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후진의 유적 답사기
'왕궁성(왕검성) 북쪽 10여리에 미륵산 서쪽 기슭에 옛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 (…) 밭두렁 사이에 7층 석탑은 엄청 높고 크며, 모든 석재들은 둘러 막아 첩첩히 쌓아 올려졌고, 돌기둥은 별도로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다. 소위 동방석탑의 으뜸이라 함은 헛 말이 아닌가 싶다. 백년 전에 벼락으로 그 절반이 무너졌고, 아래 석문이 있어 출입할 수가 있는데, 세사람이 함께 들어가 놀 수 있을 정도이다. 서쪽 벽을 밟고 탑 위에 올라가 농부 세 사람이 농기구를 옆에 끼고 그 위에 누워 있다. 밭두렁 사이에는 초석과 석조(石槽), 그릇 등이 널려 있는데, 반쯤은 노출되고, 또는 전부 노출되어 기울어져 있거나 부서져 있다. 종각으로 추정되는 초석은 완연히 남아 있다.'
지금부터 255년전, 1738년(영조 14) 어느 가을 날 기록이다. 익산 금마를 답사한 강후진(康侯晉)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200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너무나도 선연히 금마땅 미륵사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답사기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실제 석탑이 7층까지 남아 있었고, 무너진 탑 서쪽 면의 벽을 쌓아 사람이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마전이나 사자암 지명은 현존하며, 저산, 명적암, 석정, 용추 등의 지명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 강후진의 삶과 저술
그렇다면, 이처럼 역사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꼼꼼히 기록한 보기 드문 저술가인 강후진은 누구인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출신의 그는 문헌을 널리 읽고 유적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록한 저술가이자 고고학자이다. 강후진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을 그의 저술이다. 먼저 와유록은 자신의 직접 답사한 내용과 지지(地誌) 자료를 모아 저술한 책이다. 1729년 평안도 성천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유동명도기(遊東明都記)', 같은 해 묘향산의 사찰과 단군 유적을 답사한 '유묘향산기', 1730년 여름 평양의 단군과 기자유적을 답사한 '평양기', 1734년 황해도 곡산를 답사한 '유두류동기(遊頭流洞記)', 1734년 익산 마한·백제 유적을 답사한 '유금마성기', 또한 고조선·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지리지를 엮은 '서경총람'과 '송경' 등 총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와유록은 자신이 지은 답사 기행문과 기존의 서책에서 발췌하여 답사를 위한 지리지를 합쳐 만든 저술로서 그의 해박한 학문적 바탕과 실제 답사를 통해 매우 사실적이고 특색있는 문장을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특히'유금마성기'는 우리 지역인 익산 금마 일대의 왕궁리, 미륵사지, 쌍릉 등이 답사를 통해 당시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완산의 김창익·김수봉, 익산 사람 최운거와 함께 만경강 춘포 일대의 횡탄, 왕검성(왕궁리)의 정원유적와 오금산성, 그리고 미륵사지와 기준성(미륵산성), 당산과 쌍릉 등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역사적 소신을 바탕으로 답사기를 적고 있어 이채롭다.
'감영록'은 강후진의 가장 방대하고 대표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총 6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1·2권은 안타깝게도 실전(失傳)되었다. 국가와 시조, 그리고 수도와 제도를 1~4권에서 다루었으며, 5~6권에서는 민간신앙과 사물을 수록하였다. 그는 상고에서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르는 분류사에 가졌던 관심을 독서로 정리하고 발로 답사하여 얻은 지식을 수록하였다. 특히 고승전, 언어, 민간신앙, 동물 등 희귀한 민담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생활사와 민초들의 애환 등을 엮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화이잡록'은 천하를 중국과 주변국으로 구분하는 화이(華夷)의식을 반영한 책으로 여라나라 이름과 민족의 위치와 풍속, 중국과 우리나라 성씨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담긴 저술로 특히 성씨가 기원한 땅과 혈연에 대한 동아시아 민족지의 성격이 강한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역대회령'은 서제(庶弟)인 후준의 아들 강주신이 보완한 것으로 보이는데, 각지에 있는 신당(神堂)의 내력과 신령의 기원을 서술한 책이며, '송사록'은 무장현의 역사 지리지로 강후진의 지역사 연구 저술로 평가된다. '송사(松沙)'란 무장(茂長)이 무송(茂松)과 장사(長沙)를 합쳐 만든 고을 이름이므로 송사록은 무장지(茂長誌)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송사록'은 자신이 살고 있는 무장의 자존심을 찾고 지역에서의 유산과 정서를 보존·계승하려는 중요한 사찬 읍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풀뿌리 지역사가 살아야
태평산인 강후진은 현재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2007년 폐교된 석곡초등학교 뒤편에 쓸쓸이 잠들어 있다. 그가 나고 자란 용장마을로부터 서쪽으로 약 900m 남짓한 곳이다. 그는 아버지 강유태가 52세때 늦동이(晩得)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에 가문을 이끌 계승자도 아니었으며, 학문적 연원이나 이름난 계승자도 없었기에 철저한 야인으로 살았던 전라도 무장의 한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날에 조망받는 단 한가지는 오로지 한 길,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역사적 관점에서 철저하게 학문을 발로 뛰고 기술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상고사로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기자조선을 거쳐 마한과 삼국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특히 관서와 호남을 두루 답사하며 확인하면서 복원하려 했다는 점, 신천강씨의 혈연적 기원과 전라도 무장의 지역사에서부터 보기 드물게 광범위한 동아시아의 민족에 까지 역사적 관심을 확대했다는 점은 새롭게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 이후 인물의 불모지와 같았던 전라도 땅에 풀뿌리 지식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보다 앞선 부안의 백광홍이나 태인의 이항, 순창의 김인후 등 성리학으로 전국을 주름잡던 명사들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부안 우반동에 은거한 반계 유형원이나, 강후진과 같은 고창 출신인 이재 황윤석, 순창의 여암 신경준, 장흥의 존재 위백규 등을 주목해 볼 수 있겠다.
그 당대 꿈꾸는 역사가 오늘의 역사를 이어가듯 숨어 빛나는 보석같은 인물이 끊임없이 샘솟는 이 땅이 되길 소원해 보며, 지역이 살아야 국가가 살기에 오늘도 풀뿌리 지역사가 꿈틀대는 역사가 용솟음치길 기대해 본다.
/ 김승대 (문화전문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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