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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6)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2부

정부를 고무시킨 맹영재의 지평 민보군 양호도순무영이 막하 진용을 구성하던 9월 26일 고무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경기도 지평의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 근거지를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어 금산에서도 유생들이 포수 300명과 무사 700명을 뽑아서 읍내를 방비하는데 그 비용은 민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둬 비용으로 충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국에서 봉기한 동학도를 막을 방도가 없었던 양호도순무영은 이런 보고에서 유력한 방안을 찾게 되었다. 지평과 금산의 사례처럼 민보군을 조직하는 방안이었다. <갑오군정실기> 첫 부분에 그 과정이 자세하다. 먼저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군직을 부여했다. 9월 25일에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에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을 조방장에 임명했다. 다음날인 9월 26일에는 지평의 맹영재와 금산 유학 정두섭을 소모관에 임명했다. 해당 지방관에게는 화약과 연환, 그리고 군량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9월 30일에는 삼남에 각각 2명씩 소모사를 임명하여 자력으로 민보군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했다. 호남소모사는 나주목사 민종렬과 여산부사 유제관, 호서소모관은 홍주목사 조재관과 진잠현감 이세경, 영남소모관은 창원부사 이종서와 전 승지 정의묵이었다. 이때부터 군직 임명이 빈번해졌다. 강원도의 관동토포사로 횡성현감 유동근을 임명하고, 하동부사 홍택후를 조방장에 임명했다. 11월에는 전 승지 조시영을 김산소모사로 차하하고, 김산군수 박준빈을 조방장으로 임명했다. 보은군수 이규백도 조방장에 임명했다. 이어서 천안군수 김병숙과 목천현감 정기봉이 소모관이 되었고, 호남소모관에는 전동석 백낙중 임두학을 모두 임명했다. 고부군수 윤병도 소모사가 되었다. 이런 군직은 민보군을 지휘하는 권한뿐 아니라 처형권을 준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은 동학농민군을 소모사 등이 처형해도 사후 보고만 하면 문책이 따르지 않았다. 지방관은 관아의 무기와 식량을 주는 방식으로 민보군을 지원했다. 그런 사실이 <갑오군정실기>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경군 병영의 출진 병력과 비용 9월에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의 1차 목적은 척왜(斥倭)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된 일본군 전신소와 병참부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히로시마대본영은 즉각 후비보병제19대대를 증파하는 동시에 서울 주둔군을 충청도 일대에 보내서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막으려고 하였다. 조선 정부도 대규모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정부가 금지하는 사교 집단이 일으키는 병란이란 판단도 거두지 않았다. 양호도순무영의 지휘 아래 통위영 · 장위영 · 경리청 병력을 출전시켰다. 그 규모가 <갑오군정실기> 제10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선봉장 이규태가 지휘한 통위영 장졸은 337명이고, 이들을 지원한 참모사와 참모관 그리고 별군관 등이 65명이었다. 모두 402명의 행군 속에 기마 17필과 짐말 13필이 있었다. 경리청은 홍운섭이 이끈 장졸 358명과 성하영이 이끈 370명이 동원되어 모두 728명이 출진하였다. 짐말은 각각 27필과 34필이었다. 경리청 병대가 가장 많은 군수 물자를 가지고 다녔다. 장위영은 가장 먼저 출진한 병영이었다. 이두황이 거느린 381명과 원세록이 지휘한 351명이 동원되어 모두 732명이 동원되었다. 1893년 봄 보은 장내리집회를 해산시키려고 청주까지 간 홍계훈의 병대도 장위영이었고, 1차봉기 당시 장성 황룡촌전투와 전주 완산전투를 치룬 경군도 장위영이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과 동행한 경군은 장졸 255명의 교도중대였다. 여기에 별군관과 참모관 12명을 지원받았다. 영관 이진호가 인솔한 교도중대의 실제 지휘관은 19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였다. 처음 편성할 때부터 일본군 장교에게 훈련받고 그 지시에 따라서 정찰과 경계 등 맡았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교도중대를 일본 협조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미나미 소좌에게 몰래 내렸다. 경군 병력의 군량을 책임진 운량관으로는 경기도의 양성현감 남계술, 충청도의 노성 신창 온양 회덕 충주의 지방관을 선정했다. 이들은 공금을 전용하거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내서 군수전과 군수미로 쓰도록 했다. 고종의 내탕금과 운현궁의 하사금, 또 대신들의 성금도 경비로 사용했다. 경군의 행군로에 위치한 지방관에게는 식량과 땔감, 그리고 말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마련하도록 했다. 갑오년 참혹상을 전하는 기록 동학농민군이 처했던 참혹한 실상을 전해주는 자료는 드물다. 진압기록을 보면 여러 내용이 확인된다. 첫째가 재산 탈취 사례이다. 소모관 정기봉의 10월 19일자 보고에서 양성의 유성옥을 잡지 못하자 그의 재산을 적몰했다고 하였다. 총과 창 등이나 깃발과 염주뿐 아니라 재산을 빼앗았다고 한 것이다.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사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자 양호도순무사 신정희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12월 9일자 전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일 때 먼저 그 재산을 적몰하는 실상을 말하면서, 재산을 모두 잃은 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 모여서 도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항명하는 강원도 홍천의 사례도 나왔다. 이미 죄인의 가산을 적몰하여 민가를 나누어 주었으니 다시 환급받기가 어렵다며 항명을 한 것이다. 그러자 도순무사는 해당 향리를 엄히 곤장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적몰한 재산을 찾아서 돌려주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고부군수 윤병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적몰한 재산을 가지고 납속하는 일은 영구히 중지”하라는 전령을 잘 따르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당시 사정을 전해주는 기록들이다.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벌일 때 초가를 불태우거나 읍내에 방화한 사건은 <고종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방화 사건은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방화 사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관군의 방화 사건 중 가장 큰 것이 이두황의 장내리 방화사건이다. 장위영을 이끌고 보은에 간 이두황은 민가 200채와 초막 400채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커다란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마을터에는 다시 집이 들어서지 못했다. 일본군의 방화는 더욱 심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일본군 지대는 황해도 강령에서 11월 19일 밤에 민호 400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금구 원평으로 가던 일본군이 길가의 민가를 방화해서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사태는 너무 많아서 관군의 보고에도 일일이 쓰지 않을 정도였다. 매우 추웠던 갑오년 겨울에 다행히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살던 마을로 돌아와도 추위를 피할 거처가 없었다. 여러 곳에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록을 그런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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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6:4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5)-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1부

새로운 사실이 쏟아진 동학농민혁명 사료 갑오군정실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갑오군정실기>는 1894년 9월 22일(양력 10월 20일) 조선 정부에서 호위부장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에 임명하고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할 때부터 이해 12월 27일(양력 1895년 1월 22일) 폐지될 때까지 95일 동안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사료이다. 모두 10책으로 9책은 공문서집이고, 마지막 10책에는 순무영의 지휘 아래 활동한 장졸의 인원과 전공을 기재했다. 유일 필사본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원수에 해당하는 양호도순무영의 위상 조선왕조의 군사제도에서 순무영은 상설기구가 아니었다. 영조 4년(1728년)에 무신란이 일어나자 긴급히 오명항을 4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에 임명해서 진압하도록 했다. 4로는 군대의 진군과 후퇴 등이나 사방의 길을 의미하는데 또 4도순무사(四道巡撫使)로 말한 것을 보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4도의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순조 11년(1811년)에 서북 일대에서 홍경래난이 벌어지자 양서순무영(兩西巡撫營)을 설치했는데 양서는 관서와 해서를 의미한다. 고종 3년(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다시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을 설치했는데 기보연해는 경기도 해안지역을 의미한다. 임시 군사지휘부인 순무영은 군무 활동지를 명시해서 운영하였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를 호남과 호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해서 경군을 이끌고 진압하도록 했다. 전국에 걸친 2차봉기가 일어나자 위기 상황을 파악한 왕조정부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양호도순무사에 임명해서 진압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도순무영은 경군 병영과 지방 병영만 지휘하지 않았다. 진압에 관련된 군사상 기밀은 해당 군현에서 곧바로 순무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정희에게 내린 국왕의 교서는 도순무사가 ‘품계로는 도원수에 비교’되고, ‘재상의 반열에 해당’한다고 했다. 최고 군사지휘부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감사 · 충청감사 · 전라감사 · 경상감사 · 황해감사 · 강원감사도 도순무사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갑오군정실기> 조선왕조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 백서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양서순무영과 기보연해순무영은 그런 전례에 따라 전란 종료 후 각각 5책씩 <순무영등록>을 만들었다. 이 등록은 홍경래난과 병인양요를 생생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양호도순무영의 등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등록>은 공문서를 모은 형태를 띤다. 주고받은 공문을 날짜별로 편집해서 각종 사건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문서를 모은 것은 아니다. 양호도순무영의 문서 담당 인원은 11명이었다. 이들은 공문서를 분류하고 묶어놓은 일이 책무가 된다. 이런 직책이 있으면 틀림없이 공문서집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공문서집의 존재는 2011년 12월에 실체가 확인되었다. 이때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도서 1205책이 반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고도서가 중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본 궁내청 소재 조선왕조 도서 환수기념 특별전’을 열었는데 ‘국내에 없는 유일본’인 <갑오군정실기>가 포함되었다. <갑오군정실기>를 검토한 결과 그 체제가 기존 <순무영등록>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선례에 따라 도순무영의 설치 근거인 국왕의 윤허 기록을 첫 부분에 실었고, 날짜별로 일어난 사건과 수발한 공문을 전재하였다. 오직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구한 이력 배경 양호도순무영은 설치 목적을 완수한 이후 잔무까지 처리하고 해산하지 못했다. 일본공사의 압력을 받아 중도에 폐지된 까닭이었다. 양호도순무영이 일본공사관과 협조하지 않자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외부대신 김윤식을 공사관에 불러 지침을 내리는 등 간섭을 자행하였다. 마침내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도순무영을 와해시켰다. 도순무사 신정희는 12월 23일에 강화유수로 전임되었고, 같은 날 중군 허진은 경기도 통진부사로 좌천되었다. 좌선봉 이규태도 전라도 파견 현지에서 소환되었다. 이런 까닭에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을 도순무사와 중군이 관여하는 형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갑오군정실기>는 잘 정서한 필사본이지만 중앙관서에서 만든 책으로는 체제가 번듯하지 않다. 우선 이름도 <순무영등록> 또는 <양호도순무영등록>이 아닌 <갑오군정실기>라고 붙였다. 유일본 여부도 알 수가 없다. 정서를 한 것을 보면 서사가 베낀 것으로 보이나 몇 벌을 필사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도순무영에서 공식으로 만든 보고서라면 더 필사를 해서 여러 권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주도한 사람에 관한 기록이 없다. 도순무영의 종사관이든 참모사이든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성책한 담당자의 이름이 없다. 도순무사 신정희의 가전 장서에도 이 책이 존재했다는 증언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과 대신이 협력한 군부가 소장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도서에 포함되었을 수가 있다. 무려 한 세기 이상 <갑오군정실기>는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상태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반환도서에 들어가서 되찾게 된 것이다. <갑오군정실기> 10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각 책에 공문을 정리한 날짜와 면수는 다양하다. 1책 (118면) : 갑오 9월 22일 – 10월 11일 2책 (87면) : 갑오 10월 11일 – 10월 20일 3책 (92면) : 갑오 10월 21일 – 11월 2일 4책 (98면) : 갑오 11월 3일 - 11월 15일 5책 (72면) : 갑오 11월 16일 - 11월 21일 6책 (95면) : 갑오 11월 21일 - 11월 30일 7책 (76면) : 갑오 12월 1일 – 12월 10일 8책 (67면) : 갑오 12월 10일 - 12월 15일 9책 (104면) : 갑오 12월 16일 – 12월 28일 10책(114면) : 유영장졸(留營將卒) 출진장졸(出陣將卒) 기공(紀功) 합계 923면 날짜로 보면 짧을 경우 6일치 공문서를 모았고, 길 경우 20일에 달하는 기간의 공문서를 모았다. 각 책의 면수도 모두 다르다. 8책의 67면에서 1책의 118면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난다. 내용에 따라서 구분하지도 않았다. 같은 날에 해당하는 내용이 앞책의 마지막과 뒷책의 첫부분에 이어져 있기도 하다. 정서를 한 후 일정한 기준을 두지 않고 면수와 관계없이 책으로 묶었다. 도순무영에 속해서 활동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그리고 인원수를 기록한 10책의 유영장졸(留營將卒)은 서울의 도순무영 본부에서 활동한 장졸을 의미한다. 유영장졸 중 일부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고, 뒤에 군사를 거느려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인물도 있다. 여기에 전재된 주요 공문서는 <고종실록>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각진전령> <선봉진일기> 등에 실린 각종 자료와 동일하다. 1959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동학란기록> 2책에 포함되어서 일찍 알려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자료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공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전국 여러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활동상이 처음 나와서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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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0 17:3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4)자랑스러울 수 없는 공훈 기록 –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두 개의 인명록 〈동학당정토인록〉, 〈갑오군공록〉

〈동학당정토인록〉은 1894~1895년 동학농민혁명의 진압과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사람을 표창하기 위해 만든 자료이다. 작성년대와 주체는 표기되지 않았으나, 당시 갑오개혁정부의 군부가 여러 기관에서 올린 명단을 취합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순무사 신정희(申正熙) 종1품 졸서(卒逝)’라고 표기되어 있고, 또 ‘좌선봉 이규태(李圭泰) 졸서(卒逝)’라고 했는데, 이규태의 사망일자가 1895년 6월 23일(『관보』 1895년 7월 9일자)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록 내용으로는 주책(籌策, 4명), 장령(將領, 25명), 주모(主謀, 17명), 공략(攻略, 309명, 중복 3명), 의려(義旅, 346명, 중복 2명), 정탐(偵探, 64명) 등 6개 부분에 모두 765명에 대해 공훈 내역을 기록하였다. ① 주책에는 순무사 신정희, 중군 허진, 군부협판 권재형, 종사관 정인표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② 장령에는 좌선봉 이규태, 호연초토사 이승우, 호남초토사 민종렬, 충청감사 박제순, 충청병사 이장회를 비롯하여 지휘부를 구성한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다. ③ 주모는 실제 전투현장에서 군부 지휘부를 구성한 인사들로 참령 이승원 호연(湖沿)참모관을 비롯하여 순무영 참모관, 순무영참모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④ 공략은 전국 각지방에서 출전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인사들로 대개 경리청, 통위영, 장위영 등의 영관, 대관 등이며, 각지방에서는 영장과 별군관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⑤ 의려는 대개 각지방의 수성군 내지 민보군으로 활약한 인사를 포괄하고 있다. 전라도 고부(전현감 은덕중), 고창, 부안, 태인, 나주, 전주, 구례, 순천 등이며, 경상도 하동(전부사 이윤식), 거창 등, 경기도 양근(전판관 김태영), 지평, 개성, 충청도 태안, 홍주(전현감 민기호), 보령(정산군수 박홍양), 목천, 서산, 천안(군수 윤영렬, 전영장 유상후 등, 전참봉 윤치소), 공주(전오위장 강원백), 제천 등, 강원도 강릉(전오위장 윤세중), 원주, 양양 등, 황해도 신천(의례장 진사 안태훈)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의려 중에는 각 지방에서 관직이 없는 유학도 다수 차지하여 있다. 이어 ⑥ 정탐에는 별군관 순행양호 정위 남만리를 비롯하여 64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전국에 걸쳐 중앙과 지방의 각종 부대, 의려 등을 망라하고 있어 동학농민군 토벌 상황을 알 수 있고,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을 살펴볼 수 있다. 〈갑오군공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진압과 토벌에 군공(軍功)이 있는 인사들의 이름과 군공 내용을 적어 놓은 자료이다. 기록 방식으로는 군공을 세운 사람의 당시 직함과 이름을 적고, 다음으로 군공에 따라 기존의 품계와 군공을 받게 된 구체적인 내용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전체 기록된 인사는 모두 410명이다. 전체 인명 숫자에 대해 약간 혼선이 있다. 군관 출신(出身) 이병식(李秉植)의 경우 이후 같은 직위와 동일 이름이 발견되어 중출(重出)이라고 표기하였고, 수안퇴리(遂安退吏) 권성돈(權成敦)도 다시 반복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제외하면 실제 명단은 약간 축소된다. 군공 서열로 보면, 순무사 신정희를 필두로 해서 중군 허진(許璡), 군부협판 권재형(權在衡), 종사관 정인표(鄭寅杓) 등을 비롯하여 호남초토사 민종렬, 호연초토사 이승우, 충청감사 박제순, 전라감사 이도재, 좌선봉 이규태, 청주병사 이장회, 전경리영관 군수 성하영, 전순무참모관 주서 박봉양 등이 나열되어 있다. 공훈 내역은 민종렬 경우와 같이, “뜻을 세워 궁리하고 계획하여 외따로 고립된 성을 끝내 지켰다[矢志運籌竟守孤城]”라고 대개 8자 문구로 표현하였다. 