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은 태고의 자연을 간직하며 수억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생명을 보듬어 왔다. 현재 동·식물 6977종이 자생하고 있는 지리산은 우리나라 21개 국립공원 중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한다. 그 중에서도 식물군은 1522종으로 한라산·다도해해상 국립공원 다음으로 많다.
반달가슴곰, 꼬마잠자리부터 기생꽃, 복주머니란까지 멸종위기야생 동·식물 36종이 은밀한 공간에서 살아가기에 지리산은 최적의 조건이다.
이 중에서도 지리산 왕등재 습지는 천혜의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지난달 25일 지리산 국립공원관리공단 박은희 계장과 함께 왕등재 탐사길에 나섰다. '2008 람사르 총회' 공식 탐방지로 생태계 핵심지역이기도 한 이곳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있어 공단의 사전 허가가 있어야만 탐방이 가능하다.
왕등재로 올라가는 길은 수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원시림에 가까웠다. '반달곰 주의' 표지판이 곳곳에 걸려 있고 오소리가 막 파놓은 굴은 이곳이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왕등재에 가까워질수록 시야를 가리던 수풀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대신 습지식물 사초류가 해발 800m 지점에 군락을 이뤄 넓게 퍼져 있었다. 습지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일반적인 산은 정상으로 갈수록 수량이 줄어드는데 비해 왕등재로 가는 길은 고지로 갈수록 습기를 머금고 있다.
사초 군락을 따라 10여분을 더 걷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해발 967m 왕등재 습지. 지리산 주능선 동쪽 끝자락 여러 봉우리에 둘러싸인 2170㎡의 습지는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그야말로 세상과 완벽히 차단된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주변과는 확연히 다른 식물군. 희귀식물인 꽃창포 뻐꾹나리 창포가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광범위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 조그마한 생명의 요람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잠자리인 꼬마잠자리(멸종위기종 2급), 큰땅콩물방개를 비롯해 깊은 산속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 산골조개 등 500여종의 동식물이 서식한다.
또 식물들이 뿌리를 내린 이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遺骸)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밑에 쌓인 지층)은 왕등재의 생성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지형경관·지질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정영륜 경상대 식물생명공학연구소장은 "인간의 간섭이 최소화된 산지 습지들이 비교적 자연환경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충실히 기록한다. 특히 이탄층에 있는 여러 가지 미생물들은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이다"고 말했다.
천연자연의 보고 왕등재 외에도 지리산 전역에는 가시오갈피 개병풍 기생꽃 노랑붓꽃 백부자 산작약 세뿔투구꽃 복주머니란 칠보치마 대홍란 석곡 등 멸종위기 2급 식물 11종이 서식한다. 또 분비나무 지리괴불나무 나도제비난 등과 함께 구상나무·가문비나무·주목·철쭉 군락 등은 지리산 생태를 유지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이처럼 지리산에서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지리산의 기후가 식물 성장에 최적의 조건이다. 전주기상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연 평균 강수량은 1479.1㎜, 30년 평균 강수량은 1307.7㎜다. 반면 지난해 지리산 AWS(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서 관측된 연 강수량 2934.5㎜, 뱀사골에서는 2423.5㎜로 나타났다. 평균 강수량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생명의 근원인 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지리산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음으로 지형적 조건을 들 수 있다. 18억6000만년 대륙 간 충돌로 지하에 있던 화강암이 지표로 노출돼 형성된 지리산은 오랜 시간 동안 풍화작용과 지각변동을 받으면서 고위평탄면이 형성됐다.
오장환 전북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여러 차례에 걸쳐 화강암이 침식 되면서 퇴적물이 쌓였고 정상 부근에서 운반된 물질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면서 지리산 곳곳에 평탄면들이 발달했다. 이런 지형적 여건이 여러 가지 동식물들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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