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오웰은 한 민족의 정체성에 있어서 연속성(continuity)이란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다. 어른이 된 사람은 어렸을 때와 매우 다르지만 그 둘은 역시 같은 사람이란 이야기이었다.
이즈음에 특히 오웰의 이 말이 자주 생각나는 것은 월드 컵 행사를 계기로 느끼는 축구의 열기 때문이다. 필자가 35년 전 처음 영국을 왔을 때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모두 "아 축구를 잘 하는 나라!"라는 말을 하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이 곳에 오기 전 해에 북한의 축구팀이 처녀 출전을 하여서 놀랄만한 성적을 올린 일 때문이었다고 들었다. 이 즈음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를 받느라고 바쁘게 지낸다. 우선은 월드 컵 행사의 조직이 훌륭하게되었고 개막식의 축전도 매우 의미 있으면서도 사람의 이목을 끌만큼 화려하게 치루었으며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축구팀이 놀랄 만큼 경기를 잘 한다는 것이다.
참전용사들 의미있는 행사
세계가 주목하는 주요 경기를 주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는 한국은 반세기전의 한국과 같은 나라이면서도 다른 나라인가? 필자가 받는 축하와 인사 중에는 약간 다른 것도 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성이 있는 축하들이다. 공교롭게도 월드 컾 경기가 열리고 있는 시기가 6월이고 이 달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 회(British Korean Veterans Association)가 반세기 전을 회상하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벌리는 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UN군 측에서 참여했던 모든 나라가 다 그러하겠지만 영국의 경우에는 협회 차원에서도 활동이 활발하지만 회원들 사이에도 유대감이 깊어서 유독 여러 가지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참전 용사들은 이제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지만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이름도 잘 모르던 나라에서 큰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했다는 것을 의의 깊게 기억하고 있다. 현재로는 회원 수가 4,000여명이나 되고 지방 별로 결성된 지부가 전국에 60 여 개나 있다.
이들은 각 지부별로 연 1회 이상 지부 기를 교회에 바치는 기 헌수식(Standard Dedication)을 행하고 시가 행진 등의 행사를 열뿐만 아니라 회원 가족 간의 친목 리셉션 등을 개최하기도 한다. 물론 중앙에서는 따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있는 쎄인트 폴 교회에 모여 기념식을 갖는다.
이 때에 의식을 주관하는 목사님도 유명한 글로스터 연대의 솔마리 전투에 종군 목사로 참전했다가 오랫동안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겪은 분이다. 이 협회는 한국 교민회나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행사들에도 적극 참여하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예전의 부대 기를 앞세우고 구령에 맞추어서 행진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도 감회에 젖게 한다.
이들 중에는 더욱이 과거에 싸웠던 상대방에게도 미움과 원한보다도 평화를 기원하는 분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는 영국이 국민 개병제(national service)를 시행하던 시기이어서 직업 군인들 이외에도 영국 사회의 도처에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만난다. 더욱이 흥미 있는 것은 이제 참전 용사들의 2 세들의 진출도 간혹 눈에 뜨이는 점이다.
최근에 한국에 해군 함장으로 참전했던 분의 아드님이 정부에 요직에 임명된 일도 있다.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들이 한국이 개최하는 월드 컵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에게는 한국의 발전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성취가 바로 자신들의 과거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비약적 발전 보람느껴
며칠 전에 이제는 저명 인사가 된 참전 군인 한 분을 만났더니 유별나게 월드 컵에 관한 덕담과 축하를 하기에 그것이 반세기 전에 우리를 위하여 싸워 준 분들의 덕택이라고 인사 치레를 하였다. 그 분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답을 하는 것이었다:
"대사 님! 반세기 전에 우리가 한국을 위하여 적은 기여를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 것에 대하여 충분하고 남을 만큼 보답을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이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이룬 성취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만약 전쟁 이후에 한국이 불행한 길을 걸었다면 우리도 얼마나 비참한 느낌이었겠습니까. 월드 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수 많은 해외 전쟁을 치루었지만 한국 전쟁만큼 보람이 있는 참전도 드문 예이다.'"
필자는 한 마디를 더 보태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우리가 그 사이에 이룬 발전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분은 다시 한 마디 답을 하였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그런 비판적인 태도가 한국 발전의 비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에 대하여 약간은 관대한 점수를 주어도 됩니다."
/라종일(주영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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