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2-04 07:49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23. 전문가 좌담회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지리산 세계복합유산 기획취재 과정에서 수많은 논의들이 오갔다.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는 어렵다는 의견부터, 지리산의 장점을 살리는 연구를 진행해 차근차근 준비해야한다는 주장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는 지리산의 세계복합유산 등재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누구도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만 등재 전략논리를 더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지난달 15일 열린 지리산 세계복합유산으로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의 주장도 대동소이했다.△사 회 = 김재호 선임기자 △토론자 = 이병채 남원문화원장, 우두성 구례문화원장, 서정호 순천대 교수, 최원석 경상대 교수, 유인학 전 국회의원, 김인태 전북도 문화예술과장△세계복합유산로서 가치와 등재 과정사회= 그동안 기획 취재를 진행하면서 가능하면 다양한 자연경관부터 동식물, 문화역사종교 등 많은 부분을 다루고 싶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 참석하신 분들도 그간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생각만큼 많이 지면에 반영되지 않은 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먼저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과 지리산이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 의견을 말해달라. 서정호= 우리나라 세계유산 가운데 자연유산은 한 개에 불과하다. 자연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는 최소 5년이 걸리는데 제주도가 지난 2001년에 신청해 2007년에 됐다. 제주도는 먼저 시군에서 도에 의견을 올렸고 도는 이를 모아 문화재청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문화재청은 심사를 거친 뒤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올려 최종 등재됐다. 하지만 지리산은 여러 가지 요인에서 뒤쳐져있다. 언제 세계복합유산으로 추진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복합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사전 조치들을 미리 해놔야 한다.유인학=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리산이 솔직히 말해서 중국의 황산처럼 웅장한 경관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을 보는 시각에서 보자면 지리산의 위치가 가장 기후변화가 심한 아열대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다양한 동식물, 수산 자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보전하고 알린다면 충분한 가치가 인정될 것이다. 또 문화적 가치는 아주 독특하고 무속 신앙, 유교, 불교 등 종교 유산은 너무 많아 손에 꼽기도 어렵다. 이와 함께 지리산은 고려 말부터 동북아의 큰 정치나 변화기에 어김없이 국제적 전쟁터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부터 임진왜란, 동학농민운동,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전쟁을 거치면서도 보존된 자연과 문화 유산 자체가 세계유산으로 충분히 가치를 지닌다. △등재 추진 전략은?사회= 지리산의 세계복합유산 등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게 공통된 의견 같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추진 전략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로 귀결된다. 유인학= 몇몇 학자들이 지리산을 종교유산으로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데 이는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우선 이들의 연구 결과는 지리산의 가치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한 측면이 있다. 또 우리나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사례지만 특정 종교로 세계유산을 신청한다면 반대할 단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추진도 해보기 전에 지리산의 가치는 사장될 것이다. 최원석= 종교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할 당시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지리산이 가진 세계유산의 가치 가운데 어떤 유산으로서 가치가 가장 뛰어난지 전반적인 검토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지리산의 다양한 유산이 굉장히 복합적으로 용광로처럼 융합돼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어느 하나 탁월한 가치를 끄집어내기 힘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연구단에서는 어떤 전략을 수립할 것인가 고민하다 문화경관으로 문화재청에 등재를 신청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지리산이 복합유산으로서 과연 가치가 있는지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했고, 복합유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생물권보존구역문화경관역사경관 등 한 걸음씩 차분히 준비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계유산들도 대부분 이 과정을 거쳐 등재된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정호= 지리산이 절대 복합유산 대상이 아니다라고 결정한 것이 아니다. 명칭문제는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단계적 전략을 짜는 가운데 나온 것으로 언제든지 세계복합유산 추진으로 바꿀 수 있다. 다만 세계복합유산으로 가기 전까지는 여러 단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명칭 문제는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현재 지리산이 생물권보존구역, 문화경관 등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다. 이 부분부터 하나씩 추진해 나가면 세계복합유산 등재로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자치단체 및 중앙정부 협력 강화해야 사회= 중국 무이산에 다녀온 결과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자치단체 및 중앙정부 간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 무이산의 경우 등재 추진 과정에서 지방정부 간 동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어려웠다. 지리산에도 케이블카, 댐 등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어 앞으로 추진에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우두성=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케이블카와 댐 문제다. 두 개의 사안을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 또 해당 자치단체장의 첨예한 시각차도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이들의 의견을 모으는 게 중요한 과제다. 구례의 예를 들면 지난 2004년 수달보호구역을 지정할 때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간 각종 반대에 부딪혔지만 지역 시민과 환경단체가 간담토론회를 통해 의견 조정을 이룬 결과다. 이로 인해 구례는 청정이미지를 얻었다. 또 반달곰 사업을 할 때도 재산권 침해 등의 문제가 제기됐지만 현재는 반달가슴곰 때문에 60명의 일자리가 생겼다. 이와 함께 여러 언론에서 반달곰에 대해 보도해 엄청난 지역 홍보가 이뤄졌다. 이병채= 남원에 있는 국립공원연구원이 내년에 원주로 이전을 한다. 연구원에는 지리산권 뿐만 아니라 전국 국립공원의 동식물 자료 등이 방대하게 있다.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가려면 국립공원연구원이 현 위치에 있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동식물을 보존하려는 의지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또 국립공원연구원이 지리산권에 자생하는 동식물 연구를 통해 자료를 만들기 위해 남원, 구례, 산청 등 관련 자치단체에서 2000만원씩 편성했다. 하지만 이 예산도 다른 곳에 쓰려고 하는 게 현실이다. 이는 자치단체간은 물론이고 지리산권에 있는 여러 단체의 의견이 잘 모아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유인학= 자치단체의 소극적인 자세도 문제다. 지리산의 가치를 잘 모르고 다른 것들을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려고 한다. 사안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은 자치단체의 몫이지만 지리산의 가치는 현재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김인태= 전북이 절대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서원과 백제문화 등으로 세계유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전국 3~5개 자치단체가 협력해 이뤄낸 결과다. 케이블카와 댐 문제 등이 지리산 세계복합유산 추진에 걸림돌이었고, 이에 대한 자치단체들 간의 협의가 전무한 상태였다. 케이블카의 경우 오히려 서로 유치하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또 지정 추진 과정에서 주민들의 동의 절차 등 많은 부분이 미비했다. 이런 절차들을 거치고 주민들의 동의를 이뤄내는 과정이 같이 가야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과제는사회= 지리산의 가치는 충분한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세계복합유산으로 가는데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원석= 지리산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바퀴가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 주민, 언론 사회단체, 연구진 학자들이다. 지리산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연구, 지방자치단체의 협력, 주민 동의, 언론의 관심 등 어느 하나 따로 굴러가서는 절대 세계복합유산이 될 수 없다.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 네 바퀴가 잘 굴러가게 해야 하고 이 과정 자체가 세계유산감이다. 이병채= 현재 댐 저지운동은 실상사 도법스님을 중심으로 한 사회단체 생명연대가 주도하고 있다.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이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지리산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보존하려는 노력을 유네스코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인태= 이번에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간 만큼 전북도도 다음에 어떤 것을 세계유산으로 추진하는데 관심이 많다. 자치단체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 주도로 등재를 추진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반드시 진통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 교수님의 말씀처럼 네 바퀴가 동시에 잘 굴러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끝〉v:* {behavior:url(#default#vml);}o:* {behavior:url(#default#vml);}w:* {behavior:url(#default#vml);}.shape {behavior:url(#default#vml);}※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2.10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22. 중국무이산 ⑷ 변화상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무이산을 둘러싼 이해관계인들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재산권 행사 등에서 많은 제약이 따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주민 갈등재정 문제지방정부 간 불협화음 등을 이겨낸 결과, 자연도 보호하고 관광주민 소득 증대로 이어졌다.△관광수입증대23만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무이산시의 지난해 지역내총생산(GRDP)은 150억 위안(2조6128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관광산업과 농업의 비중은 90% 이상을 차지한다. 변변한 공장 하나 없이 이뤄낸 놀라운 결과다. 또 관광차(茶) 산업으로 올린 수입은 대부분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외부 자본의 유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입장권 판매기준으로 63만명의 관광객이 무이산을 찾아 1억2000만 위안(208억원)의 입장 소득을 올렸다. 하지만 10년 새 이 수치는 4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25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 5억 위안(869억원)의 입장 수입을 올렸다.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는 공원 구역 내 입장한 관광객 외에도 300여만명이 더 무이산 일대를 찾은 것으로 추산했다. 관광객 증가는 주민들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무이산시 인구 23만명 가운데 80% 정도가 요식업, 숙박업, 관광 가이드 등 관광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에는 임업농업축산업이 주 수입원이었다. 무이산 현지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후위안씨(46)는 등재 후 관광업으로 수입이 증대되자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현재 농사를 짓는 것보다 4배 가까이 수입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대홍포차대홍포차(大紅袍茶)는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에도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등재 이후 청정지역에서 생산됐다는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지난 2002년 대만에서 열린 차박람회에서 20g에 20만8000위안(3600만원)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초 보호 구역 안에서 대홍포차를 재배하던 이주민들은 중국 정부의 이주 계획에 반발했었다. 하지만 차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주단지 건설과 보호 구역 내에서 계속해서 차 재배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이주 계획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주민들에게 대홍포차는 최고의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해 무이산시 지역내총생산(GRDP) 150억 위안(2조6128억원) 가운데 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0.6%(16억 위안)에 달한다. 대홍포차는 무이산 지구에서도 화강암이 풍화돼 만들어진 곳에서 나온 것이 최고의 가치가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대홍포차는 중국 내에서도 귀빈들을 접대하는 데 사용된다. 이 때문에 이주민들 중에는 홍콩 등 중국 내 타 지역으로 진출, 합작회사를 설립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 위저관 위원장 "주민 신뢰형성, 등재에 결정적 역할"주민들에게 제시했던 약속을 지킨 결과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됐고 이후의 삶의 질도 향상됐습니다.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 위저관 위원장은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주민들에게 실현 가능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리회사의 성격을 띤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에는 현재 60명의 직원과 2300여명의 관리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이 중에는 이주민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게 위 위원장의 설명이다.무이산은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어요. 입장 수익 등으로 올린 수입 중 일부는 마을발전기금으로 사용하고, 차 산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관리 인력으로 채용했습니다. 무이산 지구에서 이주한 주민들은 모두 5800명이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마을을 건설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380억원이다.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갔지만, 무이산풍경명승구 관리위원회의 연간 관리비용 200억원 중 상당수를 이주민들에게 지급할 보상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주민들은 차 산업으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보상금까지 더해지면서 무이산 지구에서 가장 잘 사는 부류에 속한다. 이제는 무이산이 국제적 관광지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그간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내국인 수요가 대부분으로 언제 한계점에 다다를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위 위원장은 단순히 눈 구경만 하던 관광에서 인문문화적 관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무이산 관광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면서도 참고해야 할 대목이라고 조언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2.06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21. 중국 무이산 (3) 어떻게 지정됐나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중국 정부는 지난 1987년 무이산 일대를 생물권 보존구역으로 지정해 세계복합유산 등재의 초석을 다졌다. 처음부터 세계복합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것은 비현실적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생물권 보존구역 지정 이후 중국 정부는 무이산 일대에 자연 환경 보호를 위한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이와 함께 세계복합유산등재추진위원회 구성, 관광 특구 지정, 역사인문학 배경 연구 조사 등을 통해 마침내 지난 1999년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됐다.△등재 과정= 무이산 세계복합유산 등재 추진은 지난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관광산업에 관심이 많았던 천자룽 무이산시 시장은 취임 첫 업무보고에서 등재 추진을 지시했다. 이후 무이산시 관계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세계복합유산에 선정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당시 생물권 보존 구역으로 지정돼 있었지만 유산의 가치 평가, 유산의 보호 관리가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이산시는 먼저 2년 가까이 전 세계 복합유산 답사를 진행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이를 바탕으로 무이산의 장점을 키우는 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에 대한 보강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무이산시와 중국 정부는 무이산 일대를 관광특구로 개발했다. 빼어난 풍경과 풍부한 역사유적에 비해 관광객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무이산 관광 특구는 지난 1996년 첫 삽을 뜬 이후 현재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면적은 16㎢에 이른다. 숙박시설만 300여개에 달하고 상업지구에 들어선 상가는 1000여개가 넘는다. 연간 700만명의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이와 함께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도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당시 1억7000만 위안(현재 환율 적용 한화 550억원)을 들여 도로 및 공항 시설을 보강했다. 또 무이산 일대에 낙후된 건축물 14만㎡ 철거했고, 무이산에 거주하던 2000여명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기반시설 보강, 기초 연구 등을 마친 중국 정부는 지난 1998년 6월 국가 건설부, 문화부, 교육부, 외교부 등의 연합서명문서를 국무원으로 제출했다. 당시 주룽지 총리와 원자바오 부총리가 이를 승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을 했고 이듬해 실사단의 평가를 거쳐 지난 1999년 12월에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시 평가단은 양서류파충류새의 천국, 뱀의 왕국, 곤충의 세계 등 세계 생물의 창문이다고 무이산을 평가했다. △등재과정서 겪은 어려움= 등재과정에서 가장 걸림돌로 작용한 점은 각 지방정부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무이산은 3개의 성과 4개의 10개의 향진에 걸쳐있어 지방정부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자룽 무이산시 시장은 이들 지역을 수시로 방문, 세계복합유산 등재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 공유를 약속하며 합의를 이끌어냈다. 재정적 어려움도 등재 추진에 발목을 잡았다. 관광특구 개발 등에 필요한 550억원의 막대한 비용 마련은 인구 23만명의 지방정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벽이었다. 하지만 무이산시는 고부가가치 관광산업 발전 비전 등을 제시하며 중국 농업은행에서 114억원의 대출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고, 현재 대출받은 금액은 대부분 상환한 상태다. 마지막 과제는 이주민들에 대한 보상이었다. 당시 무이산시의 한 지역신문은 수십년 동안 무이산 일대에서 살아가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을 설득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무이산시는 주민들에게 공동이주단지를 만들어 주는 한편 보호구역 내에서 지역 특산품인 대홍포차(大紅袍茶)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민들을 설득했다. 현재 이주한 주민들은 대홍포차를 재배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고, 이에 더해 관광 수입은 덤으로 얻으면서 윤택한 삶을 살고 있다. 양잉씨(46)는 이주할 당시에는 반발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차(茶) 산업을 중심으로 그때보다 소득이 30배 이상 올랐다면서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대홍포차의 브랜드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2.04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20. 중국 무이산 (2) 유람

