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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의혈(義血) 흐르는 문학의 산실 ‘장수’

장수는 전국에서 공시지가가 가장 낮은 땅이다.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장수는 별 볼일 없는 낙후 지역이다. 하지만 장수는 이같은 분류법을 도도하게 거부한다. 수많은 의혈(義血)들을 낳았고, 전북 문학의 산파 역할을 한 문학인들을 길러내고 배태한 곳. 적막한 동네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장수가 조명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여기서 의혈(義血)의 피가 흐르는 문학의 산실인 장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고결한 충절의 근원지 장수 삼절무주진안과 어깨를 맞대고 있고 남원이나 임실과도 오래 교통해온 지역이 장수다. 교통이란 관점에서 보면 5개 시군의 중앙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는 쇠락과 적막지경의 이미지로 굳어진 듯하다. 장수를 가다 보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성이 되기를 꿈꾸고 수련하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았음 직한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속계와 먼 곳(외진)에 있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만큼 삶의 뿌리가 견고하지 못한 민중들의 이상향이라 할 만한 절경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장수삼절(長水三節)이라 일컬어지는 서민 영웅의 모습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인물유형을 짐작할 수 있다. 장수삼절이란 의암 주논개의 충절비와 배리에 사는 통인 백씨의 타루비, 본성역물범 정경손이 바로 그것이다. 주논개는 따로 사당을 만들어 해마다 크게 기리고 있으며 타루비는 숙종 때 장수현감 조종면이 전주감영으로 갈 때 말이 헛딛어 물속에 빠지자 아전 백씨가 손가락을 물어 타루라고 쓰고 투신했다는 전설을 기리는 것이다. 정경손의 이야기는 더욱 비장한데 정유재란 때 왜군이 전국의 향교를 불태웠으나 여기 장수 향교에서는 경을 외면서 내 목을 먼저 베라는 향교지기 정경손의 의기에 감복하고 물러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장수 사람들이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오랜 동안 그들을 기리고 가슴에 품고 온 것만 봐도 그들의 궁극적 지향점은 무엇이며 삶의 역동성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장수가 배출한 우리말우리글 사랑한 국어학자 정인승 장수 계북면 양악리 출신의 국어학자 정인승(1897~1986) 또한 장수 사람들이 존경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1925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1년간 고창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선생은 1936년 상경, 조선어학회 한글지 발행 책임자가 된다. 그때 당시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팽개치고 험난한 가시밭길에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는 제국주의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소위, 대동아전쟁이라는 기치 아래 전선을 무한 확장하고 있던 때였고 중국 전선의 후방 병참기지화 되고 있던 한반도에는 대규모 예비검속이 진행되던 때였으니 나이 마흔에 내린 선생의 결단은 의혈(義血)이나 단심(丹心)이란 말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1931년-조선어학회 발족,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공표 등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어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당시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은 죽음을 각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온전히 쓸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또한 장수읍 노곡리엔 소설가 박상륭의 생가가 있다. 박상륭 소설은 지독하게 난해하다는 평들 듣는 박상륭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소설가다. 그러나 박상륭은 한국 소설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존재로 그의 대표작 죽음에 대한 연구는 소설가 지망생들의 소설 입문서로 통한다. 한국 소설계가 그 너비를 자랑할 때 박경리의 토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 소설이 해낸 가파른 높이에 대해 말할 때 박상륭을 빼놓고는 그 진실의 잣대를 의심받는다. 한국 소설의 깊이와 삶의 진정성에 대한 궁구는 앞으로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 전북 문학 판 커다란 변화 가져온 남민시 동인 등장 1980년대 중반 남민시(南民詩) 동인의 등장은 전북 문학 판에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상당수 문인들이 장수 출신이거나 장수에 재직했던 이들이 좋은 작품을 내놓은 데 남민시 동인에 가담했고, 이는 전북작가회의 모태로 이어졌다. 남민시 동인은 문학 청년들에게는 하나의 좌표였고 전북 문단의 새로운 혈기를 불러일으키는 모태이고 산파 역할을 했다. 그들은 글 쓰는 데 자신의 생애를 내던지는 것을 불사했다. 체제의 모순과 인간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들의 문학은 청년들의 의지처였고, 행동강령이었으며, 샘을 파는 목마른 사람들의 마중물이었다.전북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안도현 시인 또한 이곳 장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리중학교 재직 중 전교조 사태로 해직, 오랜 재야생활 끝에 복직한 곳이 바로 산서고등학교였다. 안도현 시인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산서고등학교 재직 당시에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산서의 자연풍광과 시인의 필력이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겠다 싶다.교사로서, 시인으로서 안도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개인적으로 궁금할 때가 있었다. 시인의 산서고 제자인 윤석정 시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에 대한 긴 호흡 끝에 짧은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을 겪어봐야 알 것이다. 시인은 이러이러한 사람, 교사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신 분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원하는 참다운 교사상과 시인상을 다 갖추고 계신 분이다.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답변을 들었던 적이 있다.적막하고 쓸쓸하면서도, 고고한 느낌의 장수를 돌아 나오면서 불완전한 현실의 포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글쓰는 자의 책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하였다. 또한 근현대사의 상처뿐인 역사 경험으로 인한 자기소모적 패배주의, 자해적 영웅주의, 현실도피적 몽매주의를 깨뜨리고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땅이 이곳 장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 해의 잔광이 아름다운 팔공산에 붉디붉게 스며들고 있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28 23:02

23. 이리역 옛풍광

익산역은 옛 이리역을 말한다. 이리역은 1995년 이리시와 익산시가 통합되기 전의 옛 이리시의 상징이자 지역문화의 정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일제강점기 이리는 군산과 더불어 전북지역를 대표적인 계획도시이자 전략적으로 성장한 교통물류의 중심도시라 할 수 있다.따라서, 이전의 찬란한 마한백제의 고대문화의 정체성이나 고려조선시대의 다양한 문화유산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근현대 문화적 팽창이 진행되면서 전통문화와의 충돌과 내외적인 문화접변이 이루어져 왔다.꿈꾸는 미래의 비전은 이러한 지역사의 새로운 동력을 찾아가는 데서 시작되는 바, 익산역 주변의 옛 풍경 속에서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리지도에 나타난 번화가 이리역이리역 앞 명치정이 가장 번화가였다. 교본여관, 매월당 과자점, 조일여관,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삼남은행, 군청, 읍사무소, 경찰서 등이 있었고, 식산은행에서 당본백화점으로 가는 영정통은 일본인 중심상가를 이루며 번성했다.3년 전 2008년 10월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옛 이리, 익산 고향 땅을 찾아온 전촌민자(田村敏子, Toshiko Tamura)의 증언이다. 그녀의 집은 동양척식회사 관사(현재 이리침교회 뒤편)였으며, 1945년 당시 23세로 이리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자신의 직접 이리 시내의 내용을 소상히 그린 지도 한 장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이리역을 중심으로 한 이래 시내의 도로, 관공서, 학교, 금융기관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이리는 호남의 교통결절의 요충지인 이리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이리역은 호남 곡식 수탈의 전초기지인 이리~군산선, 목포를 향하는 호남선, 전주를 거쳐 순천여수에 이르는 전라선의 철도 분기점으로 성장하였다.지금까지 확인된 일제강점기 이리 시내 지도로는 1928년(익산군사정), 1935년 지도(조선도별현세지도) 정도이다. 먼저 1928년 이리지도를 살펴보면 이리역 앞으로 일지출정이 중심로이며, 일지출정과 소화정 동북쪽에는 이리농림(현 전북대 익산캠퍼스), 시녀제(옛 농고방죽), 보통학교(현 이리초)가 확인된다. 또한, 이리역 오른편에 경정, 선화정 인근에는 우편국(우체국), 경찰서(현 중앙지구대), 소학교(현 중앙초) 등이 있으며, 이리역 아래쪽으로는 익옥수리조합, 군청이, 춘포쪽 광정에는 시장(현 남부시장, 구시장), 이리신사, 전북종축장 등이 확인된다. 1935년 이리 지도는 1933년 12월1일 일제의 정(町) 제도 실시에 의해 일출정(日出町), 굉정(轟町), 영정(榮町), 소화정, 앵정, 선화정, 명치정, 대정정, 수정, 나정, 경정(京町), 욱정(旭町), 본정(本町) 등으로 명명되어 확인된다. 특히 1945년 전촌민자의 이리지도는 상점, 여관, 식당, 병원, 종교시설 등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들(선생님, 친구 등)의 거주지까지 기록하는가 하면, 특별한 기억이 있는 곳은 자신이 생각을 적어 넣기도 하였다. 예를 들자면, 동이리역에서 삼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유공장인 마면공장(麻綿工場)은 히데코씨가 근무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고, 마동정 이리일출(현 이리초), 이리농림 밭 읍영주택(邑營住宅) 인근에는 선생님댁이 많이 있다.고 썼고, 경찰서 인근에는 여학교 선생님이 살고 있었다.고 기억해 옮겼고, 본인의 집인 동양척식회사 사택에서 이리여학교에 이르는 곳 인근에는 겨울에는 논 위가 얼어 있고 그 위를 걸었다. 또한 벚꽃이 있고 너무 넓었다. 라고 기록했다.△ 역사적 상흔 이리역 폭격폭발 해방이후 이리역 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두가지 사건이 바로 이리역 폭격폭발 사건이 있다. 폭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라면, 이리역 폭격 사건은 아직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않는 사건이다.익산역에 가면 오른쪽 대한적십자 건물 앞에는 3기의 기념비가 서있다. 그 한가운에는 1971년 8월 15일에 동아일보사에서 세운 익산 31운동 기념비이고, 좌우편에는 1950년 미군의 이리역 폭격 희생자 위령비와 419 학생 의거 기념비이다. 이리역 미군 폭격사건은 1950년 7월 11일 오후 2시부터 2시 30분 사이 당시 전북 이리시 철인동에 위치한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인근 만경강 철교 등에 미 극동 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해 철도 근무자와 승객, 인근 거주민 등 수백명이 집단 희생된 사건이다.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서 오폭인지, 고의성인지에 대해 진실 규명을 진행하여 왔고, 지난해 6월 29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60년만에 미군 전투기가 오폭으로 인한 피해로 결론이 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유족회나 일반인들에게 흡족할 만한 명확한 진상과 문제해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이리역 폭발은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경 이리역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한국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또한 허술한 안전 의식이 인재를 불러왔다는 비판과 함께 이리시가 재건되고 복구되면서 뼈아픈 역사를 거울삼아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호남 최대 교통 허브 KTX 익산역 개통1912년 3월 6일 이리역사가 준공되었다. 따라서 내년 2012년은 익산역 개통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2014년에는 호남고속철도 KTX가 완전 개통되고, 익산역사가 완공되며, 2016년 복합환승센터 건립되어 그야말로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철도 분기점이자 환승역으로 그야말로 호남 최대의 교통 허브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정체성있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살아 움직이며 뒷받침을 할 때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마한백제의 찬연한 고대문화만으로, 고려조선의 다양한 문화유산만으로 문화역량을 표출하기에는 숨겨진 솝리=이리(裡里)의 역사 비중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의 뼈아픈 역사, 들추고 싶지 않는 근현대 역사를 또다른 성찰과 문화동력의 자산으로 가꾸고 만들어 간다면, 익산의 미래는 더욱 굳세고 아름다우리라 확신한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21 23:02

