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의 길을 걷다 보면 “학인당”이라는 고택이 있다.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면 너무나도 평범한 골목 그리고 정문.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전통의 혼이 있다. 빛바랜 사진 속 백범 김구 그리고 해공 신익희. 더불어 소리판을 즐겼다던 대청마루 등 오랜 시간 전주에서 전통예술을 공부했고 또한 업으로 삼고 있는 필자에게 다가오는 전라북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민족혼의 올곧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학인당은 전라북도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조선 성리학자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 11세손인 백낙중에 의해 1905년부터 2년 8개월 동안 지어진 아흔아홉 칸의 거대한 고택이다. 궁중 건축양식을 차용하여 압록강과 오대산에서 공수한 금강송으로 집을 지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어떤 사연으로 그러한 큰집을 어찌 지었나 하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 사연은 참으로 올곧다. 대한제국의 어려운 시기에 백낙준은 고종 즉위 이후 경복궁 중건사업에 집안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고 그러한 친분에 이러한 큰 저택을 지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지어진 민간 최고의 저택 학인당은 다시금 한민족의 단결과 복원을 위한 역사 현장으로 사용되었고 그 용기의 정신과 흔적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00년대 전주대사습놀이는 일본 내정간섭 속에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 이러한 소리판을 잃어가던 명창들에게 용기와 설 자리를 열어준 곳이 바로 학인당이다. 학인당의 주인 백낙중은 대청마루와 방을 모두 개방하여 공연장으로 변환시켜 민족예술의 혼을 지속시켰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이 묵고 가는 영빈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백범이 초대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전주에 내려왔을 때 당시 백낙중 자신이 기거하던 안채를 기꺼이 내줬다고 한다. 백범이 머물다간 방 옆으로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 머물다 간 방이 또한 자리하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조선지(朝鮮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그 모양은 한반도의 좌우가 뒤집힌 모양이다. 그 이유는 학인당이 지어질 무렵 조선은 이미 일본의 침탈을 받고 있었고 그러한 나라 잃은 슬픔에 연못을 뒤집힌 한반도의 모습으로 짓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금 세상이 뒤바뀌어 조선의 국권이 회복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1908년 지어질 당시 학인당은 2천여 평 부지에 지어진 아흔아홉 칸 저택이었지만 현재는 530평 7채만이 남아 전승되고 있다. 일화로 학인당의 단면을 또 논하자면 지난 1970년대 용인민속촌의 조성을 위해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를 제시하며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내놓고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고택은 전라북도를 지키며 꿋꿋이 우리 가슴 속 깊이 예술혼을 지키고 있다.
우리의 민족혼처럼 올곧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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