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익산역 개통 100주년…근·현대사 문화동력 자산 만들자...이리역 폭발은 도시 재건 계기…역사 콘텐츠로 활용을
익산역은 옛 이리역을 말한다. 이리역은 1995년 이리시와 익산시가 통합되기 전의 옛 이리시의 상징이자 지역문화의 정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일제강점기 이리는 군산과 더불어 전북지역를 대표적인 계획도시이자 전략적으로 성장한 교통·물류의 중심도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전의 찬란한 마한·백제의 고대문화의 정체성이나 고려·조선시대의 다양한 문화유산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근·현대 문화적 팽창이 진행되면서 전통문화와의 충돌과 내·외적인 문화접변이 이루어져 왔다.
꿈꾸는 미래의 비전은 이러한 지역사의 새로운 동력을 찾아가는 데서 시작되는 바, 익산역 주변의 옛 풍경 속에서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이리지도에 나타난 번화가 이리역
“이리역 앞 명치정이 가장 번화가였다. 교본여관, 매월당 과자점, 조일여관,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삼남은행, 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등이 있었고, 식산은행에서 당본백화점으로 가는 영정통은 일본인 중심상가를 이루며 번성했다.”
3년 전 2008년 10월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 이리, 익산 고향 땅을 찾아온 전촌민자(田村敏子, Toshiko Tamura)의 증언이다. 그녀의 집은 동양척식회사 관사(현재 이리침교회 뒤편)였으며, 1945년 당시 23세로 이리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자신의 직접 이리 시내의 내용을 소상히 그린 지도 한 장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이리역을 중심으로 한 이래 시내의 도로, 관공서, 학교, 금융기관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이리는 호남의 교통결절의 요충지인 이리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이리역은 호남 곡식 수탈의 전초기지인 이리~군산선, 목포를 향하는 호남선, 전주를 거쳐 순천·여수에 이르는 전라선의 철도 분기점으로 성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일제강점기 이리 시내 지도로는 1928년(익산군사정), 1935년 지도(조선도별현세지도) 정도이다. 먼저 1928년 이리지도를 살펴보면 이리역 앞으로 일지출정이 중심로이며, 일지출정과 소화정 동북쪽에는 이리농림(현 전북대 익산캠퍼스), 시녀제(옛 농고방죽), 보통학교(현 이리초)가 확인된다. 또한, 이리역 오른편에 경정, 선화정 인근에는 우편국(우체국), 경찰서(현 중앙지구대), 소학교(현 중앙초) 등이 있으며, 이리역 아래쪽으로는 익옥수리조합, 군청이, 춘포쪽 광정에는 시장(현 남부시장, 구시장), 이리신사, 전북종축장 등이 확인된다.
1935년 이리 지도는 1933년 12월1일 일제의 정(町) 제도 실시에 의해 일출정(日出町), 굉정(轟町), 영정(榮町), 소화정, 앵정, 선화정, 명치정, 대정정, 수정, 나정, 경정(京町), 욱정(旭町), 본정(本町) 등으로 명명되어 확인된다.
특히 1945년 전촌민자의 이리지도는 상점, 여관, 식당, 병원, 종교시설 등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들(선생님, 친구 등)의 거주지까지 기록하는가 하면,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은 자신이 생각을 적어 넣기도 하였다.
예를 들자면, 동이리역에서 삼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유공장인 마면공장(麻綿工場)은 “히데코씨가 근무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고, 마동정 이리일출(현 이리초), 이리농림 밭 읍영주택(邑營住宅) 인근에는 “선생님댁이 많이 있다.”고 썼고, 경찰서 인근에는 “여학교 선생님이 살고 있었다.”고 기억해 옮겼고, 본인의 집인 동양척식회사 사택에서 이리여학교에 이르는 곳 인근에는 “겨울에는 논 위가 얼어 있고 그 위를 걸었다.” 또한 “벚꽃이 있고 너무 넓었다.” 라고 기록했다.
△ 역사적 상흔 이리역 폭격·폭발
해방이후 이리역 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두가지 사건이 바로 이리역 폭격·폭발 사건이 있다. 폭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라면, 이리역 폭격 사건은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않는 사건이다.
익산역에 가면 오른쪽 대한적십자 건물 앞에는 3기의 기념비가 서있다. 그 한가운에는 1971년 8월 15일에 동아일보사에서 세운 익산 3·1운동 기념비이고, 좌우편에는 1950년 미군의 이리역 폭격 희생자 위령비와 4·19 학생 의거 기념비이다. 이리역 미군 폭격사건은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부터 2시 30분 사이 당시 전북 이리시 철인동에 위치한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인근 만경강 철교 등에 미 극동 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해 철도 근무자와 승객, 인근 거주민 등 수백명이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서 오폭인지, 고의성인지에 대해 진실 규명을 진행하여 왔고, 지난해 6월 29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60년만에 미군 전투기가 오폭으로 인한 피해로 결론이 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유족회나 일반인들에게 흡족할 만한 명확한 진상과 문제해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리역 폭발은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경 이리역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한국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또한 허술한 안전 의식이 인재를 불러왔다는 비판과 함께 이리시가 재건되고 복구되면서 뼈아픈 역사를 거울삼아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 호남 최대 교통 허브 KTX 익산역 개통
1912년 3월 6일 이리역사가 준공되었다. 따라서 내년 2012년은 익산역 개통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2014년에는 호남고속철도 KTX가 완전 개통되고, 익산역사가 완공되며, 2016년 복합환승센터 건립되어 그야말로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철도 분기점이자 환승역으로 그야말로 호남 최대의 교통 허브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정체성있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살아 움직이며 뒷받침을 할 때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마한·백제의 찬연한 고대문화만으로, 고려·조선의 다양한 문화유산만으로 문화역량을 표출하기에는 숨겨진 ‘솝리=이리(裡里)’의 역사 비중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의 뼈아픈 역사, 들추고 싶지 않는 근현대 역사를 또다른 성찰과 문화동력의 자산으로 가꾸고 만들어 간다면, 익산의 미래는 더욱 굳세고 아름다우리라 확신한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