웅장했다. 대나무 뗏목 주파이를 타고 바라본 무이산의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두 시간 가량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따라 펼쳐진 뗏목 유람길에는 천혜의 비경과 함께 수많은 인문학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황하문명부터 5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도 이만한 곳은 찾기 어렵다는 게 현지 관리인들의 설명이다.중국은 수많은 전쟁과 수십 차례 왕조가 바뀌는 등 격동의 역사를 보내왔지만 이곳만은 고요했다. 속세를 피해 문인과 종교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인문학적 배경은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선정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무이정사 무이구곡 가운데 5곡에 있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남송 때 주자학의 대가 주희(朱熹, 1130-1200)가 1183년 이곳에 서원을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썼다. 입구를 지나 전청(前廳)에 걸려 있는 학달성천(學達性天배움을 통해 천성에 이른다)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 문구는 서원 중앙에 1000년 된 박달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있는 것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현지인들은 주희의 뜻을 이어받아 지혜롭게 살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이곳에서 웨딩촬영을 많이 한다. 서원 북쪽 중앙에 위치한 강학당에는 주희의 영정이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당시 주희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장면이 재현돼 있다. 주희는 1183년 이후 무이정사에 은거하며 무이구곡가를 짓고 성리학을 완성했다. 무이구곡가는 첫 수를 제외하고 무이구곡의 산과 물의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고 있는 가운데 도학(주자학성리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이 들어왔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 퇴계 이황선생과 율곡 이이선생에 의해 주희의 사상과 작품들이 완전히 소화흡수된다. 그 뒤 무이구곡가는 조선조 성리학자 사이에서 주자학을 실물을 통해서 보다 가깝게 접근하게 하는 기능을 했다. 무이정사는 무이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인문학적 배경을 제공했다.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인근의 수많은 서원, 그 가운데서도 남명학의 본산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등재 추진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다. △서한의 도읍지 민월왕성민월왕성은 무이산 동남쪽에 면적 42㎢의 서한 유적지 한 가운데 있다. 이곳은 2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민월왕성은 한나라 유방이 진나라를 멸할 때 도움을 준 민월에게 왕의 호칭을 내리고 무이산 일대를 통치하게 하면서 만들어졌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은 당시 왕궁터에서 발견된 유적들이다. 현재 도읍지 전체에서 불과 2㎢의 면적을 발굴 했을 뿐인데도 4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이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왕궁터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목욕탕과 배수관이다. 당시 중국의 문화가 고대 그리스 로마와 견주어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지리산도 삼한시대 왕궁터인 달궁과 철기문화의 중심지라는 점을 내세워 역사적으로 충분히 세계복합유산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천시앙룽 무이정사 관장 "남명학 전승할 체계적 조직 만들어야"남명학은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면서 반드시 포함돼야 할 요소입니다.천시앙룽 무이정사 관장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풍에 대해 엄지를 세웠다. 그는 매해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한중 성리학 교류 대회에 참석하면서 남명의 학풍에 매료됐다고 했다. 동아시아 전체를 봤을 때 주희,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등은 주자학에서 손꼽히는 대학자라는 설명이다. 무이정사는 현재 상징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고, 주자학을 학습하고 전승하기 위한 공간들이 무이산 일대에 수십 군데나 됩니다.천시앙룽 관장은 인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명학을 전승할 수 있는 체계적인 조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무이정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인정을 받은 것은 학문의 독창성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이를 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주희의 신유학은 동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명학을 한국에 국한하지 말고 동아시아 전체로 봤을 때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천시앙룽 관장은 남명학을 중심으로 한 국제 포럼을 열 것을 제안했다.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면 분명 남명학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란 생각에서다.