22. 전주에 ‘귀명창’ 많은 이유

2011년 10월, 전주 국악방송(FM 95. 3MHz)이 전주 한옥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전국에서 다섯번째 개국이지만, 서울을 제외하고는 프로그램 자체 제작이 가능한 가장 큰 규모. 박준영 국악방송 사장은 귀명창이 많기로 소문난 전주는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의 수도라고 했다. 판소리 격언에 귀명창 있고 명창 있다고 했다. 소리를 제대로 음미하고 소리꾼 경지의 높고 낮음을 가늠해내는 귀가 걸출한 명창을 낳는 법. 소리를 듣고 추임새 넣어가며 장단 맞추는 고수의 귀의 힘이 명창의 입의 힘보다 크다. 판소리는 등장인물과 다양한 상황을 실감나게 펼쳐내는 소리꾼의 재주, 여기에 화답하여 동화되는 관객이 일체감을 이룰 때 진정한 예술성에 다다를 수 있다. 전주에 유독 귀명창이 많아 판소리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하는 판소리그래도 귀명창이 많으니까 전주오면 소리헐 맛이 나.일흔을 훌쩍 넘긴 노장 송순섭 명창은 전주 공연의 의미를 여기서 찾았다. 이처럼 소리꾼들은 전주에서 소리하는 것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워한다. 귀명창이 전주에 많아 소리를 할 때는 추임새로 흥을 돋구어 소리꾼이 소리할 맛을 느끼게 하고 소리를 한 다음에는 소리꾼의 소리가 어떠했는지를 평가하여 소리꾼의 실력을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전주에는 귀명창이 많은 것일까.조선시대 숙종(17세기말) 때 만들어진 판소리는 전라도 언어로 표현된 전라도 음악이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넓은 호남평야를 바탕으로 하여 먹고 살기가 다른 지방에 비해 휠씬 좋았던 지역이었다. 전주는 바로 이러한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전주는 동부산간지역과 서부평야지역이 맞닿는 곳이다.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물산이 모이고 재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것은 전주만의 문화를 창출하게 만들었다. 결국 소리꾼들은 전주로 모여들었고 소리를 들어줄 사람도 전주에 있었다. 잘 헌다는 기본. 이럴 때 박수를 치는 것이여 라는 추임새는 물론 어린 여성 명창이 무대에 서면 소리 잘하네. 얼굴도 이쁘고. 결혼은 했는 여기저기서 추임새가 쏟아진다. 전주는 고수에게도, 관객에게도, 명창의 완창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만드는 추임새 경연장. 이것이 전주에 귀명창이 많은 첫 번째 이유이다.△ 전주대사습, 전주에 뿌리 내리다조선 숙종대 시작된 마상궁술대회가 고종대에 이르러 대사습놀이로 이어졌다. 고종 2년(1864) 흥선대원군은 단오절에 관의 주관으로 판소리 경창대회를 열도록 하고 장원한 명창을 궁궐에 불러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주대사습놀이는 1905년까지 37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전라감사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관중들의 박수갈채로 장원이 결정됐다. 전주대사습의 관객은 이른바 귀명창이 많아 이미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들조차도 전주대사습에 서는 것이 긴장되는 일이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여길 정도의 권위를 지녔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던 전주대사습놀이는 1975년에 부활되었는데, 판소리뿐만 아니라 한국음악의 전분야로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년 열리고 있어 전국을 대표하는 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국악인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최근 여러 지역에서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어 그 위상이 위협받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와 관객 수가 줄어드는 등 위기에 봉착해 있다. 최동현 군산대 교수는 전주대사습놀이의 위기는 주최자인 지자체와 방송사에 의존하면서 소리꾼들 스스로가 심사위원에 참여하면서 그 권위만을 행사한 데서 빚어진 사태라며 소리꾼들 스스로가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일반 귀명창을 배출해낸 전북도립국악원2003년 11월은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전북도가 전북도립국악원을 건립해 소리문화의 중심을 표방한 당위성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판소리는 모름지기 한국전통음악의 자존심으로서 보존전승해 발전시켜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도립국악원은 판소리의 고장 = 전주임을 드높인,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명창들이 버티고 있는 곳이다. 1985년 이래 수많은 명창들이 배출됐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귀명창들을 양성해내고 있다. 현재 주야간에 판소리반과 고수반이 설강돼 있다. 그렇게 거쳐간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을 멋들어지게 부른다. 바로 이것이 전주에 귀명창이 많은 세 번째 이유일 것이다. 어느 누가 초등학생의 입에서 엇머리라는 판소리 장단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겠는가? 전주에 사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자산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이병규 문화전문 시민기자(동학 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14 23:02

‘귀명창’ 이원복씨, “초등학교 때 판소리 흥미, 늦게나마 더 배우고 싶어”

‘귀명창’. 단순한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이를 뜻한다. 김제 갑부집에서 태어난 이원복(73·전주 삼천동)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 레코드를 듣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명창들의 무대를 보고 자란 귀명창이다.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는 데는 소질이 적다”는 그는 “골방에서 ‘춘향??레코드를 막 울면서 듣고 살았다”고 했다. 교사를 하다가 자영업을 하면서 판소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 15년 전 전북도립국악원을 찾았다. 당시 이일주 명창이 은퇴 직전 강습을 했던 차에 이들의 소리를 쫓아 판소리를 공부하기 보다는 재미있게 듣는 법을 깨우쳤다. 신재효 선생의 ‘광대???판소리 해설의 정석. 사설이 정확한지, 발음은 명확한지, 소리에 깊이가 있는지, 너름새는 어떻게 하는지, 장단은 잘 맞추는지 등을 신경써가며 듣노라면 재미가 배가된다.“이전엔 판소리 완창 무대를 즐겨 찾았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CD로 듣곤 하는데, 오래 들어서인지 귀가 열리는 느낌이에요. 전라도 쪽은 박동진씨가 참 대단했어요. 고향이 전주가 아닌데, 전주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자기 소리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이라고. 언제 어디서라도 소리를 술술 풀어냈습니다. 그 양반의 재담을 듣고 있으면, 속이 다 후련해졌어요.”그는 “아들 따라 미국에 갔다가 접었던 판소리를 공부를 뒤늦게나마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14 23:02

21. 종교건축

익산으로 향하는 10월의 풍경은 노랗다. 추수를 끝낸 들녘은 짧게 머리 자른 까까머리 중학생을 닮은 듯하고, 황등 돌산의 깎인 절벽은 늦가을의 햇살을 머금고 누렇다. 익산 두둥교회, 두동편백마을, 나바위성당과 산책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채 10월의 익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종교를 떠나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교회와 성당은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 원시적인 방법으로 길을 찾다익산을 출발하면서 이제는 보편적인 길 찾기의 수단이 된 내비게이션을 끄고 두동편백마을을 찾기로 했다. 익산 시민이지만 초행길인 두동편백마을을 도움 없이 찾기로 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들면 잘못 드는 대로, 길을 모르면 길가에 차를 멈추고 동네주민들의 길 안내로 찾기로 했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여행법을 택한 것은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두동교회에 대한 경외감도 한 몫 했고, 편백나무 숲을 거닐 수 있다는 원시적인 기대감도 한 몫 했다.함열을 지나 성당 쪽으로 향하면서 잠시 길을 잃었다. 저 멀리 한가로운 오후를 맞이하는 우체국이 보여 잠시 길을 묻는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반가움으로 손수 도로까지 나와서 길안내를 하는 우체국 직원의 손끝에 정겨움이 가득하다. 기계적인 내비게이션보다 정겨움이 물씬 묻어나는 사투리에 짧은 여행길이 즐겁다. 우체국 직원의 손끝을 따라 1~2분 정도, 두동편백마을 이정표가 보이고 저 멀리서 낮은 담장 위로 그려진 벽화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두동마을, 느리게 걷다마을 초입에 내려 10월의 햇살을 온몸으로 맞는다. 두동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설렌다. 오랫동안 간직된 옛 건물에 대한 궁금증과 ㄱ자 구조를 지닌 옛 교회의 풍경이 나를 과거로 돌려줄 것 같은 착각과 기대감. 정보화센터를 돌자 오래된 교회종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탑에 설치된 교회 종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맑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 종은 우리교회 두 번째 종이에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두동교회 목사님께서 짧은 안내를 해주신다. 일제침략전쟁 때, 첫 번째 종을 수탈당하고 그 이후에 만들었다는 두 번째 종. 옛 종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옛 풍경을 살려 새로 목탑을 만들고 걸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된 건물에 조화롭게 세워진 종이 두동교회의 오랜 역사처럼 낡아있었다.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번지에 있는 두동교회(전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는 1923년 해리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초기 기독교 전파 과정에서 남녀유별의 관습이 남아 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ㄱ자 구조의 실내를 천천히 구경하고 창틀과 오래된 풍금의 나이테를 가늠해봤다. 남북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남자석이고 동서축은 여자석이다. 남자 석이나 여자 석이 33㎡(10평)정도 크기가 똑같다. 설교자는 남자 여자 석을 모두 볼 수 있었지만, 예배당 안의 남녀 신도들은 서로 보지 못하였다. 남녀 석 공간 크기가 같게 한 것이나 강단이 남녀 석 가운데 향하게 배치한 것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두동교회 ㄱ자 구조의 예배당은 남녀를 구분하면서도 남녀평등을 추구한 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구조는 두동교회와 김제 금산교회 등 두 곳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두동교회를 뒤로 하고 마을을 돌아 생태탐방로라 이름 붙여진 편백나무 숲으로 향한다. 편백나무 숲, 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따라 걷는다. 편백나무의 향이 99173m(3만 평) 길을 따라 먼저 마중 나온 듯 온몸을 감싸 안는다. 수령 30년 이상 된 나무들로 조성된 편백나무 숲. 편백나무의 곧은 줄기가 숲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숲으로 다가갈수록 편백나무 특유의 향이 강해져 온몸 곳곳에 향이 밸 듯하다. 편백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가며 얇은 외투를 벗는다. 안내자분의 귀띔에 의하면 오전 9시와 11시 사이 삼림욕을 하기에는 최적의 시간대란다. 이 시간대에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발생양이 최고조에 이르러 몸속 병원균은 물론 해충, 곰팡이 등을 없애준다. 또한 항암효과, 심폐기능 강화, 말초혈관 단련 그리고 피부 소독 및 호흡기 강화에 큰 도움을 준다.△ 고딕양식 갖춘 한옥 성당 국내 유일두동교회가 있는 성당면과 맞닿아 있는 망성면 화산리의 나바위 성당(국가지정문화재 제318호)은 한옥 성당으로 유명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이다. 성당이 있는 주변에 너른 바위들이 많아서 나바위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전한다. 기와지붕이 겹으로 쌓여있고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팔각형 유리 창문까지 있다. 예배당 바깥쪽 양 옆으로 우리나라 고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회랑까지 있다. 본당은 고딕양식의 차갑고 웅장한 이미지와 한옥이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가졌다. 이런 양식의 성당 건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성당 주변은 산책하기 좋다. 본당 건물 뒤쪽 언덕으로 산책로가 갖춰져 있다. 산책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메시지를 담은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올라가 던 순간을 담은 열네 개의 부조가 세워져 있다. 단풍이 빨갛게 말라가는 풍경 속에 고난의 예수를 조형적으로 담은 부조는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인적이 드무니 숲길을 홀로 거닐다 보면 믿음이 없더라도 적잖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언덕 정상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비가 있다.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첫 발을 디딘 곳이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다. 그는 이후 1년 만에 순교한다. 기념비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타고 왔던 돛단배와 같은 높이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아주 웅장하다. 망금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기 오르면 금강과 황산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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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1.11.07 23:02

