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정부에서 설치한 순문영(巡撫營) 예하 선봉장(先鋒將) 이두황(李斗璜∙1858~1916)의 진중일기(陣中日記)다. 1894년 9월 10일부터 1895년 2월 18일까지의 일기체 기록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그 외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철학과 윤사순 교수 소장본도 있다고 한다.
이두황의 본관은 인천으로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이다. 그의 원적은 서울 서부 방교(芳橋)로 확인된다. 가난한 상인(常人)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친군(親軍) 좌영(左營) 초관(哨官)으로 임명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양호초토영에 편성되어 관군으로 동학농민군 탄압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에 이르러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정부는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을 순무영 예하의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으로 임명하여 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케 하였다. 우선봉 이두황과 마찬가지로 좌선봉으로는 안성군수(安城郡守)이자 경리청(經理廳) 영관(領官) 성하영(成夏泳)이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였다. 일기에 따르면 9월 10일 의정부에서 ‘비도(匪徒)’가 기전(畿甸), 죽산(竹山), 안성(安城) 등지까지 올라오니 병사를 차출하여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이두황과 성하영이 상기초포사(相機剿捕事)로 파견되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관(領官)으로서 이두황이 지휘한 장위영(壯衛營)은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일본군에 의하여 새롭게 조직된 부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부대를 지휘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두황의 활동은 친일(親日) 군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적극 협조하였고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숱한 동학농민군이 희생당하였는데,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에도 이두황의 친일 행적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두황은 9월 21일 경기도 용인에 도착하여 직곡의 접주 이용익(李用翊)과 김량의, 이삼준을 비롯한 20명을 붙잡았다. 22일 죽산에 도착하여 이용익, 이삼준을 포함한 4명은 사살하고, 나머지 16명은 방면하였다. 27일에는 이천에서 일본군이 붙잡은 30명 중 10명을 사살하였다. 10월 3일에는 서이면 노루목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우성칠(禹成七)을 체포 후 사살하였으며, 5일에는 죽산의 남일면(南一面) 주천(注川)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5명을 체포하였다.
이후 그는 충청도 방면으로 내려가 청산, 보은, 온양, 신창 등에서도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 10월 22일 충청도 천안 목천 세성산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김복용(金福用) 등 5명을 생포하여 그들 모두를 죽였다. 11월 7일에는 해미성을 기습하여 동학농민군 약 40여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공주 우금지 전투 무렵이었다. 11월 14일에는 패주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노성(魯城)에서 공격하였고 뒤이어 전라도 전주에까지 들어갔다.
이두황은 대관 윤희영을 비롯한 100여 명의 병력을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의 지휘하에 있는 일본군 장교와 함께 원평까지 파견하였고 태인전투까지 참여시켜 동학농민군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속적으로 휘하 병력을 파견하여 전라도 임실, 남원, 순창, 곡성, 구례, 광양, 순천, 낙안, 보성, 장흥, 나주 등지를 돌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1895년 1월 대둔산에서 최후의 항전을 펼치던 동학농민군을 향해서도 병력을 파견하여 동학농민군 진압의 끝을 맺었다.
여기까지가 <양호우선봉일기>에 나타난 이두황의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이다. 앞에서 보듯이 이두황은 매우 적극적인 토벌 작업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이용익, 우성칠, 김복용 등 주요 지도자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동학농민군을 살해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태인까지 뒤쫓아가서 결국에는 해산시켰으며 전라도 남부지역 일대에 흩어진 동학농민군 잔당까지 섬멸하는 집요함을 보여주었다. 동학농민군 최후 항전인 1895년 1월 대둔산 전투에까지 손을 뻗친 것을 볼 때 이두황은 조선군 장령 중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장 앞장선 인물로 손꼽힐 수 있다.
동학농민군 진압 이후 이두황의 행적은 더욱 기가 막히다. 1895년 초 이두황은 죽산부사와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 자리를 내려놓고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곧이어 훈련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훈련대는 1895년 8월 20일 일본군이 일으킨 명성황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일으킨 당사자가 되었다. 이때 이두황은 일본군에 협조하여 그들의 경복궁 침입을 도와주었고 그 자신도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였다.
이두황이 지휘한 훈련대의 을미사변 개입은 그 정황이 뚜렷한 것이었다. 사건 이후 훈련대 정위(正尉) 윤석우는 왕비의 시신을 은폐한 죄과로 고등재판소에서 모반죄를 적용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두황은 이미 일본으로 도주하여 훈련대 장교 우범선을 비롯하여 정난교, 유혁료 등과 함께 체포령을 받았다.
1896년 2월 국왕 고종이 일본군의 감시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간 아관파천이 벌어진 후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일본으로 도주하여 망명한 이두황을 비롯하여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우범선, 이범래, 이진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다시금 떨어졌다.
이두황의 일본 도주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부산으로 도주하여 조선 관리의 눈을 피해 일본인의 집에 숨어있으면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바꿔 입은 후 1897년 1월 간신히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 그 후 교토를 경유하여 도쿄로 갔으며, 이후 일본 각지를 유람하며 각 지역의 유지들과 교류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고 황제 고종이 퇴위함에 따라 이두황은 10년에 달하는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새로 황제로 등극한 순종은 9월 6일 곧바로 그의 죄를 사면하였고, 10월 8일 중추원 부찬의로 임명하였다. 이윽고 이두황은 1908년 1월 22일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죽산부사 겸 장위영 영관으로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으로서 1894년 11월 전라도 전주에 진입하고 전라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섬멸했던 이두황의 화려한 복귀였다.
이두황은 통감부 체제하에서도 일본에 적극 협력하여 일본군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이두황은 동학농민군 진압뿐만 아니라 의병 진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데 이르도록 하였다. 당연히 이두황은 일제 치하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린다.
전라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던 이두황은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다시금 전라북도 장관으로 임명되어 1916년 그가 죽기까지 재직하였다.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던 이두황을 일제 조선총독부 당국이 다시금 전라북도 장관으로 임명한 사실은 일제가 그만큼 동학농민군 진압 및 혹시라도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움직임의 화근 제거에 진심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두황이 죽고 나서 장례는 1916년 3월 13일 전주 다가공원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묘는 지금도 전주 기린봉에 남아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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