  • 기획
  • 김정엽
  • 2013.11.29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9. 중국 무이산 (1)프롤로그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지리산은 해외 산 세계유산 또는 산 문화경관으로 등재된 세계유산과 비교해 독특성과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리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산에 비해 영산(靈山)의 측면과 생활문화터전이 결합돼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지리산 문화경관은 주민들의 문화생태적 산지적응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보편성과 문화역사적 특색이라는 고유성을 드러낸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현재 세계 160개국에 981건의 세계유산이 있다. 이 가운데 문화유산은 759건, 자연유산은 193건, 복합유산은 29건이다. 지리산과 유사한 해외 세계복합유산은 중국의 태산과 무이산, 뉴질랜드의 통가리로 국립공원, 필리핀의 계단식 벼 경작지 코르디레라스다. 이곳들은 자연, 역사, 문화 등 각각 특성을 잘 융합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점에서 지리산이 본보기로 삼을 만 하다. 특히 이 가운데 중국 복건성과 강소성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이산은 여러모로 지리산과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무이산은 자연미, 역사유적, 신유학의 발상지가 결합한 모습의 문화경관과 아열대 산림, 생물종 특성의 자연 경관적 탁월성을 겸비했다. 무이산은 지난 1999년 세계유산 등재 기준 가운데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명의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 △사건이나 살아있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뛰어난 보편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성 △최상의 자연 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 △생물학적 다양성의 현장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자연 서식지를 포괄하여야 하며 과학이나 보존 관점에서 볼 때 보편적 가치가 탁월하지만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포함 등 4가지 항목을 충족시켜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됐다. 수많은 사찰과 서원 유적을 지닌 무이구곡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11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문화에 영향을 끼친 신유학의 발전과 확산의 배경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무이구곡 하류에 위치한 무이정사 인근은 빼어난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있어 인문 수양을 했던 선비들에게는 최고의 장소로 보였다. 아울러 무이산은 중국 동남부에서 생물 다양성 보전이 뛰어난 곳으로서 중국의 고유종을 이루고 있는 고대 생물종, 잔존 생물종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약 56㎢에 이르는 무이산 보호구 안에는 3728종의 식물종과 5110종의 동물종이 있다. 태고의 자연을 간직하며 수억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생명을 보듬어 온 지리산에 현재 동식물 7000여종이 자생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무이산의 세계복합유산 등재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잘 보존된 자연이다. 문화유산적 기준으로 무이산은 1200년 이상 기간 동안 원시 자연이 보전돼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경관에 이어 세계복합유산으로 평가받는 요소는 역사적 배경이다. 무이산은 중국 내에서도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는 고고학적 유적지로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한나라 도읍지를 포함해 수많은 서원들과 11세기 신유학의 탄생과 관련된 학문센터들이 있다. 무이산은 신유학의 요람이었다. 신유학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역할을 했으며 세계의 철학과 정치체제에 큰 영향을 준 하나의 이론이다. 무이구곡의 하천 경관은 맑고 깊은 물과 바위 절벽이 아울러 갖춰진 특별한 경치를 보여 자연유산적 기준을 충족했다. 무이산은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아열대 산림지의 하나이다. 이것은 중국의 아열대 산림과 중국 남부 열대우림의 다양성을 망라해 대부분이 보존된 가장 거대하고 대표적인 사례다. 지리산과 무이산을 비교해 보면 무이산은 문화적인 가치로서 주자 신유학의 발상지로 주목받았지만, 지리산 권역의 유교와 서원이 지닌 살아있는 전통으로서의 진정성도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1.20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8. '하늘아래 첫 동네' 경쟁

