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교향악단은 지난해 말 3년 임기를 마친 오스모 벤스케 전 서울시향 음악감독과 함께 24·25일과 30·31일 시벨리우스의 곡으로 마지막 호흡을 맞춘다. 벤스케 전 감독은 언론을 통해 음악감독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로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 작품을 담은 음반 발매한 것을 꼽았다. 그는 “서울시향 단원들이 윤이상 음악 녹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아 한국 교향악단이 왜 한국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고 녹음해야 하는가를 설득해야 했다”라며 “독창적인 그의 음악을 한국이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연주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자신의 의지를 뚜렷이 말했다. 또한, 그는 “윤이상을 선택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한국 전통미가 들어간 교향곡의 완성도를 피력했다.
이처럼 언론에 비친 짧은 이야기는 필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녹음을 주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겠지. 윤이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은 뒤 서독으로 귀화한 어두운 과거가 있지만, 한민족의 음악을 세계로 알린 음악가로 그의 작품은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서방에 널리 알린 특별한 곡이다. 그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창원시이며 경상남도 통영에서 자라며 공부했다. 이때 그는 ‘통영의 남해안 별신굿’, ‘통영 오광대’, ‘통영 승전무’ 등 지역의 전통예술을 많이 듣고 보며 체험했는데 그러한 경험은 훗날 작곡에 필요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14세에 독학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하여 18세에 일본 오사카음악학원 그리고 늦은 38세였던 1956년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 생활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후 1964년 독일 포드 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하며 <심청> 외 많은 오페라를 비롯 <바라>, <무악>, <예악>, <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과 함께 평생 백 오십여 편이 넘는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윤이상은 1963년 플롯과 피아노 이중주 <가락>이란 작품을 통해 플롯의 직선적인 소리를 한국 전통악기 표현 방식인 음을 떠는 요성, 음을 끌어올리는 추성, 끌어내리는 퇴성을 사용하여 한국적 표현 방식을 도입했다. 마치 플롯이 대금인듯한 묘한 울림은 관객에게 특별함으로 다가섰다. 또한, 1966년 교향곡 <예악>이란 작품을 초연하였는데 우리나라 전통악기 박(拍)을 사용하여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렸고, 곡의 흐름을 때론 동일하게 때론 다르게 선율을 만들어 긴장과 이완을 창출했다. 그리고 느리고 장중한 느낌을 자극하여 마치 한국 전통음악인 정악(正樂)을 듣는 듯한 착각을 이끌기도 했다. 이렇듯 윤이상은 우리 한민족의 전통음악을 세계인에게 알리고자 노력한 작곡가이다. 그가 고백하기를 “내 상상력의 모티브는 한국 전통음악이다.”란 마음을 토로했을 정도로 한국의 전통예술을 사랑한 예술가이다. 현재 윤이상의 음악 세계는 현재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윤이상평화재단 등의 활동을 통해 올곧게 이어지고 있다. 이제 많은 한국 유수의 교향악단들이 윤이상의 곡에 더욱 애정을 갖고 많은 연주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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