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대둔산은 아름다운 단풍으로 유명하다. 겨울이면 바위와 소나무가 하얀 눈과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가지 않아도 손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고 있어서 명소가 된 지 오래다. 이 아름다운 대둔산에서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마치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4.3항쟁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듯 갑오년의 대둔산은 뼈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갑오년 섣달 보름 무렵,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밀려난 고산, 진산지역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대둔산 남쪽 석두골의 8부 능선에 위치한 미륵바위(해발 700m) 위에 초막을 짓고 이듬해 2월 중순까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혹한의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이들이 3개월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험준한 산의 지형 조건이었다. 150m 절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석 위의 농민군 진지는 접근이 쉽지 않았다. 바위 위의 초막에는 50여 명이 상주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이 산 아래에서 대포를 쏘거나 바위로 접근하면 총을 쏘거나 돌을 굴려서 방어하였다. 이들의 후방 근거지는 산 북쪽의 염정골(논산시 벌곡면 수락리)과 산 남쪽의 고산 농민군 세력이었다.
대둔산 농민군의 항전은 1895년 2월 17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무너졌다. 안개 자욱한 새벽에 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당한 농민군의 피해 상황은 일본군의 기록에 자세하다. 사망자는 모두 접주 이상의 인물로 25~6명이었고 생존자는 12살의 어린 소년 1명이었다. 28,9세쯤 되는 임산부도 총상으로 사망하고 접주 김석순은 한 살 된 딸아이를 안고 계곡으로 뛰어내리다가 바위에 부딪혀 처참하게 죽었다고 했다.
이 대둔산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1998년이다. 공교롭게도 대둔산 항전의 근거지는 100년 이상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에 사용된 탄두와 탄피들이 큰 돌 아래 흩어져 있었고, 그릇과 항아리 파편이며 기와 조각과 초막의 온돌구조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죽은 이 바위를 오르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갑오년 말과 이듬해 초에 농민군 3만명 이상이 참여하여 장흥성을 점령한 석대들 전투(전남 장흥군) 이후에 꺼져가는 농민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했던 대둔산 항전은 농민군의 최후항전이었다.
지난주, 대둔산 유적지를 다시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130년 전으로 돌아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늘 맴도는 생각은, 임산부와 한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내몰린 이유는 무엇일까, 눈 덮은 산속의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시린 손을 비비며 을미년 설날 새벽을 맞았을 농민군의 염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군의 기습을 당해 한 살배기 딸아이를 가슴에 안고 절벽을 뛰어내리는 아버지의 심정은?
그렇다, 13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오늘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또 다른 시련이 더해졌을 뿐이다. 우리의 경제 규모와 문화적인 역량은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으나 경제, 사회적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었다. 기후 위기가 현실화 되고 있음에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상생과 생명과 평화의 염원은 퇴색되고 반성은 없다. 선거를 2주 남짓 앞두고, 이름도 없이 숨져간 대둔산 농민군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주적인 나라, 사람이 하늘인 고른 세상.
/신순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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