지리산에는 '하늘아래 첫 동네'가 많다. 최근 10년 사이 고지마을까지 도로가 놓이면서 접근성이 좋아지자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주민들이 요식숙박업에 뛰어들면서 지역 간 차별화 전략으로 내건 슬로건이 바로 '하늘아래 첫 동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현재 이 마을들은 지리산 고지대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리산이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케이블카, 댐과 함께 이 부분도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민들이 자유의지로 이전을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앞서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무이산의 경우 지정 전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모두 이전시켜 유네스코 위원회로부터 경관 보호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인정을 받았다.△전남 구례군 산동면 심원마을 구례군 산동면에 있는 심원마을은 원조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린다. 노고단으로 가는 길목인 성삼재를 지붕삼아 해발 750~800m에 걸쳐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심원마을은 조선 고종 때인 1800년대 후반, 약초를 캐고 토종꿀을 채취하려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됐다. 현재 19가구 30여명이 살고 있는 미 마을은 지난 1988년 성삼재를 통해 남원과 구례를 잇는 861번 지방도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지만, 지금은 여름철 무더위를 피해 관광객이 몰리면서 최고의 피서지가 됐다. 매년 여름 이곳을 찾는 피서객은 하루 평균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관광객이 몰려들자 주민들의 생활 패턴도 점점 변하면서, 약초와 꿀 채취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은 이제 대부분 식당과 민박집을 운영한다. 이 때문에 지리산 3대 계곡 중 하나로 꼽히는 심원계곡이 몸살을 앓고 있다. 마을에 있는 오수정화 시설은 몰려드는 관광객의 수요를 감당치 못하고 있다. 구례군이 심원계곡에 대한 수질검사를 진행한 결과, 매해 평균 7월 BOD(생물학적산소요구량)는 1ℓ당 0.5~0.6mg이었지만, 피서객들이 빠져나간 뒤인 9월에는 1.3mg으로 상승했다. 오염된 물은 달궁계곡을 거쳐 뱀사골계곡까지 그대로 흘러가면서 주변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환경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남부사무소는 심원마을에 대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주를 추진한다. 남부사무소 관계자는 "그간 보상금을 두고 주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현재는 이주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다른 지역의 고지 마을들도 심원마을과 비슷한 일을 겪고 있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이주는 어려운 현실이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새재마을해발 800m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남 산청군 새재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제주 43항쟁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낮에는 아군으로, 밤에는 적군 편으로 살아야 했던 화전민들을 위해 50여년 전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어 준 게 마을의 시초다. 이병주 작가의 소설 '지리산'의 한 부분에서는 "지리산을 찾은 빨치산들은 조개골 등에 숨어 이곳 달뜨기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고향과 가족을 생각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빨치산들이 능선 위로 뜨는 달을 보며 가족을 그리워했다던 조개골 초입이 바로 새재마을이다.대원사에서 유평-중땀-아랫새재마을을 거쳐야 갈수 있는 새재마을은 오지였지만 수년 전에 도로가 연결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이 마을 주민들도 약초 등을 채취하며 살아왔지만 현재는 대부분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심원마을처럼 계곡이 수려한 것은 아니어서 마을 주민들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이름을 걸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새재마을엔 정화시설이 없다. 아랫동네인 유평 집단시설지구엔 정부에서 설치한 대형 정화시설이 있지만 새재마을의 오수는 그대로 계곡으로 흘러가고 있는 실정이다. 마을 주민들도 이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관계기관의 반응은 냉담한 현실이다.한 마을 주민은 "기존 가정용 정화조로는 오수 처리는 어림도 없고 시설을 개인이 설치하기엔 전기료 등 경제적 부담이 크다"면서 "상류부터 정화시설을 설치하는 게 맞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차라리 심원마을 같이 이주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복합유산 되려면 문화자연 어우러져야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욕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이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 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생활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그러던 곳에 1988년 861번 지방도로가 생기면서 변화가 생겼다. 도로 신설은 종종 많은 것을 바꾼다. 이전에 흥성하던 곳을 쇠락시키는가 하면, 거꾸로 한가롭고 깨끗하던 곳을 번잡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만든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민박집과 식당이 들어서면서, 탐방객은 성수기 주말에는 하루 평균 2000여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성수기에는 마을 오폐수 처리시설이 탐방객이 만들어내는 오염 물질을 다 처리하지 못하므로 오수가 계곡으로 흘러들게 된다. 악취 문제뿐만 아니라 계곡의 생태계에 변화를 주게 된다. 인과 질소는 하천의 부영양화를 일으킨다. 용존산소에 변화가 생기면, 그에 따라 수서곤충과 어류, 그리고 계곡 주변까지 변화가 일어난다. 깨끗한 계곡을 즐기기 위한 탐방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 때문에 2006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환경 복원을 위해 심원마을을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인해 이 계획은 자꾸 미뤄지고 있다. 세계복합유산이 되려면 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져야 한다. 깨끗한 '자연'이 있어야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리산과 더불어 사는 산촌 마을 만들기의 모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부딪힐 질문일 것이다. 또한,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받은 후에는 지리산 주변 마을을 운영하는 데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지리산의 깨끗한 자연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심원마을의 갈등이 재현되지 않도록, 몰려오는 세계인과 지리산이 조화롭도록 말이다.

  • 기획
  • 김정엽
  • 2013.11.15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7. 문정댐·케이블카