20. '서동' 바로 알기

요즘 드라마'계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드라마에 백제 무왕이 나오는데,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이다. 무왕은 아주 나약하고 어수룩하며 사택 가문과 대립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형편없는 군주로 묘사되었다. 분명 역사 왜곡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 서라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마를 주고 꼬드겨 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역사 왜곡이라고 본다.▲ '서동요'는 어떤 노래인가선화 공주님은 / 남 몰래 결혼하고/ 맛둥서방을 / 밤에 몰래 안고 가다.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 / 夜矣卯乙抱遣去如이는 '서동요'라 불리는 향가이다. 어린아이들이 흔히 "얼레꼴레 아무개는 누구하고 어찌 어찌 했다네." 하며 남을 놀리면서 부르는 형식의 동요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녀는 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랏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 불렀다.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랐다. 이에 그는 동요를 지어서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그것을 부르게 했다.'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믿어서 서동이가 마를 캐어서 생활했으며, 서라벌의 아이들에게도 마를 주면서 '서동요'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를 캐는 것은 서동의 생업이 아니다서동이 살았던 곳은 서울 남쪽 못가라고 하였다. 이곳은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오금산성 아래 용샘 근처로 본다. '삼국유사'에서는 선화공주와 만나 백제로 온 뒤에 왕후가 준 금으로 생계를 도모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공주가 "이것은 황금입니다. 한 평생 부를 이룰 만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서동이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놓았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곳은 땅이름으로 보아도 오금산(五金山)임에 틀림이 없다. 아무런 까닭 없이 땅이름에 '금(金)'자를 넣을 리 없다. 무왕은 금마 사람임이며 오금산 아래에 살았다.그렇다면 익산에 마가 많은가? 익산 시내인 소라단(松內)에도 마가 자라고 있다. 물론 오금산성이나 미륵산에도 마가 자라고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오금산 자락은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다. 오금산에서 마를 캐어 팔았다면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 동안 캘 분량 밖에 나올 수가 없다.그렇다면 마를 캐서 팔았다는 얘기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서동'에서 '서(薯)'가 '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를 캐어서 팔았다는 얘기는 훨씬 뒷시대에 이 고장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백제는 망해 버린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도 왜곡되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서동(薯童)은 '맏동'으로 읽어야 한다'서동'을 향찰 표기로 보고 읽었으면 한다. 곧 '薯童'을 '서동'이 아니라 '맏동'으로 보면 어떨까?물론 이에 대한 선행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명렬의 논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에 따르면, "양주동이 '서동(薯童)'은 '말자(末子)'의 뜻으로 '맏둥', '막둥', '마퉁'으로 속명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 하여 서동이 곧 무왕이며, 서동요의 작가도 무왕으로 단정함에 따라, 그 뒤의 연구자들(조윤제, 김사엽, 김동욱, 조지훈, 이능우, 구자균, 정주동, 김기동, 김준영, 김종우, 정병욱, 이명선 등)도 모두 같은 학설을 내세워 국문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처럼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계에서도 역시 서동이 곧 무왕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는 곧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글쓴이는 양주동 이래 정설로 되다시피 한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먼저 양주동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자."'薯童'은 '맛둥' 또는 '마퉁'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末子(말자)'의 뜻인 '맏둥'에서 생긴 전설이다. '맏둥'(막둥마퉁)이 '末子(말자)'의 原義(원의)임은 왕의 속명 '末通大王(말통대왕)'으로 알 수 있다."양주동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맏둥'으로 읽고, '막내', '막둥이'라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이는 서동에서 '薯(서)'를 '마'라는 뜻으로 풀이했다면, 말통대왕에서는 '말(末)'을 '음(音)'이 아니라 '末(말)'의 뜻에 너무 집착한 풀이로 잘못된 해석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맏동'으로 읽고, 뜻도 '막내'가 아니라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우두머리 아이, 으뜸이 되는 아이'라고 본다.조선시대에 쓰인 자료를 보면, "??[宗, 棟, 義], ?[長子], ?[最], 마리[頭, 首, 髮]"가 나타난다. 이를 통해 볼 때 오늘날 '맏'으로 쓰는 말은 조선 초기에는 '?'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오늘날 '맏'으로 바뀌고, '맏'은 '말'과 통하는 말이다.이보다 앞선 기록인 삼국사기의 '訥祗麻立干(눌지마립간)'에 쓰인 '마립'도 '??'와 같은 뜻으로 '우두머리, 왕'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은 '최고, 가장, 위, 머리'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또 낱말의 꼴은 먼저 '?'과 '??'가 일찍이 쓰이다가 '??'가 '마리'와 '머리'로 나뉘었으며, '?'은 오늘날엔 '맏'으로 모음이 바뀌었다고 본다. '맏누이, 맏딸, 맏며느리, 맏사위, 맏아들, 맏아이, 맏언니, 맏이, 맏형, 맏형수' 따위가 그 보기이다.이 '맏'이 다시 자음이 바뀌어 '말'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말'은 일부 명사의 앞에 붙어 '큰 것임'을 나타내는 접두사(接頭辭)가 된다. 왕개미를 '말개미', '큰 거머리'는 '말거머리', '큰 거미'는 '말거미', '큰 대추'는 '말대추', '큰 벌'은 '말벌', '큰 매미'는 '말매미', 그 밖에 '큰 잠자리'는 '말잠자리'가 된다. 곧 '?', '맏', '말'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닌다.언어학적으로 볼 때 'ㄷ'과 'ㄹ'은 같은 혀끝소리[舌端音]로 서로 넘나드는 성질이 있다. '듣다[聽]'가 '들어, 들으니'로 되거나, '묻다[問]'가 '물어, 물었다'가 될 때는 'ㄷ'이 'ㄹ'로 바뀐다. 반면에 '바느질'과 '고리'가 합해지면 'ㄹ'이 'ㄷ'으로 바뀌어 '반짇고리'가 된다.▲ '맏동'은 위대한큰우두머리 아이를 뜻해따라서 서동(薯童)을 '맏동'으로 보면 '맏동'이는 '맏동'으로 바뀌고,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우두머리 아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읽어야 할 중요한 실마리가 삼국유사에 있다. 앞에 인용한 글을 다시 보자."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의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녀는 못의 용과 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어릴 적 이름은 맏동(薯童)이다."설화나 고대의 기록에서 용은 곧 왕과 통한다. 그렇기에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 왕의 자리는 용상(龍床)이 된다. 따라서 용과 관계를 맺어 낳았다면 맏동이는 왕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귀한 아이이고 영향력이 대단히 큰 아이였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면 능히 그 아이는 '위대한 아이, 큰 아이,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로서 당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름이라면 '맏동'이라고 불러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맏동이가 마를 캐어서 팔아 생업을 삼았다는 얘기는 '서(薯)'자에 연연해서 뒷날 지어낸 얘기라고 보아야 한다. 마를 캐어서 생업을 유지할 만큼 미천한 사람은 임금이 될 수 없다.맏동이는 오금산 아래 용샘 근처에서 살다가 백제의 무왕이 되어 600년부터 641년까지 통치하다가 죽어서 오금산 가까이에 있는 곳에 그의 비와 함께 묻혔다. 무왕의 무덤을 대왕릉, 왕비의 무덤을 소왕릉이라고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택회 문화전문시민기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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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1.10.31 23:02

19. 조선말 대학자 정교

정교(鄭喬18561925)는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망할 때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저자다. 그는 개화기의 관료이자 지식인으로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주도하였고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이다. 한일병탄이 되자 모든 활동을 접고 낙향하여 지내다가 전주에서 거주하다 1925년 익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가 전주에서 국학 관련 연구를 계속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정교는 누구인가정교는 1856년 7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5년 3월 이리에서 생을 마쳤다. 본관은 하남이며 호는 추인(秋人)이다. 정교가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 모습과 교류한 인사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공부했는지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정교는 후리후리한 키에 가무스름한 얼굴은 좀 긴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짧게 깎은 머리에는 탕건(宕巾)을 쓰고 탕건에는 갓을 받쳐 쓴 풍채는 언뜻 보기에 시골 노인 같으나 빛나는 눈빛과 비범한 풍채는 노학자의 풍모를 드러냈다고 한다.정교의 첫 관직은 1894년 궁내부주사이다. 그 후 그는 1895년 4월 수원부 판관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7월 장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정교는 '박학호고(博學好古)', '독서지인(讀書之人)'으로 평가될 정도로 유학적 소양이 깊었다.그는 1898년 1월부터는 독립협회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서기(書記), 제의(提議), 총대위원(摠代委員)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정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8년 8월에 독립협회의 사법위원(司法委員)이 되면서부터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상재, 이건호와 함께 중추원관제 개정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같은 해 11월 중추원관제 개정안을 반포하면서 정교를 비롯한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는데 만민공동회의 투쟁 끝에 석방되었다.정교는 1898년 12월 독립협회 해산 후 미국인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1899년 8월 배재학당으로 옮겨 1904년 1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정교는 1905년 10월 내부대신 이지용의 추천으로 제주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1906년 1월에는 학부 참서관이 되었고, 2월에는 외국어학교장을 겸하였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과 의견대립으로 곡산군수로 좌천되었다. 정교는 병이 있어 부임하지 못하다가 다음해인 1907년 5월 곡산에 도착하였으며 약 100여일이 지난 뒤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그후 관료로서 활동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정교, 전주에 자리를 잡다정교가 1910년 이후 전주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작촌(鵲村) 조병희(趙炳喜, 1913-2003)의 '국학연구에 몰두한 추인 정교선생'(완산고을의 맥박, 1994)에서 확인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분노와 허탈감에 빠진 정교는 아들의 근무처인 전주 삼남은행이 있는 전주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노학자 추인 정교는 날마다 무엇인가 저술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전주 부중에서는 그가 무엇하는 사람이고,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전주에서 정교와 교류한 인사는 조병희의 부친 조춘원(趙春元)과 가람 이병기(李秉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두 사람은 교원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여가만 생기면 정교를 찾아가 붓글씨를 영어로 배우는 한편 무엇인가 글을 받아쓰곤 하였다고 한다.조병희의 부친과 가람 이병기는 정교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관계로 조병희는 그의 집에 심부름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조병희의 나이 열 한 살 되던 해인 1920년 여름 전주에 뜻하지 아니한 폭우로 전주천이 범람하게 되자, 서학동과 완산동의 천변지대는 침수되었다. 냇물이 빠지고 나서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때 조병희는 이질(痢疾)에 걸려 학업을 중단하였고 부친의 말씀에 따라 정교 문하에서 글(한문)을 익히는 한편 자잘한 일을 거들다가 6개월 뒤에 다시 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계년사'를 편찬한 정교정교는 '대한계년사'를 비롯하여 국학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다. 역사서로는 '대동역사(大東歷史)', '남명강목(南明綱目)', '민회실기(民會實記)',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이 있으며,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에 국제법과 정당에 관한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대한계년사'는 독립협회나 개화기 역사인식을 다룰 때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이의 편찬시기에 대해서 정교 자신이 뚜렷이 밝히지 않았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시기적으로 가장 최근의 사건은 1913년 10월 손문(孫文)이 원세개(遠世凱)에 쫓겨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사건이다. 따라서 정교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대한계년사'를 중점적으로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대한계년사'는 총 7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52년 고종의 탄생부터 1910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계년사'는 관보(官報), 각종 신문류 등 다양한 자료를 이용하였으며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료를 충실하게 인용하였으며 3인칭 시점을 사용하고 자기의 의견이 다른 상소나 견해도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 솔직하고 신랄한 평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최근세사의 중요한 사료(史料)가 될 뿐만 아니라,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였으므로 이 방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정교와 '대한계년사'를 전북의 문화자산으로정교는 개화기 관료이자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끊임없이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고 후에는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정교가 한일병탄 이후에 전주에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즉 개화기 국학의 대학자가 바로 전주에서 '대한계년사'를 비롯한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갔던 것이다.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전주에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대학자 정교는 전주라는 공간에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소리 없이 역사를 정리하고 서술하는 작업을 묵묵히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전북의 문화자산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변주승 전주대 교수가 중심이 된 한국고전문화연구원에서 정교의 '대한계년사'의 전체를 번역 출판하였다는 것이다./ 이병규 문화전문시민기자(동학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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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0.24 23:02