이어 통위영관 등 영관급, 통위대장 등 대장급, 경리교장(經理敎長) 등 교장급, 순무참모관 등 참모관급, 순무별군관 등 군관급 등을 기록했다. 각지에서 창의(倡義)를 통해 군공을 세운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지방의 아전이나 직책 없이 단순히 공을 세운 일반민들도 동학농민군 전투와 토벌에 군공을 세운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공적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학농민군의 3대 지도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을 체포한 사실을 특기하였다. 전봉준을 생포하였던 순창 유학 김영철, 순창민 정창욱 등 3명을 거론하였고, 김개남과 관련해서는 심영병관(沁營兵房) 황헌주를 수행한 황시중, 김경석, 김시형, 윤치근 등을 기록하였으며, 고부사람 조인상(趙仁常), 순창 사람 이경우(李京佑) 등 11명이 손화중을 붙잡은 데 공을 세웠다. 그밖에 전 고창현감 은덕중(殷德中)은 손여옥을, 고창유학 서동식(徐東植)은 홍락관을, 무안유학 오한수(吳漢洙)는 배상옥을 체포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특이한 것은 일본군과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탄압한 교도소 대관, 통역 등의 명단도 나온다. 이들의 공로는 “일본군 진영에서 종군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隨從日陣始終效勞]”든지, “일본군 진영에서 공로가 적지 않았으며 큰 비류를 붙잡았다[效勞日陣捉得紳匪]” 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 병참총감 카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가 비밀지령을 내려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렬함을 요구한다. 향후 모조리 섬멸하라”고 명령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들은 동학농민군의 학살에 공동책임을 져야하는 인사인 셈이다. 일본정부에서는 별도로 일본군 전투공로자 457명, 전투를 하지 않은 공로자 157명 등을 포함하여 모두 627명을 포상대상으로 하고 있다. <자료 2> 《갑오군공록》의 첫 부분, 순무사 신정희 등의 명단과 품계, 그리고 공훈사실이 적혀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공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데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들을 수록하는 방식에는 여러 차이가 있었다. 〈동학당정토인록〉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참여한 인사 중 286명만이 〈갑오군공록〉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전라감사 이도재, 전현감 조원식, 강릉민보장 이수해(李守海) 등 124명이 추가로 군공록에 수록되었다. 한편 동학농민군 진압에 큰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군공록에 수록되지 못한 인물도 있다. 조희연(군부대신), 이두황(양호우선봉) 등이 그랬다. 이들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역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양 자료의 계승관계는 어떠할까. 공적 인명을 최종 정리한 시점은 언제일까. 갑오군공록은 1895년 8월 군공록 편찬에 들어가 ‘군공조사규례’가 마련되기도 했지만, 이때는 미처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1900년 11월 이후 작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김태웅, 「1894년 농민군 진압자의 정국 인식과 정치적 행로의 분기-〈갑오군공록〉 등재자를 중심으로」 『대한제국과 3·1운동』 휴머니스트, 2022, 320쪽 참조).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수십만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공훈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 인사들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시기 집권세력에 의해 충군애국의 표상으로 크게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공훈인명록은 수많은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참여자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가해자측의 기록이며, 일본과 협조하여 민중세력을 탄압한, 결코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공훈자들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2개의 자료는 모두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도 필사본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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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4.11.14 18:2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3)<취의록>과 <거의록>- 고창지역 수성군 기록물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된 <취의록>과 <거의록>은 전북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민간 보수층의 움직임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취의록>은 1894년 9월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여한 수성군의 명단을 기록한 자료이다. 모두 1책 44면으로 되어 있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수성군 성명을 지역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는데, 수성군에 참여한 인원은 고창 424명, 흥덕 77명, 고부 25명, 장성 8명, 무장 48명 등 총 582명이다. 그리고 부록으로 강영중 등 5명의 명의로 9월 9일 작성된 취의통문(聚義通文)이 첨부되어 있어, 수성군을 조직한 이유와 목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동학농민군을 역적으로 간주, 의를 들어 토벌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1894년 9월 9일 통문을 돌려 <취의록> 명단과 같은 수성군을 모집하였으나, 곧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흥덕 이서면 용강에 살던 유학자 강영중은 고창과 흥덕지역에 살던 지인들과 자주 만나 모의한 끝에 수성군을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흥덕현감 윤석진(尹錫禛)의 동의하에 9월 9일 자신을 비롯한 8명의 명의로 ‘취의통문’을 돌려 수성군을 모집하였으나, 이 때는 동학농민군 힘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영중 등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시국을 관망하였다. 그러다 전봉준부대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이후인 11월 15일 다시 수성군을 조직하고자 흥덕현감 윤석진의 동의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윤석진은 “의거를 청한 일은 함부로 허락하기 어렵다. 왕의 군대가 당도할 때 마땅히 직접 묻고 허락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정부군이 고창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거사를 만류하였다. 대부분의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이 나주를 점령하기 위해 나주쪽으로 남하하였지만, 아직 차치구가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이 고창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치구는 전봉준의 후군대장으로서 공주와 논산 전투에서 패배한 뒤 흥덕으로 후퇴하여 머물러 있었다. 고창지역 수성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정부군과 일본군이 전라도로 남하한 11월 하순 이후부터 1895년초이다. 1책 27면 분량의 <거의록>은 바로 고창지역 수성군이 활동한 시말과 그 과정에서 생산한 문서들을 모아놓은 기록물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거의록>에는 1895년 4월에 백낙규가 작성한 ‘흥덕・고창 창의서’를 서문으로 실은 뒤, 1894년 9월 9일 강영중 등 8명 명의로 작성된 ‘창의사실’, 1894년 11월 고창 유생 김영철 등이 흥덕현감에게 올린 상서(上書), 1894년 11월 25일자 비밀지령, 1894년 11월 29일 전령, 1894년 12월 흥덕 유생 강영중 등이 정부군 앞으로 올린 상서, 1894년 12월 장성에 도착한 정부 진압군(양호순무선봉진)에서 흥덕 수성소에 보낸 전령, 흥덕・고창 수성청 좌목 등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거의록>은 1895년 4월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뒤 관련 사실과 자료들을 모아 필사해 놓은 기록물로서, 고창지역 전현직 관리와 유생들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어 동학농민군의 죽음 이면에 있는 보수유생층의 동정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실제 흥덕현감 윤석진은 11월 25일 태도를 바꾸어 <거의록>에 수록된 비밀지령을 내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 무렵 정부군 230명은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11월 30일 고부, 12월 1일 흥덕, 12월 2일 무장으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일부 병력을 무장에 남겨놓은 채 12월 6일 영광으로 이동하였다. 무장은 손화중의 근거지이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 엄중히 수색하였다. 이러한 정부군의 전략은 적중하였다. 그 무렵 손화중은 12월 1일 광주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한 뒤 12월 3일 이후 고창지역으로 되돌아왔고 홍낙관도 광주에서 흥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집을 떠난 고창지역 다른 동학농민군들도 12월 3일 이후 광주에서 속속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부군과 수성군이었다. 홍낙관은 12월 9일 흥덕 임리(林里)에서, 손화중은 12월 11일 체포되었다. 무장에 머물며 손화중 등 거물급 지도자를 체포한 정부군은 손화중과 홍낙관을 함평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에게 압송한 뒤, 12월 19일 무장에서 김광오(金光五) 등 4명을 체포하였다. 20일에는 고창읍으로 행군하여 김치삼(金致三)․남사규(南士奎)를 생포하였다. 다음 날에는 흥덕에서 이백오(李伯五) 등 5명을 붙잡아 일본군에게 압송하였다. 이렇게 1894년 12월에 들어와 고창지역을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정부군이 장악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러자 강영중 등은 당시 장성에 머물로 있던 양호순무선봉진 우선봉 이두황에게 소장을 보내, 흥덕현감에게 흥덕·고창·무장 3읍의 수성 책임을 맡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두황은 12월 7일자로 흥덕 수성소에 전령을 내려, 동학의 각 접주들이 각 마을에 다수 은닉해 있을 것이니 이들을 색출하여 그 가운데 행패가 심한 자들은 백성들을 모아 즉시 처형하고 나머지 위협에 의해 할 수 없이 따라다닌 자들은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전령은 <거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흥덕 수성소를 중심으로 고창지역 수성군은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을 찾아내 처형하거나 일본군에게 인계하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거의록>에 수록된 ‘흥덕・고창 수성청 좌목’과 같이 체계적으로 운영된 수성소가 설치되고 수성군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면서,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귀가한 동학농민군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실제 흥덕 수성군은 12월에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을 샅샅이 수색하여 서상옥(徐相玉)과 정무경을 체포하여 즉시 효수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나주에 갔다가 흥덕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흥덕의 대접주였던 고태국도 수성군에게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그 외에 많은 고창지역 동학농민군들이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죽거나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되었다. 이런 동학농민군의 비참한 실상이 비록 <취의록>과 <거의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균형있게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수성군 활동은 전국 곳곳에서 이루어졌지만, 관련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지역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취의록>과 <거의록>은 고창지역 수성군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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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7 17:4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2)난파유고(蘭坡遺稿)>와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1. 〈난파유고(蘭坡遺稿)〉와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개요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라도 나주의 수성군에 가담하였거나 호응하여 활동한 나주 출신 인사들이 남긴 문집이다. 따라서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에는 서로 겹치는 내용이 적지 않다. 나주는 동학농민혁명 발발 직후부터 목사 민종렬이 중심이 되어 수성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의 진입을 저지하였다. 때문에 나주는 운봉, 제주와 함께 전라도에서 농민군 집강소가 설치되지 않은 드문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또 농민군의 1894년 10월 28일에는 나주에 호남초토영(湖南招討營)이 설치되고 목사 민종렬이 호남초토사로 임명된 이후 나주 수성군은 나주와 인근지역의 농민군을 진압하는 거점이 되었다. 〈난파유고〉와 〈금성정의록〉에는 나주 수성군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과 농민군이 나주 인근 지역 곳곳에서 벌인 자세한 전투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전라도 서남부 일대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전투 상황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손화중·최경선·오권선‧배상옥 등이 이끄는 나주, 광주, 무안 일대의 농민군 활동에 대해서 다른 자료들에 비해 매우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2. 〈난파유고〉 〈난파유고〉는 나주의 향리가문 출신으로 호장(戶長)을 맡고 있다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 수성군 도통장(都統將)에 선임되어 사실상 나주 수성군을 지휘하였던 정진석(鄭錫珍, 1851~1896)의 문집으로 4권 1책이며 1913년에 간행되었다. 정석진의 자는 태완(台完)이며 난파(蘭坡)는 그의 호이다. 정석진이 이끈 나주 수성군은 나주성 수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난파유고〉에는 정석진의 글 몇 건과 그가 도통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농민군을 격퇴한 공을 기리는 나주 유생들의 글, 그리고 나주지방 농민군과 벌인 전투 상황을 소상히 기록한 <정장군토평일기(鄭將軍討平日記)> 및 그의 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토평일기>의 서문은 〈금성정의록〉을 저술한 나주 유생 이병수(李炳壽)가 썼다. 〈난파유고〉에는 1894년 7월초에 전개된 나주성 공방전과 10월~11월에 걸쳐 일어난 침산 전투(10월 21일), 용진산 전투(11월 13일), 고막포 전투(11월 18일), 함박산 전투(11월 23일) 등의 전투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토평일기〉말미에는 동학농민군에 의한 장흥 강진 병영의 잇따른 함락 소식과 영암의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특히 수성군과 정석진이 맹활약하던 10월 말 이후에도 수성군의 핵심을 이룬 것은 향리층이었으며, 이들은 수성군에 소요되는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는 사실도 〈난파유고〉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한편 〈난파유고〉에는 무엇보다 전라도 서남 지역의 대표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고막포(古幕浦) 전투에 대해 전개과정 뿐만 아니라, 각지로부터 농민군이 진격하고 진지를 치는 과정, 이에 대응하여 민보군과 관군이 배치되는 상황 등의 전후 상황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난파유고〉에 따르면 고막포 전투는 11월 18일 일어났지만, 1894년 11월 17일부터 고막포 주변으로 무안, 함평일대의 농민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그 일대의 산봉우리 등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의 수자는 5~6만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어 고막교(古幕橋)까지 퇴각하던 농민군이 수성군의 추격에 쫓겨 조수로 인해 불어난 물에 빠져 죽는 참상 등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전투 상황을 적어두고 있다. 3. 〈금성정의록〉 〈금성정의록〉은 나주의 유생 이병수(李炳壽, 1855~1941)의 문집 〈겸산유고(謙山遺稿)〉 권19·20에 수록되어 있다. 나주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갑‧을‧병 3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은 주로 갑편에 실려 있다. 평소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교유(校儒)로 살아가던 이병수는 1893년 12월 부임한 나주 목사 민종렬(閔種烈)이 당시 동학이 확산되어 가던 동학에 대응하기 위해 향약을 강화할 때 직월(直月)을 맡아 도약장(都約長)인 진사 나동륜(羅東綸)과 함께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1894년의 기록에는 먼저 나주의 접주 오권선(吳權善)에 대해 쓰고 있으며, 4월에 목사 민종렬의 주도로 수성군을 조직한 일, 그 직후 민종렬이 전봉준과 글을 주고받은 일, 7월 초에 전개된 나주성 공방전, 이어 8월 13일 전봉준이 찾아와서 나주 목사 민종렬과 담판을 벌인 일, 10월~11월에 걸쳐 일어난 용진산 전투, 침산 전투, 고막포 전투, 함박산 전투 등의 전후 상황과 전투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을편에는 동학농민군 진압과 관련한 군공을 적은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군공을 인정받고 난 뒤 그 축하 글인 「본주인사하군공록(本州人士賀軍功狀)」, 장성의 유생 기우만(奇宇萬)이 정석진에게 보낸 「토평후기증정장군서(討平後寄贈鄭將軍書)」, 기우만이 쓴 「토평비명병서(討平碑銘竝序)」 등이 실려 있다. 병편에는 1896년에 나주와 장성 등지의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을 관련 사실을 기록하였다. 〈금성정의록〉에는 몇 가지 특기할만한 내용들이 있다. 우선 도통장인 호장 정태완을 비롯하여 주요 직책과 명단, 편제 등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또 각 마을의 청년들을 60개 초(哨)로 나누어 수성군으로 편성하였다는 점, 이들에게는 성 한편에 군막사를 지어 기거하게 하고 군량과 부식도 지급하였다는 사실을 적어핵심 간부들은 모두 전현직 향리층이 맡고 있었다. 다른 자료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또 〈금성정의록〉에는 전봉준과 나주 목사 민종렬 간의 서신 교환, 그리고 직접 담판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무안(4월 9일 점령)과 영광(4월 12일 점령)을 거쳐 진군하던 농민군은 나주성의 수비가 매우 엄한 것을 보고 함평읍으로 방향을 바꾸어 몇 일 동안 유진하던 농민군이 나주 (공형)에 서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싣고 있다. 이 역시 일부 자료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특히 농민군의 서신에 대해 민종렬이 “명분 없는 군사는 법에 의거하여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답신을 했다는 사실은 〈오하기문〉과 〈금성정의록〉에만 나오지만, 〈금성정의록〉에는 전후 사정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록되어 있다. 또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官民相和)〉를 합의한 다음 8월 13일 나주 목사 민종렬을 찾아 담판한 전후 사실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담판한 내용이나 상황이 목사 민종렬을 치켜세우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지만, 역시 다른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전봉준 공초>에서는 8월 그믐 사이에 전라감사의 ‘영(令)’을 가지고 나주로 가서 민보군을 해산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공술하였다) 배항섭(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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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1 19:4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1)홍양기사(洪陽紀事)·창계신공실기(蒼溪申公實記)

