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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8) '토비대략', 경상도 상주소모영 유격병의 동학농민군 진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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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대략>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상주의 민보군 결성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 소식은 전국에 전해졌다. 경상도 상주까지 들려온 소식은 놀라웠다. 고부가 4월에 함락되었고, 5월에는 장성과 금구 등 17개 읍이 함락되었으며, 그리고 전주성에 들어가 웅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학 교단이 기포령을 내린 직후인 9월 하순 낙동강 연안의 읍성들도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주와 선산 읍성이 점거된 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경상도 북서부 군현의 동학도들은 선산 해평과 상주 낙동에 설치된 일본군 병참부와 군용전신소를 둔 것을 잘 알았다. 이 병참부에는 청국과 전쟁하기 위한 대규모의 일본군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반일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일본군은 즉각 대응해서 상주와 선산 읍성을 기습하고 동학농민군을 퇴각시켰다. 상주는 목사가 사라진 공관상태에서 향리들이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먼저 민보군을 만든 예천의 선례에 따라 집강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리들은 읍성 내외의 민정을 소집해서 군사조직을 만들고, 읍성 재점거를 경계하는 한편 외촌의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다. 

이때 정부에서 삼남에 각각 두 명씩 소모사를 임명해서 동학농민군을 자력으로 제압하도록 독려하였다. 상주 소모사에는 이 지역 거족대가의 일원인 전승지 정의묵을 선임하였다. 정의묵은 향리들이 만든 민보군을 흡수해서 병력을 확보한 후 소모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유격장 김석중(金奭中)에게 병대를 맡겨서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순회하도록 했다. 

 

△상주 유격병대의 진중일기인 <토비대략>

유격장 김석중은 상주 경내와 함께 충청도 청산과 보은 일대를 다니면서 동학 거점을 수색해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였다. 그 과정을 기록한 진중일기가 <토비대략(討匪大略)>이다. 

<토비대략>에서 다른 지역 소식도 기록하고 있다. 우선 첫머리에 소개하는 1893년 4월의 충청도 보은 장내와 전라도 금구 원평에 모였던 동학집회에 관한 내용이다. 보은 장내리 집회는 인접지의 사건이기 때문에 썼을 것이지만 먼 지역인 금구 원평의 집회도 나온다. 원평집회도 큰 소식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 다음에 1894년 4월 이후 전라도 고부와 장성 그리고 전주성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였다. 예천의 갑오년 사정을 기록한 <갑오척사록>과 같이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이 경상도 동학도들의 봉기에 영향을 준 증거로 보인다. 

<토비대략>에 기록하지 않으면 알지 못했을 동학농민군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모동면의 남진갑 이화춘 김군중 유학언 조왈경, 화동면 안치서 신광서 정기복 등과 청주대접주 김자선 등등 여러 사람이 나온다. 

이 자료는 상주의 서부 일대를 비롯 11월 이후 충청도 남동부의 실상과 활동 인물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각지를 다니며 일어난 일들을 기록해서 주요 항목을 찾아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주 유격병의 동학농민군 처형 죄목

유격장 김석중은 소모사로부터 유격병 지휘에 전권을 부여받았다. 유격병의 과감한 활동과 동학농민군 처형 등은 소모영의 절목에서 확인되는 철저한 소탕 방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토비대략>에는 처형된 동학농민군의 죄목을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적극적으로 붙잡아서 처형한 대상의 죄목은 지도자인 거괴와 범분난상적(犯分亂常賊)이었다. 상천민이 분수를 모르고 양반이나 상전을 욕보인 행위가 가장 중한 범죄라고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천민이 상전을 모욕하는 행위와 양반을 구타하거나 묶어놓고 위협하거나 양반부녀를 겁박하는 등을 무거운 죄상으로 적었다. 