18. 정읍 태인

한 나라의 문화가 독자성을 갖추는 중핵은 그 문화가 고유의 서사성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 서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안정적인 매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그 독자적인 이야기는 시(詩)일 수 있고, 신화(神話)일 수 있으며, 또 다른 창작물일 수도 있다. 우리에겐 고대시가를 비롯,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가 형태의 향가, 고려인들의 삶의 애환을 다룬 고려가요가 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교적 이상향을 노래한 시조, 가사 등 훌륭한 문화자산이 있다. 이러한 문화를 접함시킴으로써 우리는 통시적공시적으로 제한된 세계를 경험하고 세계에 대한 눈을 키우고 자신을 성찰한다. 이 중 선비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시조와 가사문학은 우리민족 정체성의 지표가 되고 삶의 방향성을 일러준다.▲ 최치원 고향인 정읍 태인은 시가 문학의 탯자리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조리나니,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창 밖에는 밤 깊도록 비가 내리는데,등불 앞의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신라 말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오언 절구의 한시(漢詩)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빈공과)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이름을 떨쳤다. 작품에서 수 만 리 밖의 타국(당나라)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정든 고향(신라)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먼 이역 땅 중국으로 건너갔던 지은이가 느끼는 향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그것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안타까운 심정으로도 읽힌다. 최치원은 결국 자신의 경륜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고 40여 세에 은거의 길을 택했다.최치원이 학문적 기반을 쌓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 바로 정읍 태인이다. 최치원이 이곳 태수를 지내며 유상대를 만들어 선비들과 놀았던 시절부터 정극인이 상춘곡(賞春曲)을 노래하고 고현향약을 지어 태산풍류의 물줄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물줄기는 16세기 사림의 시가 문학의 정점에 선 '면앙정가'와 '송강가사'로 이어졌다. 즉 태인은 남도 선비문화가 태어난 탯자리인 셈이다.▲ 맑은 선비의 기품이 흐르는 무성서원정읍 태인(칠보)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사적 제166호)은 본래 태산사라는 생사당에서 비롯되었다. 태산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합천으로 떠나자, 그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고을 선비들이 살아 있는 이를 모시는 생사당을 마련했다. 그 뒤로 정극인, 신잠 등이 선정을 베풀었던 여러 선현들을 모셨다. 태산사가 배움의 전당으로서 모습을 갖춘 것은 1615년, 서원을 세워 배움을 열었고 1696년 숙종으로부터 무성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슬 푸른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무성서원이 태산을 멀리 내다보며 고색창연하게 앉아 있다. 옆길에 세워진 홍살문을 지나면 정문 누각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그 담장 앞에는 이 고을 명현들의 송덕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맨 앞쪽에 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이최응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방방곡곡에 1000여 개가 넘는 서원과 사당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47개만 남았는데 전북에서 유일하게 무성서원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무성서원을 나와 반 마장쯤 걸어가면 최치원이 동진강 상류인 칠보천 물가에 곡수거를 만들고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유상대가 나온다. 나무 그늘에 다소곳이 안긴 정자에 감운정(感雲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고운 최치원을 그리워하여 지은 탓인지 맑은 선비의 기품이 흐른다.'공자의 도로 만물을 교화한다.' 태인 향교(1421년 세종3년) 또한 조선시대의 공립학교로서 선비들의 배움의 장이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향교는 국가 정책적 교육 사업으로 마을마다 세워졌다. 유교적 이념에 따른 유교적 인간으로 하루빨리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정면 4칸과 옆면 2칸으로 지어진 만화루(萬化樓)엔 단종의 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이곳 출신임을 알려준다. 넓적한 보도블록이 깔린 길 끝을 돌아 나오면 5칸짜리 명륜당에서 성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긴 지 오래건만 왠지 기자의 귀엔 고졸한 풍모의 선비들이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글 읽는 청아한 소리가 들려온다.▲ 자치규약'고현향악' 만들어 선비들의 삶의 태도 교육왕유는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도원행'이라는 시에 담아 이상향에 대한 오랜 꿈을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이에 못지않은 이상향을 노래한 시인이 많았다. 전원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가사라는 독특한 양식에 담아서 유교적 이상향을 보여준 정극인 선생(丁克仁1401~1481)의 상춘곡은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졌다. '상춘곡'을 읊조리다 보면 세속적 진출의 욕구를 뒤로 하고 자연 속에 묻혀서 안빈낙도하는 선비의 고결한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단종 때 사간원정언을 지낸 정극인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치사한 후 처가가 있는 태인으로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은거의 날들을 보냈다. 택호가 '불우헌'이라 함은 세상을 잊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새삼 정극인 선생의 심중을 알 듯하다. 선생은 향리의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이것이 고현향약이 만들어진 시초가 된 셈이다. 무성서원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세로를 따라 은석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마을 뒤쪽에 야트막한 산허리 솔숲에 정극인 선생이 잠들어 있다. 반듯한 비에 적혀있는 '사간원 정언 정 선생'이라는 글자가 초가을 햇살의 입자에 반짝거린다. 타의에 의해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어 좌절할 때 안빈낙도는 또 다른 현실 참여인 셈이었던 것. 그는 고현향약이라는 자치규약을 만들어 이상적 삶을 실천하며, 사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일재 이항 선생이 천하의 영재들과 공부했다고 전해오는 옛 서당 또한 칠보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 성리학을 이끌었던 거목으로, 퇴계 이황은 그를 두고 '호남 이학의 문을 연 스승'이라 단언했고 송강 정철은 "호남에 그가 없었다면 미개한 상태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배움과 실천의 척도가 되었다. 고운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된 선비문화가 송세림에서 정극인으로부터 구한말 김경흠과 김균과 소고당 여사까지 불세출의 수많은 선비를 내었으니 태인이 선비의 탯자리임이 분명하다.▲ 유교가 갖는 우주적 통찰 되새겨볼 필요 있어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교는 무엇이며, 선비란 어떤 존재일까! 조선시대만 해도 유교는 조선의 바탕이념이었고 종교였다. 한때 "공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몇 마디 말을 가지고 부풀려놓은 허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유교의 이상 사회는 픽션이고 허구다"라며 유교를 한껏 폄하한 이들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명분을 중시하여 호란을 자초하였고 공리공론과 명분에 휘둘려서 결국은 문약(文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유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지만, 그것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고 사회제도화 된 것은 조선 건국과 함께였다. 유학의 한 갈래인 주자학은 조선 500년은 물론 우리 근현대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다산의 학문을 실학(實學)으로 부르는 순간 유교는 이미 유효 기간의 만기가 선언된 셈이다. 권위와 복종을 인간 사회의 마지막 이데올로기로 착각하고 있는 유교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명령에 익숙하며 입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다. 소통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유교와 선비문화는 고루하고 봉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고개 끄덕거리게 한다. 그러나 유교를 과학적 검증도, 열린 토론도 거치지 않은 공자의 불완전한 우주론적 에세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것만 아니다. 우주를 담론의 대상으로 했던 도가적 발상이나 우주적 통찰과 철학적 메시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마을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옛 선비와 같은 어른들이 향음주라도 마시며 음풍농월하는 의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그것이 단지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선비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서로 소통하는 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화가 사회통합을 하는 절대적인 기능을 한 셈이다. 사회의 존립에 정신적 일체감이 요즘처럼 분자화 된 세상에 더욱 더 필요하다. 삶의 면면들이 문화에 투영되고 문화는 바로 정치와 경제의 바탕이 되고 핵심적 가치가 된다. 여러 심성과 규율, 내면과 외면, 개인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고자 하는 삶을 위한 상징으로서 유교와 선비문화는 여전히 한국인의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같은 불황 시대에 정신적 의지처를 유교 고전의 전아(典雅)한 세계에서 찾아봄이 어떨까?/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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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10.17 23:02