홍양기사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홍양기사(洪陽紀事)〉 〈홍양기사(洪陽紀事)〉는 충청도와 인접한 경기도 남양 사람 홍건(洪健)이 기록한 충청도 홍주(洪州)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록이다. 지금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홍건은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의 친우로 지내다가 이승우가 홍주목사로 특별히 제수되자 그의 막객(幕客)으로 따라 내려가 동학농민혁명의 진압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홍주는 충청도 서북 내포(內浦) 지역의 중심지로서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끝까지 동학농민군에 함락되지 않은 고을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목사 이승우는 10월 8일에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임명되었으며 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던 홍건도 11월 16일에 홍주 영장(營將)에 발탁되었다. 〈홍양기사〉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가 마친 다음인 7월 7일 홍주에서 동학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밤마다 일어나고 있으며, 홍주 관아의 인원들까지도 동학에 물든 정황이 파악되었다. 8월 6일에는 선무사 정경원이 홍주로 와서 인근의 접주들을 소집하여 효유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유명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는 홍주의 김영필(金永弼)·정대철(丁大哲)·이한규(李漢奎)·정원갑(鄭元甲)·나성뢰(羅成蕾),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禮山)의 박덕칠(朴德七)·박도일(朴道一), 대흥(大興)의 유치교(兪致敎), 보령(保寧)의 이원백(李源百), 남포(藍浦)의 추용성(秋鏞成), 정산(定山)의 김기창(金基昌), 면천(沔川)의 이창구(李昌求)이다. 그 가운데 이창구의 무리가 가장 많아서 50,000~60,000명이라고 하였다. 18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가 시작되고 나서 홍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10월 3일 각처의 동학농민군이 최시형의 지휘라고 하며 도처에서 일어났다. 서산 수령 박정기(朴錠基)·태안부사(泰安府使)·신백희(申百熙)·별유관(別諭官) 김경제가 모두 그 피해를 당했다. 해미·예산·덕산 등의 고을에서는 군기를 모두 빼앗겼다. 해미·덕산·대천·예산·목시(木市) 등지에서 진세(陣勢)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10월 8일 홍주목사 이승우가 호연초토사로 임명되고 나서부터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이 진행되었다. 관군은 10월 20일 合德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여 60여 명을 사로잡았다. 10월 25일 일본군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와 통역관 이이다(飯田)가 군사를 인솔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결국 10월 28일부터 29일 사이에 홍주성에서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다. 〈홍양기사〉에 따르면 관군의 대포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일본군이 대포를 잘 쏘아서 적중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병기는 뛰어나지 못하고 서툰 자들이 쏘고 법도가 없어서 끝내 관군 및 일본군 중에 1명도 해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 상당 수는 사로잡혔고 이틀 동안 성 아래 죽은 사람만 600~700명에 이르렀다. 〈홍양기사〉에는 11월 8일 서산 해미에서 일어난 전투도 수록되어 있다. 해미성을 점거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죽산부사 이두황이 지휘하는 병력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여 서산의 도비산(道飛山)에 물러나서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내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완전히 가라앉게 되었다. 〈홍양기사〉는 홍주성 영장을 받았던 홍건의 기록인 만큼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으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홍주성 전투에서 관군 측의 탄약을 허비하게 하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위장전술을 사용한 농민군의 전술, 이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이창구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애첩을 납치하여 미인계를 쓴 이야기,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이창구가 체포되는 경위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실려 있다. 비록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기록이지만 그들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홍양기사〉가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바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창계신공실기(蒼溪申公實記)〉 경상도 의흥(義興, 현재 군위군 의흥면)에서 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내용을 일기체로 적어 편집하여 인쇄한 자료이다. 이 자료의 저자는 신석찬(申錫燦, 1851~1921)이다. 신석찬의 활동은 뒤에 붙여 놓은 행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행장에 따르면 호는 창계(蒼溪)이고 나이는 40대 후반이며 의흥향교의 약장(約長) 또는 교의(校議)를 지냈다. 표지의 책명은 〈창계실기(蒼溪實記)〉라고 했으나 『창계신공실기서(蒼溪申公實記序)』 라고 하여 〈창계신공실기(蒼溪申公實記〉를 책명으로 볼 수 있다. 이상교(李相敎)가 지은 서문에 “공은 바위굴에서 책을 읽는 선비요, 초야에서 조잡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석찬은 벼슬은 하지 않은 시골 선비였다. 내용 기술은 일기체로 1894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사실을 적어 놓았으며 끝에 포상과 관련되는 문건들을 붙여 놓았다. 이 내용의 기본은 의흥을 중심으로 창의하고 농민군을 토벌한 과정을 담았다. 앞에 “동도의 변고가 처음 호서와 호남에서 시작하여 봄에서 여름 사이에 더욱 퍼졌는데,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그사이에 물들어 낙동강의 좌우와 상하가 모조리 소굴이 되었으며 약탈이 끝이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동학농민군이 먼저 의성에서 봉기하고 나서 이들이 8월 19일에 의흥 지방을 침입하였다고도 기록하였다. 일기 순서에 따르면, 8월 18일 신석찬은 동료들을 모아 방어의 계책을 논의하였고 의흥수령 성태영(成泰永)과도 의논하였다. 그는 의흥ㆍ칠곡ㆍ군위 세 고을의 사족들과 민정(民丁)을 모아 수천 명의 민보군을 조직하고 양곡과 군기를 거두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석찬은 향교의 조직에 따라 약소(約所)를 꾸려 총지휘관인 약장이 되었고, 이어 면 단위의 약장, 강장(講長)을 임명하였다. 이들 민보군은 1차로 신원전투에서 동학농민군 27명을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2차로 신녕, 3차로 효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세 곳은 모두 강좌(江左) 지역으로 김산 등 강우 지역에서 쫓겨오는 농민군을 방어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 민보군 일부를 강우로 보내 김산 등지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이어 1905년에 의병이 일어나자 개화 정부의 하수인인 수령들이 이들의 방어에 나섰다. 이에 신석찬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조직을 다시 가동해 토벌에 나섰는데, 이 사실을 끝 부분에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2권에는 부록을 실었는데 선무사 이중하(李重夏)가 전달한 선유문, 토포사인 조중응(趙重應)이 보낸 전령, 신석찬이 의흥약장의 이름으로 보낸 전령 등의 문건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자료와 내용은 향교 중심의 민보군이 조직된 점과 강좌 지역의 민보군 활동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끝에는 의흥현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군위현감에게 신석찬의 포상을 요청하는 장초(狀草)와 상서(上書), 경상도 유생의 이름으로 경상관찰사에 보낸 서장, 군부아문과 궁내부에 보낸 서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관련 부처에서 끝내 포상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로 보아도 신석찬은 유력 인사로 짐작된다. 맨 끝에는 신석찬의 일대기를 적은 행장이 수록되어 있고, 또 다른 유생들이 신석찬과 관련하여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발문에는 족질인 신태경이 편집해 발간한 경위를 밝혀 놓았다.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전개상황과 민보군의 활동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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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24 17:2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0)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 시굴점 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오늘 나주 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어 우선 굶어 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요. 돈 300여 냥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 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불망 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 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사하나 서로 만나 말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의복 상하 벌, 보신 한 벌, 토시 한 벌, 주의 한 벌, 망건, 노자 3냥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 터이니 혹 가고 싶어도 올 수 없으면 옥동 가고골 한기에서 의복 지어 보내소서.”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접주급 인사 한달문(韓達文, 1859~1895)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나주 감옥에 있던 중에 고향집에 있는 모친 쌍동댁(雙同宅) 박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작성일자는 1894년 12월로 추정되며 한달문의 당시 나이는 36세였다. 이 편지의 작성자 한달문은 1859년 6월 2일 전라도 화순 도암면에서 출생한 인물로, 한경진(韓敬鎭)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족보와 호적 명은 한영우(韓英愚)이며 호는 묵헌(黙軒)이다. 그는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 잡혀 있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한달문은 돈 300냥이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 ‘부디부디 명심 불망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 하옵니다’라고 애원하고 있으며, 옥중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추운 날씨를 이기기 위해 ‘의복ㆍ보신(명주옷)ㆍ토지ㆍ주의ㆍ망건’ 등을 함께 요청하고 있다. 이 글에서 ‘노자 3냥(路子 三兩)’은 추가로 기록된 것으로 편지를 전해준 자에게 전달하는 돈으로 파악된다. 호남초토사이자 나주목사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진압 책임자였던 민종렬(閔種烈)이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한 동학도(東學徒)들의 성명과 처리 상항 등을 중앙에 보고한 자료인 『전라도 각읍 소착 동도수효 및 소획집물 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汁物幷錄成冊)』(1894)에서 동학농민군 한달문이 잡혀 압송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김낙철역사(金洛喆歷史)』에서도 나주 감영에 잡혀 온 농민군들이 가혹하게 다루어진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나주초등학교 소각장 부근이 나주옥(羅州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주옥’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인 이병수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1946),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1926), 이두황의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1894) 등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문헌 기록과 증언에 따른 한달문의 동학농민군 참여 내용을 보면, 그는 전남 화순 도암면 동두산 인근 부락에서 ‘한대장’이라 지칭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이 태인에서 해산한 후 전라도 남부지방으로 밀려 내려와 12월 중순 격전장이었던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토벌대와 싸워 농민군 13명이 전사하고 1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한달문은 14명의 포로 중 한 명으로 나주옥에서 모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유족 증언에 의하면 그는 다음 해 3월 석방되어 조카 한일수가 업고 집에 돌아왔으나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장독으로 사망하였다 한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사업이 진행되자,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가 한달문을 참여자로, 한우회 등을 유족을 신청한 바 있다. 이에 2005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는 1894년 전투 중에 작성된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와 전라도 각읍 소착 동도수효 및 소획집물 병록성책 등을 근거로 한달문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그의 손자 한우회를 유족으로 인정하였다. ※ A : 한달문 거주지, B: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 C: 나주옥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 및 관련 내용은 전남대 사학과 이상식 교수에 의해 광주일보(1994. 2. 16)에 처음 보도되었다. 편지의 원본은 한관용(1937년생)이 한달문의 직계 후손인 백부의 유품에서 발견하여 간직해온 것으로 손자인 한우회(1938년생)가 오랫동안 보관해 오다가 2019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증하여 현재 이 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편지에는 나주 감옥에 갇혔던 농민군의 절박한 상황과 어려움을 잘 드러내고 있고, 짧은 편지이지만 동학농민군의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는 역사성과 진정성, 19세기 전라도 방언을 국어사적으로 작성했다는 희귀성 등의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동학농민군 활동과 관련한 문서의 대부분은 관변자료나 양반 유생들의 기록이고,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농민군이 남긴 기록 중 특히 서간문은 한문으로 작성된 유광화 편지를 제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 편지의 주요 내용 및 특징을 보면, 한달문이 나주 감옥에 갇혀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자금으로 300냥을 모친에게 부탁하고 있는데, 이는 농민군의 옥중생활과 나주 감옥의 실상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가 모친에게 돈 300냥과 노자, 의복 등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집안이 300냥을 융통할 수 있는 집안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당시 목숨 거래를 담보로 부패한 자금을 요구했던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라는 글을 통해 농민군 격전지인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달문 편지는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한달문이 모친에게 보내기 위해 직접 한글로 작성한 유일한 옥중 한글 서신은 전북대 국어교육학과 서형국 교수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한글 편지 형식으로 국어사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그가 작성한 한글은 19세기 말 사용되었던 한글로 전라도 방언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서간문 형식 등을 보여주고 있어 국어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서 ‘고상’은 ‘고생(苦生)’의 한자어 모음 ‘ㅐ’가 ‘ㅏ’로 변동된 것이고, ‘신표ㅣᄒᆞ여’에서 ‘표(標)’를 ‘표ㅣ’로 적은 것으로 중간 단계를 거쳐 정착한 표기이다. ‘어마임 항게’는 ‘ᄒᆞᆫᄢᅴ’에서 온 ‘한께’가 변동된 발음을 그대로 작성한 것이고, ‘지달이던이’는 ‘기다리더니’로 ‘기’가 ‘지’로 구개음화된 표현, ‘업신이’, ‘깊피’, ‘직시’는 각기 ‘없으니’, ‘급히’, ‘즉시’의 모음으로 ‘ㅡ’가 ‘ㅣ’로 발음된 것이고, ‘모로고’는 ‘모르고’를 적은 것으로 모음 동화를 겪어 어간이 고정된 것이다. 이 편지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을 비롯하여 동학농민군 주도세력과 그들을 진압한 조선 정부, 일본군의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해 왔던 기존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싸우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농민군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보존 및 연구 가치가 충분한 자료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자료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유물로서 이 편지가 갖는 사료적 및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대표성․희소성도 충분하다.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2022년 2월 국가유산청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국가유산청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한달문 편지는 전남 화순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나주 감옥에 수감 중이던 한달문(韓達文, 1859~1895)이 고향에 계신 어머님께 직접 쓴 한글 편지 원본이다. 본인의 구명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양반가의 자제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로 활동한 유광화가 동생에게 보낸 한문 편지와는 다른 면에서 동학농민군의 처지와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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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11 13:25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9) '순교약력'과 '종리원사부동학사'- 남원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을 담다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순교약력>과 <종리원사부동학사>는 남원지역 동학의 역사와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1995년에 남원대접주 김홍기(金洪基, 1856-1895)의 3대손인 김동규(金東圭)가 소장하고 있던 기록물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이들 기록물은 남원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유태홍의 진술을 남원군 종리사 최병현이 각각 1923년과 1924년에 정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기억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때 중요 기록물로 선정된 것이다. <순교약력>은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유태홍의 진술을 남원군 종리사 최병현이 1923년에 정리한 1책 61면의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이 생산된 직접적인 계기는 1923년 3월 10일 있었던 천도교 남원교구의 ‘갑오 이래 순교인의 위령식’이었다. 