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 이 세 건의 문서는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1980년대 원광대 박순호교수로부터 입수되었다. 이 문서들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직접 남긴 문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명록>은 1894년 7월에 작성된 것으로 <나주명록>이나 <함평갈동명록>보다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들 중에 제일 먼저 작성되었다. 작성 주체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학농민군이라고 보여진다. 표지에는 갑오 7월이라 하여 1894년 7월 작성되었다. 이 <명록>에는 45명의 성명(姓名)과 자(字) 본관(本貫) 거주지(居住地) 그리고 나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은 나주거주(羅州居住)로 표시되어 있고, 마지막 7명은 함평(咸平)으로 표기되어 있다. <명록>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록(名錄)>(갑오 7월(1894년 7월))
순서 | 성명 | 자(字) | 본관 | 거주지 | 나이 |
1 | 김진선(金鎭善) | 군명(君明) | 부안 | 나주 | 50 |
2 | 김진묵(金鎭黙) | 군백(君伯) | 부안 | 나주 | 47 |
3 | 김세표(金世表) | 치도(治道) | 부안 | 나주 | 43 |
4 | 김진방(金鎭邦) | 정만(正萬) | 부안 | 나주 | 37 |
5 | 신석규(申錫圭) | 우범(禹範) | 평산 | 나주 | 35 |
6 | 김진필(金鎭必) | 명오(明五) | 부안 | 나주 | 35 |
7 | 하계헌(河啓獻) | 도숙(道淑) | 진주 | 나주 | 31 |
8 | 김낙환(金洛煥) | 도균(道均) | 부안 | 나주 | 29 |
9 | 김낙윤(金洛允) | 응화(應化) | 부안 | 나주 | 26 |
10 | 신석필(申錫必) | 덕중(德仲) | 평산 | 나주 | 36 |
11 | 황성룡(黃成龍) | 여화(汝化) | 장수 | 나주 | 36 |
12 | 고기학(高起學) | 경선(景善) | 장택 | 나주 | 35 |
13 | 이신수(李信守) | 명선(明善) | 전주 | 나주 | 34 |
14 | 김진대(金鎭大) | 경환(景換) | 부안 | 나주 | 34 |
15 | 김명국(金明國) | 재원(在元) | 광산 | 나주 | 44 |
16 | 김맹종(金孟宗) | 부안 | 나주 | 17 | |
17 | 김상업(金相業) | 명숙(明叔) | 광산 | 나주 | 47 |
18 | 이영근(李永根) | 만서(萬書) | 전주 | 나주 | 42 |
19 | 김진환(金鎭煥) | 명환(明煥) | 부안 | 나주 | 40 |
20 | 김진우(金鎭佑) | 윤천(允天) | 부안 | 나주 | 37 |
21 | 임양서(林良書) | 팽택 | 나주 | 37 | |
22 | 김진한(金鎭漢) | 성칠(成七) | 부안 | 나주 | 37 |
23 | 신석봉(申碩逢) | 덕행(德行) | 평산 | 나주 | 33 |
24 | 김상열(金相㤠) | 백현(白賢) | 광산 | 나주 | 32 |
25 | 황정묵(黃丁默) | 운오(雲吾) | 장수 | 나주 | 36 |
26 | 신영모(申永謀) | 공진(公盡) | 평산 | 나주 | 36 |
27 | 김진상(金鎭相) | 경선(景善) | 부안 | 나주 | 37 |
28 | 박종택(朴宗擇) | 경문(景文) | 밀양 | 나주 | 31 |
29 | 박봉옥(朴鳳玉) | 봉래(鳳來) | 밀양 | 나주 | 38 |
30 | 김낙중(金洛仲) | 경중(敬仲) | 부안 | 나주 | 19 |
31 | 김낙운(金洛雲) | 동몽(童蒙) | 부안 | 나주 | 19 |
32 | 김창용(金倉用) | 동몽(童蒙) | 광산 | 나주 | 17 |
33 | 신효재(申孝才) | 동몽(童蒙) | 평산 | 나주 | 14 |
34 | 김막동(金幕童) | 동몽(童蒙) | 김해 | 나주 | 23 |
35 | 박몽국(朴蒙國) | 동몽(童蒙) | 밀양 | 나주 | 21 |
36 | 김재현(金才鉉) | 동몽(童蒙) | 광산 | 나주 | 23 |
37 | 박몽실(朴夢實) | 동몽(童蒙) | 밀양 | 나주 | 18 |
38 | 박장룡(朴長龍) | 동몽(童蒙) | 밀양 | 나주 | 17 |
39 | 이돈섭(李敦燮) | 오겸(五兼) | 함평 | 함평 | 28 |
40 | 이돈창(李敦倡) | 사욱(士郁) | 함평 | 함평 | 25 |
41 | 이목헌(李穆憲) | 화경(和景) | 함평 | 함평 | 26 |
42 | 송염신(宋炎臣) | 동몽(童蒙) | 신평(?) | 함평 | |
43 | 이유영(李儒英) | 성업(成業) | 함평 | 함평 | |
44 | 이유수(李儒洙) | 성빈(成彬) | 함평 | 함평 | |
45 | 한백룡(韓白龍) | 동몽(童蒙) | 함평 |
‘명록’이란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는 의미이다. 자(字)가 있는 경우는 성인으로 결혼을 했다는 의미이며, 동몽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성씨별로 보면 부안김씨가 29명으로 가장 많고, 평산신씨 5명, 광산김씨 5명, 밀양박씨 5명, 전주이씨 2명, 장수황씨 2명, 진주하씨 1명, 장택고씨 1명, 평택임씨 1명, 김해김씨 1명, 함평이씨 5명, 등이다. 거주지는 대부분 나주이고, 7명은 함평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부터 50대까지로 가장 연장자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어떤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주어진 자료만을 가지고 해석해 보자면 1894년 7월 나주와 함평지역에서 무엇인가 행동을 하기 위해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놓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다음 문서 <나주명록>을 보면 이것은 어떤 목적에서 기록되었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나주명록>은 <명록>이 작성된 후 2개월이 지난 1894년 9월에 작성되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주명록(羅州名錄)> (갑오 9월(1894년 9월)
