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전북을 동쪽의 산악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로 갈라놓아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룬다. 전북 동부는 무진장, 임순남 등 낙후지역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금광·은광·동광·철광이 공존하는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의 보고이다. 오늘날 포항제철과 그 의미가 똑같은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과 국내 유일의 제동유적도 전북 동부에 자리한다.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에서 후백제와의 연관성이 검증되어, 전북 동부는 후삼국의 맹주 후백⑭제 국력의 화수분이자 거점이었다.
△전북 동부 후백제 철산지였다
인간의 지혜와 자연의 철광석이 하나로 합쳐져 다시 탄생된 것이 제철유적이다. 최고의 생산유적으로 평가받는 제철유적은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인 숯, 첨단기술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 전북 동부는 철분의 함유량이 월등히 높은 화강 편마암이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으며, 기원전 2세기 말 장수 남양리에서 첨단기술의 전래도 입증되었다.
가야사 국정과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북 동부에서 한 개소의 제철유적도 학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반파가야 봉화의 완전성을 위해 제철유적을 찾는 지표조사가 기획되었다. 지금도 전북 동부 제철유적 및 봉화를 찾는 추가 지표조사가 꾸준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전북 동부 문화요소의 유전자는 철(鐵)이다. 우리나라 단일 지역 내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운봉고원은 기원전 84년 지리산 달궁계곡을 피난지로 삼은 마한 왕이 첨단과학의 전달자이다. 기문가야가 동북아를 아우르는 위세품을 거의 다 모은 국제성도 철의 힘이다. 남원 아막성 집수시설에서 나온 용광로 벽체와 슬래그도 신라의 철산개발을 실증한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금강 최상류에 기반을 둔 반파가야는 봉화 왕국이다. 1500년 전 전북 동부에 봉화망을 구축하려면 국력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국력의 원천은 철이다. 반파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최고의 철제품인 말발굽이 나와 철의 생산과 유통을 유물로 입증하였다. 게다가 반파가야 영역에서 발견된 250여 개소의 제철유적도 그 개연성을 더 높였다.
장수 삼고리 고분군은 반파가야의 요람이다. 반파가야 백성들이 잠든 사후 안식처로 한강 이남의 최상급 마한계와 백제, 가야, 신라토기를 한 자리에서 실견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 물물교환의 증거물로 철산지만의 정형성이자 자랑거리이다. 우리나라에서 도굴의 피해가 가장 심한 반파가야 고총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제철유적의 발굴조사가 기획되었다.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제철유적은 철의 제련부터 가공, 정련까지 이루어진 종합제철소이다. 이곳에서는 철광석을 캐던 반달모양의 채석장, 철광석을 녹이던 제련단지, 철제품을 만들던 가공단지, 숯을 굽던 숯가마 등이 조사되었다. 후백제 문화층에서 붉게 그을린 기와편과 청동제 소형 동종이 출토되어, 전북 동부 제철유적이 후백제에 의해 운영되었음을 실증해 주었다.
△후백제, 전북 동부에 국력을 쏟았다
후백제 축성술의 비밀이 드러났다. 고구려 백암성을 쏙 빼닮았는데, 그 전수자는 고구려 유민들이 금마저에 세운 보덕국이다. 후백제 축성술은 줄을 띄운 줄 쌓기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들여쌓기, 한자 품(品)자형 쌓기로 상징된다. 성돌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고 그 길이가 상당히 길어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을 닮아 견치석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 산줄기를 따라 후백제 산성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다.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는 길목을 지킨 산성들로 후백제는 산성의 규모를 확장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았다. 후백제의 동쪽 방어체계 구축과 함께 장수 명덕리 대적골 제철유적 등 전북 동부 철산지를 방비하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 투영되어 있다.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어 전주까지 이어진 옛길이 통과하던 방아다리재 남쪽에 장수 침령산성이 있다. 반파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쌓은 테뫼식 산성을 신라가 4배 이상의 포곡식 산성으로 확장하였다. 후백제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거나 남쪽에 치를 두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집수시설에서 수백 점 이상의 후백제 유물이 쏟아져 후백제 박물관을 연출하였다.
