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이 미륵신앙과 언제,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서남해 지역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자립을 선언한 것이 바로 농민 반란이 일어난 889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과 한 달만에 5천 여 명이라는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대부분이 농민이었음에 눈길이 간다. 견훤이 농민의 호응을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상적으로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견훤이 자립을 선언할 무렵 그곳에는 진표의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옛 백제 지역의 농민들은 진표의 미륵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고 백제 부흥운동을 외치며 일어난 견훤에게 크게 호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견훤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진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표의 미륵신앙의 특징은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곧바로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윤회전생하여 다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라도, 이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진표의 반신라적인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소망을 견훤이 나름대로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견훤은 미륵불이 하생하는 용화세계의 구현을 내세움으로써 반신라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던 서남부 지역의 농민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은 견훤은 서남해 지역에서 광주로 옮겼고, 광주 호족세력과 결합을 통해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그 결과 견훤은 호족세력과 연결된 농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고 진표의 미륵신앙의 근거지였던 금산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견훤이 금산사를 중창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후백제를 건국한 초기에 미륵신앙을 주된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후백제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고 생각된다.
견훤이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한 것은 900년의 일이었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도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김제의 금산사보다는 익산의 미륵사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가 익산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익산 지역의 미륵신앙은 무왕의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좀 더 설명하면 진표의 미륵신앙은 농민층이 주된 계층이었으나,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은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이후 그가 스스로 왕을 내세운 것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이 불만층의 농민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익산 미륵사에서 개탑 의식은 군주로서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견훤의 미륵신앙에 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미륵신앙을 익산의 미륵사를 통하여 새롭게 흡수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견훤은 국가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이후 미륵신앙만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불교계에서 유행하는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 아침에 선종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일찍부터 선종에 관하여 일정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견훤이 태어나기 전에 그곳에는 선종 승려인 혜소선사와 무염선사(800∼888)가 연이어 활동하였고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두 선승은 모두 당에 유학하였으며 신라 왕실로부터 상주에 머물면서 그곳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주문받았다. 이와 같이 견훤이 태어난 상주는 일찍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도헌선사(824∼882)가 개창한 희양산문도 견훤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가 상주를 떠나 중앙군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교종보다는 선종 불교와의 친연성이 더 하였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견훤이 광주 서남해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때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유명하던 선종산문은 체징에 의해 개창된 가지산문의 보림사, 혜철 선사에 의해 개창되었던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다. 비록 산문의 개산조는 이미 열반에 들고 없었지만 그들의 제자들이 왕실과 연결되어 산문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은 옥룡사의 도선국사(827∼898)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선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견훤은 그를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로 풍수지리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세우는데 사상적 이념으로 삼았다고 보아진다.
무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실상산문과도 연결하였다.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오월과의 수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실상산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이전 편운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즉위하자 태안사를 주도하던 윤다선사가 왕건에게 갔다. 그러자 견훤은 당에서 귀국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이 경보를 우대한 것은 성주산문과 굴산문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경보가 두 곳의 선종 산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온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은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선종 불교와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견훤과 경보 선사
통진대사 경보는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선승이다. 그는 속성이 김씨이고, 구림(현재 영암) 출신이다. 10세 무렵에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아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부인사(夫仁寺)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선종으로 눈을 돌려 백계산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찾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무렵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도선국사의 허락을 받아 여러 곳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성주산의 무염대사와 굴산문의 범일선사를 찾아 깨우침을 더하였다. 두 선지식을 방문한 것은 선종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 중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4세 무렵에 중국 유학을 떠나 무주(撫州)의 소산광인화상으로부터 조동종을 전수받았다. 광인화상은 그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불법을 구하는 자로서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동쪽에서 온 사람중에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자는 오직 그대 뿐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실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인화상을 떠나 강서의 노선화상을 배알하고 또 마음의 법을 전해받았다. 그리고서는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깨우친 바를 실행하다가 53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중국에 유학가서 머문 기간이 무려 3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신라 출신의 선승들이 당에 머문 기간과 비교해 보면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921년 전주 임피현으로 귀국하자 견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견훤이 마련한 남복선원을 물리치고 스승인 도선국사가 지냈던 광양의 옥룡사에서 머물렀다. 그는 견훤의 뜻을 이해하고 국사가 되었으며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서로 연결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936년에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으로 향했다. 그러므로 견훤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기간은 대략 15년 정도였다. 개경으로 간 대사는 왕건 및 그의 아들인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그리고 정종 2년(947)에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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