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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의혈(義血) 흐르는 문학의 산실 ‘장수’

적막강산에 스며있는 ‘의로운 피’ ‘문학의 힘’

▲ 논개 생가지

장수는 전국에서 공시지가가 가장 낮은 땅이다.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장수는 별 볼일 없는 낙후 지역이다. 하지만 장수는 이같은 분류법을 도도하게 거부한다. 수많은 의혈(義血)들을 낳았고, 전북 문학의 산파 역할을 한 문학인들을 길러내고 배태한 곳. 적막한 동네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장수가 조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여기서 의혈(義血)의 피가 흐르는 문학의 산실인 장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 고결한 충절의 근원지 ‘장수 삼절’

 

무주·진안과 어깨를 맞대고 있고 남원이나 임실과도 오래 교통해온 지역이 장수다. 교통이란 관점에서 보면 5개 시군의 중앙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는 쇠락과 적막지경의 이미지로 굳어진 듯하다. 장수를 가다 보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성이 되기를 꿈꾸고 수련하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았음 직한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속계와 먼 곳(외진)에 있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만큼 삶의 뿌리가 견고하지 못한 민중들의 이상향이라 할 만한 절경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장수삼절’(長水三節)이라 일컬어지는 서민 영웅의 모습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인물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장수삼절’이란 의암 주논개의 충절비와 배리에 사는 통인 백씨의 타루비, ‘본성역물범’ 정경손이 바로 그것이다. 주논개는 따로 사당을 만들어 해마다 크게 기리고 있으며 타루비는 숙종 때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으로 갈 때 말이 헛딛어 물속에 빠지자 아전 백씨가 손가락을 물어 ‘타루’라고 쓰고 투신했다는 전설을 기리는 것이다. 정경손의 이야기는 더욱 비장한데 정유재란 때 왜군이 전국의 향교를 불태웠으나 여기 장수 향교에서는 ‘경을 외면서 내 목을 먼저 베라’는 향교지기 정경손의 의기에 감복하고 물러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장수 사람들이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오랜 동안 그들을 기리고 가슴에 품고 온 것만 봐도 그들의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이며 삶의 역동성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 장수가 배출한 우리말·우리글 사랑한 국어학자 정인승

 

장수 계북면 양악리 출신의 국어학자 정인승(1897~1986) 또한 장수 사람들이 존경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1925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1년간 고창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선생은 1936년 상경, 조선어학회 ‘한글지’ 발행 책임자가 된다. 그때 당시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팽개치고 험난한 가시밭길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는 제국주의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소위, ‘대동아전쟁’이라는 기치 아래 전선을 무한 확장하고 있던 때였고 중국 전선의 후방 병참기지화 되고 있던 한반도에는 대규모 예비검속이 진행되던 때였으니 나이 마흔에 내린 선생의 결단은 의혈(義血)이나 단심(丹心)이란 말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1931년-조선어학회 발족,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공표 등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어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당시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은 죽음을 각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온전히 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장수읍 노곡리엔 소설가 박상륭의 생가가 있다. “박상륭 소설은 지독하게 난해하다”는 평들 듣는 박상륭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소설가다. 그러나 박상륭은 한국 소설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존재로 그의 대표작 ‘죽음에 대한 연구’는 소설가 지망생들의 ‘소설 입문서’로 통한다. 한국 소설계가 그 너비를 자랑할 때 박경리의 ‘토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 소설이 해낸 가파른 높이에 대해 말할 때 박상륭을 빼놓고는 그 진실의 잣대를 의심받는다. 한국 소설의 깊이와 삶의 진정성에 대한 궁구는 앞으로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 전북 문학 판 커다란 변화 가져온 ‘남민시 동인’ 등장

 

1980년대 중반 ‘남민시(南民詩) 동인’의 등장은 전북 문학 판에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상당수 문인들이 장수 출신이거나 장수에 재직했던 이들이 좋은 작품을 내놓은 데 남민시 동인에 가담했고, 이는 전북작가회의 모태로 이어졌다. 남민시 동인은 문학 청년들에게는 하나의 좌표였고 전북 문단의 새로운 혈기를 불러일으키는 모태이고 산파 역할을 했다. 그들은 글 쓰는 데 자신의 생애를 내던지는 것을 불사했다. 체제의 모순과 인간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들의 문학은 청년들의 의지처였고, 행동강령이었으며, 샘을 파는 목마른 사람들의 마중물이었다.

 

전북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안도현 시인 또한 이곳 장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리중학교’ 재직 중 ‘전교조’ 사태로 해직, 오랜 재야생활 끝에 복직한 곳이 바로 ‘산서고등학교’였다. 안도현 시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산서고등학교 재직 당시에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산서의 자연풍광과 시인의 필력이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겠다 싶다.

 

교사로서, 시인으로서 안도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개인적으로 궁금할 때가 있었다. 시인의 산서고 제자인 윤석정 시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에 대한 긴 호흡 끝에 짧은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을 겪어봐야 알 것이다. 시인은 이러이러한 사람, 교사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분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원하는 참다운 교사상과 시인상을 다 갖추고 계신 분이다.”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답변을 들었던 적이 있다.

 

적막하고 쓸쓸하면서도, 고고한 느낌의 장수를 돌아 나오면서 불완전한 현실의 포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글쓰는 자의 책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하였다. 또한 근현대사의 상처뿐인 역사 경험으로 인한 자기소모적 패배주의, 자해적 영웅주의, 현실도피적 몽매주의를 깨뜨리고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땅이 이곳 ‘장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해의 잔광이 아름다운 팔공산에 붉디붉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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