금남호남정맥을 넘어 전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하던 자고개 북쪽에 장수 합미산성이 있다. 후백제 축성술의 랜드마크로 반파가야와 백제, 후백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반파가야가 산성의 터를 닦고 후백제가 확장한 테뫼식 산성으로 90% 이상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장수군이 후백제의 동쪽 거점으로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와 후백제
중국 청자의 본향이 절강성 항주에 도읍을 둔 오월이다. 후백제 견훤왕은 오월을 세운 전류와 왕 대 왕으로 양국의 국제외교를 거의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후백제가 오월에 말을 보내자 오월은 반상서를 대표로 사절단을 후백제에 파견하였다. 양국의 국제외교 결실로 오월의 도공과 중국식 벽돌가마를 만드는 전축공이 후백제에 파견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후백제 도읍 전주에서 가까운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가 조사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오월 월주요 상림호처럼 아주 정교하게 벽석을 쌓았다. 그러나 시흥 방산동 벽돌가마는 아주 거칠고 조잡하게 쌓아 오월, 후백제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검출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도 일관되게 후백제를 가리켰다.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중국식 벽돌가마가 처참하게 파괴된 뒤 전혀 검증되지 않은 길이 43m의 진흙가마를 다시 앉혀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길다. 진안 도통리에서 중국식 벽돌가마는 그 운영주체가 후백제로 판단된다. 전주 동고산성과 인봉리, 장수 침령산성 등 후백제 산성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똑같은 초기청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진안 도통리는 후백제 최첨단국가산업단지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북 동부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철기문화 못지않게 도자문화도 후백제가 후삼국 맹주로 발돋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안 도통리, 고창 반암리 중국식 벽돌가마에서 구운 초기청자는 차(茶) 문화를 중시하던 선종(禪宗)의 후백제 지지를 이끌어낸 촉매제였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인류의 역사 발전에서 소금과 철의 공헌도가 탁월하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전북가야를 거쳐 후백제까지 전북은 소금과 대규모 철산지였다. 새만금 등 전북 서해안에서 200여 개소의 패총과 전북 동부에서 30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이를 실증한다. 이제까지 전북에서 축적된 고고학 자료에 근거를 두고 전북의 역사를 ‘동철서염(東鐵西鹽)’으로 표방하려고 한다.
기원전 202년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마지막 왕 준왕의 남래 때 철기문화가 바닷길로 곧장 만경강유역에 전래된 것 같다.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요람으로 한강 이남에서 청동문화가 가장 융성하고 철기문화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마한의 핵심세력은 해양세력으로 전북 서해안에서 토판천일염으로 소금이 생산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북혁신도시를 테크노밸리로 일군 선진세력이 철광석을 찾아 전북 동부로 대거 이동한다.
장수군 천천면 남양리와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마한세력의 이동이 포착되었다. 전북 동부에 정착한 마한세력은 가야문화를 받아들여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기문가야와 반파가야로 상징되는 전북가야는 120여 개소의 가야 봉화를 전북 동부에 남겼다. 일본열도를 포함하여 전북 동부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 가야 봉화는 전북가야의 본바탕이자 아이콘이다.
전북가야는 동북아를 아우르는 최고급 위세품과 최상급 토기류를 거의 다 모아 대규모 철산지였음을 알렸다. 통일신라 때 남원경 설치의 역사적 배경도 전북 동부 철산개발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 철불의 효시로 평가받는 운봉고원 내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도 전북 동부 철기문화의 정수이자 최고의 걸작품이다.
후백제는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전북 동부의 철기문화와 서부의 해양문화를 하나로 응축시켜 전북의 ‘동철서염’을 국가 시스템으로 완성하였다. 요즘 전북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후백제 문화유산은 그야말로 풍성하고 월등하기 때문에 후백제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요청된다. 후백제사가 복원될 때까지 후삼국의 맹주 후백제를 꼭 기억하였으면 한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