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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김유석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울음이 잘 번지도록 … 걷다가 선다, 느낀다, 다시 걷는다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뗀다. 응달과 양달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돌아와 보면 조금씩 무너지고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두 팔이 따라온다. 김행숙은 “미적 쾌감은 ‘엔트로피와 네그엔트로피의 최적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혼돈과 질서가 번갈아 놓인 징검다리같이 미학적 균형을 이룬 김유석 시인의 시집 <붉음이 제 몸을 휜다> 를 생각한다. 호박넝쿨이 “둑방 밑에 버려진 토관”에 “푸른 힘줄을 옭아 넣고 있다”(‘부드러운 힘’ 중). 강했지만 버려진 존재에게 보내는 ‘연두의 입술’로 세상의 볼은 푸르다. 시인은 “한 번뿐인 생이 여러 번 다녀가듯 혼곤한 날”(‘처서’ 중)에게 다시 ‘푸른 젖꼭지’를 물릴 것이다.

“한여름 문간 앞에 그늘을 내어놓고/ 잠시 들렀다 가는 것들의 기척”(‘공空’ 중)에 몸을 기울인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잠시’는 찰나에 불과하지만, ‘기척’은 온 생애다. 공과 색이 사는 느릅나무 어린 그늘을 분양받고 싶다. “오르면서 세우는 그만큼의 벼랑을 끼고/ 휘청거리는 순간순간이 황홀해서/ 그림자조차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린” 수수깡의 “내려오는 길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마디’ 중). 이 대목에 이르면 의지를 낮게 부리는 버드나무와 높이 오르는 미루나무를 비교하는 일이 무색해진다. “나는 곡선으로 나아가고/ 제 몸을 쥐어트는 가학적인 문양을 둘렀고/ 그리고, 나의 피는 차갑다”(‘뱀의 문장紋章을 쓰는 가계家系’ 중). 이 시를 보며 직선과 무문, 따스한 피, 그리고 해독을 떠올린다.

“울음은 감정이 아니라 생의 지극한 울림이다. 밖으로부터 삼투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은 내 안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생의 어디쯤 스스로 풀리며, 내 안에서 공명한다. 그러므로 붉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의 몸은 텅 비어있다. 울음이 울림이 되는 이유다. 시를 읽고 나면 공명이 가득 들어차 장구통이 된 기분이다. “뿔이 난 후에야 송아지는 자신이 소임을 알게” 되지만, “감때사나운 부사리의 뿔을 각목으로 내려치면 이내 직수굿해진다”(‘개뿔’ 중). 그 울음은 언제쯤 풀밭에 풀려 길들여지지 않은 정체성으로 살아갈지. “사막 건너 또 다른 사막이 놓여 있기 때문”에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행자’ 중) 낙타의 혹에서 언제 푸른 달이 풀려나와 사막의 속눈썹을 비추어줄지.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가 “철사줄에 발목 하나를 두고 간”(‘세 발 고라니’ 중) 고라니의 배고픔을 울린다. “마당가에 떨어져 등을 비비적거”리는 매미를 위해 나무그늘은 “울음이 묻어 있는”(‘미필적 감정 2’ 중) 공명통을 떤다.

보이지 않는 울음이 더 먹먹하다. 시인은 울음이 잘 번지도록 등을 웅크리지 않는다. 오래 가두어 놓은 시인의 울음은 여물을 먹는 소의 혀처럼 붉다. 씨에게 물릴 사과의 통통 불은 몸이고, “비긋이 열린 마당을 적시는” 생혈 같은 눈시울처럼 “보리밥나무 열매 속으로”(‘유월’ 중) 스며드는 붉음이다. 울음을 벗고 붉음을 입는 것들은 제 몸을 휘게 하는 무거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무거움이 예사롭지 않다. “무게를 좀 더 얹히려고/ 이슬을 맞히고 오줌발 먹이는/ 고물장수의 비루한 생이 들어 있을지 모를”(‘가벼움을 팔아먹다’ 중) 책들은 가벼워 우리를 훅 휘게 한다.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생각 들 때/ 방향을 바꾸는 줄도 모르고”(‘개구리가 뛰는 방향을 바꿀 때’ 중) 뛰어내리는 붉은 눈물이 있다.

걷다가 선다. 느낀다. 다시 걷는다. “한 길을 너무 오래 걷다 보면 마치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그때에 가슴에 고이는 것이 나의 시”라고 시인이 말한 적이 있다. “수염이 깔끄러워서, 물풍선 같은 달은 어떻게 보리밭을 건넜을까”(‘이슬방울 주렴珠簾’ 중) 궁금해하며 들길을 걷는다. 걷기 위하여 혹은 서기 위하여 많은 날들은 꽃의 고요를 개미처럼 핥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하얀 건물 위에 슬픔이 좌우로 펄럭인다. 강물 옆 둑을 따라 타들어가는 금지된 불 냄새가 난다. 시인이 사는 곳이다. “싸락눈 몇 됫박 들판에 안”쳐 한 시절 보내다가, “한 곳 정들지 못하고 떠”(‘이력’ 중)돌 것이다.

 

* 이영종 시인은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노숙’이 당선되었고, 15회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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