17. 부안이 낳은 대학자 지포 김구

부안땅은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자 유서깊은 역사의 숨결이 가득한 보배로운 곳이다. 특히 부안 변산은 곳곳이 숨은 비경(秘景)이요, 찾을수록 소중한 문화자산이 그윽한 곳으로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줄포만 곰소바다, 내소사와 개암사, 유천리 상감청자, 호랑가시나무와 꽝꽝나무의 푸르름, 아름다운 변산의 낙조, 서해바다 지킴이 수성당,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 반계 유형원 등이 이를 대변한다.일찍이 조선 영조때 어사 박문수는 "물고기와 소금과 땔나무가 풍부하여 부모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부안(生居扶安)이로다"라고 하였던가. 또한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땅이다.◆ 부안의 정신사적 인물, 지포 김구이러한 부안땅에 인물을 찾는다면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 임진왜란때 의병장인 김홍원, 마지막 유학의 거두인 간재 전우 등 수많은 사람을 들 수 있겠지만, 부안이 낳은 걸출한 대학자이자 부안의 정신사적 인물인 지포 김구(止浦 金坵, 12111278)를 빼놓을 수는 없다.그는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뛰어난 외교가로서, 그가 남긴 문풍의 영향으로 조선시기에 부안 뿐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된다.김구는 고려말 몽고간섭기때 살았던 사람으로 부안 출신으로 본관은 부령(부안),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라 하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와 지금의 변산 지지포(지금의 지서리운산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그를 지포선생이라 불렀다.그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변산 지지포에 그의 묘역과, 부안 연곡리에 도동서원터, 선은리에 김구유허비 등이 있다. 특히 김구를 주벽(主壁)으로 1534년(중종 29)에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세워진 시기가 최초의 서원이라는 영주 소수서원과 비교해서 8년이나 앞서 지포 김구와 함께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유학의 중심지로서의 도동서원은 조선시기 부안지방이 유림의 세력이 비교적 강했고 그의 후손인 부령김씨(부안김씨)들이 생원진사가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기에 주목된다.또한 선은리에 남아 있는 김구유허비는 조선말 대표적인 유림의 거두로 당시 계화도에 은거했던 간재 전우가 1910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지포가 김구가 태어나고 만년에 살았던 선은동과 변산 지지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예의윤강(禮儀倫綱)을 다하였다"고 부안 땅에서 김구의 문풍진작를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부안보다 제주에서 더 유명한 인물지포 김구는 부안 출신으로 고장을 빛낸 인물 중에 가장 오래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역대 부안군지 등에 보면 인물조 첫머리에 그의 대한 기록이 소개된다.그가 살다간 시대는 어지러운 고려말 무신정권기와 몽고간섭기였다. 그가 부안에서 성장하였고 신흥사류로서 중서시랑평장사라는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기에 정치관료로서도 평가받아야 하지만 그가 만년에 낙향하여 지지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문풍을 선양하며 지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기에 중요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1211년(희종 7) 지금의 부안 선은리에서 출생한 김구는 22세때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관료생활에 접어든다. 특히 당대 제1의 문호였던 이규보와 최자가 김구를 천거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그는 24세때인 1234년(고종 21)에 제주판관으로 임명되어 6년을 제주에서 보내며 선정을 베푼다. 탐라지(耽羅志) 풍속편에 보면 "김구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에게 고통을 느끼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또한, 동문선(東文選)에 의하면 '제주도는 난석(難石)이 많고 땅이 건조하여 본시부터 논이란 없고 다만 밀, 보리, 콩, 조 따위만 나는데 그나마 옛적엔 내 밭, 네 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힘이 센 집에서 나날이 남의 것을 누에가 뽕을 먹듯 침범하므로 모든 힘없는 백성들이 괴로워하더니 김구란 이가 판관이 되어 온 후 백성의 고통을 듣고 돌을 모아 밭에 담을 두르게 하니 경계가 분명해져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이처럼 김구는 힘없는 백성들이 힘있는 토호세력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광경을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백성의 입장에서 돌담을 쌓고 치안과 국방에 전력을 다했다. 말 그대로 민본주의 실천한 목민관의 표본이었다. 우리 고장의 인물이 제주에서 더 잘 알려지고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현재 제주를 상징하는 특유의 현무암 돌담이 이러한 연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부안 출신 김구를 제주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할 만하다.이를 대변이나 하듯 제주시 삼양동에 소재한 제주민속박물관에는 "돌문화의 은인 판관 김구선생 공적비"까지 건립되어 있고, 현재 제주 애월읍 설촌마을에는 제주 특유의 현무암 돌담길이 문화재로 등록되기까지 하였다.이후 김구는 권직한림으로 문사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북정록(北征錄), 항몽의식이 담긴 "과철주" 등 여러 시를 남기도 한다. 최충헌, 최우정권이 끝나고 최우의 아들 최항이 집권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김구는 부안으로 낙향한다. 그의 나이 40세(1249년)였다. 이후 10년간 선학동(선은리)와 지지포(변산 운산리)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였다. 당시 강화도에 고려조정이 있었는데 강화에서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쓸쓸히 변산 지지포에 닿았을 김구를 회상한다.◆ 뛰어난 외교문장가의 대명사김구는 이후 유경김준정권이 등장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1257년에는 한림원 지제고를 시작으로 50세인 1259년(고종46년) 김구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還都)와 태자의 입조(入朝)에 대한 표문을 작성하여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다. 이 표문은 원 세조를 높이는 글이지만 결국 이후 몽고의 무리한 요구와 압력을 해결하는 중요한 전기가 된 글로 평가된다. 이후 원종, 충렬왕 초기 그가 죽기 전까지 김구는 국가의 주요 외교문서나 의례에 수반되는 문한(文翰)를 맡는 중심인물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하였다. 실제로 당시의 원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음속에 비분강개의 항몽의식은 내재하나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문장가로서의 김구의 삶의 궤적은 여기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또한, 김구 신종희종강종의 삼조실록(三朝實錄)를 편찬하기도 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1274년에는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되어 재상 반열에 오르게 된다.김구의 성품은 "성실하여 말이 적었으나 국사를 논함에는 강직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고려사'에 보면 "국사를 논할 때 말이 절도있는 직언으로 피하는 바가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김구의 성품이 매우 강직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1278년(충렬왕 4)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본관은 부령(扶寧: 현재의 扶安). 초명은 백일(百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그가 죽자 충렬왕은 국가에서 장사비용을 대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김구는 첫째부인 박씨에게 1녀, 둘째부인 경주최씨에게 3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해주정씨, 청주정씨, 경주김씨등 당시 명문과 혼인하였다. 특히 그의 손녀사위가 기철(奇轍)인 점으로 보아 김구는 당대 최고의 권문세족과 연혼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승대 문화전문 시민기자(전북도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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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1.10.10 23:02

석불사 주지 휴암 스님

석불사 주지 휴암 스님은 주위에서 범패의 1인자로 불린다. 필자가 만난 날도 강원도에서 의식을 하고 막 돌아왔을 때였다.스님이 이곳에 산 것은 이 앞을 지나다가 보호각 문틈으로 부처님을 보니 너무 거룩하여 3년만 살다가 가려던 것이 벌서 34년째라고 한다.불상에 관해 물으니, 오른손가락은 염지(焰指) 공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법의는 옷 주름이 손까지 덮은 것으로 볼 때 아미타불이고, 불두(佛頭)와 전체 상호는 여래상이며, 광배에는 과거 7불을 새기고, 광배의 연꽃잎으로 볼 때는 미륵불로 볼 수 있으므로,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상호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다.가등청정 전설 외에도 다른 전설이 있는데, 이 돌부처님께 기도하여 태어난 사람은 이름에 돌 석(石) 자를 넣어 지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강현욱 전 전북지사의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아버지 강석철을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석(石)자를 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현재의 대웅전을 지을 때 당시 전북지사였던 강현욱 지사의 도움으로 전라북도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또 고을 원님이 이 앞을 지나가다 말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원님이 부처님께 절을 하니 그제야 발이 떨어져 가던 길을 갔다고 한다. 어른 앞에서는 말을 타고 가지 말고 내려서 가라는 의미라고 한다.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는 불상이 땀을 흘린다고도 하였다.법의가 대좌까지 내려가 있는데 불단을 조성하여 가렸으니, 앞으로 유리로 조성하여 대좌가 보이도록 하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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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9.26 23:02

16. 익산 연동리 돌부처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을 보면 으레 부처님 같다는 표현을 쓴다. 불상을 조각할 때도 항상 미소를 머금은 자비로운 모습으로 조각한다. 그런데 익산에는 웃지 않는 부처님이 계신다. 바로 연동리 돌부처님이다. 이 부처님도 다른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머금게 해야 한다. 우리 문화를 아끼는 마음이 모이면 언젠가는 1300년 전 백제인의 미소를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석불사'로 검색해야문화재청에 올라 있는 이름은 '보물 제45호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益山 蓮洞里 石造如來坐像)'이다. 그렇지만 길도우미(내비게이션)에서는 '석불사'로 검색해야 한다.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서 함열읍으로 이어진 722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삼기면에서 낭산면으로 가는 718번 지방도와 만난다. 이 네거리 서쪽에 '미륵산 석불사'가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널리 알려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지만 여기에 모신 불상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미륵사지에서 지척인데도 찾는 이가 거의 없다.주소는 삼기면 연동리, 현재 소유는 국유이며, 관리자는 익산시로 되어 있다.▲미륵산 석불사연동리 돌부처님은 석불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미륵산 석불사'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종각이 있고, 오른쪽에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오른쪽에는 삼성각이 있다. 종각에는 범종과 운판이 있고,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쇠솥도 놓여 있다.대웅전 왼쪽에는 '세심대(洗心臺)'란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는 '한국불교화엄종종정사원, 한국불교화엄종석불사' 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요사에는 '호남범음회총본부'라는 현판도 있다.절터 앞마당에는 사적기가 있다.사적기에는, "어느 신도에게 현몽하여 내 머리를 조성 보결(補缺)하여 달라는 부처님의 계시가 있어 본 삼기면민과 신도들의 협력 하에 불상을 지하에서 발굴하여 '불상(佛上)'을 보결 봉안하니, 단월(檀越, 시주라는 의미)들이 소원이 있어 지성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어 인근 불제자들의 신앙 도량으로 널리 알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돌부처의 모습먼저 불상을 대하면 상호 부분과 어울리지 않는 머리의 모습에 당황하게 된다. 몸통과 목이 너무 가까이 붙어 목이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고, 머리의 가로 길이와 세로 길이가 비슷하여 둥그렇게 보이고 몸통에 비해 비례가 맞지 않아 왜소해 보인다. 돌의 빛깔도 흰빛이 많아 대번에 새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머리는 1963년에 끊긴 광배를 다시 세우고, 보호각을 지으면서 새로 조성해 붙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1990년에 신축한 것이다.머리 부분을 제외한 몸체의 높이는 156㎝, 광배의 높이는 448㎝인데 재질은 화강암이다.법의(法衣)는 통견(U자 형태)인데 비교적 얇은 편이다. 두 무릎은 넓게 퍼져 안정감이 있으며, 무릎 위에도 법의가 U자 형태로 펼쳐져 있다. U자 형태의 옷 주름은 대좌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발 위에 얹어 놓은 형태로 예외적인 수인(手印, 손모양)이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는 약간 다른 손모양이다. 무릎 부분과 오른쪽 팔, 가슴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몸에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여래상이다.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둘레에 불꽃무늬를 새겼다. 여기에는 불꽃무늬와 함께 일곱 분의 화불(化佛)을 새겼다. 윗부분이 잘려나가고, 아랫부분이 부러져 붙였다.만일 돌부처의 머리 부분이 온전하고 훼손되지 않았더라면 국보로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절터의 옛 모습창건 연대나 절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고 했다. 1989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절터를 발굴하여, 출토된 기와와 주춧돌 등을 분석해 보았더니, 백제 무왕(600~641) 때인 7세기 전반에 미륵사지를 세우기 앞서서 이루었다는 것이다. 문화재 안내문에는 "600년경의 백제 석불상이다."라고 소개되어 있다.백제의 가람 배치는 중문(中門), 탑, 금당(金堂), 강당, 그리고 주위에 회랑이 있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금당 터만이 별견되었다고 한다. 폐찰된 시기는 상감청자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12~13세기)로 보았다.한편 휴암 주지 스님 말씀에 따르면 과거에는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세운 비석, 지금은 일주문 밖으로 옮겨놓은 비석 앞면에는 '보물 제10호(?) 익산 석불리 석불 좌상', 뒷면에는 '조선총독부'란 글자가 새겨 있다. 또 사적기에 "1930년에 만선(萬善) 스님과 신녀 진안화주가 공력 도모하여 초가 3칸을 건립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석불사로 부른 것 같다.▲왜 얼굴을 잃어버렸나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목이 없다. 이 돌부처가 목이 부러진 것은 정유재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기요마사)이 칼로 내리쳤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가등청정이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쳐들어오는데 안개가 느닷없이 생겨 주위를 살필 수 없게 되자 군사들을 풀어서 무엇이 있는가 알아보라고 했다.잠시 뒤 군사들이 돌아와 돌부처 하나밖에 없다고 보고하자, 이렇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은 분명히 돌부처의 짓일 것이라면서 돌부처가 있는 데로 와서,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네가 방자하게 길을 막느냐?" 하면서 칼로 돌부처의 목을 베자 주위를 가렸던 안개가 걷히어 지나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유재란 때 이미 절이 소실되고 불상만 남았을 것이다.가등청정은 독실한 불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도 임진, 정유 양란 때 우리 민족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경상도 민요 '쾌지나칭칭나네'는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가 물러가자 "쾌재(快哉)라, 청정이가 가네."라는 말이 변해서 되었다는 학설이 있는데,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 땅에서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가등청정은 구주(九州, 큐슈) 웅본(熊本, 구마모토) 사람이다. 웅본성(구마모토 성) 밖에 동상이 있다. 웅본성에 가서 성만 볼 것이 아니라 임진정유 양란 때의 만행도 보아야 한다. 덧붙여 일제강점기에 전북에 들어와 수탈에 앞장섰던 세천(細川, 호소카와) 집안의 고택이 웅본성 바로 밖에 있다. 이곳에 가서는 일본 옛집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수탈도 떠올려 보아야 한다.우리나라를 지켜온 건 사찰이다정병조의 '불교문화사론'에 따르면 사찰은 주요 군사시설이었기 때문에 전쟁 때면 으레 파괴되었다고 한다. 넓은 공간과 많은 전각이 있는 사찰은 전쟁 때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주둔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수 있는 요긴한 군사시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겪을 때마다 사찰이 큰 피해를 보았다.그 뒤 많은 사찰들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절터가 방치된 채 그대로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연동리 돌부처님의 얼굴을 복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임진정유 양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 작업일 수 있다.▲미소를 찾게 할 방안은 없는가?진홍섭의 '한국의 불상 200쪽'에는 "원래의 머리는 옆에 보관되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 머리 부분은 절에 없다. 이 책 외에 머리 부분이 있다는 기록도 없다.그렇다면 불두(佛頭)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면 전북에 있는 백제 불상을 본보기로 하여 복원해야 한다. 연동리 절터 바로 북쪽 1㎞ 지점에 있는 태봉사에는 백제 때 조성된 석조삼존불(전라북도유형문화제 제12호)이 있다. 또 정읍시 소성면에도 백제불인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井邑 普化里 石造二佛立像, 보물 제914호)이 있다. 이들 불상과 직접 비교는 어려울지라도 참고 자료는 될 것이다. 그것도 어렵다면 충청도에 있는 백제불도 살펴보아 석불 전체의 상호(相好)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서 복원하면 된다.조각가는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새긴다. 연동리 돌부처님의 얼굴은 그 시대에 가장 자비로웠던 백제인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백제인의 얼굴을 되찾자. 그 미소를 복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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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9.26 23:02