지리산이 위기에 처한 것은 사람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부터다. 전북과 전남도가 관광객 유치를 명분 삼아 1988년 남원시 산내면에서 달궁, 성삼재를 거쳐 구례군 광의면까지 지리산 25㎞를 관통하는 861번 지방도로를 개설한 후 뱀과 오소리, 노루 등 동물들이 차량에 치여 죽는(로드킬) 사고가 빈발했다. 쓰레기 오염, 등산로 훼손도 많아졌다. 최근에는 댐과 케이블카 설치 움직임으로 지리산 일대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문정댐정부는 경남 함양군 문정댐(일명 지리산댐)을 비롯해 전국 한강낙동강금강섬진강 수계에 6개 대형댐과 8개 소형댐 등 14개의 댐을 2021년까지 건설할 계획이다. 이 중 지리산에는 문정댐과 전남 구례 피아골 내서댐 등 2개가 포함됐다. 문정댐은 정부가 1987년 수자원개발계획을 세우면서 댐 예정지로 지정한 후 찬반 논란이 계속되는 곳이다. 정부가 2001년 재측량을 실시하면서 댐건설 반대가 거세게 일었다. 급기야 지리산 실상사 입구 해탈교까지 댐 물꼬리가 닿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실상사 도법스님을 중심으로 한 댐 반대운동이 극에 달했다. 이후 정부는 함양 황석산 쪽으로 댐 계획을 수정하려고 했지만 안의면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문정댐 물꼬리를 실상사 해탈교에서 마천면소재지 방향으로 3㎞ 가량 하향 조정한 뒤 문정댐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6월 국토교통부는 댐 건설시 환경단체 등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사전검토협의회를 거치고, 지역주민 의견수렴을 의무화하도록 한 '댐 사업절차 개선방안'을 내놓았다. 최근 홍수 조절 전용댐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 문정댐과 관련해서는 "지역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겠다"고 밝혔다.정부는 전국 댐건설 반대의 중심에 놓인 문정댐 문제 해결을 위해 한탄강댐처럼 평상시에는 물을 담지 않는 홍수조절전용댐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는 댐 건설로 인한 실상사 문화재 훼손 시비와 환경단체 등이 명승지로 지정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용유담 수몰 시비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문정댐은 높이 141m, 길이 896m, 저수용량 1억 7000만t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14개 댐 중 가장 규모가 크다.이와 관련 함양군청 지역발전T/F팀 김성진 팀장은 "문정댐은 예정지일 뿐 기본계획도 안된 상태다. 또 정부가 지난 6월 발표했듯이 만약 정부가 댐 건설을 하려면 사전검토협의회를 거치고 주민 의견을 수렴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도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리산생명연대 등 반대 측은 "이제 주민의 찬반 여부를 떠나 댐 상류와 하류 등 지리산 전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케이블카(삭도)2000년대 들어 10여년 간 국립공원 훼손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케이블카 건설사업은 정부가 2012년 6월26일 경남 사천시가 신청한 한려해상 케이블카 1곳만 통과시킴으로써 일단락됐다. 지리산과 설악산, 월출산 지역 지자체들이 신청한 6곳의 케이블카 계획에 대해서는 모두 부적절 결정이 내려졌다. 남원시 산내면 반선~반야봉 중봉 하단부 간 케이블카(6.6km, 421억 원)를 계획한 남원시는 기존 뱀사골 탐방로를 통제하고 케이블카로 탐방객을 분산시킴으로써 탐방로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립공원위원회는 중봉 아래로 예정된 상부정류장 일대가 우리나라에서 몇 군데밖에 없는 구상나무 숲이고, 또 절대보전지역인 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멸종위기, 야생동물서식지)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부결했다. 또 구례군은 산동면 온천지구~성삼재~노고단 KBS 중계소 하단에 이르는 4.3km의 케이블카( 320억 원) 설치 시 지리산 성삼재도로와 정령치도로를 폐쇄하겠다며 차별화 전략을 폈지만 공원위원회로부터 "남원시가 동의하지 않는 비현실적 방안"이란 지적을 받았다. 공원위원회는 또 산청군이 내놓은 중산관광지~장터목 5.2km 케이블카 계획(450억 원)에 대해서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등을 이유로 역시 불허했고, 함양군의 백무동~망바위인근 3.4km( 240억 원) 계획도 비슷한 이유로 불허했다. 이후 환경부 관계자가 "지리산권 4개 시군 어느 한 곳이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사업을 재신청하면, 다시 경쟁적으로 나설 것이 우려된다"며 "서로 자율조정해서 신청지를 단일화 한다면 재심사 하겠다"고 밝혀 또 다른 갈등을 부추겼다.● 최화연 지리산생명연대 사무처장 "고마운 지리산 그대로 놔두자"지리산은 3개도(경남, 전남,전북)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국내 최대 면적(483㎢)의 국립공원이며 고산, 계곡, 습지 등이 분포해 멸종위기에 처한 종을 포함, 약 5,000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다. 지리산은 1967년 국내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의 카테고리Ⅱ지역으로 인증되어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국립공원으로 인정받았다.다양한 동식물들과 더불어 지리산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도 골짜기에 깃들어 지리산과 한 몸이 된 삶을 꾸려왔다. '지리산문화권'이 형성될 정도로 지리산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산이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배경에는 지리산 주민들의 자발적 지정운동이 있었는데, 지리산에 케이블카와 댐을 만든다는 계획을 지리산 4개 시군 지자체와 국토해양부, 수자원공사가 버젓이 추진하고 있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세상이 강팍해지고 돈 중심으로 흘러가다보니 내 몸과 같은, 내 어머니 같은 지리산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기 시작한데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리산은 우리 산이야!'라고 자부심을 갖는 경남권, 전남권, 전북권 사람들이 있다. 자부심이 혹여 자만심과 독점욕으로 변질된다면 케이블카, 댐을 짓겠다는 발상은 언제나 가능할 수 있다.지리산에 댐을 지으면 멸종위기종 반달가슴곰의 생태이동통로 단절과 국가명승으로 지정예고까지 된 비경 '용유담'의 수몰, 인근 칠선계곡, 한신계곡, 백무동 계곡과 연결된 생태계 단절, 안개 일수 증가로 인한 생태계 변화, 농사 및 건강피해, 교통비용 증가, 인근 실상사 등 문화유산과 대대로 이어온 주민공동체가 파괴된다. 용수확보, 홍수조절이 필요해 댐을 짓겠다고 하지만 4대강 사업하면 두 가지 다 해결된다고 했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가. 4대강 사업이 국민 사기극인 게 드러난 마당에 같은 거짓말에 두 번 속을 순 없다. 국민혈세를 허투루 쓸 순 없다.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으면 지역경제가 살아난다고 하지만, 일부 업자와 권력자들의 주머니만 채우는 꼴이다. 무엇보다도 생태보전이 절실히 필요한 국립공원 구역 안에 케이블카를 계획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 '자연공원법' 개악부터 바로잡아야한다. 환경보호, 노약자, 장애인 배려는 핑계일 뿐이다. 최근에 설악산 케이블카 계획서가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다행히 부결되었지만 지리산권에서도 재추진 한다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 지리산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서운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핑계로 독점하고 사유화, 소유하려 들지 말고 그냥, 지리산을 고마워하자. 지금 이 자리에 있어주는 지리산을 공공의 가치와 선으로 놔두자. 지리산의 존재 자체를 경이로워하자. 지금 지리산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그대로, 옆에 있어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김재호
  • 2013.11.08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6. 이야기가 있는 마을

자치단체마다 지역 스토리를 발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호평을 받는 곳도 있지만 억지로 짜 맞춘 이야기 때문에 찾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지리산 일대 마을은 풍부한 스토리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가 함께 녹아 있다. 느림의 미학을 통해 힐링을 추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리산 일대의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매해 늘고 있는 이유다. 역사와 자연,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진 지리산 마을들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힐링을 준다.△천년송과 함께한 '와운마을'해발 800m 산자락에 우뚝 솟은 소나무의 자태가 일품이다. 언뜻 정이품송 소나무를 연상케하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424호 '지리산 천년송'. 구름도 누워 갈 정도로 높고 험한 곳 남원시 산내면 와운(臥雲) 마을에 있는 지리산 천년송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장대한 천년송의 빼어난 자태를 보기 위해 수년 전부터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던 이곳에 지난 2009년께 도로가 연결되면서, 하나둘씩 관광객이 찾기 시작해 입소문을 탄 뒤 이제는 지리산의 최고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사실 지리산 천년송은 수령이 600년 이상인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수량 측정을 위해 나무를 훼손할 수 없어 마을 주민들은 천년송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천년송을 할매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인근에 한아시(할아버지)송이 위치해 있다. 수 백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선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1월 10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낸다. 제관으로 선발된 사람은 음력 12월 30일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인근 계곡에서 목욕재계를 하며 천년송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백두대간 지나는 '노치마을'백두대간이 지나는 자리에 유일하게 촌락을 이룬 남원시 운봉읍 노치마을. 3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인데도 대간 능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에 속해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노치마을 일대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m의 방죽을 만들어 지맥을 끊고 그 안에 목돌(일명 잠금석)을 설치했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마을을 지나가는 유일한 지점임과 동시에 덕음산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사람의 신체로 비유하면 목에 해당된다. 일제는 잠금석을 설치해 목을 졸라 민족정기를 단절하려 했던 셈이다. 목돌들은 노치마을에서 1.5㎞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15년 전 경지정리작업 중에 발견된 목돌이 개인 집으로 옮겨져 정원석으로 사용되다 지난 8월 노치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노치마을로 옮겨진 목돌은 너트형으로 된 5개의 석물이다. 하나의 크기는 가로 120㎝, 세로 95㎝, 두께 40㎝로 두 개를 하나로 연결할 경우 가로 120㎝, 세로 190㎝ 정도로 구멍의 직경은 100㎝에 이른다. 일제가 설치한 목돌 때문에 숨통이 막혀 있던 마을 뒷산에는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 3그루가 버티고 있다. 또 마을 중앙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주민들에게 안락한 휴식 공간을 만들어 준다.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했으나 지리산의 강한 생명력마저 끊지는 못한 것이다. 주민들은 마을을 지켜준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매해 당산재를 지내고 있다. △남명학 발상지 '사리마을'남명 조식 선생의 지리산 사랑은 남달랐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그는 벼슬에서 내려온 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벼슬에서 내려오기 전에도 지리산을 17차례나 방문하면서 유람록을 남겨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현재 산청군 사리마을 일대에는 남명이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던 산천재가 남아있다. 산천재에 있는 수 백년된 매화나무 남명매는 지역의 명물이다. 남명은 72세 때인 1572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제자들이 산천재 인근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덕천서원을 건립했다. 이후 덕천서원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지만, 현재도 남명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이 묻어난다.남명의 학문적 업적도 뛰어났다. 바른 소리를 하고 나아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남명학을 만들어 실천적 지식인을 길러왔다. 이 때문에 같은해(1501년) 태어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성리학자라는 평가는 물론 신유학의 발상지 중국 무이정사 관장도 그의 이름 석자에 경외감을 표할 정도다.

