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를 고무시킨 맹영재의 지평 민보군
양호도순무영이 막하 진용을 구성하던 9월 26일 고무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경기도 지평의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 근거지를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어 금산에서도 유생들이 포수 300명과 무사 700명을 뽑아서 읍내를 방비하는데 그 비용은 민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둬 비용으로 충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국에서 봉기한 동학도를 막을 방도가 없었던 양호도순무영은 이런 보고에서 유력한 방안을 찾게 되었다. 지평과 금산의 사례처럼 민보군을 조직하는 방안이었다. <갑오군정실기> 첫 부분에 그 과정이 자세하다.
먼저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군직을 부여했다. 9월 25일에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에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을 조방장에 임명했다. 다음날인 9월 26일에는 지평의 맹영재와 금산 유학 정두섭을 소모관에 임명했다. 해당 지방관에게는 화약과 연환, 그리고 군량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9월 30일에는 삼남에 각각 2명씩 소모사를 임명하여 자력으로 민보군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했다. 호남소모사는 나주목사 민종렬과 여산부사 유제관, 호서소모관은 홍주목사 조재관과 진잠현감 이세경, 영남소모관은 창원부사 이종서와 전 승지 정의묵이었다.
이때부터 군직 임명이 빈번해졌다. 강원도의 관동토포사로 횡성현감 유동근을 임명하고, 하동부사 홍택후를 조방장에 임명했다. 11월에는 전 승지 조시영을 김산소모사로 차하하고, 김산군수 박준빈을 조방장으로 임명했다. 보은군수 이규백도 조방장에 임명했다. 이어서 천안군수 김병숙과 목천현감 정기봉이 소모관이 되었고, 호남소모관에는 전동석 백낙중 임두학을 모두 임명했다. 고부군수 윤병도 소모사가 되었다.
이런 군직은 민보군을 지휘하는 권한뿐 아니라 처형권을 준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은 동학농민군을 소모사 등이 처형해도 사후 보고만 하면 문책이 따르지 않았다. 지방관은 관아의 무기와 식량을 주는 방식으로 민보군을 지원했다. 그런 사실이 <갑오군정실기>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경군 병영의 출진 병력과 비용
9월에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의 1차 목적은 척왜(斥倭)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된 일본군 전신소와 병참부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히로시마대본영은 즉각 후비보병제19대대를 증파하는 동시에 서울 주둔군을 충청도 일대에 보내서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막으려고 하였다.
조선 정부도 대규모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정부가 금지하는 사교 집단이 일으키는 병란이란 판단도 거두지 않았다. 양호도순무영의 지휘 아래 통위영 · 장위영 · 경리청 병력을 출전시켰다. 그 규모가 <갑오군정실기> 제10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선봉장 이규태가 지휘한 통위영 장졸은 337명이고, 이들을 지원한 참모사와 참모관 그리고 별군관 등이 65명이었다. 모두 402명의 행군 속에 기마 17필과 짐말 13필이 있었다. 경리청은 홍운섭이 이끈 장졸 358명과 성하영이 이끈 370명이 동원되어 모두 728명이 출진하였다. 짐말은 각각 27필과 34필이었다. 경리청 병대가 가장 많은 군수 물자를 가지고 다녔다.
장위영은 가장 먼저 출진한 병영이었다. 이두황이 거느린 381명과 원세록이 지휘한 351명이 동원되어 모두 732명이 동원되었다. 1893년 봄 보은 장내리집회를 해산시키려고 청주까지 간 홍계훈의 병대도 장위영이었고, 1차봉기 당시 장성 황룡촌전투와 전주 완산전투를 치룬 경군도 장위영이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과 동행한 경군은 장졸 255명의 교도중대였다. 여기에 별군관과 참모관 12명을 지원받았다. 영관 이진호가 인솔한 교도중대의 실제 지휘관은 19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였다. 처음 편성할 때부터 일본군 장교에게 훈련받고 그 지시에 따라서 정찰과 경계 등 맡았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교도중대를 일본 협조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미나미 소좌에게 몰래 내렸다.
경군 병력의 군량을 책임진 운량관으로는 경기도의 양성현감 남계술, 충청도의 노성 신창 온양 회덕 충주의 지방관을 선정했다. 이들은 공금을 전용하거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내서 군수전과 군수미로 쓰도록 했다. 고종의 내탕금과 운현궁의 하사금, 또 대신들의 성금도 경비로 사용했다. 경군의 행군로에 위치한 지방관에게는 식량과 땔감, 그리고 말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마련하도록 했다.
갑오년 참혹상을 전하는 기록
동학농민군이 처했던 참혹한 실상을 전해주는 자료는 드물다. 진압기록을 보면 여러 내용이 확인된다. 첫째가 재산 탈취 사례이다. 소모관 정기봉의 10월 19일자 보고에서 양성의 유성옥을 잡지 못하자 그의 재산을 적몰했다고 하였다. 총과 창 등이나 깃발과 염주뿐 아니라 재산을 빼앗았다고 한 것이다.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사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자 양호도순무사 신정희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12월 9일자 전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일 때 먼저 그 재산을 적몰하는 실상을 말하면서, 재산을 모두 잃은 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 모여서 도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항명하는 강원도 홍천의 사례도 나왔다. 이미 죄인의 가산을 적몰하여 민가를 나누어 주었으니 다시 환급받기가 어렵다며 항명을 한 것이다. 그러자 도순무사는 해당 향리를 엄히 곤장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적몰한 재산을 찾아서 돌려주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고부군수 윤병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적몰한 재산을 가지고 납속하는 일은 영구히 중지”하라는 전령을 잘 따르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당시 사정을 전해주는 기록들이다.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벌일 때 초가를 불태우거나 읍내에 방화한 사건은 <고종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방화 사건은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방화 사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관군의 방화 사건 중 가장 큰 것이 이두황의 장내리 방화사건이다. 장위영을 이끌고 보은에 간 이두황은 민가 200채와 초막 400채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커다란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마을터에는 다시 집이 들어서지 못했다.
일본군의 방화는 더욱 심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일본군 지대는 황해도 강령에서 11월 19일 밤에 민호 400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금구 원평으로 가던 일본군이 길가의 민가를 방화해서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사태는 너무 많아서 관군의 보고에도 일일이 쓰지 않을 정도였다.
매우 추웠던 갑오년 겨울에 다행히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살던 마을로 돌아와도 추위를 피할 거처가 없었다. 여러 곳에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록을 그런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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