이완용은

사람들은 이완용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 모르는 부분이 많다.이완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으로서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강제 합병시킨 장본인이자 친일 매국노의 수괴다. 이완용은 미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친미주의 관료였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친러파로 변신을 하고 1904년 러일 전쟁 후 친일파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전 이완용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일본 제국의 무력을 업게 된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 조약을 적극 지지하고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앞장서고 이토 히로부미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서서 정미칠적이 되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서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 건을 통과시킨 뒤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국권을 일본에 팔아넘김으로서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범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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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9.19 23:02

15. 이완용과 익산의 묘 터

몇 해 전, 방영된 TV프로그램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나운서는 도심 속 청춘들에게 다양한 인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누군가?' 라며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인물 속에는 연예인, 운동선수, 현직 정치인, 항일 의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과 함께 '이완용'이란 팻말이 의미심장하게 제시되었다."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의사 였나?"/ "정치인?"/ "마음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 "음, 무얼 팔았는데 무엇을 팔았던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던 사람이지 않았을까요?"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1926년 2월 12일,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858년에 태어나 68세까지 살았으니 천수를 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질긴 목숨 모질도록 이어나갔다 해야 할까? 그때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시점이었으니 그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당시 '경성일보'에 의하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이완용은 사후를 대비하여 유명한 역학자들을 동원, 최고의 명당자리를 찾게 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치적으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닌 첩첩산중을 방불케 한 곳이 조건으로 내걸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산세가 험하고 깊어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전북 익산시 낭산의 명당자리를 그가 차지하게 되었다.▲ 베일에 싸여진 묘터풍수지리의 지관들은 명당에도 꼭 임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있어도 덕을 쌓지 못하면 명당자리가 있어도 보이지 않고 또, 설상 찾아서 쓴다더라도 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그의 묘터는 전국에 몇 개가 진 묘냐 가짜 묘냐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묘에 대한 행방이 무수한 억측만 낳았을 뿐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의 묘는 여러 개라는 추측들도 난무했다. 이러한 추측들이 난무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민족 반역자에 대한 감정으로 그의 시신이라도 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둘째로, 일제의 비호아래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였기에 값비싼 부장품이 많을 거라는 지레짐작이었을 것이다. 이 궁금증은 1979년, 이완용이 죽은 지 53년 만에 밝혀진다. 그의 후손이 인부 10여명을 동원 직접 발굴하고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그가 진짜 묻혔던 자리는 오지로서 신선이 내려와 춤을 추는 모습을 갖춘 명당자리임이 드러났다.익산 낭산면 내산동에 위치한 성인봉 중턱, 좌청룡 우백호인 좌우 산맥이 계곡을 이루는 중간 자리에 위치한 이완용 묘는 익산 최고봉인 미륵산과 맞절을 하고 있는 자리였다. 봉분 뒤로는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쳐서 있어 시신이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는 명당 중 명당.▲ 아카시아 뿌리가 그의 심장을 겨누다1979년 4월, 서울에 사는 증손자 형제와 손주며느리들이 찾아와 인부 10여 명을 동원, 폐 묘한 뒤 유골은 거두어 화장하여 인근 장암천에 띄워 보냈다 한다. 하지만 지관들의 주장처럼 명당자리가 사람을 가리는 걸까? 당시 묘 터에는 잡초와 아카시아 뿌리들이 묘 터 깊숙이 뿌리박아 묘의 형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아카시아 뿌리가 마치 시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형태를 띠었으나 관은 뚫지 못했다. 명당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의 관은 제 모습을 남겨놓았을까?작업에 참여한 인부들은 봉분이 일반 묘와 달리 크고 상석 등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옛날 권세 있던 사람의 것으로만 추정했을 뿐 이완용의 묘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관의 모습이 드러나자 관 뚜껑에 빨간 글씨로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란 글씨가 선명하게 씌여져 있어서 매국노 이완용의 묘란 것을 알 수 있었다한다.묘에는 이완용 부부가 합장으로 묻혀 있었고 그의 관은 5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원형이 썩거나 손상된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세간의 관심과는 다르게 부장품으로는 생시에 입었던 관복과 평상복 서너 벌을 비롯, 그의 일생동안의 행적이 기록된 지석(2030Cm)뿐이었다.지관들의 말대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명당이 안보인 것인지, 아니면 명당이 그를 거부해서 이변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의 후손들의 손으로 폐 묘 되어 화장된 채 강물에 뿌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김성철 문화전문시민기자(우석대 한국어센터 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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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9.19 23:02