남원교구는 3월 1일 42명의 순교인과 47명의 환원인 총 91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8일 뒤인 3월 9일에는 위령문을 차례로 작성하였다. 순교인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그 직후 체포되어 처형된 인물이고, 환원인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교단 내에서 활약하다가 사망한 인물들이다. 특히 이 자료가 주목되는 점은 갑오년에 사망한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김홍기 등 남원지역 유명접주들의 출생, 거주지, 동학 입교시기, 연원, 지위, 활동내용, 체포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순교자 42명 가운데 남원 출신이 38명으로, 출생지는 둔덕면과 산동면 출신이 각각 7명과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둔덕면은 김홍기가 친인척을 적극 동학에 가입시켜 활동한 결과 김홍기가 살던 탑동리 출신이 가장 많았다. 순교자의 나이는 1850년대생이 12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1860년대생 10명이다. 이것으로 보아 동학농민혁명기에 활동한 남원 토착 동학농민군은 주로 젊은 나이층인 20-30대가 주축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전투과정에서 죽은 인물도 있지만, 주로 12월에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남원과 오수장터 등지에서 처형되었다. 일부는 감옥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또 일부는 출옥하였지만, 이후에도 동학 지목이 심해 병사하거나 자결하기도 하였다. 당시 처참하였던 남원의 동학농민혁명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순교약력>은 수록 인물을 사망자로 국한한 데다, 남원지역과 연원이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실제 동학농민혁명기 사망한 남원 출신 동학농민군은 <순교약력>에서 정리한 인원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종리원사부동학사>는 1926년 남원군 천도교 종리사 최병현이 갑오년 당시의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유태홍의 구술을 바탕으로 남원군의 동학 연혁을 기록한 책이다. 이 자료는 1861년 수운 최제우가 남원에 온 사실부터 1904년 일진회사건까지 44년 동안의 남원지역 동학 역사를 정리하고 있지만, 전체 분량의 60% 정도가 갑오년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리원사부동학사>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남원에 온 사실을 다른 어느 자료보다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실제 수운이 남원에 와서 은적암에 기거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1861 6월에 대신사가 호남으로 향하시어 산수풍토와 인심풍속을 살펴보시고 본군 남문 밖 광한루 아래 오작교 옆 서형칠 집에 와서 머물며 수일을 유숙하다가 그 집은 약방인 까닭에 번잡함으로 인하여 부근에 있는 서형칠의 조카 공창윤 집에 유숙하시며 서형칠, 공창윤,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에게 전도하실 때 --- 동년 가을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은적암은 본군 서쪽 10리쯤 교룡산성 덕밀암 내 대신사께서 거주하신 방호)에 돌아와서 연성으로 가을 겨울을 지내시고”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다른 어느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내용들이다. 다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또다른 내용은 1892-1893년에 걸친 동학운동 관련 내용이다.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은 1892년 10월 공주집회를 시작으로 삼례집회, 광화문 복합상소, 금구집회, 보은집회를 연이어 개최하여 동학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이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서인주이나, 그에 관한 기록이 없어 그동안 서인주의 활동상을 알 수 없었다. <종리원사부동학사>에는 삼례집회 때 서인주가 전라감영의 영장 김시풍과 담판짓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1892년 11월 삼례집회 때 남원 출신 유태홍이 전봉준과 함께 장두가 되어 소장을 전라감사에게 제출한 점, 1893년 1월 10일 전봉준이 작성한 창의문을 김영기가 남원에 게시하고 유태홍이 구례에 첨부한 사실, 금구 원평집회의 전말 등은 다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특히 <종리원사부동학사>는 남원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가운데 김개남이 남원에 5영을 설치한 사실, 전봉준이 운봉 박봉양을 찾아가 그를 설득해 민보군을 해산시킨 사실과 김개남과 8일간에 걸쳐 논쟁을 벌인 사실,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된 11월 방아치전투, 전봉준의 최후 모습 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11월 28일 남원성 전투 이후 살아 남은 동학농민군 오백명이 유태홍을 따라 순천으로 향하였다는 기록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종리원사부동학사>는 “수백인이 갑오 12월부터 을미 봄 여름까지 남원장터와 오수장터 및 각 방면 도회지에서 총칼의 원혼이 되고 그 외 생존 도인도 가산탕진하고 망명도주로 유리걸식하여 거처없이 떠도는 자가 수백인이었다.”라고 하면서 처참히 죽어간 남원 동학농민군의 최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다만, <종리원사부동학사> 내용은 유태홍의 구술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몇 가지 사실 오류도 있어 고증이 요구된다. 김개남 부대가 남원을 떠나 행군한 곳도 청주가 아닌, 공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일부 기억의 오류가 있을지라도, <순교약력>과 <남원종리원사부동학사>는 남원지역에 동학이 확산되는 일련의 과정과 남원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에 관한 다양한 기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기록물이 1995년에 공개된 이후 <영상일기>∙<갑오약력>∙<박봉양경력서> 등과 함께 남원지역 동학, 동학농민혁명, 천도교 연구에 활용되어 남원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특히 다른 기록물의 경우 정부나 양반유생의 시각에서 기록된 반면, 이 두 자료는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구술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이 점은 동학농민군이 직접 남긴 기록물이 많지 않은 실정에서 매우 가치 있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아닐 수 없다. /김양식(청주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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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03 15:4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8) '토비대략', 경상도 상주소모영 유격병의 동학농민군 진압기록

△상주의 민보군 결성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 소식은 전국에 전해졌다. 경상도 상주까지 들려온 소식은 놀라웠다. 고부가 4월에 함락되었고, 5월에는 장성과 금구 등 17개 읍이 함락되었으며, 그리고 전주성에 들어가 웅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학 교단이 기포령을 내린 직후인 9월 하순 낙동강 연안의 읍성들도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주와 선산 읍성이 점거된 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경상도 북서부 군현의 동학도들은 선산 해평과 상주 낙동에 설치된 일본군 병참부와 군용전신소를 둔 것을 잘 알았다. 이 병참부에는 청국과 전쟁하기 위한 대규모의 일본군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반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본군은 즉각 대응해서 상주와 선산 읍성을 기습하고 동학농민군을 퇴각시켰다. 상주는 목사가 사라진 공관상태에서 향리들이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먼저 민보군을 만든 예천의 선례에 따라 집강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리들은 읍성 내외의 민정을 소집해서 군사조직을 만들고, 읍성 재점거를 경계하는 한편 외촌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다. 이때 정부에서 삼남에 각각 두 명씩 소모사를 임명해서 동학농민군을 자력으로 제압하도록 독려하였다. 상주 소모사에는 이 지역 거족대가의 일원인 전승지 정의묵을 선임하였다. 정의묵은 향리들이 만든 민보군을 흡수해서 병력을 확보한 후 소모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유격장 김석중(金奭中)에게 병대를 맡겨서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순회하도록 했다. △상주 유격병대의 진중일기인 <토비대략> 유격장 김석중은 상주 경내와 함께 충청도 청산과 보은 일대를 다니면서 동학 거점을 수색해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그 과정을 기록한 진중일기가 <토비대략(討匪大略)>이다. <토비대략>에서 다른 지역 소식도 기록하고 있다. 우선 첫머리에 소개하는 1893년 4월의 충청도 보은 장내와 전라도 금구 원평에 모였던 동학집회에 관한 내용이다. 보은 장내리 집회는 인접지의 사건이기 때문에 썼을 것이지만 먼 지역인 금구 원평의 집회도 나온다. 원평집회도 큰 소식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 다음에 1894년 4월 이후 전라도 고부와 장성 그리고 전주성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였다. 예천의 갑오년 사정을 기록한 <갑오척사록>과 같이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이 경상도 동학도들의 봉기에 영향을 준 증거로 보인다. <토비대략>에 기록하지 않으면 알지 못했을 동학농민군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모동면의 남진갑 이화춘 김군중 유학언 조왈경, 화동면 안치서 신광서 정기복 등과 청주대접주 김자선 등등 여러 사람이 나온다. 이 자료는 상주의 서부 일대를 비롯 11월 이후 충청도 남동부의 실상과 활동 인물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각지를 다니며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서 주요 항목을 찾아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주 유격병의 동학농민군 처형 죄목 유격장 김석중은 소모사로부터 유격병 지휘에 전권을 부여받았다. 유격병의 과감한 활동과 동학농민군 처형 등은 소모영의 절목에서 확인되는 철저한 소탕 방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토비대략>에는 처형된 동학농민군의 죄목을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적극적으로 붙잡아서 처형한 대상의 죄목은 지도자인 거괴와 범분난상적(犯分亂常賊)이었다. 상천민이 분수를 모르고 양반이나 상전을 욕보인 행위가 가장 중한 범죄라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천민이 상전을 모욕하는 행위와 양반을 구타하거나 묶어놓고 위협하거나 양반부녀를 겁박하는 등을 무거운 죄상으로 적었다. 수십 명의 유격병이 외촌을 돌면서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찾아다니며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호되게 징치하자 살기 위해 귀화해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가와 상전가에 들어가 행패를 한 주동자는 귀화를 용납하지 않고 일일이 지명해서 붙잡았다. 이들은 읍내 장터 등지에서 효수되거나 포살되었다. △충청도 보은 일대의 진압기록 11월 27일 상주 유격병은 보은과 청산을 기습하였다. 동학 교주 최시형의 체포가 첫 번째 목적이었다. 보은에는 동학대도소가 위치했고, 청산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살았다. 소모영 정탐원의 보고에 따라 네 부대로 나누어 밤중에 몰래 들이쳤으나 최시형은 잡지 못했다. 12월 3일에는 옥천 고관리에 최시형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기습했으나 찾지 못했다. 직전에 전라도 임실로 피신한 것이다. 상주 유격병이 동학 본거지인 보은과 청산 일대를 순회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군 대군이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논산에 가서 전봉준군과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군이 옥천에서 동학 본거지를 지키던 수비군을 격파해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었다. 충청병영도 병력을 파견하여 수색하였다. 그래서 마치 빈집 털이를 하는 것처럼 상주유격병이 돌아다녔다. △유격장 김석중의 족쇄가 된 청산 사건 유격장 김석중은 11월 30일 청산에 들어가 이른바 팔로도성찰 강경중과 부성찰 허용을 붙잡아서 처형하고, 향리 김경연까지 동학농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추적하였다. 청산 현감도 윽박질러서 김경연의 체포를 강요하였다. 다음과 같은 방문도 게시하였다. “청산은 적의 피해를 홀로 많이 받았으니 최적은 연이어 소굴로 삼았고, 배적은 적들을 못된 짓 하도록 인도하였으며, 김리(金吏)는 위협하고 공갈하여 한 읍이 모두 넋을 빼앗겼다.” 청산은 동학 세력에 눌렸던 시기에 양반과 향리도 동학농민군 직함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외지에서 온 유격병이 그 사정을 모르고 이들까지 처형하고 추적한 것이다. 상주 유격병이 상주 경내를 벗어나서 충청도에 들어가 지방관을 협박하고 현임 향리를 다그친 청산 사건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관할지역을 넘어가 지방관을 윽박지른 문제와 팔로도성찰이라는 직함을 강요해서 받은 인물의 처형 문제는 내전 상태의 어지러운 시기라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었다. 충청감영과 의정부는 이를 청산민 침학사건으로 인식했다. 상주 유격병이 청산에서 거친 행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1894년은 몇년 동안 연이은 가뭄으로 농민들이 고통을 당했는데 한 마을 전체가 기민인 경우도 있었다. 상주 유격병이 청산의 효림리에 들어가니 20호나 되는 민호가 굶주리고 있는 참상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군량으로 가져간 양식을 주어 구제를 했다. △수많은 학살이 자행된 보은 북실전투 손병희 통령이 이끈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 이후 임실에서 교주 최시형을 만나서 충청도 땅으로 돌아왔다. ‘수만 명’ 병력이 온다는 소문은 관치질서를 회복한 행군로 인근의 각 군현을 경동시켰다. 그래서 충청감영과 병영은 물론 경상감영과 일본군 병참부에 구원 요청을 잇달아 보냈다. 상주 유격병 240명은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선인 율계령에 진을 치고 경내 침입을 막았고, 경상감영의 영병은 추풍령을 막았다. 충청병영과 옥천 민보군도 영동 용산으로 급파되었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일본군은 낙동병참부에서 1개분대가 왔고, 대구병참부에서도 1개분대가 파견되었다. 이 시기에 경부 철도노선을 조사하기 위한 군로실측대 호위병 14명이 동학농민군 행군을 뒤따라왔다. 보은 장내리 대도소가 불태워진 것을 본 동학농민군은 보은읍내에 들어가 불을 질러 보복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인 종곡에 들어가 하루밤을 보내려고 했다. 추격해온 상주 유격병과 일본군은 종곡을 기습하였다. 종곡전투의 주도권은 일본군이 장악했다. 상주 유격병을 50명씩 일본군 장교 두 명에게 보내고, 나머지 병력을 유격장 김석중이 이끌었다. 일본군 보고서의 전투상황은 실감이 난다. “종곡 남쪽 고지를 점령하였더니 동학도 약 1만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 산개하여 약 세 번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의 정신을 교란하게 한 다음 돌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허둥지둥 당황하여 마을 밖으로 무너져 달아났다. 약 1,000m를 추격하여 요지를 택해 점령하였다. 이때가 오전 3시였다.” 일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탄약은 1,120발을 소비했고, 동학농민군 전사자는 300여명이며 부상자는 미상이라고 했다. 소와 말 80여 마리는 일본군이 노획물로 가져갔다. <토비대략>은 희생자의 수를 다르게 기재했다. “목을 자른 것이 10여 명이었으며, 어지러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2,200여 명이었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한 것이 393명이었다.”한 것이다. 이 전투로 ‘수만 명’을 칭했던 동학교단의 농민군이 궤멸하였다. 상주 유격병의 최대 전과가 북실전투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평가는 달랐다. 종곡에 몰려있던 동학농민군을 일본군과 협력해서 학살한 사건이 너무 지나쳤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각종 모함이 심하여 심지어 이를 조사하기 위해 염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퍼졌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격장 김석중의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고, <갑오군공록>에도 실리지 못했다. <토비대략> 갑오(1894년) 10월 내용.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안동관찰사가 된 김석중 종곡전투 직후 유격장 김석중은 일본군 장교들과 편지를 왕래하거나 만나서 교류를 계속하였다. 이들이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 김석중을 지원자가 되었다. 1895년 4월 김석중은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 대구토포사 지석영이 동래부사에 임명된 시기와 같았다. 종곡전투를 같이 치룬 일본군 장교 미야케 대위는 김석중에게 지석영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지난 해 종곡의 전역(戰役)은 김공의 남다른 공인데, 지금 들으니 해임되어 고향으로 물러났다 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이 급선무이고, 대저 공이 있으면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김공 같은 이는 참으로 영재입니다. 동국(東國) 사람으로 그와 비교할 사람이 드무니 혹 상주에서 혹 다른 곳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관직에 나가면 저희들이 용병하는 데도 크게 편리할 것입니다. 군은 어찌하여 정부에 말하지 않습니까? 김공이 관직에 나가는 것은 귀국에만 경하할 일이 아니라 이웃 나라도 일대 경사입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후 내정을 간섭하던 일본의 영향력은 강력하였다. 이런 편지가 초야의 유생을 돌연 안동부사로 나아가게 하였다.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김석중은 관찰사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일본 장교들과 가깝던 김석중은 개화정권의 정책을 적극 따랐다. 을미사변 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먼저 단발을 할 정도였다. 군사 활동에도 능력을 보였다. 안동에 의병이 편성되자 김석중은 외지로 가서 대구병정을 데려와 안동부를 탈환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김석중은 의병을 적대하는 관찰사로 변신한 것이다. 안동의 의병은 다시 관찰부 공격을 기도하였고, 예안과 예천 등지에서도 속속 의병이 결성되었다. 김석중은 안동부를 빠져나가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토비대략>의 사료가치 <토비대략>은 필사본 자료이다. 한 부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또 한 부가 상주 우산리의 진양정씨 종가에 보관되어 있다. 군공을 인정받지 못한 김석중은 진중일기를 여러 부 필사해서 돌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중 두 부가 확인된다. <토비대략>은 높은 사료가치를 갖고 있다. 먼저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모영의 동학농민군 진압상황을 전해준다. 1894년에 정부는 전국에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장 등이 임명해서 민보군을 결성하고 지휘하는 군권을 부여했지만 그 활동상을 전해주는 자료가 발굴된 적이 없었다. 상주소모영은 공문서집인 <소모사실>과 소모사의 일기인 <소모일기>, 그리고 진중일기 <토비대략>을 남겼고, 그 자료들의 중요성이 알려졌다. 이 자료를 통해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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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26 14:5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7)'전봉준 공초', 2차 농민 봉기 목적은 어떻게 다루어졌나?

