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연·사람, 구석구석 '의미' 녹아있어
자치단체마다 지역 스토리를 발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호평을 받는 곳도 있지만 억지로 짜 맞춘 이야기 때문에 찾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 일대 마을은 풍부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가 함께 녹아 있다. 느림의 미학을 통해 힐링을 추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리산 일대의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매해 늘고 있는 이유다. 역사와 자연,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진 지리산 마을들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힐링을 준다.
△천년송과 함께한 '와운마을'
해발 800m 산자락에 우뚝 솟은 소나무의 자태가 일품이다. 언뜻 정이품송 소나무를 연상케하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424호 '지리산 천년송'.
구름도 누워 갈 정도로 높고 험한 곳 남원시 산내면 와운(臥雲) 마을에 있는 지리산 천년송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장대한 천년송의 빼어난 자태를 보기 위해 수년 전부터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던 이곳에 지난 2009년께 도로가 연결되면서, 하나둘씩 관광객이 찾기 시작해 입소문을 탄 뒤 이제는 지리산의 최고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사실 지리산 천년송은 수령이 600년 이상인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수량 측정을 위해 나무를 훼손할 수 없어 마을 주민들은 천년송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천년송을 할매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인근에 한아시(할아버지)송이 위치해 있다. 수 백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선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1월 10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발된 사람은 음력 12월 30일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인근 계곡에서 목욕재계를 하며 천년송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백두대간 지나는 '노치마을'
백두대간이 지나는 자리에 유일하게 촌락을 이룬 남원시 운봉읍 노치마을. 3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인데도 대간 능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노치마을 일대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m의 방죽을 만들어 지맥을 끊고 그 안에 목돌(일명 잠금석)을 설치했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마을을 지나가는 유일한 지점임과 동시에 덕음산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사람의 신체로 비유하면 목에 해당된다. 일제는 잠금석을 설치해 목을 졸라 민족정기를 단절하려 했던 셈이다.
목돌들은 노치마을에서 1.5㎞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15년 전 경지정리작업 중에 발견된 목돌이 개인 집으로 옮겨져 정원석으로 사용되다 지난 8월 노치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노치마을로 옮겨진 목돌은 너트형으로 된 5개의 석물이다. 하나의 크기는 가로 120㎝, 세로 95㎝, 두께 40㎝로 두 개를 하나로 연결할 경우 가로 120㎝, 세로 190㎝ 정도로 구멍의 직경은 100㎝에 이른다.
일제가 설치한 목돌 때문에 숨통이 막혀 있던 마을 뒷산에는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 3그루가 버티고 있다. 또 마을 중앙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주민들에게 안락한 휴식 공간을 만들어 준다.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했으나 지리산의 강한 생명력마저 끊지는 못한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을 지켜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매해 당산재를 지내고 있다.
△남명학 발상지 '사리마을'
남명 조식 선생의 지리산 사랑은 남달랐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벼슬에서 내려온 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벼슬에서 내려오기 전에도 지리산을 17차례나 방문하면서 유람록을 남겨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현재 산청군 사리마을 일대에는 남명이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던 산천재가 남아있다. 산천재에 있는 수 백년된 매화나무 남명매는 지역의 명물이다.
남명은 72세 때인 1572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제자들이 산천재 인근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덕천서원을 건립했다. 이후 덕천서원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지만, 현재도 남명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이 묻어난다.
남명의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다. 바른 소리를 하고 나아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남명학을 만들어 실천적 지식인을 길러왔다. 이 때문에 같은해(1501년) 태어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평가는 물론 신유학의 발상지 중국 무이정사 관장도 그의 이름 석자에 경외감을 표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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