수십 명의 유격병이 외촌을 돌면서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찾아다니며 동학농민군 가담자를 호되게 징치하자 살기 위해 귀화해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평민이나 천민이 양반가와 상전가에 들어가 행패를 한 주동자는 귀화를 용납하지 않고 일일이 지명해서 붙잡았다. 이들은 읍내 장터 등지에서 효수되거나 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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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대략> 갑오(1894년) 4월 내용.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충청도 보은 일대의 진압기록

11월 27일 상주 유격병은 보은과 청산을 기습하였다. 동학 교주 최시형의 체포가 첫 번째 목적이었다. 보은에는 동학대도소가 위치했고, 청산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살았다. 소모영 정탐원의 보고에 따라 네 부대로 나누어 밤중에 몰래 들이쳤으나 최시형은 잡지 못했다. 12월 3일에는 옥천 고관리에 최시형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시 기습했으나 찾지 못했다. 직전에 전라도 임실로 피신한 것이다. 

상주 유격병이 동학 본거지인 보은과 청산 일대를 순회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군 대군이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논산에 가서 전봉준군과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군이 옥천에서 동학 본거지를 지키던 수비군을 격파해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었다. 충청병영도 병력을 파견하여 수색하였다. 그래서 마치 빈집 털이를 하는 것처럼 상주유격병이 돌아다녔다. 

 

△유격장 김석중의 족쇄가 된 청산 사건

유격장 김석중은 11월 30일 청산에 들어가 이른바 팔로도성찰 강경중과 부성찰 허용을 붙잡아서 처형하고, 향리 김경연까지 동학농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추적하였다. 청산 현감도 윽박질러서 김경연의 체포를 강요하였다. 

다음과 같은 방문도 게시하였다. “청산은 적의 피해를 홀로 많이 받았으니 최적은 연이어 소굴로 삼았고, 배적은 적들을 못된 짓 하도록 인도하였으며, 김리(金吏)는 위협하고 공갈하여 한 읍이 모두 넋을 빼앗겼다.” 청산은 동학 세력에 눌렸던 시기에 양반과 향리도 동학농민군 직함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외지에서 온 유격병이 그 사정을 모르고 이들까지 처형하고 추적한 것이다. 

상주 유격병이 상주 경내를 벗어나서 충청도에 들어가 지방관을 협박하고 현임 향리를 다그친 청산 사건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관할지역을 넘어가 지방관을 윽박지른 문제와 팔로도성찰이라는 직함을 강요해서 받은 인물의 처형 문제는 내전 상태의 어지러운 시기라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었다. 충청감영과 의정부는 이를 청산민 침학사건으로 인식했다. 

상주 유격병이 청산에서 거친 행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1894년은 몇년 동안 연이은 가뭄으로 농민들이 고통을 당했는데 한 마을 전체가 기민인 경우도 있었다. 상주 유격병이 청산의 효림리에 들어가니 20호나 되는 민호가 굶주리고 있는 참상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군량으로 가져간 양식을 주어 구제를 했다. 

 

△수많은 학살이 자행된 보은 북실전투

손병희 통령이 이끈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 이후 임실에서 교주 최시형을 만나서 충청도 땅으로 돌아왔다. ‘수만 명’ 병력이 온다는 소문은 관치질서를 회복한 행군로 인근의 각 군현을 경동시켰다. 그래서 충청감영과 병영은 물론 경상감영과 일본군 병참부에 구원 요청을 잇달아 보냈다. 

상주 유격병 240명은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선인 율계령에 진을 치고 경내 침입을 막았고, 경상감영의 영병은 추풍령을 막았다. 충청병영과 옥천 민보군도 영동 용산으로 급파되었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일본군은 낙동병참부에서 1개분대가 왔고, 대구병참부에서도 1개분대가 파견되었다. 이 시기에 경부 철도노선을 조사하기 위한 군로실측대 호위병 14명이 동학농민군 행군을 뒤따라왔다. 

보은 장내리 대도소가 불태워진 것을 본 동학농민군은 보은읍내에 들어가 불을 질러 보복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인 종곡에 들어가 하루밤을 보내려고 했다. 추격해온 상주 유격병과 일본군은 종곡을 기습하였다. 종곡전투의 주도권은 일본군이 장악했다. 상주 유격병을 50명씩 일본군 장교 두 명에게 보내고, 나머지 병력을 유격장 김석중이 이끌었다. 

