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업은 헌종 13년인 1847년에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개항기 전라북도 익산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던 명창이다.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타고난 목에 재주도 많았다. 12세에 전남 보성의 박유전 문하에 들어가 5년간 소리를 배웠으며 이후 산 중 절로 들어가 5년 동안 모진 노력 끝에 스스로 득음하기에 이른다.
정창업은 득음한 후 산에서 내려와 자신의 실력을 확인도 하고 만인에게 실력을 알릴 겸 전주대사습에 참가한다. 22세의 어린 나이라 많은 관중 앞에 소리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그는 경연 소리 도중 그만 사설을 놓치고 머뭇거리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춘향가 중 한 대목이었는데 정창업은 몹시 당황하며 “나귀 등에 솔질 솰솰. 솔질 솰솰. 솔질 솰솰...” 다음 대목 사설이 생각이 나지 않아 계속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청중들은 수군거리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어느 사람은 “저 혹독한 솔질에 나귀는 곧 죽을 거야. 푸하하!”라고 비웃음을 던졌다. 곧이어 정창업은 퇴장을 당했고 불행히도 낙방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뒤 그는 비참한 심정에 소리를 그만두고 만다. 그의 소문은 경연 후 걷잡을 수 없이 세간에 퍼지게 되었으며 창피함과 수모에 그만 정창업은 식음을 전폐하고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창 이날치가 나주목사 생일연에 축하 소리를 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날치는 같은 박유전의 제자였지만 정창업보다 나이가 27세나 많은 대선배로 부모님과 같은 심정을 가진 동문이었다. 정창업 또한, 이날치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이날치는 정창업에게 “나는 자네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인 것을, 한 번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다시 분발해 명예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나? 어서 다시 보성으로 가서 공부하시게” 하지만 정창업은 스승의 명예에 욕되게 함을 죄스럽게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지 못함을 밝힌다. 그러자 이날치는 “그러면 전라북도 고창에 가서 신재효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게나.”라고 권유하였고 정창업은 기력을 회복한 후 고창으로 가 신재효 문하에 입적하기에 이른다. 그는 신재효에게 다시 소리를 공부하며 더불어 판소리에 대한 이론과 견문을 넓혔다. 심청가를 주력하였는데 그 비장함의 소리는 어떤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창업은 3년 후 다시 전주대사습에 참가한다. 심청가 중 남경장사 선인에게 끌려가는 대목부터 심봉사가 효녀비를 부여안고 통곡하는 타루비 대목, 집에 돌아온 심봉사가 적막한 집을 보며 심청을 생각하며 울부짖는 대목을 차례대로 애원성과 함께 비장하게 소리를 하니 모든 청중은 눈물을 흘리고 그의 소리에 탄복하였다고 전한다. 그렇게 정창업은 다시 도전한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하게 된다. 여느 어전 광대처럼 운현궁에서 1년간 소리하며 수 천냥을 벌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많은 소리판을 이끌었으며 제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그의 아들은 명창 정학진이요 손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였던 정광수이며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 수궁가 보유자 정의진은 증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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