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문신·탁월한 외교가 제주판관 시절 돌담 쌓아 '추앙'
부안땅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자 유서깊은 역사의 숨결이 가득한 보배로운 곳이다. 특히 부안 변산은 곳곳이 숨은 비경(秘景)이요, 찾을수록 소중한 문화자산이 그윽한 곳으로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줄포만 곰소바다, 내소사와 개암사, 유천리 상감청자, 호랑가시나무와 꽝꽝나무의 푸르름, 아름다운 변산의 낙조, 서해바다 지킴이 수성당,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 반계 유형원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일찍이 조선 영조때 어사 박문수는 "물고기와 소금과 땔나무가 풍부하여 부모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이로다"라고 하였던가. 또한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땅이다.
◆ 부안의 정신사적 인물, 지포 김구
이러한 부안땅에 인물을 찾는다면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김홍원, 마지막 유학의 거두인 간재 전우 등 수많은 사람을 들 수 있겠지만, 부안이 낳은 걸출한 대학자이자 부안의 정신사적 인물인 지포 김구(止浦 金坵, 1211∼1278)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뛰어난 외교가로서, 그가 남긴 문풍의 영향으로 조선시기에 부안 뿐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된다.
김구는 고려말 몽고간섭기때 살았던 사람으로 부안 출신으로 본관은 부령(부안),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라 하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와 지금의 변산 지지포(지금의 지서리·운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그를 지포선생이라 불렀다.
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변산 지지포에 그의 묘역과, 부안 연곡리에 도동서원터, 선은리에 김구유허비 등이 있다. 특히 김구를 주벽(主壁)으로 1534년(중종 29)에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세워진 시기가 최초의 서원이라는 영주 소수서원과 비교해서 8년이나 앞서 지포 김구와 함께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유학의 중심지로서의 도동서원은 조선시기 부안지방이 유림의 세력이 비교적 강했고 그의 후손인 부령김씨(부안김씨)들이 생원·진사가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기에 주목된다.
또한 선은리에 남아 있는 김구유허비는 조선말 대표적인 유림의 거두로 당시 계화도에 은거했던 간재 전우가 1910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지포가 김구가 태어나고 만년에 살았던 선은동과 변산 지지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예의윤강(禮儀倫綱)을 다하였다"고 부안 땅에서 김구의 문풍진작를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 부안보다 제주에서 더 유명한 인물
지포 김구는 부안 출신으로 고장을 빛낸 인물 중에 가장 오래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역대 부안군지 등에 보면 인물조 첫머리에 그의 대한 기록이 소개된다.
그가 살다간 시대는 어지러운 고려말 무신정권기와 몽고간섭기였다. 그가 부안에서 성장하였고 신흥사류로서 중서시랑평장사라는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기에 정치관료로서도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가 만년에 낙향하여 지지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문풍을 선양하며 지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기에 중요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1211년(희종 7) 지금의 부안 선은리에서 출생한 김구는 22세때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관료생활에 접어든다. 특히 당대 제1의 문호였던 이규보와 최자가 김구를 천거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는 24세때인 1234년(고종 21)에 제주판관으로 임명되어 6년을 제주에서 보내며 선정을 베푼다. 탐라지(耽羅志) 풍속편에 보면 "김구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에게 고통을 느끼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또한, 동문선(東文選)에 의하면 '제주도는 난석(難石)이 많고 땅이 건조하여 본시부터 논이란 없고 다만 밀, 보리, 콩, 조 따위만 나는데 그나마 옛적엔 내 밭, 네 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힘이 센 집에서 나날이 남의 것을 누에가 뽕을 먹듯 침범하므로 모든 힘없는 백성들이 괴로워하더니 김구란 이가 판관이 되어 온 후 백성의 고통을 듣고 돌을 모아 밭에 담을 두르게 하니 경계가 분명해져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김구는 힘없는 백성들이 힘있는 토호세력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광경을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성의 입장에서 돌담을 쌓고 치안과 국방에 전력을 다했다. 말 그대로 민본주의 실천한 목민관의 표본이었다. 우리 고장의 인물이 제주에서 더 잘 알려지고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현재 제주를 상징하는 특유의 현무암 돌담이 이러한 연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부안 출신 김구를 제주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할 만하다.
이를 대변이나 하듯 제주시 삼양동에 소재한 제주민속박물관에는 "돌문화의 은인 판관 김구선생 공적비"까지 건립되어 있고, 현재 제주 애월읍 설촌마을에는 제주 특유의 현무암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되기까지 하였다.
이후 김구는 권직한림으로 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북정록(北征錄), 항몽의식이 담긴 "과철주" 등 여러 시를 남기도 한다. 최충헌, 최우정권이 끝나고 최우의 아들 최항이 집권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김구는 부안으로 낙향한다. 그의 나이 40세(1249년)였다. 이후 10년간 선학동(선은리)와 지지포(변산 운산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였다. 당시 강화도에 고려조정이 있었는데 강화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쓸쓸히 변산 지지포에 닿았을 김구를 회상한다.
◆ 뛰어난 외교문장가의 대명사
김구는 이후 유경·김준정권이 등장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1257년에는 한림원 지제고를 시작으로 50세인 1259년(고종46년) 김구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還都)와 태자의 입조(入朝)에 대한 표문을 작성하여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 표문은 원 세조를 높이는 글이지만 결국 이후 몽고의 무리한 요구와 압력을 해결하는 중요한 전기가 된 글로 평가된다. 이후 원종, 충렬왕 초기 그가 죽기 전까지 김구는 국가의 주요 외교문서나 의례에 수반되는 문한(文翰)를 맡는 중심인물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원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음속에 비분강개의 항몽의식은 내재하나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문장가로서의 김구의 삶의 궤적은 여기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김구 신종·희종·강종의 삼조실록(三朝實錄)를 편찬하기도 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1274년에는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되어 재상 반열에 오르게 된다.
김구의 성품은 "성실하여 말이 적었으나 국사를 논함에는 강직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고려사'에 보면 "국사를 논할 때 말이 절도있는 직언으로 피하는 바가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김구의 성품이 매우 강직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1278년(충렬왕 4)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본관은 부령(扶寧: 현재의 扶安).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국가에서 장사비용을 대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김구는 첫째부인 박씨에게 1녀, 둘째부인 경주최씨에게 3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해주정씨, 청주정씨, 경주김씨등 당시 명문과 혼인하였다. 특히 그의 손녀사위가 기철(奇轍)인 점으로 보아 김구는 당대 최고의 권문세족과 연혼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김승대 문화전문 시민기자(전북도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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