  • 기획
  • 김정엽
  • 2013.11.01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5. 지리산이 주는 선물

지리산의 다양한 기후와 풍토는 동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험준한 거산 안에는 넓은 평지가 많고, 맑은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농지가 더 필요하면 산비탈을 개간했다. 초목을 뽑아내고, 돌멩이를 골라내어 다랑이논을 만들었다. 지리산 주변 다랑이논은 지리산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깊은 산속에서 자라는 약초는 허준이 의술을 익혀 명의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풍부하게 공급되면서 목공예가 발전했고, 독성이 강한 옻은 수준 높은 옻칠공예를 탄생시켰다. 닥나무는 한지로, 목면은 실과 천으로 변신했다. 지리산의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는 품질 놓은 녹차와 매실, 감, 배 등 맛좋은 과일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남원 목기남원은 목기, 목공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에서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풍부하게 공급됐고, 특히 지리산 주변에 사찰이 많아 스님들의 공양에 사용하는 발우는 물론 제기, 소반 등 목공예산업이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남원목기는 표면에 옻칠을 더해 최고 품질을 자랑했다. 지리산은 전국 3대 옻 주산지에 들 만큼 옻이 많다. 옻칠장으로 유명한 김을생씨(남원시 산내면 백일리)는 "옻은 나무에 대한 침투력이 강하기 때문에 벗겨지지 않는다. 방수가 잘되니 썩지 않고, 살균 살충 효과도 좋다. 사용할수록 윤기가 나는 것도 옻칠의 큰 장점이다"고 말했다. 남원의 목기산업은 1960년대까지 성행했지만 플래스틱과 스텐리스 제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위기를 맞았다.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에 자리잡고 있던 전라목기기술중학교는 1968년까지 18회동안 48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다가 결국 폐교됐다. 그러나 김을생 옹을 비롯하여 김광열, 노동식, 김영돌, 박강용, 안곤 등 전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목공예, 옻칠 장인들이 남원목공예의 맥을 잇고 있다. △함양 마천석지리산은 품질 좋은 석재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오석인 마천석은 예로부터 벽재, 구조재, 기념비, 비석 등 내외부용으로 고루 사용돼 왔는데, 검은색을 띄고, 강도가 무른 편이어서 조각에 용이하기 때문이다.함양군 마천면의 한 채석장에서 마천석을 채취한 후 남은 석산 단면에 석가모니불을 조각하는 작업이 가능한 것도 마천석의 특징을 잘 이용한 것이다. 얼굴 부분이 조각된 천왕대불은 높이 108미터, 어깨넓이 40미터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불상이 될 전망이다.△산청 약초경남 산청군 금서면은 일찍이 약초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조선 명의 허준이 탄생한 산청은 '동의보감촌'에서 9월6일부터 10월20일까지 45일간 '2013 산청 세계전통의약엑스포' 행사가 열렸다. 유네스코가 공중보건의학서 사상 최초로 허준의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고,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인 2013년을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한 데서 알 수 있듯 이제 산청은 세계 시장에 '약초의 고장'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했다. 지리산은 해발 1915m의 다양한 기후 지대에서 각종 약초가 풍부하게 생산되어 왔다. 구기자, 오미자, 당귀, 더덕, 꾸지뽕, 도라지, 두충, 독활, 산수유, 갈근, 천궁 등 수 많은 한방약재들이 생산되는 지리산은 생명의 영산이다.또 산청군 단성면에는 문익점이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에 처음 목화를 심어 재배했다는 시배지(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08호)가 있다. 1965년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뿌렸던 300여 평의 밭을 사적지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산청 곶감경남 산청군 시천면 천평뜰에 자리잡은 곶감경매장은 시천면을 비롯해 인근 삼장면, 중태, 덕산 등 지리산 자락에서 생산되는 곶감 집산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고종시 곶감은 큰 일교차 덕분에 당도가 높아 예로부터 궁궐 진상품이었다. 10월말이면 감을 깎아 말리는 모습이 그야말로 진풍경이다. 12월 첫째 주부터 실시되는 곶감경매에서 거래되는 곶감은 연간 200억원을 훨씬 웃돈다. 거래 물량은 2,000동(1동은 100접, 곶감 1만개) 이상이다. 이 때문에 산간 오지인 이 일대 주민들은 집 텃밭은 물론 논과 밭까지 감 농사를 짓는다. 시천면 천평마을 일대는 예로부터 금환락지 명당터가 있다는 말이 전해오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금환락지 명당터인 셈이다. △하동 감과 매실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 생산되는 감은 산청군 시천면 일원에서 생산되는 곶감용 감과는 크게 다른 대봉감(홍시)이다. 지리산 남쪽에 자리잡은 악양골에서 생산되는 감은 풍부한 일조량과 큰 일교차 덕분에 맛과 향이 뛰어났으며, 임금에 진상된 것으로 유명하다. 악양면 주민들은 매년 10월 말이면 악양대봉감축제를 열고 있다. 하동은 또 매실 재배농가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지리산 구재봉(767.6m) 자락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먹점마을의 경우 주민(30여 가구) 대부분이 매실 농사를 지을 정도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기후 풍토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하동 화개차 쌍계사 들어가는 계곡길 주변은 차밭과 찻집이 즐비하다. 지리산 자락 하동군 화개에서 녹차가 재배된 것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져왔고, 왕이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 지리산 쌍계사 입구 차 시배지에는 '대렴공추원비'가 세워져 있다. 다성 초의선사는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자태는 그 종자부터가 다르다"고 격찬했다. 지리산 청정계곡에서 차가 재배되면서, 찻잎을 따서 9번 덖는 과정이 반복되는 45월 무렵 하동 일대에는 차향이 끊이지 않는다. △한지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등은 예로부터 닥나무가 많이 자생했고, 물이 맑아 한지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 지방특산물인 숯과 종이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 운영하던 소(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함양 의탄리에는 최근까지 닥나무 껍질을 벗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삼굿터가 있었다. △구례 산수유구례군 산동은 산수유마을로 불린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70%가 생산되는데다 산수유 시목이 지금도 자라고 있다. 약 1000년 전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 때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는데, 이 나무가 산수유 시목(始木)으로 알려진다. 산동면 계척마을에 있다. 산수유 열매는 11월에 수확하며 술과 차, 한약재로 쓰인다. 요즘에는 신장기능 강화, 요실금, 전립선, 생리통 등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재호 논설위원

  • 기획
  • 김재호
  • 2013.10.25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4. 지리산을 지키는 사람들

