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덕진중과 동암고, 고려대 의대를 졸업한 이재훈씨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위장·간·대장·갑상선·소아외과 등 다양한 분야의 전임의 과정을 마친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봉사를 위해서는 ‘1인 다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잔혹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르완다에서 지난 2000년 의료봉사를 시작한 이씨는 이후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다.
그곳은 병원 하나 없는 마을이 2만여 곳에 달하는 ‘의료 오지’였다.
대부분 도로조차 없는 지역이었다.
때로는 열대우림을 헤치고 나흘을 걸어 들어가 환자를 돌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씨가 치료해준 환자는 지금까지 1만여 명에 달한다.
현지인들은 이재훈씨를 ‘부시맨 닥터’라고 부른다. 의료시설이 없는 숲이나 들판에서 칼과 가위, 실과 바늘만 가지고 수많은 수술을 하면서 병을 치료해온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그는 “혼자 무의촌 2만곳을 다 돌려면 200년이 걸린다”며 자신과 같은 의사가 100명만 더 있으면 그곳 사람들도 2년에 한번을 진료를 받을 수 있을것 이라고 말했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피부에서 고름이 나는 상황에서도 치료한번 받지 못한채 방치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재훈은 이제 제2의 이태석으로 인식되고 있다. 처음엔 그를 믿지 않고 무당으로 여기던 사람들도 이젠 수십km를 걸어와 그에게 진료받기를 원한다.
이씨의 이 같은 봉사 활동은 ‘이태석상’의 첫 수상자를 찾고 있던 외교부 측에 알려졌고, 심사위원회는 “이태석 신부의 봉사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라며 50여 명의 후보 가운데 이씨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국내에서 부유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도 있었음에도 이재훈씨는 왜 머나먼 고행의 길을 떠났을까.
동암고 재학 시절 그의 꿈은 의료선교였다고 한다. 이를 이루려면 의과대학에 입학하는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고교시절, 당시만해도 최상위권 학생들은 서울대 공과대학을 가장 선호했으나, 그는 봉사와 선교의 꿈을 향해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어린 학생이었지만, 의사가 되려는 동기는 좋은 집에 살고, 해외여행을 다니거나, 골프를 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훌륭하게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의료봉사’를 꿈꿨다.
고교시절 그를 지도했던 이정돈 교사는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끝까지 수업을 듣고 병원에 가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이제 그는 지역의 인재, 국내의 자랑을 넘어 아프리카의 희망이 되고 있다.
한편 지난 23일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이태석 상’ 시상식에서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고 이태석 신부의 가족, 해외원조단체협회의 이창식 회장, 이재훈씨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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