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라는 역사 용어는, 일본인의 서술 중 “이로써 옛적의 고구려‧백제 두 나라가 부흥하여 서로 싸우는 삼국시대 재현의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등에서 연유했다. 그러면 신라는 삼국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을까? 896년의 시점에서 “도적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 바지를 붉은 색으로 입어 스스로를 구분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고 일컬었는데, 주현(州縣)을 도륙하여 해를 입혔다. 서울의 서부인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고 갔다”고 했다.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난 무리들에게 경주 서부 지역까지 한번에 뚫린 것이다. 신라가 자위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905년의 시점에서는 “궁예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변경 읍락을 침탈해 죽령 동북까지 이르렀다. 왕은 땅이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는 깊이 걱정했으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성주에게 명하여 나가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왕명을 내린 대상을 ‘성주’라고 했다. 그런데 ‘성주’라는 이름 자체가 반독립 세력을 뜻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해 정령을 집행하는 지방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명은 공허한 외침이요 허세나 의례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성주는 신라 왕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지 못한 대상이었다.
906년 궁예의 군대는 후백제 군대를 물리치고 상주를 장악했다. 907년에는 “일선군(구미‧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모두 진훤에게 빼앗겼다”고 하였다. 원 신라 지역에서 궁예와 진훤이 격돌한 것이다. 궁예의 영주 부석사 행차도 이루어졌다. 이 상황에서 신라 왕의 통치력이 행사되었거나 저항한 기록도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920년에 왕건이 신라3보를 거론한 것은, 신라로부터의 양위를 염두에 두었다는 징표였다. 상징성 외에는 의미없는 존재로 신라가 전락했음을 뜻한다. 그랬기에 신라는 927년 후백제군의 습격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뿐 아니라 전혀 대응하지도 못했다. 신라 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경애왕이 전적으로 왕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솥발이 버티고 있는 삼국 ‘정립(鼎立)’ 개념을 염두에 둔 ‘후삼국시대’는 적합하지 않다.
현재 한국 학계의 공식 입장은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통합에 대한 의지도 없이 단순 남북 병렬 상황을 남북국시대로 운위하기는 어렵다. 굳이 남북국시대론를 설정한다면 신라와 발해가 아니라 후백제와 고려 사이는 가능할 수 있다. 양국은 동일한 국가 영역에서 성립하여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려 왕건은 후백제 진훤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이것은 곧 내가 남인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고 했듯이 후백제인들을 ‘남인’으로 호칭했다. 진훤 왕은 “군대는 북군보다 갑절이나 되면서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라고 하여, 고려군을 ‘북군’으로 일컬었다. 진훤 왕은 그러면서 “어찌 북왕北王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고려 왕을 ‘북왕’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일컬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를 ‘남인’‧‘북군’‧‘북왕’으로 불러 ‘남북국’의 대치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후백제와 고려의 대치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신라의 존재를 제시하겠지만, 진훤과 왕건이 주고받은 국서에서 공히 신라와 주周를 거론했다. 진훤은 “저의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돈독하고”라고 하여 ‘존왕’ 곧 신라의 신하임을 자처하였다. 왕건은 “의리를 지켜 주周를 높임에 있어”라고 했다. 진훤과 왕건은 모두 신라를 주실(周室)에 견주었다. 익히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주실은 상징성만 있었듯이 당시 영역이 경주에 국한된 신라도 이와 동일했다. 형식상 주실이 엄존했지만 춘추시대로 일컫고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도 엄연히 한실(漢室)이 존재했지만, 위(魏)·촉(蜀)·오(吳) 삼국의 역사로 간주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주周처럼 상징성만 지닌 신라를 제끼고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한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하등 부자연스럽지 않다. 현재 남한과 북한이 대치한 시대를 훗날 남북국시대로 설정한다고 해도 전혀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라와 발해는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동질성도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순히 남북으로 대치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북국시대를 운위할 수는 없다. 주지하듯이 ‘남북국시대론’은 본시 하나였던 정치체가 분열되었지만, 결국 통합을 위한 과도기로 인식한데서 등장한 용어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는 본시 하나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는 하나로 통합되지도 않았다. 고려에 의한 신라 통합과, 제3자인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의 흡수였다. 그 어느 하나도 남북국시대 용어에 부합하지 않았다.
△미래를 지향한 국가, 지연과 혈연을 뛰어넘다
후삼국시대, 아니 남북국시대를 선도했던 후백제는, 신라 군인 출신을 수반으로 하고, 백제 유민들을 기층으로 한 국가였다. 6두품 출신들의 가세와 더불어, 다양한 세력이 정권에 참여하였다. 주민 통합과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권 주도층의 범위는 경주 중심에서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소수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 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기회와 참여 폭이 넓은 사회로 넘어가게 하였다.
진훤의 참모들 가운데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전환기에 최치원‧최언위와 더불어, 이른바 3최崔로 일컫는 최씨 성을 가진 최고의 인텔리켄챠 가운데 하나인 최승우가 있다. 즉 “소위 1대 3최가 금방(金牓)에 이름을 걸고 돌아왔으니, 최치원이요, 최인연이요, 최승우라고 한다”고 했던 그 인물이다. 이 중 최승우는 공산 대승 직후 왕건에게 보낼 격서(檄書)를 작성한 당대 최고 문사였다. 최승우의 격서는 웅문(雄文)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신라가 기울어 가는 890년(진성여왕 4)에 당唐에 유학 가서 893년에 시랑 양섭(楊涉)의 문하에서 3년만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서문을 쓴 <호본집(餬本集)>이라는 4‧6병려체 문장의 문집 5권을 남겼다. 『동사강목』에는 “최승우가 당으로부터 돌아오니 나라가 이미 어지러워졌으므로 드디어 진훤에게 의탁하여 ···”라는 글귀가 보인다. 최승우는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주군으로 진훤을 택한 것이다.
선종산문(禪宗山門)들과 더불어 사상계도 경주를 벗어나 재편되는 양상을 띄었다. 그럼에 따라 획일적인 의식과 통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침울하고도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포착된다. 창의성과 더불어, 활기 넘친 약동하는 사회 면면이 후백제가 선도한 시대 기풍으로 평가되어진다.
아자개에 의한 농민 봉기와 진훤의 거병으로 인해 노쇠한 사회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활기찬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고, 전통적인 폐쇄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회와 참여의 폭이 넓어진 사회로 넘어가게 한 시대가 ‘후삼국시대’였다.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이를 선도한 국가가 후백제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고대사, 아니 한국사에서 후백제사가 지닌 위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남북국시대’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분기점으로서 과거제 시행
후백제는, 실질적인 ‘남북국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20여 년 후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를 통해 중세로 넘어가는 교량 역을 했다. 과거제 시행으로써, 그 전까지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지배세력의 권력 계승은 차단되었다. 혈연과 지연을 청산한 능력 본위의 시대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후백제는 승려들에 대한 과거(科擧)인 선불장(選佛場)을 시행하였다. 미륵사 개탑 30주년 기념으로 922년 선불장을 개최한 것이다. 후백제 선불장은 훗날 고려 승과와 상통하고 있다. 후백제 승과 시행은, 승려 선발 과거제를 넘어 인재 등용과 관련한 국가 조직 전반의 체계화를 뜻한다. 진훤 왕 주도의 과거제 실시를 상정할 수 있다. 최승우와 같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유학파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의 한 분과인 승과(선불장)만 별시(別試)로 치러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골품체제를 타파하고 기회 균등을 부여한 것이다. 이 점은 우리 모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시대를 선도했던 진훤 왕과 후백제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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