한반도의 허파 지리산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한 해 3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 명소이자 국민 체력단련장, 스트레스 해소의 장, 예술인들의 작업장이다. 70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이고, 소중한 문화자산들이 가득한 곳이다.지리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날도 머지않았다. 문화재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남원문화원 이병채 원장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권 7개 시군 문화원이 한 단계 높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 등재를 수년째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지리산의 가치를 알고 보존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가는 지난 1967년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지리산생명연대,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등 시민단체, 주민 등의 감시와 노력 덕분이다. 최근 문화재청의 지리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을 위한 용역을 실시한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의 서정호 교수(순천대)를 통해 지리산의 가치, 보존 이유, 향후 전략과 과제 등을 들어보았다. 또 지리산 자락에 아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눌러앉은 강병규 길섶 갤러리 대표도 만났다.● 서정호 지리산권문화연구단 교수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급해"-지리산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까."5년 전에 무주 군청에서 태권도공원 관련 일을 할 때 덕유산에 많이 올라갔는데, 그 때 자연스럽게 산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2008년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으로 옮긴 후 지리산 연구에 푹 빠져 있습니다. 여기 와서 빨치산과 관련된 남부군 등 소설책을 비롯해서 지리산 관련 책들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또 지난 5년 동안 지리산에는 200번 정도 들어갔다 나왔는데, 천왕봉 20번, 노고단 50번 정도 다녀왔고, 골짜기마다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리산은 어떤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까."지리산은 384㎢에 달하는 굉장히 넓은 산입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생물종 2만2000여종 중에서 3분의 1인 7000여종이 살아요. 그게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돼 있으니, 그게 지리산의 가장 큰 매력이죠. 북한산은 지리산의 6분의 1 크기에 불과한데, 연간 탐방객이 1000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지리산은 300만 명이예요. 탐방객 수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생물권보전이 잘 돼 있다는 것이죠. -지리산권문화연구단은 2007년 교육부 HK사업으로 선정됐죠?"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하고,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이 단일과제로 '지리산권 문화 연구'라는 의제(아젠다)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80억 원을 지원받는 사업입니다." -주로 무슨 일을 합니까."지리산권의 문화를 연구합니다. 연구원 7명이 그동안 저서 100권, 논문 150편 정도를 내놓은 것 같습니다. 외부 용역도 수행하고 있는데요, 문화재청의 '지리산복합문화유산등재신청' 용역,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주한 '디지털 하동문화대전' 용역, '지리산 사전' 발간작업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환경부의 유네스코 '지리산생물권보전지역' 신청 용역에 연구원 동료인 최원석 교수(경상대)와 함께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문화재청이 지리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데, 어떻게 보십니까. "문화재청은 우선 세계문화유산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유네스코 복합유산등재입니다. 문제는 문화재청 내부에서 지리산복합유산등재 건이 후순위에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자연유산 부문에서 내용이 생각보다 빈약하다는 겁니다. 화엄사 등 사찰을 중심으로 한 문화 쪽은 내용이 좀 있는데, 자연 쪽에서는 세상에 '이거다' 하고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지리산만의 자연경관과 동식물이 빈약하다는 거죠. 인공적으로 방사해 개체수를 늘리고 있는 반달가슴곰이나, 한국 특산종 구상나무 모두 경쟁력 떨어진다는 판단입니다." -왜 그런가요. "예를 들어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호주 블루마운틴에 서식하는 유칼립투스라는 나무는 호주와 뉴질랜드에만 서식하는데, 그 나무가 블루마운틴의 60% 정도 분포돼 있습니다. 유칼립투스 잎에는 알콜 성분이 있고, 바람이 불어 서로 부딪치면 산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이 산불을 이용해 동물들을 사냥하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즉, 유칼립투스가 많이 분포돼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유칼립투스가 원주민들의 전통적 생활 풍습, 문화에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증명이 됐기 때문에 유네스코로부터 그 가치가 인정된 것입니다. 아쉽게도 구상나무는 인간 전통문화 관련성이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풀어야 할 연구과제가 많다는 얘깁니다. -어떤 일들을 어떻게 대비해 나가야 할까요."자연유산은 세계적 추세가 국내법이나 국제적 네트워크 규약에 의해서 보존관리구역으로 지정된 곳을 우선 등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국내법으로 천연보호구역,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어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가 유리하다는 겁니다. 지리산은 천연보호구역,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조차 안 돼 있으니까 먼저 이것부터 지정해 나가야 합니다. -의욕이 앞선 측면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그렇죠. 차근차근 해 가야 합니다. 먼저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을 받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유네스코에 지정 신청하려면 환경부장관, 산림청장, 도지사, 시장군수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지금으로서는 3개 광역지자체와 4개 기초지자체가 지리산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적극 협조하는 분위기가 시급 합니다. -주민들 사이에 생물보전지역이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지역발전이 저해될 것이란 우려가 있는데요."지속가능한 발전을 하자는 것이 바로 생물권보전지역 및 유네스코 유산 등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제주도에서 나오는 생수는 '세계자연유산지역에서 나오는 삼다수'라는 상표가 가능합니다. 그만큼 경쟁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주민은 물론 3개도 5개 시군 기관장들이 지리산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합니다.● 강병규 길섶 갤러리 대표 "역사문화자산, 소득화 필요"-어떻게 지리산에 터를 잡게 됐는지요."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일할 때 주로 산을 취재했습니다. 덕유산과 지리산을 많이 다녔는데 지리산의 인상이 너무 좋았어요. 거의 매주 지리산을 찾았지요. 이곳에 내려온 지는 8년 정도 됐습니다. 사진작업을 하면서 지리산만의 차별화된 면모를 보았죠. 뾰족한 기암괴석이 많은 설악산과 달리 지리산은 선이 부드럽고 화려하지 않아요. 포근하고 장중한 느낌이었죠. 은근하고, 끈기 있고, 어머니처럼 포근하거든요. 그러면서 지리산에 끌렸고, 나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산줄기와 계곡, 일출과 일몰 등 장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차츰 숲 속의 길과 그 길을 오가며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욱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도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직장을 그만두면 꼭 지리산에서 살겠다고 생각했었죠.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지리산에서, 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소망했던 삶입니다."-길섶 갤러리는 마을 뒷산이지만 상당히 가파른 곳에 위치했는데, 어떻게 집을 짓게 됐습니까."지리산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2005년에 임야를 사서 개간했습니다. 매입한 임야가 1만6000평이고, 2000평의 대지를 만들어 살림집과 갤러리, 사랑방을 지었죠. 집은 지역 문화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산골이라는 분위기를 살려 황토로 흙집을 지었고, 지붕은 너와를 얹었습니다. 당초 제 꿈이 조용한 숲 속에 알찬 문화 휴식공간을 조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 전시 휴식공간을 마련했습니다."-흙집 짓는 것부터 난공사였을 것 같은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흙집 짓기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마침 산내면 지역에 흙집 짓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품앗이 해가면서 공사를 했어요. 제 집이 산내면에서 일곱 번째 완공된 흙집입니다. 사실 집짓는 것보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이해를 얻는 것이 더 힘들었죠. 원주민과 외부에서 들어온 귀농인들 사이의 갈등, 또 귀농인들 간의 갈등이 보이지 않게 많아 참 안타까워요. 몇 년 전 출판사와 공동으로 지리산 주변 마을 취재를 다닌 적이 있는데, 원주민들은 부와 지식을 두루 갖춘 귀농인들에게서 상대적 박탈감, 시기심을 갖는 경우가 많았어요. 또 귀농인들은 은근히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런 갈등이 조금씩 삭혀지고 있지만 해결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강 대표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지리산에는 많은 문화유산, 전통이 있습니다. 남원시 운봉 등에서 발굴되는 야철지는 고대 철기문화의 중심지가 지리산 일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원시 운봉읍 회덕마을과 팔랑치 등에 남아 있는 샛집(억새집)도 소중한 지리산의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차원에서,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유입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경우 이원규박남준 시인, 이창수 사진작가 등이 정착해 창작 작업이라는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실상사가 귀농학교를 만들고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지리산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입니다. 이제 지역의 소중한 역사 문화적 자산을 소득으로 연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소득은 어떻게 얻고 있습니까."제가 집을 지은 후 공교롭게도 지리산둘레길이 개설됐는데, 남원 인월-함양 마천 구간이 집 근처를 지납니다. 이래저래 입소문이 나면서 여행객들이 들러 가거나 1박 하며 바비큐 파티를 하는데, 그런 손님들이 많아졌어요. 갤러리에 전시된 지리산 사진도 판매합니다."-구절초 축제는 잘 돼갑니까."지난 4년간 집 주변 1만 4000평의 소나무 숲에 구절초를 심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첫 축제를 열었고, 올해에도 10월3일부터 구절초축제를 동네잔치처럼 소박하게 했습니다. 산골에서 혼자 하려니 여러모로 힘든 것이 사실인데, 자연경관과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축제를 주민, 여행객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구절초 축제가 지리산 둘레길의 대표적인 상생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키우려고 합니다."-지리산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보시는지요."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리산에 새로운 피가 수혈돼야 하고, 자치단체들이 나서 흙집과 목기 등을 살리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어가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리산문화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가치가 충분해요. 지리산의 원시적 생태와 역사 전통문화 가치를 통해 주민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앞으로 구절초에 예술, 문화를 얹어 수준 높은 지리산 문화를 만들어 갈 계획입니다.김재호 논설위원