<전봉준공초>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를 심문한 기록이다. 원래 공초(供招)라고 되어있어야 하나 공초(供草)로 표기되어 있다. 기록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고, 국한문혼용체와 한문체로 혼용되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원본이, 이를 베낀 사본은 장서각에, 그리고 별도로 국가기록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전봉준에 대한 최초의 심문은 1895년 2월 9일(음력)부터 시작된다. 이날 법무아문 참의 이재정의 주관으로 그해 3월 중순까지 5차례 이루어졌다. 실제로는 6차례일 수도 있다. 공초자료 편철 순서가 약간 혼란이 있어, 2월 19일의 공초는 2번이나 거행되었다. 뒷부분 3차에 걸친 심문에는 일본 영사가 개입되어 있다. 재판 장소는 법무아문이 새로 마련한 권설재판소 법정이었다. 여기는 원래 의금부의 청사였던 만큼 국가의 중대 사안에 관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때 재판과정에는 참의 약간 명과 주사 1인이 입회하였지만,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찌다 사다즈치(內田定槌)가 직접 간여했다. 그는 개항 이후 일본인과 관련된 민사와 형사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영사가 직접 간여할 수 있다는 ‘회심(會審)’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본 개입은 명백히 불법적이고 내정간섭이었다. 이때 권설재판소에서 6차에 걸쳐 이루어진 전봉준에 대한 심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1차 (초초문목, 음력 2월 초9일 : 양력 3월 5일, 국한문혼용체) : 전봉준의 개인 신상과 동학과의 관계, 동학농민군의 봉기원인과 전개과정(고부봉기, 재차기포, 전주기포 등)을 통해 농민군의 봉기와 경과 2차 (재초문목, 2월 11일 : 3월 7일) : 탐관오리의 불법 탐학과 동학 조직과 역할, 재차 기포와 소모사, 최시형과의 관계 등을 통하여 봉기의 주도층과 조직에 대한 질문 3차 (3초문목, 2월 19일 : 3월 15일) : 흥선대원군의 효유문과 관련하여 송희옥과의 관계, 흥선대원군과 2차 봉기 모의 가능성 추궁 4차 (5차문목, 2월 19일 : 3월 15일, 일영사 심문) : 송희옥과 전봉준과의 관계를 집중 추궁하면서 대원군 효유문과 묘당 효유문을 사전 인지했는지 여부 집중 추궁 5차 (4차문목, 3월 초7일 : 4월 1일, 일영사 심문, 한문체) : 전봉준의 이름과 별호 등 신상을 묻고 집강소 설치과정 등 사항, 삼례 회동과 문서 대필 문제 재론(마지막 편철에 위치함) 6차 (5차문목, 3월 초10일 : 4월 4일, 일영사 심문, 한문체) : 편지나 서간의 작성자 여부와 더불어 최경선, 송희옥 등과의 관계 재추궁(3초 문목 다음에 위치함). 전봉준 심문과 재판과정에서는 전봉준의 신상과 동학농민군의 고부 봉기. 재차 봉기, 2차 봉기 등 전쟁 과정, 동학의 조직과 역할 등 모두 276개 질의와 응답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과 기병 목적 등에 대해 전봉준이 직접 진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았다. 고부봉기의 주모자로 추대된 경위, 만석보 수세의 부담 강화, 봉기할 때 동학도가 적고 원민이 많았다는 사실 등이 특기하다. 그는 동학이 “수심(守心)하여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일이외다”라고 하여 유교지식인으로서의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봉기 의도와 과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었다. 커다란 논란은 2차 봉기의 목적과 정치세력과의 연관성 심문에서 일어났다. 3차 심문(2월 19일)부터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집중 추궁하게 되자 그는 진술 태도를 바꾸었다. 참모 역할을 했던 송희옥의 서한도 문제였는데, 이 편지가 흥선대원군의 효유문과 2차 봉기를 연결시켜주는 결정적인 문서였기 때문이다. 정부측은 법무대신 김학우의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현정부의 쿠데타 음모와 연결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본측도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의 관련 사실을 캐물어 사주에 의한 농민봉기로 몰아가려고 하였다. 전봉준은 이준용 반란 사실 등과 엮어 자신들을 처벌하려는 정부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그르쳤으며, 인민들도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과의 모의, 또는 연계설을 일체 부정하였다. 그는 농민군 독자적으로, 그리고 민중들의 삶을 위해 봉기했다는 정당성을 재차 강조했다. 결국 2차 봉기의 목적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그는 재봉기 이유로 일본이 “궁궐을 침범한 연유를 꾸짖고자 하였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재판관이 “그러면 일본병과 그리고 각국인으로 서울에 머물러 돌아다니는 자를 모두 구축하려 하였느냐”고 다그쳐 묻자, 전봉준은 “그러함이 아니라, 각국인은 다만 통상만 하는데, 일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을 치고 체류하는 고로 우리나라 영토를 침략하려는 데 있을 것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차 봉기는 외국과의 통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정치·군사적 침략사실을 질책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외세 배격과 자주적 개혁, 합의법에 의한 정치운영 등 주장하면서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진술하는 동안 시종일관 민중들의 정의로운 행동이었음을 강조했다. 이후 <전봉준공초>는 1895년 3월 29일(음력) 임시 권설재판소에서 내린〈판결선고서〉의 근거자료가 되었다. 다만 심문과정에서 일본측이 활용한 증빙서류가 무려 1,496통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판결선고서에는 2차 봉기의 목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재판부는 흥선대원군과의 결합, 혹은 사주로 인해 봉기하였다는 혐의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전봉준의 본래 진술대로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동학농민군과 지도자들의 처벌 근거를 조선왕조국가 내의 형법 질서를 위배하였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이미 폐지되어버린<대전통편>형전 ‘추단조(推斷條)’ 규정이었다. 마침내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5명에게 교형(絞刑)으로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봉기의 원인이었던 일본의 침략성 여부와 반일민족 운동은 평가에서 제외하였다. 2차 봉기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범죄사실로 간주하지 않았고, 반일민족운동에 관해서도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판결선고서는 전봉준의 본의와 진술 내용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봉준 등의 사형집행과정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갑오개혁 정부는 새 법률제도와 재판소 규정을 마련하고 이미 3월 25일에 공포하였다. 법률 1호 <재판소구성법>과 칙령 50호 <재판소처무규정통칙>을 통해 민·형사 모두 2심의 재판과 소송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새 제도가 시행되기 불과 몇 시간 전,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3월 30일(양력 4월 24일) 오전 2시 종묘 앞 좌감옥소 처형대에서 전격 처형되었다. 법무대신 서광범, 참의 장박 등 담당 관리들이 신식 재판제도를 시행하기 직전에 서둘러 처형한 것이다. 이는 갑오개혁과 일본측에 의해 감행된 정치적·편파적인 재판이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법제도의 효시로서 ‘법의 날’(4월 25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신식 재판제도가 시민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농민군 지도자 처형을 애써 감추고 있다. 이렇게 전봉준과 재판부 사이에 벌인 실체적 진실과 정당성 공방에도 불구하고 끝내 2차 봉기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체와 정당성을 간직하고 있는 전봉준의 공초 기록은 언젠가 새롭게 재판 관련 자료의 발견과 함께 심층적 분석이 이루어질 날을 고대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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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19 15:53

[세계 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6)이두황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정부에서 설치한 순문영(巡撫營) 예하 선봉장(先鋒將) 이두황(李斗璜∙1858~1916)의 진중일기(陣中日記)다. 1894년 9월 10일부터 1895년 2월 18일까지의 일기체 기록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그 외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철학과 윤사순 교수 소장본도 있다고 한다. 이두황의 본관은 인천으로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이다. 그의 원적은 서울 서부 방교(芳橋)로 확인된다. 가난한 상인(常人)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친군(親軍) 좌영(左營) 초관(哨官)으로 임명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양호초토영에 편성되어 관군으로 동학농민군 탄압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에 이르러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정부는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을 순무영 예하의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으로 임명하여 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케 하였다. 우선봉 이두황과 마찬가지로 좌선봉으로는 안성군수(安城郡守)이자 경리청(經理廳) 영관(領官) 성하영(成夏泳)이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였다. 일기에 따르면 9월 10일 의정부에서 ‘비도(匪徒)’가 기전(畿甸), 죽산(竹山), 안성(安城) 등지까지 올라오니 병사를 차출하여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이두황과 성하영이 상기초포사(相機剿捕事)로 파견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관(領官)으로서 이두황이 지휘한 장위영(壯衛營)은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군에 의하여 새롭게 조직된 부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부대를 지휘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두황의 활동은 친일(親日) 군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적극 협조하였고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하였는데,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에도 이두황의 친일 행적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두황은 9월 21일 경기도 용인에 도착하여 직곡의 접주 이용익(李用翊)과 김량의, 이삼준을 비롯한 20명을 붙잡았다. 22일 죽산에 도착하여 이용익, 이삼준을 포함한 4명은 사살하고, 나머지 16명은 방면하였다. 27일에는 이천에서 일본군이 붙잡은 30명 중 10명을 사살하였다. 10월 3일에는 서이면 노루목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우성칠(禹成七)을 체포 후 사살하였으며, 5일에는 죽산의 남일면(南一面) 주천(注川)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5명을 체포하였다. 이후 그는 충청도 방면으로 내려가 청산, 보은, 온양, 신창 등에서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 10월 22일 충청도 천안 목천 세성산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김복용(金福用) 등 5명을 생포하여 그들 모두를 죽였다. 11월 7일에는 해미성을 기습하여 동학농민군 약 40여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공주 우금지 전투 무렵이었다. 11월 14일에는 패주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노성(魯城)에서 공격하였고 뒤이어 전라도 전주에까지 들어갔다. 이두황은 대관 윤희영을 비롯한 100여 명의 병력을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의 지휘하에 있는 일본군 장교와 함께 원평까지 파견하였고 태인전투까지 참여시켜 동학농민군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속적으로 휘하 병력을 파견하여 전라도 임실, 남원, 순창, 곡성, 구례, 광양, 순천, 낙안, 보성, 장흥, 나주 등지를 돌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895년 1월 대둔산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던 동학농민군을 향해서도 병력을 파견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의 끝을 맺었다. 여기까지가 <양호우선봉일기>에 나타난 이두황의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이다. 앞에서 보듯이 이두황은 매우 적극적인 토벌 작업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이용익, 우성칠, 김복용 등 주요 지도자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동학농민군을 살해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태인까지 뒤쫓아가서 결국에는 해산시켰으며 전라도 남부지역 일대에 흩어진 동학농민군 잔당까지 섬멸하는 집요함을 보여주었다. 동학농민군 최후 항전인 1895년 1월 대둔산 전투에까지 손을 뻗친 것을 볼 때 이두황은 조선군 장령 중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장 앞장선 인물로 손꼽힐 수 있다.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 이두황의 행적은 더욱 기가 막히다. 1895년 초 이두황은 죽산부사와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 자리를 내려놓고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훈련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훈련대는 1895년 8월 20일 일본군이 일으킨 명성황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일으킨 당사자가 되었다. 이때 이두황은 일본군에 협조하여 그들의 경복궁 침입을 도와주었고 그 자신도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였다. 이두황이 지휘한 훈련대의 을미사변 개입은 그 정황이 뚜렷한 것이었다. 사건 이후 훈련대 정위(正尉)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을 은폐한 죄과로 고등재판소에서 모반죄를 적용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두황은 이미 일본으로 도주하여 훈련대 장교 우범선을 비롯하여 정난교, 유혁료 등과 함께 체포령을 받았다. 1896년 2월 국왕 고종이 일본군의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간 아관파천이 벌어진 후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일본으로 도주하여 망명한 이두황을 비롯하여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우범선, 이범래, 이진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다시금 떨어졌다. 이두황의 일본 도주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부산으로 도주하여 조선 관리의 눈을 피해 일본인의 집에 숨어있으면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바꿔 입은 후 1897년 1월 간신히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 그 후 교토를 경유하여 도쿄로 갔으며, 이후 일본 각지를 유람하며 각 지역의 유지들과 교류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고 황제 고종이 퇴위함에 따라 이두황은 10년에 달하는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새로 황제로 등극한 순종은 9월 6일 곧바로 그의 죄를 사면하였고, 10월 8일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하였다. 이윽고 이두황은 1908년 1월 22일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죽산부사 겸 장위영 영관으로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서 1894년 11월 전라도 전주에 진입하고 전라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섬멸했던 이두황의 화려한 복귀였다. 이두황은 통감부 체제하에서도 일본에 적극 협력하여 일본군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이두황은 동학농민군 진압뿐만 아니라 의병 진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데 이르도록 하였다. 당연히 이두황은 일제 치하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린다. 전라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던 이두황은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다시금 전라북도 장관으로 임명되어 1916년 그가 죽기까지 재직하였다.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이두황을 일제 조선총독부 당국이 다시금 전라북도 장관으로 임명한 사실은 일제가 그만큼 동학농민군 진압 및 혹시라도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움직임의 화근 제거에 진심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두황이 죽고 나서 장례는 1916년 3월 13일 전주 다가공원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묘는 지금도 전주 기린봉에 남아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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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9.05 15: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⑮우금치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공주 우금치전투의 관군 기록 전봉준 장군은 우금치에서 4차례 접전했다고 말했다. 1895년 2월 9일 첫 번째 문초를 받을 때 “두 차례 접전 뒤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 자가 불과 3,000여 명이요, 그 뒤 또 두 차례 접전한 뒤 점고한 즉 불과 500여 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금치전투는 4차례의 전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공산초비기>는 40차에서 50차에 걸쳐 벌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에이 산허리에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적병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자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했는데 40∼50차례를 이와 같이 하였다(又登脊齊發 如是者 爲四五十次).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 한 차례의 접전에서 10여 차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우금치를 넘으려고 하면 일본군과 관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다시 넘으려고 시도하면 사격을 가해왔다. 동학농민군은 죽고 또 죽어도 고지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하고 또 공격했다. 그리고 쓰러졌다. 얼마나 많이 희생했으면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고 했을까? 이러한 전투 상황은 실제 경험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공산초비기>의 필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쓴 사람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전투를 요약 정리한 내용으로 보아 상황 파악이 가능한 인물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금치전투를 기록한 주요 사료인 <공산초비기> 공주성 공방전은 여러 자료가 기록하고 있다. 민간 자료는 간략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관군 문서가 비교적 자세하다. 관군 자료가 <선봉진일기>,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정보첩>, <갑오군정실기> 등이다. <선봉진일기>와 <순무선봉진등록>은 출정군을 지휘한 선봉장 이규태가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것인데 여기에 우금치전투의 1차 자료가 들어있다. 양호도순무영은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 전례에 따라 편제했는데 출정군 지휘관은 달랐다. 기보연해순무영은 중군 이용희가 출정군을 지휘했지만 양호도순무영의 중군 허진은 출정하지 않았다. 대원군파라고 일본 공사관에서 꺼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출정군을 지휘한 이규태의 선봉진 기록과 순무사 보고 내용이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군의 전투보고서는 후비보병 제19대대의 보고 계통인 남부병참감을 거쳐 히로시마대본영 병참총감에게 직보되었다. 대본영 기록에는 동학농민군 관련 보고가 생략되고 있으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많은 내용을 전재하고 있다. 일본 정권의 실력자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공사로 온 9월 이후 일본군의 진압을 관장한 현지 실권자였다. 이노우에는 고종을 압박해서 갑오개혁을 강요하는 한편 청국과 전쟁에 긴요한 군용전신을 단절시킨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각종 보고문서가 들어갔는데 우금치전투 전후의 보고서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우금치전투의 핵심은 모두 빠져있다. 우금치전투뿐 아니라 일본군이 책임이 있는 학살 상황을 기록하지 않거나 희생자 수를 줄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우금치전투의 실상을 파악하는 자료로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결함이 있다. 동학농민군의 자료는 <균암장 임동호 씨 약력>이 자세하다. 동학농민군은 훗날 동학사 관련 책을 펴낼 때 기록한 우금치전투는 구체적인 내용 없이 줄거리만 대충 설명하고 있지만 경기도 여주 출신인 임동호가 술회하는 기록은 도움이 된다. 다만 젊은 동학농민군의 제한된 정보와 시각으로 인해 우금치전투 전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산초비기>가 갖는 사료로서의 중요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관군의 시각에서 기록한 자료이기 때문에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증과 지형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주공방전은 이인전투 · 효포전투 · 우금치전투 <공산초비기>는 동학농민군의 3차에 걸친 전투를 지도와 함께 기록했다. 이인전투와 효포전투, 그리고 우금치전투이다. 이인전투는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싸운 전투이고, 효포전투는 남접농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우금치전투는 남북접농민군이 일제히 우금치와 견준봉, 그리고 봉황산 일대에서 전개한 전투이다. 이인전투는 공주성 서남쪽 이인역에 있던 북접농민군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 소위가 거느린 1개 소대(<공산초비기>엔 100명으로 표기)와 구완회의 충청 감영병, 서산군수 성하영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해서 벌어진 전투이다. 관군을 정면에 세운 일본군이 엄폐물 뒤에 숨어서 공격한 상황이 잘 드러난다. 효포전투는 동쪽 효포로 진격해서 공산성 방향으로 돌아 감영을 공격하려는 북접농민군을 이인에서 돌아온 서산군수 성하영과 백낙완의 경리청 병대가 공격한 전투이다. 고지에 올라가서 사격을 가하자 남접농민군이 후퇴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두 전투는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공주로 들어오기 이전에 충청감사 박제순이 통제한 전투였다. 한창 전투 중에 군호를 내려 이인에서 관군을 불러들인 충청감사에게 불만을 표하는 기록도 있다. 한 달여 뒤에 벌어진 우금치전투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서로분진대가 공주에 들어와 남북접농민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일본군 대위 모리오 마사이치가 이끈 일본군은 3개 소대였다. 당진 승전곡 전투에서 밀린 1개소대가 홍주성 방어에 가세해 있었다. 이어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도 통위영 병력을 지휘해서 감영에 들어왔다. 우금치 일대를 방어한 경군과 감영병은 모리오 대위가 장악했다. 선봉장의 위상을 가진 이규태는 모리오 대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가 뒤에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다. △우금치전투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민족의 이정표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침략한 시기에 강력한 현지민의 항쟁이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중에서 아프리카 남부의 줄루전쟁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1879년에 3만 5000 명의 줄루전사가 이산들와나에서 1만 4000여 명의 영국군과 이에 협력한 원주민 병사를 제압했다. 그렇지만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용감한 병사가 많아도 무기가 열세하면 어쩔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금치를 오르고 또 오르다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다시는 그처럼 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금치의 분투와 감투 의지는 시대의 이정표가 되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려면 우리도 우수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침략과 반침략 투쟁에서 우금치전투는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우금치전투의 처절한 희생은 한국인이 현재를 살아가는 당당한 동력이 되고 있다. 귀중한 기록유산인 <공산초비기>는 규장각에서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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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9 16:4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⑭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

