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마로 꼬드겨 서동요 부르게 했다는 것 잘못…'서동' → '맏동'으로 읽어야
요즘 드라마'계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드라마에 백제 무왕이 나오는데,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다. 무왕은 아주 나약하고 어수룩하며 사택 가문과 대립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형편없는 군주로 묘사되었다. 분명 역사 왜곡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서라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꼬드겨 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사 왜곡이라고 본다.
▲ '서동요'는 어떤 노래인가
선화 공주님은 / 남 몰래 결혼하고/ 맛둥서방을 /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 / 夜矣卯乙抱遣去如
이는 '서동요'라 불리는 향가이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얼레꼴레 아무개는 누구하고 어찌 어찌 했다네." 하며 남을 놀리면서 부르는 형식의 동요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녀는 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 불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랐다. 이에 그는 동요를 지어서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그것을 부르게 했다.'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믿어서 서동이가 마를 캐어서 생활했으며, 서라벌의 아이들에게도 마를 주면서 '서동요'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를 캐는 것은 서동의 생업이 아니다
서동이 살았던 곳은 서울 남쪽 못가라고 하였다. 이곳은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성 아래 용샘 근처로 본다. '삼국유사'에서는 선화공주와 만나 백제로 온 뒤에 왕후가 준 금으로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공주가 "이것은 황금입니다. 한 평생 부를 이룰 만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서동이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놓았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곳은 땅이름으로 보아도 오금산(五金山)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런 까닭 없이 땅이름에 '금(金)'자를 넣을 리 없다. 무왕은 금마 사람임이며 오금산 아래에 살았다.
그렇다면 익산에 마가 많은가? 익산 시내인 소라단(松內)에도 마가 자라고 있다. 물론 오금산성이나 미륵산에도 마가 자라고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오금산 자락은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다. 오금산에서 마를 캐어 팔았다면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동안 캘 분량 밖에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마를 캐서 팔았다는 얘기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서동'에서 '서(薯)'가 '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를 캐어서 팔았다는 얘기는 훨씬 뒷시대에 이 고장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백제는 망해 버린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도 왜곡되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 서동(薯童)은 '맏동'으로 읽어야 한다
'서동'을 향찰 표기로 보고 읽었으면 한다. 곧 '薯童'을 '서동'이 아니라 '맏동'으로 보면 어떨까?
물론 이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명렬의 논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에 따르면, "양주동이 '서동(薯童)'은 '말자(末子)'의 뜻으로 '맏둥', '막둥', '마퉁'으로 속명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 하여 서동이 곧 무왕이며, 서동요의 작가도 무왕으로 단정함에 따라, 그 뒤의 연구자들(조윤제, 김사엽, 김동욱, 조지훈, 이능우, 구자균, 정주동, 김기동, 김준영, 김종우, 정병욱, 이명선 등)도 모두 같은 학설을 내세워 국문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처럼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계에서도 역시 서동이 곧 무왕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는 곧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글쓴이는 양주동 이래 정설로 되다시피 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먼저 양주동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자.
"'薯童'은 '맛둥' 또는 '마퉁'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末子(말자)'의 뜻인 '맏둥'에서 생긴 전설이다. '맏둥'(막둥·마퉁)이 '末子(말자)'의 原義(원의)임은 왕의 속명 '末通大王(말통대왕)'으로 알 수 있다."
양주동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맏둥'으로 읽고, '막내', '막둥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이는 서동에서 '薯(서)'를 '마'라는 뜻으로 풀이했다면, 말통대왕에서는 '말(末)'을 '음(音)'이 아니라 '末(말)'의 뜻에 너무 집착한 풀이로 잘못된 해석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맏동'으로 읽고, 뜻도 '막내'가 아니라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우두머리 아이, 으뜸이 되는 아이'라고 본다.
조선시대에 쓰인 자료를 보면, "??[宗, 棟, 義], ?[長子], ?[最], 마리[頭, 首, 髮]"가 나타난다. 이를 통해 볼 때 오늘날 '맏'으로 쓰는 말은 조선 초기에는 '?'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오늘날 '맏'으로 바뀌고, '맏'은 '말'과 통하는 말이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삼국사기의 '訥祗麻立干(눌지마립간)'에 쓰인 '마립'도 '??'와 같은 뜻으로 '우두머리, 왕'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은 '최고, 가장, 위, 머리'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또 낱말의 꼴은 먼저 '?'과 '??'가 일찍이 쓰이다가 '??'가 '마리'와 '머리'로 나뉘었으며, '?'은 오늘날엔 '맏'으로 모음이 바뀌었다고 본다. '맏누이, 맏딸, 맏며느리, 맏사위, 맏아들, 맏아이, 맏언니, 맏이, 맏형, 맏형수' 따위가 그 보기이다.
이 '맏'이 다시 자음이 바뀌어 '말'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말'은 일부 명사의 앞에 붙어 '큰 것임'을 나타내는 접두사(接頭辭)가 된다. 왕개미를 '말개미', '큰 거머리'는 '말거머리', '큰 거미'는 '말거미', '큰 대추'는 '말대추', '큰 벌'은 '말벌', '큰 매미'는 '말매미', 그 밖에 '큰 잠자리'는 '말잠자리'가 된다. 곧 '?', '맏', '말'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닌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ㄷ'과 'ㄹ'은 같은 혀끝소리[舌端音]로 서로 넘나드는 성질이 있다. '듣다[聽]'가 '들어, 들으니'로 되거나, '묻다[問]'가 '물어, 물었다'가 될 때는 'ㄷ'이 'ㄹ'로 바뀐다. 반면에 '바느질'과 '고리'가 합해지면 'ㄹ'이 'ㄷ'으로 바뀌어 '반짇고리'가 된다.
▲ '맏동'은 위대한·큰·우두머리 아이를 뜻해
따라서 서동(薯童)을 '맏동'으로 보면 '맏동'이는 '맏동'으로 바뀌고,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우두머리 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읽어야 할 중요한 실마리가 삼국유사에 있다. 앞에 인용한 글을 다시 보자.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녀는 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맏동(薯童)이다."
설화나 고대의 기록에서 용은 곧 왕과 통한다. 그렇기에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 왕의 자리는 용상(龍床)이 된다. 따라서 용과 관계를 맺어 낳았다면 맏동이는 왕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귀한 아이이고 영향력이 대단히 큰 아이였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면 능히 그 아이는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로서 당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름이라면 '맏동'이라고 불러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맏동이가 마를 캐어서 팔아 생업을 삼았다는 얘기는 '서(薯)'자에 연연해서 뒷날 지어낸 얘기라고 보아야 한다. 마를 캐어서 생업을 유지할 만큼 미천한 사람은 임금이 될 수 없다.
맏동이는 오금산 아래 용샘 근처에서 살다가 백제의 무왕이 되어 600년부터 641년까지 통치하다가 죽어서 오금산 가까이에 있는 곳에 그의 비와 함께 묻혔다. 무왕의 무덤을 대왕릉, 왕비의 무덤을 소왕릉이라고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이택회 문화전문시민기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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