순서 | 성명 | 직책 | 순서 | 성명 | 직책 |
1 | 김진선(金鎭善) | 교장겸도금찰(敎長兼都禁察) | 38 | 박장룡(朴長龍) | 중정(中正) |
2 | 김진욱(金鎭郁) | 교수겸접주(敎授兼接主) | 39 | 김창용(金倉用) | 대정(大正) |
3 | 김세표(金世表) | 도집(都執) | 40 | 신효재(申孝才) | 중정(中正) |
4 | 신석규(申錫圭) | 도집겸금찰(都執兼禁察) | 41 | 김정섭(金貞攝) | 집강(執綱) |
5 | 신석필(申錫必) | 교수(敎授) | 42 | 김진구(金鎭龜) |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
6 | 김진방(金鎭邦) | 교수겸교수(敎授兼敎授) | 43 | 김진곤(金鎭坤) |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
7 | 김진효(金鎭孝) | 교수(敎授) | 44 | 김진석(金鎭錫) | 교장(敎長) |
8 | 김진우(金鎭佑) | 교수(敎授) | 45 | 김만순(金萬順) | |
9 | 김상업(金相業) | 교수(敎授) | 46 | 김낙현(金洛現) | |
10 | 이신수(李信守) | 집강(執綱) | 47 | 김상수(金相秀) | |
11 | 고기학(高起學) | 집강(執綱) | 48 | 신옥랑(申玉郞) | 대정(大正) |
12 | 김낙환(金洛煥) | 집강겸접사(執綱兼接司) | 49 | 송재옥(宋在玉) | 대정(大正) |
13 | 김낙윤(金洛允) | 집강금찰(執綱禁察) | 50 | 김낙교(金洛敎) | 대정(大正) |
14 | 하계헌(河啓獻) |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 51 | 김학성(金學成) | 봉도(奉道) |
15 | 황성룡(黃成龍) | 교수(敎授) | 52 | 김만엽(金萬葉) | |
16 | 김진대(金鎭大) |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 53 | 김낙종(金洛種) | |
17 | 김명국(金明國) | 교수(敎授) | 54 | 김갑수(金甲秀) | |
18 | 김맹종(金孟宗) | 집강겸교수(執綱兼敎授) | 55 | 김자갈(金玆碣) | |
19 | 이영근(李永根) | 교수(敎授) | 56 | 김화조(金華祚) | |
20 | 김진환(金鎭煥) | 교수(敎授) | 57 | 이두성(李斗星) | 중정(中正) |
21 | 임양서(林良書) | 집강(執綱) | 58 | 장찬모(張贊謀) | 도집(都執) |
22 | 김진한(金鎭漢) | 집강(執綱 | 59 | 백종삼(白宗三) | 교수(敎授) |
23 | 신석봉(申碩逢) | 집강(執綱) | 60 | 장양윤(張良允) | 집강(執綱) |
24 | 김상열(金相悅) | 대정(大正) | 61 | 김종선(金宗善) | 교수(敎授) |
25 | 최대현(崔大賢) | 집강(執綱) | 62 | 문영도(文永道) | 집강(執綱) |
26 | 김진상(金鎭相) | 대정(大正) | 63 | 송정권(宋正勸) | |
27 | 박종택(朴宗擇) | 대정(大正) | 64 | 이영규(李永奎) | |
28 | 황정욱(黃丁郁) | 대정(大正) | 65 | 조병규(曺秉圭) | |
29 | 김진호(金鎭湖) | 집강(執綱) | 66 | 장정영(張丁永) | |
30 | 박봉옥(朴鳳玉) | 집강(執綱) | 67 | 김남서(金南書) | |
31 | 신영모(申永謀) | 집강(執綱) | 68 | 김세복(金世福) | |
32 | 김낙중(金洛仲) | 대정겸집강(大正兼執綱) | 69 | 김진학(金鎭學) | |
33 | 김만동(金晩童) | 중정(中正) | 70 | 김봉서(金逢書) | |
34 | 김몽국(金蒙國) | 중정(中正) | 71 | 김재환(金在煥) | |
35 | 김재현(金才鉉) | 대정(大正) | 72 | 이상영(李相永) | |
36 | 김낙운(金洛雲) | 대정(大正) | 73 | 김세현(金世顯) | 교장(敎長) |
37 | 박몽실(朴夢實) | 중정(中正) | 74 | 김진필(金鎭必) | 접사겸교수(接司兼敎授) |
<나주명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명단에 포함된 사람이 45명에서 74명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다만 <명록>에 함평 거주자들은 이어서 등장하는 <함평갈동명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나주명록>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 74명 중에서 18명을 제외한 56명에게 직책이 부여되고 있다. 이 직책은 바로 동학 교단의 접주, 접사, 도금찰, 교장, 교수, 금찰, 도집, 집강, 대정, 중정, 봉도 등이다. 