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물을 생산하였다. 이들 기록물에는 조선 정부의 논의과정을 기록한 문서, 진압군이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은 많은 유물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조선 정부 및 조선 정부가 편성한 진압군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 주목된다.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은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벌받은 동학농민군 다수에 대한 재판기록이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의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는 평안도 강계부 관찰사 조승현 등 6명의 을미의병 관련 고등재판소 판결문도 수록하고 있지만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계가 없으므로 표 설명문에서는 제외하였다. 형사재판원본은 갑오개혁 시기 설치된 법무아문 권설재판소, 법무아문 임시재판소, 법무아문 고등재판소,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대한제국 시기의 고등재판소, 평리원의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결문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동요(東擾)’로, 참여자들을 ‘비도(匪徒)’ 동도(東徒)‘ ’비류(匪類)‘ ’동비(東匪)‘ ’동학배(東學輩)‘로 그 지도자를 ’비괴(匪魁)‘ ’동학거괴(東學巨魁), 농민군 토벌을 ’토비(討匪)‘ 등으로 비하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봉준, 손화중, 서장옥,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최시형 등 총 211명의 최종 판결 선고서가 포함된 판결기록으로 동학농민군 및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이다. 농민군 진압에 소홀하였거나 결탁한 일부 지방관도 처벌을 받았다. 2024년 8월 5일 현재 공식 등재된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3,817명으로 이 판결선고서에 기재된 관련자는 전체의 18.09%에 불과하다. 이 기록에서 1895년의 초기 선고에는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가 입회 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민병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되어도 심리와 판결 없이 현장에서 총살ㆍ참수 및 효수ㆍ타살, 원한에 의한 사살(私殺) 등으로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관련 기록도 매우 소략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형사재판원본은 1894~1895년 동학농민군 진압과 그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진 농민군 개별 인물들의 활동과 정부의 체포와 심리와 재판 선고 처벌 등을 이해하는 데도 역사자료로서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이미지를 포함한 원문 텍스트와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학관련판결선고서’로 되어있다. 문서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아래의 표는 전북일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동학농민군 관련 판결선고서의 핵심내용을 추려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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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⑬ 동학임명장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총 185건이다. 이를 작성주체별로 구분해 보면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30건(16%), 민간인이 생산한 기록물이 33건(18%), 조선정부가 생산한 보고서와 공문서가 122건(66%)으로 조선정부가 생산한 문서가 대부분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인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은 매우 적은 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많지 않은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들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동학임명장이다. 동학임명장은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이 북접법헌의 이름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1894년에 발급한 임명장이다. 현재 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은 18건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을 소장처별로 보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1건, 천도교중앙총부 6건, 독립기념관 1건이다. 이러한 임명장은 현재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시기를 1891년부터 1904년까지 확대하면 남아 있는 동학임명장은 대략 80건 정도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선정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추진과정에서 여러 기관의 자문을 통해 정해졌는데 이는‘국가기관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이 소장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로 보존 및 관리 대책이 명확한 자료’였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천도교중앙총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물만이 목록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도 세계기록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동학임명장은 모두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다. 전봉준의 이름으로 발급된 동학임명장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발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봉준은 동학임명장을 발급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었고,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최고책임자는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단의 틀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이끌면서 농민군을 조직화한 것은 백산대회 때이다. 이때 전봉준은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은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은 총참모, 최경선은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은 비서로 정하여 농민군대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 하부단위에 대한 조직은 구성하지 못하였다. 전봉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존 동학교단의 조직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최시형이 임명하고 그에 대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고 보여진다. 위의 표에서 임명장이 만들어진 시점을 보면 주로 1894년 7∼8월임이 확인된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하고 여기에 더하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 동학교단 조직은 포접제(包接制)로 운영되었다. 즉 접(接) → 포(包) → 동학교단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조직은 접(接)이다. 접에는 접주(接主)와 접사(接司)의 직책이 있다. 접주는 접의 책임자로서 교도를 관리하고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주요한 임무이다. 접사는 접주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문서는 1894년 9월 최시형이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이러한 접주임명장은 동학교단의 계통과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서의 오른쪽부터 보면 용담(龍潭)은 교조 최제우를 말하며 무극대도대덕(無極大道大德)은 최제우가 제시한 동학의 궁극적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대선생(大先生)은 교조 최제우의 존칭이며 시포덕(侍布德)은 최제우가 이 동학을 개창했다는 의미이다. 북접(北接)은 최시형을 말하며 무극대도대덕은 동학이 추구하는 목표로서 이를 최시형이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대도주(大道主)는 최시형의 존칭 또는 직책이다. 다음 태인(泰仁)은 지역을 말하며 지역의 책임자로서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고 있다. 다음 눈여볼 것은 도장이다. 접주임명장과 접사임명장의 경우, 도장이 5개가 찍혀 있다. 도장의 글자는 최시형의 호인 해월(海月)이다. 그런데 여기서 1894년 당시 최시형은 주로 보은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임명장이 만들어지고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는 교통과 통신이 제한된 상황에서 각 포의 대접주 명의로 임명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모두 최시형 명의로 임명장이 발급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지 한지에 ‘해월’이라고 하는 도장 5개를 찍어서 각 포에 내려주면 각 포에서 대접주가 문서의 형식에 맞게 글자를 쓰고 직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임명장의 글씨체가 다르고 도장 위에 글씨가 씌여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방 접주 임명장'과 '정성영 접사 임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러 개의 접을 관리하고 통할하는 조직이 포(包)이다.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大接主)라고 한다.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은 바로 이러한 대접주로서 많은 접을 거느린 포의 책임자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봉기한 지도자들은 대개 이러한 대접주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접주는 여러 접을 관할하기 때문에 이를 운영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육임직이다. 육임이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말한다. 교장은 알차고 덕망있는 사람(質實望厚員爲敎長), 교수는 성심수도하여 가르칠 사람(誠心修道可以傳授員爲敎授), 도집은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有風力明紀綱知境界員爲都執), 집강은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明是非可執紀綱員爲執綱), 대정은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持公平勤厚員爲大正), 중정은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能直言剛直員爲中正)으로 임명하였다. 각 포(包)에서 교장이나 교수에 임명된 사람을 보면 모두 포내(包內)의 장로나 덕망있는 사람들이고, 도집과 집강은 실질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대정이나 중정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서 포내의 실무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육임직의 임명장은 북접법헌이라는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한지 백지에 3개의 도장을 찍은 뒤에 각 포에 전달하여 각 포의 대접주가 직책과 이름을 기입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러 개의 포를 비롯하여 모든 동학의 조직을 관할하는 것이 바로 동학교단이다.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다. 최제우가 1860년 동학을 창도한 뒤 1864년 처형되었다. 이후 동학교단의 종통은 최시형이 이어받았다. 최시형은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동학교단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도 동학교단은 최시형이 교주로서 역할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어 처형된 1898년까지 이러한 체제는 지속되었다. 동학교단에서도 육임직은 운영되었다. 동학임명장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최시형의 동학교단과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후 이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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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9 08:4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⑫ 전봉준 상서∙동도창의소 고시문

● <전봉준 상서(全琫準上書)> : 반일투쟁을 위한 ‘민족적 대연합’ 추구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북상하던 전봉준이 논산에 주둔 중이던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글이다.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 준비는 1894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봉기 때도 ‘척왜양(斥倭洋)’ 구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5월 초순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인 5월 초부터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의 관심은 폐정 개혁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반일투쟁’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백성들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투쟁’에 착수하였다. 삼례에서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여를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반일투쟁을 전개하기에는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에도 다녀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또 각지의 관아에 반일투쟁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인근 지역의 관아들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추수가 거의 끝났고, 북접에서 기포를 결정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직후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달리 청주 쪽으로 북상하였다.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과 휘하의 농민군은 이미 도착해 있던 이유상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북상하는 과정에서, 또 논산에 주둔해 있는 동안 합세한 인근 고을이나 북접 휘하의 농민군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공주 진격을 앞둔 10월 16일 전봉준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의 자격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전봉준상서>를 보냈다. 이글에서 전봉준은 우선 ‘왜구(倭寇)’들이 침략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대신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생각에 위로는 임금을 위협하고 아래로는 일본 오랑캐와 결탁하여 백성들을 해치려 한다는 현 상황을 규탄하였다. 이어 초야에 사는 필부들인 농민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반일투쟁에 일어섰으니, 충청감사도 동참하여 ‘의를 위하여 죽을 것’을 요청하였다.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까지 포함하는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동도창의소의 한글 고시문, 행간을 다시 읽는다. 갑오년 11월 12일 동도창의소 명의로 발포한 고시문은 특이하게도 한글로 되어 있다. 2차 봉기의 분수령이던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정부군과 지방 감영군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다.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동학란기록>(하권, 379~380쪽)에서였다. 이 고시문은 정부군의 진압보고서류 중에서 노획한 문서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는 한글로 된 언문에다가 행간에 임의로 한자를 넣어서 의미를 분명하고자 하였다. 제목에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한글 문구를 ‘(京軍與營兵而敎市民)’으로 표기하여 ‘경군과 영병에게, 그리고 시민에게 가르친다’는 이상한 표현으로 변했다. 본래 언문 표현대로 하면, ‘경군과 영병, 향리(鄕吏)와 장교(將校), 시민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일 것이다. 고시문의 서두에는 개항 이래 조일 관계를 개관하면서 갑신개화파가 일본과 협력했다는 점을 거론하고, 1894년 갑오개혁파들이 왜국과 체결하여 경성에 들어와 군부(임금)를 핍박하여 국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1894년 6월 2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금년 뉵월의 개화간당’이라고 지적하였다(국편 편집본에는 ‘금년 십월’로 오기). 또한 갑오개혁 정부가 인민을 무휼하지 않고 도탄에 빠지게한 상황에 대해 ‘왜적(일본)’을 초멸하고 개화를 제어하고 조정을 청평하여 사직을 안보하려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때 사용된 ‘척왜척화’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설왕설래했다. 국편 간행본에 ‘척왜척화(斥倭 斥華)’로 한자를 첨기하여 동학농민군의 대외인식을 반일본·반중화라는 배외주의로 오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의문은 느낀 정창렬은 한글본 원본 사진을 확인하여 한자 오류임을 밝혔다(<갑오농민전쟁 연구>, 박사학위논문, 1991). 결국 개화간당 비판과 관련되어 ‘척화(斥化)’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시는 사실 조선 군대와 접전을 벌여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되었다는 후회와 질책을 가하고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 전후, 이른바 ‘조·일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선사람끼지 서로 죽이는 골육상잔을 중지하자면서 “조선사람끼리야 도 혹은 다르나 척왜 척화라는 기의를 같이”하자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자신을 섬멸하려 하는 정부와 영군에게조차 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런데 고시문 표기 중에는 “□성상, □군부, □조정, 충□군우국” 등 조정과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 앞에 한 칸을 띄어 쓰고 있다. 이는 당시 국왕이나 국가를 우선시하는 관행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의 의식 속에는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를 그대로 긍정하는데 머물렀다고 해석될 수는 없다. 앞서 공포된 <선유방문 한글 고시문>에서 “우리 성상이 극히 인자하시니 어찌 너희를 죽이랴 하시리오”라고 하여, 백성을 적자(赤子)로 인식하는 고종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고시문은 고종 윤음이나 농민군 진압의 방침을 정면 반박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시문의 전후 맥락은 갑오 11월 12일 같은 날에 배포한 정부군의 탄압책을 비판하는 <고시문(示京軍營兵)>과 바로 연결되고, 순무영에서 배포한 고시문(한문 및 언문)에 대한 전면 거부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고시문은 조선사람끼리 동족상잔을 이제 그만두고 인민의 생명과 생존을 존중하자는 눈물겨운 호소를 담고 있다. 나아가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면에서 반전 평화 휴머니즘까지 느낄 수 있다. 