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際煩舍弟光八卽見)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國之患難民之所患)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余出家逗遛於數年不顧家事)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固然不似子道也)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與之倭軍屢日戰之所以報恩之冡也)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려워 (然而事勢極難故)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囊者遣財多少要需之)
사정이 어려워져 또 한 번 돈과 비단을 청하니 살펴 주길 바라네 (近況極甚於前故更請錢帛此便通察付送之)
또한 매우 급한 일이라네 (燋眉之急也)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일세 (死生縣命國運)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後事所託於昆弟)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摠摠不備禮)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甲午 晩秋 兄 光華)
이 편지는 1894년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접주 급의 지식인 유광화(劉光華)가 고향 집에 있는 동생 광팔(光八)에게 보낸 한문 편지이다. 유광화는 1858년 4월 15일 나주 다도에서 출생한 인물로, 유몽렬과 김해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하는데 온힘을 다했으며,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알려졌으며 성격도 올곧아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광화는 1894년 37세의 나이에 다섯 살 배기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둔 아버지였음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때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유광화는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벌어진 나주 공방전이 광주에 근거지를 둔 농민군 지도자 손화중, 최경선의 지휘를 받아 진행되었다. 당시 유광화는 최경선 휘하의 광주 포에 소속되어 있었다. 최경선 부대에서 활약하였던 유광화는 9월 2차 봉기 때 전봉준과 함께 공주로 북상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해상상륙에 대비하였다. 공주로 북상하였던 전봉준의 주력이 패전하여 장성 갈재에서 해산하고 은신하게 되자, 광주의 손화중․최경선 부대도 1894년 12월 1일에 군을 해산하고 철수하였다. 이때 유광화도 최경선과 함께 남평을 점령하고 화순으로 이동하였으나, 12월 10일 화순 도곡에서 관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광화가 동생 광팔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전투가 진행되던 1894년 10∼11월경(늦가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급한 전쟁의 상황에서 동생에게 보낸 유광화 편지는 비록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어났던 농민군의 군자금 모금 상황 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편지에서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사를 돌보지 않고 몸을 바친다.’는 뜻을 거듭 드러내고 있어, 당시 농민군 지도자들이 어떠한 의식을 갖고 혁명에 참여하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로, 한문으로 작성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광화는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광화와 같이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던 동학농민군에도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통에서 쓰인 짧은 편지이지만, 자료에 드러난 내용을 통해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들의 실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유광화가 혁명에 직접 참여하며 집에 있는 동생에게 활동 자금을 보내달라고 하여 당시 농민군들은 모자라는 활동 자금을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 중에라도 부호를 약탈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농민군의 합리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의 표현을 통해 유광화는 이전에도 동생에게 재물을 조달받은 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학농민군은 최대한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등 매우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편지 내용 중 ‘왜군과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 이라는 표현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항일의지가 얼마나 강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농민군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동시에 유광화라는 사람이 얼마나 문학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는지도 짐작케 한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동학농민군의 절박하고 애통한 마음이 고스란히 잘 표현되어 있다. 짧은 편지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군이 동학농민혁명 전투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중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지는 1995년 전남대 이상식 교수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유광화의 후손이 2021년 기증하여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는 2022년 문화재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23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대표적인 기록물로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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