플라자의 쓰임이 크게 달라 전면적인 ‘리뉴얼’ 작업이 요구되었지만 오이타시는 건축물 구조는 물론 내부의 대부분 공간을 그대로 두고 부분만 개조해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오이타 아트플라자>가 1층에 2층까지 닿는 높은 천장과 창문을 통해 내부로 길게 들어오는 은은한 빛, 오전과 오후 햇빛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양쪽으로 창이 뚫려있는 특별한 공간을 갖게 된 배경이다.
1층과 2층에는 시민 갤러리와 창작 활동을 위한 공간이, 3층에는 건축가 이소자키가 작업한 세계 각국의 건축 작품 모형과 아카이브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2022년 10월 국가등록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오이타 아트플라자>는 오래된 건축물의 빛바랜 외관에도 불구하고 랜드마크가 됐다.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의 대표작이어서 건축 전공자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찾아오는 공간이기도 하다.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다. <오이타 아트플라자>가 있는 부지의 위치다. 이곳은 오이타 시청과 오이타성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도시의 중심이다. 당초 철거 방안이 제기되었던 것도 ‘노른자위’ 땅의 부동산 가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이타시와 시민들은 화려한 새로운 시설을 건립하는 대신 지역이 배출한 세계적 건축가가 남긴 건축물로서의 역사성과 가치를 택했다. 재생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 김은정 선임기자, 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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