일본군 보고서의 전투상황은 실감이 난다. “종곡 남쪽 고지를 점령하였더니 동학도 약 1만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각기 몸을 녹이고 있었으며 조금도 방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 산개하여 약 세 번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의 정신을 교란하게 한 다음 돌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허둥지둥 당황하여 마을 밖으로 무너져 달아났다. 약 1,000m를 추격하여 요지를 택해 점령하였다. 이때가 오전 3시였다.” 

일본군은 전투보고서에서 탄약은 1,120발을 소비했고, 동학농민군 전사자는 300여명이며 부상자는 미상이라고 했다. 소와 말 80여 마리는 일본군이 노획물로 가져갔다. <토비대략>은 희생자의 수를 다르게 기재했다. “목을 자른 것이 10여 명이었으며, 어지러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2,200여 명이었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한 것이 393명이었다.”한 것이다. 

이 전투로 ‘수만 명’을 칭했던 동학교단의 농민군이 궤멸하였다. 상주 유격병의 최대 전과가 북실전투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평가는 달랐다. 종곡에 몰려있던 동학농민군을 일본군과 협력해서 학살한 사건이 너무 지나쳤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각종 모함이 심하여 심지어 이를 조사하기 위해 염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퍼졌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격장 김석중의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고, <갑오군공록>에도 실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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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대략> 갑오(1894년) 10월 내용.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안동관찰사가 된 김석중

종곡전투 직후 유격장 김석중은 일본군 장교들과 편지를 왕래하거나 만나서 교류를 계속하였다. 이들이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 김석중을 지원자가 되었다. 1895년 4월 김석중은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 대구토포사 지석영이 동래부사에 임명된 시기와 같았다. 

종곡전투를 같이 치룬 일본군 장교 미야케 대위는 김석중에게 지석영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지난 해 종곡의 전역(戰役)은 김공의 남다른 공인데, 지금 들으니 해임되어 고향으로 물러났다 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이 급선무이고, 대저 공이 있으면 상을 주는 것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김공 같은 이는 참으로 영재입니다. 동국(東國) 사람으로 그와 비교할 사람이 드무니 혹 상주에서 혹 다른 곳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관직에 나가면 저희들이 용병하는 데도 크게 편리할 것입니다. 군은 어찌하여 정부에 말하지 않습니까? 김공이 관직에 나가는 것은 귀국에만 경하할 일이 아니라 이웃 나라도 일대 경사입니다.” 

경복궁을 점령한 후 내정을 간섭하던 일본의 영향력은 강력하였다. 이런 편지가 초야의 유생을 돌연 안동부사로 나아가게 하였다.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김석중은 관찰사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일본 장교들과 가깝던 김석중은 개화정권의 정책을 적극 따랐다. 을미사변 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먼저 단발을 할 정도였다. 군사 활동에도 능력을 보였다. 안동에 의병이 편성되자 김석중은 외지로 가서 대구병정을 데려와 안동부를 탈환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김석중은 의병을 적대하는 관찰사로 변신한 것이다. 

안동의 의병은 다시 관찰부 공격을 기도하였고, 예안과 예천 등지에서도 속속 의병이 결성되었다. 김석중은 안동부를 빠져나가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토비대략>의 사료가치

<토비대략>은 필사본 자료이다. 한 부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또 한 부가 상주 우산리의 진양정씨 종가에 보관되어 있다. 군공을 인정받지 못한 김석중은 진중일기를 여러 부 필사해서 돌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중 두 부가 확인된다. 

<토비대략>은 높은 사료가치를 갖고 있다. 먼저 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모영의 동학농민군 진압상황을 전해준다. 1894년에 정부는 전국에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장 등이 임명해서 민보군을 결성하고 지휘하는 군권을 부여했지만 그 활동상을 전해주는 자료가 발굴된 적이 없었다. 

상주소모영은 공문서집인 <소모사실>과 소모사의 일기인 <소모일기>, 그리고 진중일기 <토비대략>을 남겼고, 그 자료들의 중요성이 알려졌다. 이 자료를 통해 민보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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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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