원본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아카이브에 유리필름 사진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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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5:5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⑪<흥선대원군 효유문> :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8월~9월에 걸쳐 전국 각지에 전달된 문서로 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즉각 해산할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필사본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수록>, <미나미 고시로 문서>, <소모사실>(정의묵), <뮈텔문서> 등의 자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각 문서에 따라 일부의 글자에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효유문>을 내린 날짜도 <수록>과 <뮈텔문서>에는 ‘개국 503년(1894) 8월’로 되어있고, <소모사실>에는 ‘개국 503년(1894)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하는 이 효유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서 자체의 진위 문제, 그리고 대원군의 원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이는 대원군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효유문>은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부터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제기되었으며, 대원군이 실권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대부분의 글에서 이 문제가 언급되어 왔으나, 1945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양자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00주년을 맞은 이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은 거의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봉준과 대원군이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고,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대원군과 동학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미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부터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돈 바 있다. 또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대원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월 16일 영광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完營留陣所)에 보낸 통문이다. 이때 농민군은 자신들의 의거가 “탐관오리를 개과혁신케 하고 국태공(國太公)을 감국(監國)케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4월 18일 함평에서 나주 공형(公兄)에게 보낸 통문과 4월 19일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정문(呈文), 5월 4일 역시 초토사에게 보낸 소지(所誌)와 그 무렵부터 제시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 등에서 대원군의 섭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2차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대원군 측이 보낸 밀사들과의 만남을 비롯하여 몇 차례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대원군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케 하지만, 언제부터, 또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원군은 1894년 6월 21일의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강제 점령을 계기로 집정한 직후부터 이미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해 준비해 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 언론이나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봉준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았거나 대원군의 비호를 기대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봉준 혹은 농민군 측에서 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동학농민혁명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 뿐만 아니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일찍부터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대원군을 접촉한 의도도 대원군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풍부한 기사를 생산한 일본 「二六新報」의 1894년 11월 14일자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동도가) 그들이 믿는 대원군과 미리 기맥을 통하였느냐 여부는 의문이지만, 전봉준의 인물됨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처음 기포가 반드시 대원군을 기대하였기 때문은 아님이 명확하다. 다만 그의 지략이 풍부하고 동도의 의기(義氣) 역시 한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원군이라는 목상(木像)을 대중의 눈앞에 세움으로써 조종(操縱)의 편리로 삼으려 한 것 같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에 임할 때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다음 그 힘을 모아 전주감영을 점령하고, 나아가 매관매작을 일삼는 민씨 척족세력을 타도하면 팔도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은 고을범위를 벗어나는 ‘반란’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자신들의 행위가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아직 반란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꺼리던 민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한 것이다. 이 점에서 대원군은 중요한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대원군은 이미 실세한 정치가로 188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운현궁에 유폐된 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중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던 정치가였고, 또 이미 10여년간 섭정을 한 경력이 있으며, 임오군란 시에도 일시적으로 섭정을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험이 있는 등 대중적 신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러한 대원군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이 결코 반란이 아님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이점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보낸 <피도소지(彼徒訴志)>에서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맡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불궤라 하느냐”라고 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 전봉준은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의 농민군 동원기도나 ‘정변계획’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전봉준이 제2차 기포를 결심하게 된 데는 농민군의 기포를 요구하기 위해 보낸 대원군 측의 밀사와 접촉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보낸 밀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군의 일본의 침략의도와 일본군이 진압하러 온다는 계획, 일본이 친일적 개화파를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려 하나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는 점 등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원군이 농민군의 재기포를 요구하는 밀사를 파견한 직후 또 다시 <효유문>을 보내 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전봉준으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재차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사실을 알고 나서도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재기포를 유보하여 왔으나, 대원군 측의 밀사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으로서는 농민군의 역량이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할 결심”으로 반일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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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6: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⑩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 이 세 건의 문서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1980년대 원광대 박순호교수로부터 입수되었다. 이 문서들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남긴 문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명록>은 1894년 7월에 작성된 것으로 <나주명록>이나 <함평갈동명록>보다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들 중에 제일 먼저 작성되었다. 작성 주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이라고 보여진다. 표지에는 갑오 7월이라 하여 1894년 7월 작성되었다. 이 <명록>에는 45명의 성명(姓名)과 자(字) 본관(本貫) 거주지(居住地) 그리고 나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나주거주(羅州居住)로 표시되어 있고, 마지막 7명은 함평(咸平)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록>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록(名錄)>(갑오 7월(1894년 7월)) 순서 성명 자(字) 본관 거주지 나이 1 김진선(金鎭善) 군명(君明) 부안 나주 50 2 김진묵(金鎭黙) 군백(君伯) 부안 나주 47 3 김세표(金世表) 치도(治道) 부안 나주 43 4 김진방(金鎭邦) 정만(正萬) 부안 나주 37 5 신석규(申錫圭) 우범(禹範) 평산 나주 35 6 김진필(金鎭必) 명오(明五) 부안 나주 35 7 하계헌(河啓獻) 도숙(道淑) 진주 나주 31 8 김낙환(金洛煥) 도균(道均) 부안 나주 29 9 김낙윤(金洛允) 응화(應化) 부안 나주 26 10 신석필(申錫必) 덕중(德仲) 평산 나주 36 11 황성룡(黃成龍) 여화(汝化) 장수 나주 36 12 고기학(高起學) 경선(景善) 장택 나주 35 13 이신수(李信守) 명선(明善) 전주 나주 34 14 김진대(金鎭大) 경환(景換) 부안 나주 34 15 김명국(金明國) 재원(在元) 광산 나주 44 16 김맹종(金孟宗)   부안 나주 17 17 김상업(金相業) 명숙(明叔) 광산 나주 47 18 이영근(李永根) 만서(萬書) 전주 나주 42 19 김진환(金鎭煥) 명환(明煥) 부안 나주 40 20 김진우(金鎭佑) 윤천(允天) 부안 나주 37 21 임양서(林良書)   팽택 나주 37 22 김진한(金鎭漢) 성칠(成七) 부안 나주 37 23 신석봉(申碩逢) 덕행(德行) 평산 나주 33 24 김상열(金相㤠) 백현(白賢) 광산 나주 32 25 황정묵(黃丁默) 운오(雲吾) 장수 나주 36 26 신영모(申永謀) 공진(公盡) 평산 나주 36 27 김진상(金鎭相) 경선(景善) 부안 나주 37 28 박종택(朴宗擇) 경문(景文) 밀양 나주 31 29 박봉옥(朴鳳玉) 봉래(鳳來) 밀양 나주 38 30 김낙중(金洛仲) 경중(敬仲) 부안 나주 19 31 김낙운(金洛雲) 동몽(童蒙) 부안 나주 19 32 김창용(金倉用) 동몽(童蒙) 광산 나주 17 33 신효재(申孝才) 동몽(童蒙) 평산 나주 14 34 김막동(金幕童) 동몽(童蒙) 김해 나주 23 35 박몽국(朴蒙國) 동몽(童蒙) 밀양 나주 21 36 김재현(金才鉉) 동몽(童蒙) 광산 나주 23 37 박몽실(朴夢實) 동몽(童蒙) 밀양 나주 18 38 박장룡(朴長龍) 동몽(童蒙) 밀양 나주 17 39 이돈섭(李敦燮) 오겸(五兼) 함평 함평 28 40 이돈창(李敦倡) 사욱(士郁) 함평 함평 25 41 이목헌(李穆憲) 화경(和景) 함평 함평 26 42 송염신(宋炎臣) 동몽(童蒙) 신평(?) 함평   43 이유영(李儒英) 성업(成業) 함평 함평   44 이유수(李儒洙) 성빈(成彬) 함평 함평   45 한백룡(韓白龍) 동몽(童蒙)   함평   ‘명록’이란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는 의미이다. 자(字)가 있는 경우는 성인으로 결혼을 했다는 의미이며, 동몽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씨별로 보면 부안김씨가 29명으로 가장 많고, 평산신씨 5명, 광산김씨 5명, 밀양박씨 5명, 전주이씨 2명, 장수황씨 2명, 진주하씨 1명, 장택고씨 1명, 평택임씨 1명, 김해김씨 1명, 함평이씨 5명, 등이다. 거주지는 대부분 나주이고, 7명은 함평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부터 50대까지로 가장 연장자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주어진 자료만을 가지고 해석해 보자면 1894년 7월 나주와 함평지역에서 무엇인가 행동을 하기 위해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주명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런데 다음 문서 <나주명록>을 보면 이것은 어떤 목적에서 기록되었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나주명록>은 <명록>이 작성된 후 2개월이 지난 1894년 9월에 작성되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주명록(羅州名錄)> (갑오 9월(1894년 9월) 순서 성명 직책 순서 성명 직책 1 김진선(金鎭善) 교장겸도금찰(敎長兼都禁察) 38 박장룡(朴長龍) 중정(中正) 2 김진욱(金鎭郁) 교수겸접주(敎授兼接主) 39 김창용(金倉用) 대정(大正) 3 김세표(金世表) 도집(都執) 40 신효재(申孝才) 중정(中正) 4 신석규(申錫圭) 도집겸금찰(都執兼禁察) 41 김정섭(金貞攝) 집강(執綱) 5 신석필(申錫必) 교수(敎授) 42 김진구(金鎭龜)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6 김진방(金鎭邦) 교수겸교수(敎授兼敎授) 43 김진곤(金鎭坤)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7 김진효(金鎭孝) 교수(敎授) 44 김진석(金鎭錫) 교장(敎長) 8 김진우(金鎭佑) 교수(敎授) 45 김만순(金萬順)   9 김상업(金相業) 교수(敎授) 46 김낙현(金洛現)   10 이신수(李信守) 집강(執綱) 47 김상수(金相秀)   11 고기학(高起學) 집강(執綱) 48 신옥랑(申玉郞) 대정(大正) 12 김낙환(金洛煥) 집강겸접사(執綱兼接司) 49 송재옥(宋在玉) 대정(大正) 13 김낙윤(金洛允) 집강금찰(執綱禁察) 50 김낙교(金洛敎) 대정(大正) 14 하계헌(河啓獻)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1 김학성(金學成) 봉도(奉道) 15 황성룡(黃成龍) 교수(敎授) 52 김만엽(金萬葉)   16 김진대(金鎭大)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3 김낙종(金洛種)   17 김명국(金明國) 교수(敎授) 54 김갑수(金甲秀)   18 김맹종(金孟宗)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55 김자갈(金玆碣)   19 이영근(李永根) 교수(敎授) 56 김화조(金華祚)   20 김진환(金鎭煥) 교수(敎授) 57 이두성(李斗星) 중정(中正) 21 임양서(林良書) 집강(執綱) 58 장찬모(張贊謀) 도집(都執) 22 김진한(金鎭漢) 집강(執綱 59 백종삼(白宗三) 교수(敎授) 23 신석봉(申碩逢) 집강(執綱) 60 장양윤(張良允) 집강(執綱) 24 김상열(金相悅) 대정(大正) 61 김종선(金宗善) 교수(敎授) 25 최대현(崔大賢) 집강(執綱) 62 문영도(文永道) 집강(執綱) 26 김진상(金鎭相) 대정(大正) 63 송정권(宋正勸)   27 박종택(朴宗擇) 대정(大正) 64 이영규(李永奎)   28 황정욱(黃丁郁) 대정(大正) 65 조병규(曺秉圭)   29 김진호(金鎭湖) 집강(執綱) 66 장정영(張丁永)   30 박봉옥(朴鳳玉) 집강(執綱) 67 김남서(金南書)   31 신영모(申永謀) 집강(執綱) 68 김세복(金世福)   32 김낙중(金洛仲) 대정겸집강(大正兼執綱) 69 김진학(金鎭學)   33 김만동(金晩童) 중정(中正) 70 김봉서(金逢書)   34 김몽국(金蒙國) 중정(中正) 71 김재환(金在煥)   35 김재현(金才鉉) 대정(大正) 72 이상영(李相永)   36 김낙운(金洛雲) 대정(大正) 73 김세현(金世顯) 교장(敎長) 37 박몽실(朴夢實) 중정(中正) 74 김진필(金鎭必) 접사겸교수(接司兼敎授) <나주명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명단에 포함된 사람이 45명에서 74명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다만 <명록>에 함평 거주자들은 이어서 등장하는 <함평갈동명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나주명록>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 74명 중에서 18명을 제외한 56명에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 이 직책은 바로 동학 교단의 접주, 접사, 도금찰, 교장, 교수, 금찰, 도집, 집강, 대정, 중정, 봉도 등이다. 이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며,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894년 9월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농민군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7월에 작성된 <명록> 단계는 마을 공동체가 무엇인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그 뜻에 동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9월 <나주명록> 단계는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방향을 설정하고 동학을 받아들여 각각 직책을 받아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즉 마을 공동체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동학의 직책을 받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하면서 추가된 성씨는 최씨, 백씨, 장씨, 송씨, 조씨 등으로 큰 흐름은 기존 <명록> 단계를 기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함평갈동명록>은 이들 <명록> 및 <나주명록>과 연관된 문서인데 작성 시기는 이 문서들보다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총 11명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는데 <명록>에 있는 8명과 관련된 자(字), 나이, 본관이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나주명록> 단계에서 기록되어 있는 직책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문서보다 뒤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명록>, <나주명록>에는 없는 3명의 명단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함평갈동명록(咸平葛洞名錄)> 순서 성명 자 나이 본관 직책 1 정안면(鄭安冕)       집강 접주 2 정해욱(鄭海郁)       집강 접사 3 김기섭(金琪燮)       집강 도집 4 이유영(李儒英) 성업(成業) 31 함평 교수 5 이유수(李儒洙) 성빈(成彬) 35 함평 집강 6 이돈섭(李敦燮) 오겸(五兼) 28 함평 집강 7 이돈창(李敦倡) 사욱(士郁) 25 함평 집강 8 이목헌(李穆憲) 화경(和景) 26 함평 집강 9 송염신(宋炎臣) 동몽(童蒙)   신평(?) 대정 10 한백룡(韓白龍) 동몽(童蒙) 24   대정 11 김진선(金鎭善)       강장(講長) 羅州 居 그렇다면 이러한 <명록>을 작성하고 이러한 활동의 방향을 전개한 주도세력은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런데 이 세 건의 문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선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명록>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50세로 나이가 가장 많다. 그리고 <나주명록>에는 역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교장겸도금찰이라는 직책을 받고 있으며, <함평갈동명록>에는 마지막에 가로로 강장(講長)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장이나 도금찰은 열거된 직책 중에 상위의 직책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강장은 나주에서 시작된 활동을 함평갈동까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진선이 이러한 방향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진선의 근거지와 함평갈동은 인접해 있다. 김진선이 부안김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동안 후손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김봉곤 교수가 '2021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 학술대회'에서 <나주 동학농민군의 활동 재조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들 부안김씨 후손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현재 행정구역상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면 양산리와 인근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아왔다. 이 지역은 원래 나주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하였다.<명록>과 <나주명록>에서 집강겸접사로 활동한 김낙환의 고손이 김종후임이 <부안김씨대보>(1981)에서 확인된다. 김종후는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 유족 등록을 신청하였다. 심의위원회는 기존에 직권등록된 김낙환과 신청인 김종후의 고조부 김낙환이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김종후와 함께 신청한 유족들을 모두 등록하였다.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그리고 문서에는 동학농민군의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동안 유족들이 자신의 선조가 동학농민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 자료에서 이를 확인하고 동학농민군 후예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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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8 15:2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⑨<홍계훈밀부유서> <양호전기>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 <홍계훈밀부유서(洪啓薰密符諭書)>는 1894년 4월 2일 고종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에게 내린 문서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한 후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진압군 최고책임자인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에게 유서와 밀부를 하사받은 홍계훈은 장위영 군사 800명을 이끌고 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병하게 된다. 유서(諭書)란 지역에 군사권을 가진 관리를 부임시키거나 파견할 때, 임금이 내리는 임명장 및 명령서와 같은 문서를 말한다. 밀부(密符)는 자의로 혹은 역모를 위해 동병(動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증명패이다.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존재했으며, 다음과 같이 활용되었다. 유사시 임금의 비상명령이 내려지면 관원이 간직하고 있던 부 반쪽과 임금이 보낸 부 반쪽을 맞춘다. 두 개의 반쪽 부가 의심할 바가 없이 일치하면 명령대로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왕이 밀부를 해당 관원에게 발급할 때, 유서도 함께 내렸다. 관원은 이 유서를 생명과 같이 귀중하게 여겨 유서통(諭書筒)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가로 67cm ,세로 56cm의 크기로 되어있다. 첫 행에 ‘유(諭)’자를 쓰고 바로 아래에 품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 관직인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정령관(正領官) 양호초토사, 성명인 홍계훈을 기재했다. ‘경수위양호(卿受委兩湖)’로 시작한 3행부터 9행까지는 그 임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비상시 군사를 동원할 때는 함부로 하지 말고 반드시 임금이 내리는 밀부와 합쳐보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한 경우에만 명령대로 군대를 동원하라’는 취지의 내용을 기록하여 압(押)한 제38부를 내렸다. 마지막 10행에는 연호와 월일인 ‘광서 20년(光緖二十年) 1894년 4월초2일(四月初二日)’을 적고 ‘유서지보(諭書之寶)’를 5곳에 국왕문서임을 확인하는 고종의 직인이 찍혀있다. <홍계훈밀부유서>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諭崇政大夫 親軍壯衛營正領官 兩湖招討使 洪啓薰 (유숭정대부 친군장위영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 卿受委兩湖軆任非輕 (경수위양호체임비경) 凡發兵應機安民制敵 (범발병응기안민제적) 一應常事自有舊章慮 (일응상사자유구장려) 或有予與卿獨斷處置事非密符莫可施爲 (혹유여여경독단처치사비밀부막가시위) 且意外奸謀不可不預防如有非常之命合符無疑然後當就命 (차의외간모불가불예방여유비상지명합부무의연후당취명) 故賜押第三十八符卿其受之故諭 (고사압제삼십팔부경기수지고유). 