14. 시조계의 큰 어른 가람 이병기 생가

사람은 어느 한 분야에 능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을지라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잊히기 쉽다. 바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그런 분 가운데 한 분이다. 가람은 당신의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진흙에 뒤덮인 보석 같아 못내 아쉽다.▲가람 생가 가는 길익산시 금마면에서 1번 국도를 따라서 연무대 방향으로 가면 익산시 여산면이다. 4차선 신작로를 따라 여산면에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이정표가 나온다. 또 여산면 초입에서 2차선 구도로인 '가람로'를 따라 가면 '가람1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 길로 가면 된다.마을 이름은 진사동인데 '참숯골'이었다가 '참실골'로 바뀌고 진사동(眞絲洞)으로 다시 바뀌었다. 마을 입구 '진사교' 양쪽 난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한가운데에 '시조의 마을'이란 글씨를 써 놓았다.▲생가와 그 주변생가 앞에는 널따란 주차장이 있다. 이 주차장을 볼 때면 이곳에 백련을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람문선'에 보면 생가 앞 논 반 마지기에다가 백련을 심은 이야기가 나온다. 할아버지가 심은 백련이 죽어서 다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백련을 가꾸었다고 한다.최근에는 여러 곳에서 백련을 관광 상품화하는데 중국에서 백련을 처음으로 들여온 이가 익산 사람으로 조선 선조 때 문인인 표옹 송영구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성도 없는 데다가 백련을 가꾸는 것보다 백련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익산에 백련을 가꾸어야 한다. 주차장을 콘크리트를 거둬 내고 백련을 심을 날이 오기 바란다.가람 생가는 지금 보수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처음에는 이엉만 다시 올리고, 담장 보수하고, 배수로만 내려고 계획했는데, 도리까지 썩어서 공사가 더 커졌다고 한다.가람 생가에 들어서면 먼저 네모난 작은 못이 나온다. 가람 생가에서 만난 김장환씨의 증언에 따르면 2004년 무렵에 주차장을 만들면서 못도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는 폭 1미터 정도의 작은 못이 울타리 안 마당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못가에는 개나리, 산수유나무, 배롱나무 들이 어울려 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롱나무 꽃이 앞서 맞이했다.그리고 현재의 못 남쪽 끝에는 계일정(誡溢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이므로 항상 분수를 지키고자 노력했을 고인들에게 새삼 머리가 수그린다. 언젠가는 이 정자도 복원해야 한다.과거에는 부속건물이 더 있었지만 지금은 정자, 사랑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 한 동이 있다. 모두 초가로 화려하지 않아 소박하기 그지없다. 당호(堂號)는 수우재(守愚齋)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란다.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란 겸손한 이름이다.사랑채 앞에는 승운정(勝雲亭)이란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다분히 도교적인 이름이다. 이 정자에 앉아서 호산춘이라도 한 잔 한다면 구름을 탄 기분이리라. 승운정 옆에는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된 커다란 탱자나무가 마치 문지기라도 되는 듯 서 있다.사랑채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이곳에 올 때면 가람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것만 같다. 2년 전에 가람 친척에게서 들은 이야기다.어느 날인가 가람이 방안에서 밖으로 담뱃대를 내밀며 불을 붙여 오라고 했단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시킨 것이었겠지만 마침 사랑채를 지나던 사람이 담뱃대를 받아 불을 붙여서 방안으로 담뱃대를 내밀었다고 한다. 담뱃대를 받으면서 보니 바로 아버지였다. 깜짝 놀란 가람이 이 일을 계기로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가람도 가람이지만 아버지도 훌륭한 분이다.안채는 ㄱ자 모양이다. 양반 가옥의 구조를 따라 누마루까지 갖췄지만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주차장 오른쪽 언덕에는 동상이 있는데, 둘레에 가람의 시조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연보가 새겨져 있다. 이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더 들어가면 가람의 묘소가 나온다. 곧 가람 생가 대나무 숲 뒤다. 그런데 안내문이 없어서 생가 뒤에 있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다. 막상 묘소에 가더라도 너무 방치되어 있고 석물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아 아쉬움이 든다. 이곳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모르는 이들은 너무 방치했다면서 안타깝게 여긴다.가람 생가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는 폐교가 된 여산남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가람이 돌아가셨을 때 조문객을 받았던 곳이다.또 여산초등학교는 가람이 20대 때 근무하던 학교다. 학교에 들어서면 흉상과 함께 가람이 지은 교가가 새겨 있다. 그런데 노랫말이 참 재미있다."여산은 옛 고을 호남의 첫 고을그 역사 몇 천 년 나리어 오면서이렇다 할 만한 자랑은 없으나그래도 우리는 못 잊는 이 고장."▲가람 이병기는 누구인가가람 이병기(1891~1968)는 국문학자 또는 시조시인이다. 가람은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주춧돌을 놓은 학자요, 쇠약해 가던 우리 시조시를 부흥발전시킨 시인이었다. 또한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이기도 했다.▲난초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비록 문학소녀가 아닐지라도 학창시절에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가람의 '난초'라는 시조다. 가람은 난초복, 술복, 제자복을 타고 났다고 한다. 얼마나 난을 아꼈으면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갈 때도 처자식의 안위보다는 난초가 죽지 않게 잘 보살피라고 했을까? 가람은 술자리와 강의실이 따로 없었다. 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곧 강의실이었다고 한다.가람은 1891년 3월 5일 현재의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이다.주시경 선생의 제자가 된 뒤 우리 말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국어학 연구와 한글 연구를 하는 한편, 시조시 창작과 그 이론적인 연구에도 차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가'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1927년 시조회, 1928년 가요연구회를 조직하여 시조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시가 전반에 걸친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의유당일기', '요로원야화기', '어우야담', '역대시조선' 등은 가람이 발굴하여 소개한 것들이다.가람은 창씨제도(1940)의 협박에도 본성명 '이병기'를 고수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근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1946년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개론' 첫 강의를 하고, 1952년 명륜대학이 국립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에 편입되자 그 학장이 되어 1956년 정년퇴임까지 재직하였다. 1957년 한글날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귀갓길에 뇌일혈로 와병하였다가, 1968년에 돌아가셨다.▲기념사업주차장에 들어서면 올 4월에 제3회 가람시조문학제를 했던 현수막이 지금도 붙어 있다. 가람시조문학제는 가람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데 해마다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가람 생가에서 열린다. 문학제 때는 학술행사와 함께 전국가람시조백일장을 열고 있다. 가람기념사업회에서는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한 쪽에는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익산문화재단, 익산의제21 등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가람 이병기 학술대회'가 오는 9월 23~24일에 원광대학교에서 열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익산시는 가람의 업적을 추모하고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가람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79년부터 97년까지는 시조문학사에서 시행(17회 시상)하다가, 98년과 99년에는 문학사상사에서 2회, 그리고 2000년부터는 익산시에서 시행하고 있다. 2009년도부터는 가람시조문학신인상을 제정하여 2011년에 3회 시상을 했다./ 이택회 문화전문 시민기자(시조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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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1.09.05 23:02

13.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어느 농민군과 유족의 삶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원회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구성됐다. 위원회는 그간 '역적'으로 몰렸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에 관해 국가적 차원에서 명예 회복을 시켜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부는 사실 확인이 안 돼 유족을 찾아가 이야기를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상당했다. 오랫동안 '동학란'으로 왜곡되고 평가절하됐던 동학농민혁명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잊혀질뻔했던 인물을 소개한다. 김기준씨는 가장 가슴 아픈 동학농민혁명 상흔의 주인공이다.▲ 김기준, 동학농민혁명 아픔의 또다른 얼굴1853년 김제 백구면 가전리에서 출생한 김기준(42)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뒤 집에 숨어 지냈다. 1895년 음력 4월 자신의 집 부엌에서 토벌군에게 체포되어 끌려갔으나 그날 죽임을 당해 시신이 만경강에 던져졌다. 이상의 내용이 유족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김기준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서 몇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데 김기준이 참여한 지역이 김제이며 동학농민혁명 다음해인 1895년 4월 토벌군에 의해 처형됐다는 것이다. 김제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많은 지역이며 1895년까지 토벌군의 활동이 계속 이루어졌다. 여기에 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김기준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김기준 후손으로 이어지는 상흔의 잔재들당시 김기준에게는 2살된 아들과 아내(정씨)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그들의 삶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의 아내는 토벌군이 동학군 아내와 자식 등 가족까지 몰살시킨다는 말을 듣고 2살 아들 학룡을 데리고 밀밭으로 피신했다. 낮에는 밀밭에 숨고, 밤이 되면 집으로 몰래 돌아오는 피신 생활을 보름 남짓 하던 중 남편을 찾아준다는 장정에 의해 김제 백구면 유강리 우담마을 임씨 집안으로 보쌈을 당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선택의 여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 아들의 삶은 그 이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내가 임씨 집안에 살게 되면서 아들은 남편 임씨의 아들 성으로 바뀌어 올려졌다. 시간이 흘러 아들 학룡은 결혼 해 1남 2녀를 낳았다.▲ 역사로 인해 굴절된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김기준의 아내는 자녀 손자녀 앞에서 김기준의 동학농민혁명 참여 사실과 비참한 죽음 등에 대해 자주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특히 손자 김병훈씨는 지금은 비록 임씨 집안에서 살고 있지만 꼭 본래의 김씨를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즉 김기준의 아내 정씨는 뒤틀리고 굴절된 가족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보이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정씨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손자가 김씨를 되찾아야 한다는 아내의 기대와 임씨의 맏손자가 되어 재산상속의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을 꺼려했던 임씨 집안의 입장 등으로 김병훈씨는 군 입대 당시까지 호적 없이 생활했다. 이에 따라 손자 김병훈은 군 제대 후 본래의 김씨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드디어 1961년 김씨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들은 김씨를 되찾지 못했다.▲ 아직도 계속되는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혁명은 역사적 사건이다. 얼핏 생각하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둘러보면 우리 자신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결정된 경우가 허다하다. 김기준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의 삶은 굴절되었으며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후손들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실로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만 벗어나는 것은 엄청난 댓가가 필요하였다. 후손들은 지금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혁명은 먼 옛날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전라도 특히 현재의 전북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체세력은 모두 전북 지역 출신이며 수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김기준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후손들은 그것으로 인해 삶의 내용이 고통과 고난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전북지역이 침제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런 점을 염두해 두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접근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역사에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변혁운동의 최고봉으로 자주, 평등, 개혁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의의가 있으며 세계사적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이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전북도가 적극 활용하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북도민들이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규 문화전문시민기자(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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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29 23:02

강후진은…

강후진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람으로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출신이다. 그는 상고사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특이한 관점과 식견을 지녔으며, 유적을 직접 답사해 기록한 저술가이자 고고학자다.본관은 신천(信川)이며, 자는 순보(順甫), 호는 스스로를 태평산인(太平散人)이라 칭하였다. 1685년(숙종11)에 태어나 1756년(영조32) 5월 2일에 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경학과 역사에 밝았으며,'와유록(臥遊錄)','감영록(鑑影錄)','화이잡록(華夷雜錄)','역대회령(歷代會靈)','송사록(松沙誌)'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집안 세보에 보면 그는 전국을 두루 유람하면서 자신의 성씨 족보와 유적을 살펴서 '초보(草譜)'(3권)도 만들었다고 한다.'신천강씨세보'에 강후진는 무장 갈마곡파(渴馬谷派), 용장파(龍庄派)에 속한다. 신천강씨는 14세 고려조 지연(之淵)를 중시조로 황해도 신천곡산재령 일대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19세손인 류(旒)가 1453년(단종1) 계유정난(癸酉靖亂)에 벼슬을 받지 않고 영광 홍농으로 숨어 들어 스스로 둔암(遯庵)이라 했다. 류의 아들 윤석(允碩)이 무장 갈마곡(현 고창군 대산면)으로 이주하였고, 24세손이고 덕민(德民)이 정유재란 때 출전하여 남원 운봉에서 순절하였다. 후진의 증조인 귀생(貴生)은 용장(현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여지며, 후진은 아버지 유태(有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강후진은 위로 이형(以亨), 후범(候範)의 형이 있고, 아래로 서자인 동생 후준(候寯)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족보상 어머니인 나주정씨가 별세하고 2년후에 태어났기에 정실이 아닌 계실 소생으로 추정된다.그의 저서인 감영록에 의하면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고, 친지가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59년(철종 10)에 증조 귀생을 기리기 위해 용장마을에 영모재(永慕齋)가 건립되었고, 이 곳에 조선말기 호남 의병장인 송사(松沙) 기우만이 글 썼다는 것, 조부 지수(智水)가 사호(沙湖) 오창익(吳昌益)과 사예(司藝) 이담(李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덕망이 높았다 것 등을 통해 학문적 단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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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22 23:02