이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며,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894년 9월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직책을 받았다는 것은 동학농민군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7월에 작성된 <명록> 단계는 마을 공동체가 무엇인가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그 뜻에 동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9월 <나주명록> 단계는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방향을 설정하고 동학을 받아들여 각각 직책을 받아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즉 마을 공동체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동학농민군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동학의 직책을 받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명록> 단계에서 <나주명록> 단계로 발전하면서 추가된 성씨는 최씨, 백씨, 장씨, 송씨, 조씨 등으로 큰 흐름은 기존 <명록> 단계를 기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함평갈동명록>은 이들 <명록> 및 <나주명록>과 연관된 문서인데 작성 시기는 이 문서들보다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총 11명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는데 <명록>에 있는 8명과 관련된 자(字), 나이, 본관이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나주명록> 단계에서 기록되어 있는 직책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문서보다 뒤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명록>, <나주명록>에는 없는 3명의 명단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함평갈동명록(咸平葛洞名錄)>
순서 | 성명 | 자 | 나이 | 본관 | 직책 |
1 | 정안면(鄭安冕) | 집강 접주 | |||
2 | 정해욱(鄭海郁) | 집강 접사 | |||
3 | 김기섭(金琪燮) | 집강 도집 | |||
4 | 이유영(李儒英) | 성업(成業) | 31 | 함평 | 교수 |
5 | 이유수(李儒洙) | 성빈(成彬) | 35 | 함평 | 집강 |
6 | 이돈섭(李敦燮) | 오겸(五兼) | 28 | 함평 | 집강 |
7 | 이돈창(李敦倡) | 사욱(士郁) | 25 | 함평 | 집강 |
8 | 이목헌(李穆憲) | 화경(和景) | 26 | 함평 | 집강 |
9 | 송염신(宋炎臣) | 동몽(童蒙) | 신평(?) | 대정 | |
10 | 한백룡(韓白龍) | 동몽(童蒙) | 24 | 대정 | |
11 | 김진선(金鎭善) | 강장(講長) 羅州 居 |
그렇다면 이러한 <명록>을 작성하고 이러한 활동의 방향을 전개한 주도세력은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런데 이 세 건의 문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선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명록>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50세로 나이가 가장 많다. 그리고 <나주명록>에는 역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교장겸도금찰이라는 직책을 받고 있으며, <함평갈동명록>에는 마지막에 가로로 강장(講長)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장이나 도금찰은 열거된 직책 중에 상위의 직책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강장은 나주에서 시작된 활동을 함평갈동까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진선이 이러한 방향을 주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진선의 근거지와 함평갈동은 인접해 있다.
김진선이 부안김씨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동안 후손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김봉곤 교수가 '2021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 학술대회'에서 <나주 동학농민군의 활동 재조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들 부안김씨 후손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현재 행정구역상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면 양산리와 인근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아왔다. 이 지역은 원래 나주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속하였다.<명록>과 <나주명록>에서 집강겸접사로 활동한 김낙환의 고손이 김종후임이 <부안김씨대보>(1981)에서 확인된다. 김종후는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에 유족 등록을 신청하였다. 심의위원회는 기존에 직권등록된 김낙환과 신청인 김종후의 고조부 김낙환이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김종후와 함께 신청한 유족들을 모두 등록하였다.
<명록>, <나주명록>, <함평갈동명록>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그리고 문서에는 동학농민군의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동안 유족들이 자신의 선조가 동학농민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 자료에서 이를 확인하고 동학농민군 후예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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