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된 <취의록>과 <거의록>은 전북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민간 보수층의 움직임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취의록>은 1894년 9월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여한 수성군의 명단을 기록한 자료이다. 모두 1책 44면으로 되어 있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수성군 성명을 지역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수성군에 참여한 인원은 고창 424명, 흥덕 77명, 고부 25명, 장성 8명, 무장 48명 등 총 582명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강영중 등 5명의 명의로 9월 9일 작성된 취의통문(聚義通文)이 첨부되어 있어, 수성군을 조직한 이유와 목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동학농민군을 역적으로 간주, 의를 들어 토벌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1894년 9월 9일 통문을 돌려 <취의록> 명단과 같은 수성군을 모집하였으나, 곧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흥덕 이서면 용강에 살던 유학자 강영중은 고창과 흥덕지역에 살던 지인들과 자주 만나 모의한 끝에 수성군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흥덕현감 윤석진(尹錫禛)의 동의하에 9월 9일 자신을 비롯한 8명의 명의로 ‘취의통문’을 돌려 수성군을 모집하였으나, 이 때는 동학농민군 힘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영중 등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시국을 관망하였다. 그러다 전봉준부대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인 11월 15일 다시 수성군을 조직하고자 흥덕현감 윤석진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윤석진은 “의거를 청한 일은 함부로 허락하기 어렵다. 왕의 군대가 당도할 때 마땅히 직접 묻고 허락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정부군이 고창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거사를 만류하였다. 대부분의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이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나주쪽으로 남하하였지만, 아직 차치구가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이 고창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치구는 전봉준의 후군대장으로서 공주와 논산 전투에서 패배한 뒤 흥덕으로 후퇴하여 머물러 있었다.
고창지역 수성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정부군과 일본군이 전라도로 남하한 11월 하순 이후부터 1895년초이다. 1책 27면 분량의 <거의록>은 바로 고창지역 수성군이 활동한 시말과 그 과정에서 생산한 문서들을 모아놓은 기록물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거의록>에는 1895년 4월에 백낙규가 작성한 ‘흥덕・고창 창의서’를 서문으로 실은 뒤, 1894년 9월 9일 강영중 등 8명 명의로 작성된 ‘창의사실’, 1894년 11월 고창 유생 김영철 등이 흥덕현감에게 올린 상서(上書), 1894년 11월 25일자 비밀지령, 1894년 11월 29일 전령, 1894년 12월 흥덕 유생 강영중 등이 정부군 앞으로 올린 상서, 1894년 12월 장성에 도착한 정부 진압군(양호순무선봉진)에서 흥덕 수성소에 보낸 전령, 흥덕・고창 수성청 좌목 등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거의록>은 1895년 4월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뒤 관련 사실과 자료들을 모아 필사해 놓은 기록물로서, 고창지역 전현직 관리와 유생들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어 동학농민군의 죽음 이면에 있는 보수유생층의 동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실제 흥덕현감 윤석진은 11월 25일 태도를 바꾸어 <거의록>에 수록된 비밀지령을 내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무렵 정부군 230명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11월 30일 고부, 12월 1일 흥덕, 12월 2일 무장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일부 병력을 무장에 남겨놓은 채 12월 6일 영광으로 이동하였다. 무장은 손화중의 근거지이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 엄중히 수색하였다.
이러한 정부군의 전략은 적중하였다. 그 무렵 손화중은 12월 1일 광주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한 뒤 12월 3일 이후 고창지역으로 되돌아왔고 홍낙관도 광주에서 흥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집을 떠난 고창지역 다른 동학농민군들도 12월 3일 이후 광주에서 속속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부군과 수성군이었다. 홍낙관은 12월 9일 흥덕 임리(林里)에서, 손화중은 12월 11일 체포되었다. 무장에 머물며 손화중 등 거물급 지도자를 체포한 정부군은 손화중과 홍낙관을 함평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에게 압송한 뒤, 12월 19일 무장에서 김광오(金光五) 등 4명을 체포하였다. 20일에는 고창읍으로 행군하여 김치삼(金致三)․남사규(南士奎)를 생포하였다. 다음 날에는 흥덕에서 이백오(李伯五) 등 5명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압송하였다.
이렇게 1894년 12월에 들어와 고창지역을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정부군이 장악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러자 강영중 등은 당시 장성에 머물로 있던 양호순무선봉진 우선봉 이두황에게 소장을 보내, 흥덕현감에게 흥덕·고창·무장 3읍의 수성 책임을 맡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두황은 12월 7일자로 흥덕 수성소에 전령을 내려, 동학의 각 접주들이 각 마을에 다수 은닉해 있을 것이니 이들을 색출하여 그 가운데 행패가 심한 자들은 백성들을 모아 즉시 처형하고 나머지 위협에 의해 할 수 없이 따라다닌 자들은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전령은 <거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흥덕 수성소를 중심으로 고창지역 수성군은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하거나 일본군에게 인계하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거의록>에 수록된 ‘흥덕・고창 수성청 좌목’과 같이 체계적으로 운영된 수성소가 설치되고 수성군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귀가한 동학농민군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실제 흥덕 수성군은 12월에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을 샅샅이 수색하여 서상옥(徐相玉)과 정무경을 체포하여 즉시 효수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나주에 갔다가 흥덕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흥덕의 대접주였던 고태국도 수성군에게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그 외에 많은 고창지역 동학농민군들이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죽거나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되었다.
이런 동학농민군의 비참한 실상이 비록 <취의록>과 <거의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균형있게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수성군 활동은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졌지만,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지역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취의록>과 <거의록>은 고창지역 수성군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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