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공초>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를 심문한 기록이다. 원래 공초(供招)라고 되어있어야 하나 공초(供草)로 표기되어 있다. 기록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고, 국한문혼용체와 한문체로 혼용되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원본이, 이를 베낀 사본은 장서각에, 그리고 별도로 국가기록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전봉준에 대한 최초의 심문은 1895년 2월 9일(음력)부터 시작된다. 이날 법무아문 참의 이재정의 주관으로 그해 3월 중순까지 5차례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6차례일 수도 있다. 공초자료 편철 순서가 약간 혼란이 있어, 2월 19일의 공초는 2번이나 거행되었다. 뒷부분 3차에 걸친 심문에는 일본 영사가 개입되어 있다.
재판 장소는 법무아문이 새로 마련한 권설재판소 법정이었다. 여기는 원래 의금부의 청사였던 만큼 국가의 중대 사안에 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때 재판과정에는 참의 약간 명과 주사 1인이 입회하였지만,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찌다 사다즈치(內田定槌)가 직접 간여했다. 그는 개항 이후 일본인과 관련된 민사와 형사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영사가 직접 간여할 수 있다는 ‘회심(會審)’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 개입은 명백히 불법적이고 내정간섭이었다.
이때 권설재판소에서 6차에 걸쳐 이루어진 전봉준에 대한 심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1차 (초초문목, 음력 2월 초9일 : 양력 3월 5일, 국한문혼용체) : 전봉준의 개인 신상과 동학과의 관계, 동학농민군의 봉기원인과 전개과정(고부봉기, 재차기포, 전주기포 등)을 통해 농민군의 봉기와 경과
2차 (재초문목, 2월 11일 : 3월 7일) : 탐관오리의 불법 탐학과 동학 조직과 역할, 재차 기포와 소모사, 최시형과의 관계 등을 통하여 봉기의 주도층과 조직에 대한 질문
3차 (3초문목, 2월 19일 : 3월 15일) : 흥선대원군의 효유문과 관련하여 송희옥과의 관계, 흥선대원군과 2차 봉기 모의 가능성 추궁
4차 (5차문목, 2월 19일 : 3월 15일, 일영사 심문) : 송희옥과 전봉준과의 관계를 집중 추궁하면서 대원군 효유문과 묘당 효유문을 사전 인지했는지 여부 집중 추궁
5차 (4차문목, 3월 초7일 : 4월 1일, 일영사 심문, 한문체) : 전봉준의 이름과 별호 등 신상을 묻고 집강소 설치과정 등 사항, 삼례 회동과 문서 대필 문제 재론(마지막 편철에 위치함)
6차 (5차문목, 3월 초10일 : 4월 4일, 일영사 심문, 한문체) : 편지나 서간의 작성자 여부와 더불어 최경선, 송희옥 등과의 관계 재추궁(3초 문목 다음에 위치함).
전봉준 심문과 재판과정에서는 전봉준의 신상과 동학농민군의 고부 봉기. 재차 봉기, 2차 봉기 등 전쟁 과정, 동학의 조직과 역할 등 모두 276개 질의와 응답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과 기병 목적 등에 대해 전봉준이 직접 진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았다. 고부봉기의 주모자로 추대된 경위, 만석보 수세의 부담 강화, 봉기할 때 동학도가 적고 원민이 많았다는 사실 등이 특기하다. 그는 동학이 “수심(守心)하여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일이외다”라고 하여 유교지식인으로서의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봉기 의도와 과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었다.
커다란 논란은 2차 봉기의 목적과 정치세력과의 연관성 심문에서 일어났다. 3차 심문(2월 19일)부터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게 되자 그는 진술 태도를 바꾸었다. 참모 역할을 했던 송희옥의 서한도 문제였는데, 이 편지가 흥선대원군의 효유문과 2차 봉기를 연결시켜주는 결정적인 문서였기 때문이다. 정부측은 법무대신 김학우의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현정부의 쿠데타 음모와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본측도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련 사실을 캐물어 사주에 의한 농민봉기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전봉준은 이준용 반란 사실 등과 엮어 자신들을 처벌하려는 정부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그르쳤으며, 인민들도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과의 모의, 또는 연계설을 일체 부정하였다. 그는 농민군 독자적으로, 그리고 민중들의 삶을 위해 봉기했다는 정당성을 재차 강조했다.
결국 2차 봉기의 목적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그는 재봉기 이유로 일본이 “궁궐을 침범한 연유를 꾸짖고자 하였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재판관이 “그러면 일본병과 그리고 각국인으로 서울에 머물러 돌아다니는 자를 모두 구축하려 하였느냐”고 다그쳐 묻자, 전봉준은 “그러함이 아니라, 각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을 치고 체류하는 고로 우리나라 영토를 침략하려는 데 있을 것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차 봉기는 외국과의 통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정치·군사적 침략사실을 질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외세 배격과 자주적 개혁, 합의법에 의한 정치운영 등 주장하면서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진술하는 동안 시종일관 민중들의 정의로운 행동이었음을 강조했다. 이후 <전봉준공초>는 1895년 3월 29일(음력) 임시 권설재판소에서 내린〈판결선고서〉의 근거자료가 되었다. 다만 심문과정에서 일본측이 활용한 증빙서류가 무려 1,496통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판결선고서에는 2차 봉기의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재판부는 흥선대원군과의 결합, 혹은 사주로 인해 봉기하였다는 혐의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전봉준의 본래 진술대로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동학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처벌 근거를 조선왕조국가 내의 형법 질서를 위배하였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이미 폐지되어버린<대전통편>형전 ‘추단조(推斷條)’ 규정이었다. 마침내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5명에게 교형(絞刑)으로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봉기의 원인이었던 일본의 침략성 여부와 반일민족 운동은 평가에서 제외하였다. 2차 봉기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범죄사실로 간주하지 않았고, 반일민족운동에 관해서도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결선고서는 전봉준의 본의와 진술 내용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봉준 등의 사형집행과정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갑오개혁 정부는 새 법률제도와 재판소 규정을 마련하고 이미 3월 25일에 공포하였다. 법률 1호 <재판소구성법>과 칙령 50호 <재판소처무규정통칙>을 통해 민·형사 모두 2심의 재판과 소송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새 제도가 시행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3월 30일(양력 4월 24일) 오전 2시 종묘 앞 좌감옥소 처형대에서 전격 처형되었다. 법무대신 서광범, 참의 장박 등 담당 관리들이 신식 재판제도를 시행하기 직전에 서둘러 처형한 것이다. 이는 갑오개혁과 일본측에 의해 감행된 정치적·편파적인 재판이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법제도의 효시로서 ‘법의 날’(4월 25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신식 재판제도가 시민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농민군 지도자 처형을 애써 감추고 있다.
이렇게 전봉준과 재판부 사이에 벌인 실체적 진실과 정당성 공방에도 불구하고 끝내 2차 봉기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체와 정당성을 간직하고 있는 전봉준의 공초 기록은 언젠가 새롭게 재판 관련 자료의 발견과 함께 심층적 분석이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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