12. 고창 출신 고고학자 강후진

▲ 강후진의 유적 답사기'왕궁성(왕검성) 북쪽 10여리에 미륵산 서쪽 기슭에 옛 미륵사터가 남아 있다. () 밭두렁 사이에 7층 석탑은 엄청 높고 크며, 모든 석재들은 둘러 막아 첩첩히 쌓아 올려졌고, 돌기둥은 별도로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다. 소위 동방석탑의 으뜸이라 함은 헛 말이 아닌가 싶다. 백년 전에 벼락으로 그 절반이 무너졌고, 아래 석문이 있어 출입할 수가 있는데, 세사람이 함께 들어가 놀 수 있을 정도이다. 서쪽 벽을 밟고 탑 위에 올라가 농부 세 사람이 농기구를 옆에 끼고 그 위에 누워 있다. 밭두렁 사이에는 초석과 석조(石槽), 그릇 등이 널려 있는데, 반쯤은 노출되고, 또는 전부 노출되어 기울어져 있거나 부서져 있다. 종각으로 추정되는 초석은 완연히 남아 있다.'지금부터 255년전, 1738년(영조 14) 어느 가을 날 기록이다. 익산 금마를 답사한 강후진(康侯晉)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200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너무나도 선연히 금마땅 미륵사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답사기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실제 석탑이 7층까지 남아 있었고, 무너진 탑 서쪽 면의 벽을 쌓아 사람이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마전이나 사자암 지명은 현존하며, 저산, 명적암, 석정, 용추 등의 지명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강후진의 삶과 저술그렇다면, 이처럼 역사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꼼꼼히 기록한 보기 드문 저술가인 강후진은 누구인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출신의 그는 문헌을 널리 읽고 유적을 답사하여 확인하고 기록한 저술가이자 고고학자이다. 강후진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을 그의 저술이다. 먼저 와유록은 자신의 직접 답사한 내용과 지지(地誌) 자료를 모아 저술한 책이다. 1729년 평안도 성천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유동명도기(遊東明都記)', 같은 해 묘향산의 사찰과 단군 유적을 답사한 '유묘향산기', 1730년 여름 평양의 단군과 기자유적을 답사한 '평양기', 1734년 황해도 곡산를 답사한 '유두류동기(遊頭流洞記)', 1734년 익산 마한백제 유적을 답사한 '유금마성기', 또한 고조선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지리지를 엮은 '서경총람'과 '송경' 등 총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와유록은 자신이 지은 답사 기행문과 기존의 서책에서 발췌하여 답사를 위한 지리지를 합쳐 만든 저술로서 그의 해박한 학문적 바탕과 실제 답사를 통해 매우 사실적이고 특색있는 문장을 남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특히'유금마성기'는 우리 지역인 익산 금마 일대의 왕궁리, 미륵사지, 쌍릉 등이 답사를 통해 당시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완산의 김창익김수봉, 익산 사람 최운거와 함께 만경강 춘포 일대의 횡탄, 왕검성(왕궁리)의 정원유적와 오금산성, 그리고 미륵사지와 기준성(미륵산성), 당산과 쌍릉 등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자신의 역사적 소신을 바탕으로 답사기를 적고 있어 이채롭다.'감영록'은 강후진의 가장 방대하고 대표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총 6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12권은 안타깝게도 실전(失傳)되었다. 국가와 시조, 그리고 수도와 제도를 1~4권에서 다루었으며, 5~6권에서는 민간신앙과 사물을 수록하였다. 그는 상고에서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르는 분류사에 가졌던 관심을 독서로 정리하고 발로 답사하여 얻은 지식을 수록하였다. 특히 고승전, 언어, 민간신앙, 동물 등 희귀한 민담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생활사와 민초들의 애환 등을 엮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화이잡록'은 천하를 중국과 주변국으로 구분하는 화이(華夷)의식을 반영한 책으로 여라나라 이름과 민족의 위치와 풍속, 중국과 우리나라 성씨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우주관과 세계관이 담긴 저술로 특히 성씨가 기원한 땅과 혈연에 대한 동아시아 민족지의 성격이 강한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역대회령'은 서제(庶弟)인 후준의 아들 강주신이 보완한 것으로 보이는데, 각지에 있는 신당(神堂)의 내력과 신령의 기원을 서술한 책이며, '송사록'은 무장현의 역사 지리지로 강후진의 지역사 연구 저술로 평가된다. '송사(松沙)'란 무장(茂長)이 무송(茂松)과 장사(長沙)를 합쳐 만든 고을 이름이므로 송사록은 무장지(茂長誌)의 다른 이름이다. 특히 '송사록'은 자신이 살고 있는 무장의 자존심을 찾고 지역에서의 유산과 정서를 보존계승하려는 중요한 사찬 읍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풀뿌리 지역사가 살아야태평산인 강후진은 현재 고창군 아산면 남산리 2007년 폐교된 석곡초등학교 뒤편에 쓸쓸이 잠들어 있다. 그가 나고 자란 용장마을로부터 서쪽으로 약 900m 남짓한 곳이다. 그는 아버지 강유태가 52세때 늦동이(晩得)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에 가문을 이끌 계승자도 아니었으며, 학문적 연원이나 이름난 계승자도 없었기에 철저한 야인으로 살았던 전라도 무장의 한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날에 조망받는 단 한가지는 오로지 한 길,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역사적 관점에서 철저하게 학문을 발로 뛰고 기술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상고사로 고조선에 뿌리를 두고 기자조선을 거쳐 마한과 삼국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특히 관서와 호남을 두루 답사하며 확인하면서 복원하려 했다는 점, 신천강씨의 혈연적 기원과 전라도 무장의 지역사에서부터 보기 드물게 광범위한 동아시아의 민족에 까지 역사적 관심을 확대했다는 점은 새롭게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1589년 정여립의 기축옥사 이후 인물의 불모지와 같았던 전라도 땅에 풀뿌리 지식인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보다 앞선 부안의 백광홍이나 태인의 이항, 순창의 김인후 등 성리학으로 전국을 주름잡던 명사들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부안 우반동에 은거한 반계 유형원이나, 강후진과 같은 고창 출신인 이재 황윤석, 순창의 여암 신경준, 장흥의 존재 위백규 등을 주목해 볼 수 있겠다.그 당대 꿈꾸는 역사가 오늘의 역사를 이어가듯 숨어 빛나는 보석같은 인물이 끊임없이 샘솟는 이 땅이 되길 소원해 보며, 지역이 살아야 국가가 살기에 오늘도 풀뿌리 지역사가 꿈틀대는 역사가 용솟음치길 기대해 본다./ 김승대 (문화전문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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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22 23:02

11. 조선왕조실록의 요람 무주 '적상산사고'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에 대한 '억지주장'이 극에 달한 가운데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조선왕조 500년, 그 흥망성쇠의 역사는 과거가 아닌 우리 삶 속에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엔 조선의 27왕에 관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사와 조선 왕들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었거나 편협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문명으로 인해 우리역사가 폄하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1618년 '선조실록' 봉안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국서(國書)를 약 300년간 보관했던 무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는 한국전쟁 와중에 불타버리고 관찬자료들은 인민군에 반출, 현재는 김일성대학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롭게 조성된 텅 빈 사고(史庫)를 돌아 나오는데 한 가닥의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왕조를 결코 찬양할 생각은 없지만 역동적이었을지도 모를 우리역사를 너무나 쉽게 놓아버렸다는 자괴감 때문이요, '삼국사기' 이전의 제대로 된 기록물이 없는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국서를 온전히 지킨 수문장바야흐로 우리는 역사 드라마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안방극장은 '광개토태왕'과 '계백'에서 삼국시대가, '공주의 남자'와 '무사 백동수'에선 질펀한 조선의 역사가 펼쳐진다. 특히 '공주의 남자'에선 문종의 짧은 치세기간 동안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와 왕위를 찬탈하려는 수양대군과의 알력이 대중의 역사에 대한 욕구와 흥미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수양대군 딸과 김종서 아들과의 사랑'이라는 허구다. 이처럼 사극은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조합한 팩션(faction)을 통해서 대중의 역사 감정을 자극한다. 대중은 드라마 속 인물에 감정이입하여 위축된 왕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생질을 살육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수양대군을 옹호하거나 '천박한 권력의지의 철면피'라고 분노한다. 엊그제 개봉한 '활'이라는 영화는 국치(國恥)의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화에서 주인공은 활 하나로 수많은 청군의 정예부대를 궤멸시킨다. 심지어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고 욕보인 청나라 왕자를 불태워 죽임으로써 처절한 패전의 고통을 통쾌한 복수로 상쇄한다. 현재의 사극 열풍은 현실의 위기와 사회 병리현상을 반영한다. 한 국가와 민족이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할수록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고조된다. 진실된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한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무주 적상산(赤裳山)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가 있다. 사실 무주는 멀고도 험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전북의 최북단이고 가장 먼 동쪽이라는 지리적 사실과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상징하는 국경의 역사적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무주산천은 곧추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이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아 이름을 적상산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선조실록' 116권에 '당초 향산(묘향산)에 장서토록 정하였으나 금번에 적상산성에 장서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 신하 김설(金卨)이 1625년 4월 21일 116권의 실록을 포쇄하고 기록한 것을 적상산사고에 옮겨 보관한 것. 그 이전에 적상산성(赤裳山城)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려말 최영장군이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를 정벌한 후 서울로 돌아오다가 적상산의 산세에 감탄하여 산성을 쌓도록 했다. 산성의 담장이 일부 남아있는 위로 안국사(安國寺)가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적상산 안국사기'에 보면 1277년(충렬왕 3) 월인 스님이 안국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아마도 적상산성의 수호사찰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64년(고종)에 지은 '안국사중수기(安國寺重修記)' 현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승병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인 것과 이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고 붙인 것도 비록 작은 절이긴 하되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적상산성의 안국사는 적상산사고와 그 안에 있는 국서(國書)들을 완전하게 지켜온 수문장 역할을 다한 셈이다.▲ 실록 고출하는 장소로 중요도 더해적상산사고는 실록과 선원보 등 전적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사각(실록각)과 선원전을 건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충주 성주 춘추관의 실록이 병화로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 실록은 난 중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해주 강화 묘향산에 옮겨지면서 난을 피했다. 난이 끝나자 실록을 강화로 이송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03년 5월경에 다시 강화도로 안치하였다. 1603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3부를 인쇄하고 여기에 교정본과 원본을 합쳐 5부를 마련 인쇄본 1부는 춘추관인 내사고에, 2부 교정본 1부 원본 1부는 강화의 마니산사고를 비롯하여 봉화의 태백산, 영변의 묘향산, 평창의 오대산사고에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610년 실록을 남쪽의 안전지대로 옮기기로 하고 1612년 적상산성으로 장소를 정해 1613년 사각을 짓기 시작, 1614년 완성됨으로써 오대산 태백산정족산 적상산의 4대사고가 되었다. 특히 적상산사고는 서책의 보관상태가 좋아 실록을 고출하는 장소로서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적상산사고에는 4대문이 있었으나 북문과 서문에 누각을 설치하고 주로 이곳으로 통행하였으며, 사고에는 사각 선원각과 삼문이 있었고 사고의 수호와 포쇄시 이용했던 군기고, 참봉청, 별장청, 객사가 있었으며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호국사, 안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는 주로 사찰의 승병들이 지켰다. 건립당시에는 50여 명이었고 '선조실록' 봉안시에는 92명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조 영정이 적상산사고에 봉안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승병이 흩어지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그 위험이 더해지자 승려 각성에게 도총섭(都摠攝)의 칭호를 제수하고 적상산성에 거주케 하였으니 적상산사고에 대한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가 발견한 비장의 심처적상산 사고에 얽힌 이야기는 조선 후기부터 우리 근대사의 격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일전쟁의 와중에 분산 봉인되어 있던 왕조실록은 사고본만을 남기고 모두 분실, 훼손되고 말았다. 전주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만이 전주 유생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던 것이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왕조는 왕가의 족보라 할 선원록(璿源錄) 또한 이곳에 옮겨 비장케 하였다. 적상산 사고는 이처럼 조선 왕조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발견한 비장의 심처였다. 그만치 이곳이 깊고 먼 곳이었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관원들이 튼튼한 궤짝 속에 든 왕조실록을 짊어지고 걸었을 이 산길엔 텅 빈 사고만이 남아있다. 그나마 양수발전소 준공과 함께 원래 있던 자리에서, 역시 함께 옮겨 온 안국사 발치에 자리 잡고 있다. 요동치는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서책의 운명을 적상산사고가 증명한다고나 할까, 역사는 끝없이 변하고 소멸한다는 것을 웅변하듯 적상산 사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저절로 쓸쓸함을 금할 수 없다./ 기명숙 문화전문시민기자(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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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1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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