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초고본)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이 동학교단 및 천도교의 역사를 다룬 서적이다. 전체 4책으로 되어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조선사편수회 자료로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대한 서술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저자 오지영은 전라도 무장(茂長) 덕임리(德林里)에서 몰락한 양반인 오재선(吳栽善)의 장자로 태어나서 1891년동학에 입도하였다. 이듬해 1892년 무장 지역 동학교단 지도자였던 손화중이 고창 선운사에서 석불비결(石佛秘訣) 사건을 일으킨 후, 그는 익산으로 옮겨가 활동하였다. 1893년에는 익산민란을 일으켰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익산대접주인 김방서(金方瑞) 휘하에서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2차 봉기 당시 남접과 북접의 화해에 중재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지영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양주(楊州) 묘적암에 은거한 뒤 1904년 이후 교단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꾼 동학교단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익산교구장을 지내고 1909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편집하고 글을 기고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천도교연합회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1926년 익산의 천도교도들과 함께 만주 길림에 집단이주하여 균등한 토지분배와 공동경작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오지영이 <동학사>(초고본)을 서술한 시점은 그가 만주 길림으로 이주한 192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 이전인 1915년 천도교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시천교(侍天敎)의 김연국(金演局)이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를 간행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자신의 활약을 부각시켰던 적이 있다. 오지영은 이에 대응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계열의 활동상을 부각시키고 자신이 전개하던 천도교 혁신운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목적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동학사>(초고본)은 모두 4책으로 1책은 '부천도교연혁대관(附天道敎沿革大觀)'이라는 제목하에 1926년 이후 만주지역에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2책은 '동학사 서(東學史 序)'에 "포덕 65년 갑자 3월 일우일서(布德六十五年甲子三月 日于一序)"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24년 3월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오지영은 이를 통하여 19세기 후반 정세를 분석하고 1890년 초반 일어난 전라도 일대의 민란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고부민란을 서술하였다. 고부민란은 전봉준을 비롯하여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김덕명 등 동학당 수령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부각시켜 설명하였다.
그런데 실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에 대한 서술은 날짜나 인물이 불명확한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그가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주로 전해 들은 내용을 서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계사년(癸巳年, 1893) 11월에 일어난 사발통문의 등소운동을 고부민란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다음으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사실과 격문(檄文), 창의문(倡義文)을 발포한 시기를 갑오년(甲午年, 1894) 정월(正月)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저자가 1894년 1월 고부민란과 같은 해 3월 무장기포 이후 전개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서로 혼동하여 발생한 오류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1894년 5월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이루어진 전주화약에서 체결된 폐정개혁 12개 조항에 대한 서술이 주목할 만하다. 초고본에서는 '집강소(執綱所)의 행정(行政)'이라는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난 이후에 집강소의 강령이라는 것이다. 초고본의 내용은 1940년에 나온 간행본과 차이가 있다.
<동학사>(초고본) '집강소(執綱所)의 행정(行政)'부분에, "이때 전라도 53주에 골골마다 집강소가 아니 설립된 곳이 없이 일률로 다 되었었고 집강소의 안에는 수천명의 의군(義軍)이 호위를 하였었고 행정에 있어서는 집강이 주무로 십수인의 의원이 있어 협의체로 조직이 되었었고 도집강 1인을 뽑아 전도(全道)의 대표가 되게 하였었고 이왕 있던 대소관리들은 오직 사무에 책임만을 맡게 하였었고 집강소의 정강은 이와 같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12개의 정강을 나열하였다.
집강소의 정강
하나.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 것
하나. 탐관오리는 뿌리를 뽑을 것
하나.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것
하나.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것
하나. 천민 등의 軍案을 불지를 것
하나. 종문서는 불지를 것
하나. 백정의 머리에 페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하나. 무명잡세 등은 혁파할 것
하나.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아울러 실시하지 말 것
하나.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것
하나.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하나.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위의 폐정개혁안을 분류해 보자면 기본적 인권(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 것), 신분제 철폐를 비롯한 평등권(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것,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것, 천민 등의 군안(軍案)을 불지를 것, 종문서는 불지를 것, 백정의 머리에 페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것), 조세 문제의 개혁(무명잡세 등은 혁파할 것,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아울러 실시하지 말 것), 토지개혁 및 공동경작 등 경제적 지향(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것), 국가주권 및 국기 확립(탐관오리는 뿌리를 뽑을 것,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것) 등이 명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에 나온 <동학사>(간행본)에 나와 있는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수렴을 탕소하고 시정에 협력할 것,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락할 것,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은 실려 있지 않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이다. 이를 두고 그동안의 한국사 연구에서 “지주제를 해체하고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경작”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보를 통한 농민적 코스의 농업근대화를 지향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혁명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와 같이 동학농민군의 토지개혁 구상이 직접적으로 명시된 자료는 <동학사>(초고본) 하나뿐이며 1894년 당시에 나온 폐정개혁안 어디에도 이러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볼 때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것”이라는 정강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사>(초고본)에서만 이 정강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학사>(초고본)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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