光緖二十年四月初二日 (광서이십년사월초이일) 숭정대부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홍계훈에게 교유한다. 경이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에 관한 일을 위임받았으니 책임이 가볍지 않다. 무릇 병사를 출동시켜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것은 백성을 편안히 하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일체 평상시 사안은 자연히 옛 법도가 있다. 그러나 혹여 내가 경과 독단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밀부(密符)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또 뜻밖의 간사한 계략을 예방하지 않아선 안 되니 만약 비상한 명이 있으면 밀부를 합쳐서 의심이 없는 뒤에야 응당 명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압(御押)을 찍은 제38밀부를 내리니 경은 이를 받으라. 그러므로 교유한다. 광서 20년(1894, 고종31) 4월 초2일. <홍계훈밀부유서>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진압군 최고책임자 홍계훈에게 고종이 직접 내린 유서로 국왕문서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 및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홍계훈의 후손(증손)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201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입수하였으며 보관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유서와 밀부는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하는 데 밑거름이 될 중요한 자료이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조선왕조의 거의 마지막에 국왕이 발급한 밀부유서이다. 이후 조선의 군제가 개편되면서 밀부유서는 거의 발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홍계훈밀부유서>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兩湖電記) <양호전기>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당시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하여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자, 중앙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각처(各處) 사이에 서로 주고받은 전보를 날짜순으로 수록한 것으로 1894년 4월 3일부터 같은 해 5월 2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양호전기에서 전(電)은 전보를 의미한다. 조선에 전신이 처음 가설된 것은 외세에 의해서였는데 일본은 1884년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 해저 전선을 개통하였고, 그 다음해에 청나라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최초의 육로 전선인 서로전선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한발 늦게 1887년 조선전보총국을 설립하여 전신을 통한 한반도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여 서울과 부산을 연결한 남로전선과 서울과 원산을 연결한 북로전선을 가설하였다.(<개항기 전보송달지 연구>, 한미경), 이후 가설된 전신을 통해 홍계훈은 전주에서 중앙의 관료들과 전보를 주고 받으면서 진압활동을 수행하였다. 홍계훈이 주로 전보를 주고받으면서 관련 내용을 보고하고 지시받은 기관은 공사청(公事廳), 혜당댁(惠堂宅), 본영 사또댁(本營使道宅), 수교대신댁(水橋大臣宅), 내서(內署) 등이다. 공사청은 고종 때 왕명을 전달하는 기관이었고, 혜당댁은 민씨척족 세력의 핵심인 민영준이며, 본영 사또댁은 장위영의 최고책임자인 장위사(壯衛使)이며, 수교대신댁은 좌의정 조병세를 말한다. 내서는 당시 권한이 강력하였던 내무부로 보여진다. 내무부(內務府)는 1885년 개화·자강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궐 안에 설치한 관청이다. 통리군국사무아문(통리내무아문)의 후신으로, 의정부·6조 체제와는 별도로 각종 근대화 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1880년대 후반 국정 운영을 총괄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정부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1894년 폐지되었다. <양호전기>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진압과 관련하여 서울을 출발하여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당시 전황과 정부의 대책에 관련되는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당시 전보를 주고받은 곳이 집권층 내부의 핵심적 위치에 있던 인물이 많았으므로 전주성 공방전과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기까지 집권층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5월 5일 내서(內署)의 전보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에 대하여, “귀화지설(歸化之說)은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멸하도록 하되 평민에게 이르러서는 불가불 충분히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휴전제의를 거절하였지만, 5월 8일에는 그 사자(使者)가 일전에 소지(所志)한 바 민원을 상계(上啓)하고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공문을 제출하였고 5월 8일에도 비슷한 내용의 공문을 제출하였다고 하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정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 <양호전기>는 2점이 전해지며 1점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4년 홍계훈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1점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호전기>는 당시 정부진압군의 입장과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1차 자료로서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취어> <양호초토등록> 등의 자료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자료이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양호초토영을 설치하고, 최고지휘관으로 임명된 홍계훈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홍계훈(1842~1895) 홍계훈의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재희(在羲),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3년 3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갖자,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경군(京軍) 600명을 이끌고 출동했었다. 1894년(고종 31) 장위영의 영관으로 있을 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 임명되어 장위영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전주·태인·정읍·고창·영광 등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전주성을 둘러싸고 거의 매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져 5월 8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이 철수하자 강화병 200명을 남겨 성을 지키게 했다. 그 공으로 훈련대장에 승진하였고, 유길준 등과 협력하여 친일파 박영효 타도에 나섰으나 이듬해인 1895년 8월 일본군이 궁궐을 습격하자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방어하다가 일본군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1896년 군부대신에 추증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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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5:1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⑧ 무장포고문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무장에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포고문이다. 대략 400여자의 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은 확인되지 않으며, 모두 원본 혹은 누군가 필사한 것을 다시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각 자료에 소개된 <포고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자료에 따라 일부 글자에 차이가 있다. <포고문>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과 목표 등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생각이나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만큼 먼저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무장포고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과 부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자식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나라와 집안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德化)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도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국왕의) 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도적의 무리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득실대니 인민들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들어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제 한 몸 간수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며,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예의염치(禮義廉恥)]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公卿)으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고,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어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지니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 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위기를 좌시(坐視)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많은 백성들이 상의하여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성군(聖君)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1892년 10월부터 1893년 4월에 걸쳐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을 전개하였던 전봉준과 호남지역의 동학지도자들은 1893년 말부터 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군현 단위의 봉기를 확산하고 규합하여 전라도 전 지역의 봉기, 나아가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1893년 11월에 만들어진 사발통문 거사계획(“⑥세기를 넘어선 미스터리, 사라진 사발통문의 기록을 찾아서” 참조)과 1894년 1월 10일 일어난 고부농민봉기이다. 동학농민혁명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고부농민항쟁이었지만, 전봉준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근 읍의 호응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 2월 20일경에는 봉기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기 위해 “각 읍의 군자(君子)들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나라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격문을 전라도 각 군현으로 띄우기도 했지만, 인근 읍의 호응은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부하 50여 명만 거느리고 고부를 빠져나가 무장의 손화중에게 갔다. 이 때 전봉준과 손화중은 전국 규모의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0일경부터는 전라도 각지, 그리고 일부 다른 도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이 합세해 오기 시작하였다. 모여든 농민군이 4,0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전봉준 등 지도부는 드디어 3월 20일에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포고문>은 동학농민군의 생각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거의 없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그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가 ‘반봉건’ 근대화나 ‘반외세’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언뜻 보더라도 <포고문>에는 근대지향성과 거리가 먼, 유교적 이념과 언어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반외세’와 관련된 내용도 전무하다. 그러나 <포고문>에는 동학농민군의 생생한 현실진단과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매우 선명히 제시되어 있다. 국왕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공경대부 이하 방백 수령들이 가장 중요한 책무인 인정을 방기고 가혹한 정사를 펴기 때문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농민군들은 비록 자신들이 시골에 사는 평범한 백성[草野遺民]에 불과하지만,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의기(義旗)를 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농민군이 스스로를 “보국안민”의 주체로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각이 있었기에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가시화하자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근대지향적인 성격만 부각시키는 동학농민혁명 이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라는 냉엄한 현실이 잘 보여주듯이 근대는 더 이상 추구의 대상만이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근대를 넘어서는 방안을 고민해야 될 시점이다. 동학농민군들의 생각 가운데는 ‘근대’와 거리가 먼 것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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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4 15:1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⑦동학사(초고본)

<동학사>(초고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이 동학교단 및 천도교의 역사를 다룬 서적이다. 전체 4책으로 되어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조선사편수회 자료로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대한 서술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저자 오지영은 전라도 무장(茂長) 덕임리(德林里)에서 몰락한 양반인 오재선(吳栽善)의 장자로 태어나서 1891년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듬해 1892년 무장 지역 동학교단 지도자였던 손화중이 고창 선운사에서 석불비결(石佛秘訣) 사건을 일으킨 후, 그는 익산으로 옮겨가 활동하였다. 1893년에는 익산민란을 일으켰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익산대접주인 김방서(金方瑞) 휘하에서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2차 봉기 당시 남접과 북접의 화해에 중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지영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양주(楊州) 묘적암에 은거한 뒤 1904년 이후 교단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꾼 동학교단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익산교구장을 지내고 1909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편집하고 글을 기고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천도교연합회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1926년 익산의 천도교도들과 함께 만주 길림에 집단이주하여 균등한 토지분배와 공동경작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오지영이 <동학사>(초고본)을 서술한 시점은 그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한 192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 이전인 1915년 천도교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시천교(侍天敎)의 김연국(金演局)이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를 간행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자신의 활약을 부각시켰던 적이 있다. 오지영은 이에 대응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계열의 활동상을 부각시키고 자신이 전개하던 천도교 혁신운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동학사>(초고본)은 모두 4책으로 1책은 '부천도교연혁대관(附天道敎沿革大觀)'이라는 제목하에 1926년 이후 만주지역에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2책은 '동학사 서(東學史 序)'에 "포덕 65년 갑자 3월 일우일서(布德六十五年甲子三月 日于一序)"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24년 3월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오지영은 이를 통하여 19세기 후반 정세를 분석하고 1890년 초반 일어난 전라도 일대의 민란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고부민란을 서술하였다. 고부민란은 전봉준을 비롯하여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등 동학당 수령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부각시켜 설명하였다. 그런데 실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에 대한 서술은 날짜나 인물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그가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주로 전해 들은 내용을 서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계사년(癸巳年, 1893) 11월에 일어난 사발통문의 등소운동을 고부민란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다음으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사실과 격문(檄文), 창의문(倡義文)을 발포한 시기를 갑오년(甲午年, 1894) 정월(正月)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저자가 1894년 1월 고부민란과 같은 해 3월 무장기포 이후 전개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서로 혼동하여 발생한 오류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1894년 5월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이루어진 전주화약에서 체결된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대한 서술이 주목할 만하다. 초고본에서는 '집강소(執綱所)의 행정(行政)'이라는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난 이후에 집강소의 강령이라는 것이다. 초고본의 내용은 1940년에 나온 간행본과 차이가 있다. <동학사>(초고본) '집강소(執綱所)의 행정(行政)'부분에, "이때 전라도 53주에 골골마다 집강소가 아니 설립된 곳이 없이 일률로 다 되었었고 집강소의 안에는 수천명의 의군(義軍)이 호위를 하였었고 행정에 있어서는 집강이 주무로 십수인의 의원이 있어 협의체로 조직이 되었었고 도집강 1인을 뽑아 전도(全道)의 대표가 되게 하였었고 이왕 있던 대소관리들은 오직 사무에 책임만을 맡게 하였었고 집강소의 정강은 이와 같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12개의 정강을 나열하였다. 집강소의 정강 하나.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 것 하나. 탐관오리는 뿌리를 뽑을 것 하나.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것 하나.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것 하나. 천민 등의 軍案을 불지를 것 하나. 종문서는 불지를 것 하나. 백정의 머리에 페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하나. 무명잡세 등은 혁파할 것 하나.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아울러 실시하지 말 것 하나.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것 하나.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하나.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위의 폐정개혁안을 분류해 보자면 기본적 인권(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 것), 신분제 철폐를 비롯한 평등권(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것,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것, 천민 등의 군안(軍案)을 불지를 것, 종문서는 불지를 것, 백정의 머리에 페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조세 문제의 개혁(무명잡세 등은 혁파할 것,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아울러 실시하지 말 것), 토지개혁 및 공동경작 등 경제적 지향(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국가주권 및 국기 확립(탐관오리는 뿌리를 뽑을 것,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것) 등이 명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에 나온 <동학사>(간행본)에 나와 있는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수렴을 탕소하고 시정에 협력할 것,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락할 것,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은 실려 있지 않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이다. 이를 두고 그동안의 한국사 연구에서 “지주제를 해체하고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경작”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보를 통한 농민적 코스의 농업근대화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의 토지개혁 구상이 직접적으로 명시된 자료는 <동학사>(초고본) 하나뿐이며 1894년 당시에 나온 폐정개혁안 어디에도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볼 때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이라는 정강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사>(초고본)에서만 이 정강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학사>(초고본)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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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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