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봉준 상서(全琫準上書)> : 반일투쟁을 위한 ‘민족적 대연합’ 추구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북상하던 전봉준이 논산에 주둔 중이던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글이다.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 준비는 1894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봉기 때도 ‘척왜양(斥倭洋)’ 구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5월 초순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인 5월 초부터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의 관심은 폐정 개혁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반일투쟁’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백성들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투쟁’에 착수하였다. 삼례에서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여를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반일투쟁을 전개하기에는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에도 다녀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또 각지의 관아에 반일투쟁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인근 지역의 관아들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추수가 거의 끝났고, 북접에서 기포를 결정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직후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달리 청주 쪽으로 북상하였다.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과 휘하의 농민군은 이미 도착해 있던 이유상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북상하는 과정에서, 또 논산에 주둔해 있는 동안 합세한 인근 고을이나 북접 휘하의 농민군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공주 진격을 앞둔 10월 16일 전봉준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의 자격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전봉준상서>를 보냈다. 이글에서 전봉준은 우선 ‘왜구(倭寇)’들이 침략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대신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생각에 위로는 임금을 위협하고 아래로는 일본 오랑캐와 결탁하여 백성들을 해치려 한다는 현 상황을 규탄하였다. 이어 초야에 사는 필부들인 농민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반일투쟁에 일어섰으니, 충청감사도 동참하여 ‘의를 위하여 죽을 것’을 요청하였다.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까지 포함하는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동도창의소의 한글 고시문, 행간을 다시 읽는다.
갑오년 11월 12일 동도창의소 명의로 발포한 고시문은 특이하게도 한글로 되어 있다. 2차 봉기의 분수령이던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정부군과 지방 감영군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다.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동학란기록>(하권, 379~380쪽)에서였다. 이 고시문은 정부군의 진압보고서류 중에서 노획한 문서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는 한글로 된 언문에다가 행간에 임의로 한자를 넣어서 의미를 분명하고자 하였다. 제목에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한글 문구를 ‘(京軍與營兵而敎市民)’으로 표기하여 ‘경군과 영병에게, 그리고 시민에게 가르친다’는 이상한 표현으로 변했다. 본래 언문 표현대로 하면, ‘경군과 영병, 향리(鄕吏)와 장교(將校), 시민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일 것이다.
고시문의 서두에는 개항 이래 조일 관계를 개관하면서 갑신개화파가 일본과 협력했다는 점을 거론하고, 1894년 갑오개혁파들이 왜국과 체결하여 경성에 들어와 군부(임금)를 핍박하여 국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1894년 6월 2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금년 뉵월의 개화간당’이라고 지적하였다(국편 편집본에는 ‘금년 십월’로 오기). 또한 갑오개혁 정부가 인민을 무휼하지 않고 도탄에 빠지게한 상황에 대해 ‘왜적(일본)’을 초멸하고 개화를 제어하고 조정을 청평하여 사직을 안보하려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때 사용된 ‘척왜척화’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설왕설래했다. 국편 간행본에 ‘척왜척화(斥倭 斥華)’로 한자를 첨기하여 동학농민군의 대외인식을 반일본·반중화라는 배외주의로 오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의문은 느낀 정창렬은 한글본 원본 사진을 확인하여 한자 오류임을 밝혔다(<갑오농민전쟁 연구>, 박사학위논문, 1991). 결국 개화간당 비판과 관련되어 ‘척화(斥化)’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시는 사실 조선 군대와 접전을 벌여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되었다는 후회와 질책을 가하고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 전후, 이른바 ‘조·일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선사람끼지 서로 죽이는 골육상잔을 중지하자면서 “조선사람끼리야 도 혹은 다르나 척왜 척화라는 기의를 같이”하자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자신을 섬멸하려 하는 정부와 영군에게조차 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런데 고시문 표기 중에는 “□성상, □군부, □조정, 충□군우국” 등 조정과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 앞에 한 칸을 띄어 쓰고 있다. 이는 당시 국왕이나 국가를 우선시하는 관행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의 의식 속에는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를 그대로 긍정하는데 머물렀다고 해석될 수는 없다. 앞서 공포된 <선유방문 한글 고시문>에서 “우리 성상이 극히 인자하시니 어찌 너희를 죽이랴 하시리오”라고 하여, 백성을 적자(赤子)로 인식하는 고종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고시문은 고종 윤음이나 농민군 진압의 방침을 정면 반박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시문의 전후 맥락은 갑오 11월 12일 같은 날에 배포한 정부군의 탄압책을 비판하는 <고시문(示京軍營兵)>과 바로 연결되고, 순무영에서 배포한 고시문(한문 및 언문)에 대한 전면 거부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고시문은 조선사람끼리 동족상잔을 이제 그만두고 인민의 생명과 생존을 존중하자는 눈물겨운 호소를 담고 있다. 나아가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면에서 반전 평화 휴머니즘까지 느낄 수 있다. 원본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아카이브에 유리필름 사진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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