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기사(洪陽紀事)〉
〈홍양기사(洪陽紀事)〉는 충청도와 인접한 경기도 남양 사람 홍건(洪健)이 기록한 충청도 홍주(洪州)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록이다. 지금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홍건은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의 친우로 지내다가 이승우가 홍주목사로 특별히 제수되자 그의 막객(幕客)으로 따라 내려가 동학농민혁명의 진압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홍주는 충청도 서북 내포(內浦) 지역의 중심지로서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끝까지 동학농민군에 함락되지 않은 고을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은 목사 이승우는 10월 8일에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로 임명되었으며 그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던 홍건도 11월 16일에 홍주 영장(營將)에 발탁되었다.
〈홍양기사〉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가 마친 다음인 7월 7일 홍주에서 동학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밤마다 일어나고 있으며, 홍주 관아의 인원들까지도 동학에 물든 정황이 파악되었다.
8월 6일에는 선무사 정경원이 홍주로 와서 인근의 접주들을 소집하여 효유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유명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는 홍주의 김영필(金永弼)·정대철(丁大哲)·이한규(李漢奎)·정원갑(鄭元甲)·나성뢰(羅成蕾), 덕산의 이춘실(李春實), 예산(禮山)의 박덕칠(朴德七)·박도일(朴道一), 대흥(大興)의 유치교(兪致敎), 보령(保寧)의 이원백(李源百), 남포(藍浦)의 추용성(秋鏞成), 정산(定山)의 김기창(金基昌), 면천(沔川)의 이창구(李昌求)이다. 그 가운데 이창구의 무리가 가장 많아서 50,000~60,000명이라고 하였다.
1894년 9월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가 시작되고 나서 홍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10월 3일 각처의 동학농민군이 최시형의 지휘라고 하며 도처에서 일어났다. 서산 수령 박정기(朴錠基)·태안부사(泰安府使)·신백희(申百熙)·별유관(別諭官) 김경제가 모두 그 피해를 당했다. 해미·예산·덕산 등의 고을에서는 군기를 모두 빼앗겼다. 해미·덕산·대천·예산·목시(木市) 등지에서 진세(陣勢)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10월 8일 홍주목사 이승우가 호연초토사로 임명되고 나서부터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이 진행되었다. 관군은 10월 20일 合德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파하여 60여 명을 사로잡았다. 10월 25일 일본군 아카마츠(赤松國封) 소위와 통역관 이이다(飯田)가 군사를 인솔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결국 10월 28일부터 29일 사이에 홍주성에서 커다란 전투가 벌어졌다. 〈홍양기사〉에 따르면 관군의 대포는 멀리까지 날아가고 일본군이 대포를 잘 쏘아서 적중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병기는 뛰어나지 못하고 서툰 자들이 쏘고 법도가 없어서 끝내 관군 및 일본군 중에 1명도 해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 상당 수는 사로잡혔고 이틀 동안 성 아래 죽은 사람만 600~700명에 이르렀다.
〈홍양기사〉에는 11월 8일 서산 해미에서 일어난 전투도 수록되어 있다. 해미성을 점거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죽산부사 이두황이 지휘하는 병력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여 서산의 도비산(道飛山)에 물러나서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내포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완전히 가라앉게 되었다.
〈홍양기사〉는 홍주성 영장을 받았던 홍건의 기록인 만큼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으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홍주성 전투에서 관군 측의 탄약을 허비하게 하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위장전술을 사용한 농민군의 전술, 이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이창구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애첩을 납치하여 미인계를 쓴 이야기,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이창구가 체포되는 경위 등 흥미로운 이야기도 실려 있다. 비록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기록이지만 그들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홍양기사〉가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바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창계신공실기(蒼溪申公實記)〉
경상도 의흥(義興, 현재 군위군 의흥면)에서 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내용을 일기체로 적어 편집하여 인쇄한 자료이다. 이 자료의 저자는 신석찬(申錫燦, 1851~1921)이다. 신석찬의 활동은 뒤에 붙여 놓은 행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행장에 따르면 호는 창계(蒼溪)이고 나이는 40대 후반이며 의흥향교의 약장(約長) 또는 교의(校議)를 지냈다.
표지의 책명은 〈창계실기(蒼溪實記)〉라고 했으나 『창계신공실기서(蒼溪申公實記序)』 라고 하여 〈창계신공실기(蒼溪申公實記〉를 책명으로 볼 수 있다. 이상교(李相敎)가 지은 서문에 “공은 바위굴에서 책을 읽는 선비요, 초야에서 조잡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석찬은 벼슬은 하지 않은 시골 선비였다.
내용 기술은 일기체로 1894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사실을 적어 놓았으며 끝에 포상과 관련되는 문건들을 붙여 놓았다. 이 내용의 기본은 의흥을 중심으로 창의하고 농민군을 토벌한 과정을 담았다. 앞에 “동도의 변고가 처음 호서와 호남에서 시작하여 봄에서 여름 사이에 더욱 퍼졌는데,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그사이에 물들어 낙동강의 좌우와 상하가 모조리 소굴이 되었으며 약탈이 끝이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동학농민군이 먼저 의성에서 봉기하고 나서 이들이 8월 19일에 의흥 지방을 침입하였다고도 기록하였다.
일기 순서에 따르면, 8월 18일 신석찬은 동료들을 모아 방어의 계책을 논의하였고 의흥수령 성태영(成泰永)과도 의논하였다. 그는 의흥ㆍ칠곡ㆍ군위 세 고을의 사족들과 민정(民丁)을 모아 수천 명의 민보군을 조직하고 양곡과 군기를 거두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석찬은 향교의 조직에 따라 약소(約所)를 꾸려 총지휘관인 약장이 되었고, 이어 면 단위의 약장, 강장(講長)을 임명하였다.
이들 민보군은 1차로 신원전투에서 동학농민군 27명을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2차로 신녕, 3차로 효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이 세 곳은 모두 강좌(江左) 지역으로 김산 등 강우 지역에서 쫓겨오는 농민군을 방어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 민보군 일부를 강우로 보내 김산 등지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이어 1905년에 의병이 일어나자 개화 정부의 하수인인 수령들이 이들의 방어에 나섰다. 이에 신석찬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조직을 다시 가동해 토벌에 나섰는데, 이 사실을 끝 부분에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2권에는 부록을 실었는데 선무사 이중하(李重夏)가 전달한 선유문, 토포사인 조중응(趙重應)이 보낸 전령, 신석찬이 의흥약장의 이름으로 보낸 전령 등의 문건이 실려 있다. 이 책의 자료와 내용은 향교 중심의 민보군이 조직된 점과 강좌 지역의 민보군 활동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끝에는 의흥현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군위현감에게 신석찬의 포상을 요청하는 장초(狀草)와 상서(上書), 경상도 유생의 이름으로 경상관찰사에 보낸 서장, 군부아문과 궁내부에 보낸 서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관련 부처에서 끝내 포상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로 보아도 신석찬은 유력 인사로 짐작된다. 맨 끝에는 신석찬의 일대기를 적은 행장이 수록되어 있고, 또 다른 유생들이 신석찬과 관련하여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발문에는 족질인 신태경이 편집해 발간한 경위를 밝혀 놓았다.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전개상황과 민보군의 활동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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