  • 기획
  • 김재호
  • 2013.10.18 23:02

판소리, 유네스코가 인정한 독창적 음악

세계의 모든 나라는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전통음악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 가부키가 있다면 중국에는 경극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판소리가 있다. 판소리는 특수성, 독창성,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3년 11월에 유네스코로부터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됐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결합된 말로 '판'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말하고 '소리'는 노래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말한다. 한 판이 꾸려지고 나면 고수의 북 장단에 따라 소리꾼 한 명이 창(소리), 아니리(말), 발림(몸짓)을 섞어 가며 긴 이야기를 한다. 소리꾼은 혼자서 모든 역할을 다 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의 음역대 변화가 뛰어나야하고 다양해야 한다. 또 고수는 소리꾼의 소리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를 맞추고 추임새도 넣어야 하는데 이는 상당한 순발력을 요구한다. 단순한 무대 구성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시간 동안 혼자서 모든 역할을 해야 하는 힘든 1인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처럼 판소리의 독창성은 전 세계 다양한 음악 무대에서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판소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당들의 노래로부터 나왔다는 무가(巫歌)기원설, 고려~조선말까지 궁중 연례행사 때부터 광대들의 노력으로 발전되었다는 광대소학지희설(廣大笑謔之戱設)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전라도 지방의 서사무가(敍事巫歌)가 그 기원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배경지가 바로 남원 운봉 비전마을에 있는 국악의 성지다.이러한 판소리의 기원 자체가 서민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보니,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취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서민들의 일상 언어와 걸쭉한 욕설도 사설에 들어오고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그들의 불만이 판소리에 반영됐다.

  • 기획
  • 기고
  • 2013.10.11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3. 국악의 성지 남원 운봉

힘차고 거셌다. 계곡을 휘감은 굉음이 빠져나갈 자리는 하늘 밖에 없었다. 권삼득 명창이 소리를 가다듬었던 곳으로 알려진 구룡폭포 이야기다. 완주 출생인 권 명창은 집안에서 쫓겨나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들어와 한바탕 소리 공부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편제의 거장이라 불리는 숱한 명창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지천에 울리는 물소리를 뚫고 득음을 한 명창들이 많아서일까. 동편제 창법의 특성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듯 정중웅건(鄭重雄健)한 우조(羽調)의 특성을 갖고 있어 힘차고 거세다. 또 발성이 무거운 데다 소리의 꼬리를 짧고 분명히 끊어주며 리듬 또한 단조롭고 담백하다.동편제의 고향 남원시 운봉읍 일대는 국악의 성지다.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데다가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요롭고 살기 좋았다. 특히 운봉 읍내와 장교리는 2000년에 가까운 오랜 마을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좋은데다 풍요로우며 사람들이 많이 찾다 보니 삶이 윤택했다. 자연히 판소리와 같은 풍류음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에 더해 운봉지역 주변 지리산 내에는 정령치 인근의 선유폭포, 구룡폭포, 옥계동 등과 같이 소리 공부하기 좋은 곳이 많아 명창들이 배출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운봉 비전마을에서는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이자 가왕이라 불린 송흥록과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이 태어났다. 송흥록의 소리는 아우이자 자신의 고수였던 송광록-송우룡-송만갑으로 이어졌다. 이들로부터 동편제라는 창법이 나왔고 운봉읍은 동편제의 원고장이 됐다.이후 김정문, 이화중선, 장재백, 박초월, 배설향, 강도근, 안숙선, 강정숙, 전인삼, 이난초 등 명창과 대금 명인 강백천, 가야금병창 명인 강순영오갑순강정렬 등 수많은 국악인들이 배출됐다. 이들은 지리산 북부자락의 운봉 및 남원을 국악의 고장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운봉에는 국악의 성지가 조성돼 전시체험관, 국악, 한마당, 납골묘, 사당, 독공장, 야생화 단지 등이 만들어졌다. 지난 2008년에는 옥보고의 묘역 등이 설치돼 운봉 출신 국악인들을 기리며 국악의 계승 발전을 위해 후진들을 양성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악의 성지가 들어선 곳은 사실 그 역사가 더 깊다. 신라 경덕왕 시대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이곳에 자리 잡고 50년 동안 가야금 기법(금법琴法)을 닦은 뒤 상원곡, 중원곡, 하원곡 등 새로운 거문고 가락 30곡을 지어 널리 전파했다. 통일신라 육두품 출신인 옥보고는 금도(琴道)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줌으로써 신라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김정엽기자 colorgogum@△동편제란?판소리는 창법에 따라 유파를 달리한다.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구분된다. 가왕이라 불린 송흥록의 법제를 기준 삼아 운봉구례순창흥덕 등 주로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흥행했던 창법을 동편제라 한다.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광주보성 등 섬진강 서쪽을 서편제, 경기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불렸던 염계달모흥갑의 법제가 중고제다. 남원에서는 춘향가, 흥보가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고전소설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배경으로 판소리 동편제가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0.11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⑫ 현대문학 속 지리산

현대문학 속에서 지리산은 아름다움 보다는 비극적 충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화합과 동질보다는 이념적 갈등과 비극이 지리산 계곡 곳곳에 남아 있는 탓이다. 인간다운 삶을 갈구했던 사람들의 핏빛 절규가 동백꽃처럼, 진달래꽃처럼, 단풍처럼 빨갛게 타오르다 결국 맥없이 스러져간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한 모든 문학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은둔과 수행, 전쟁, 투쟁의 질곡이 뒤범벅된 지리산 문학작품들은 '한'의 소산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하여 이병주의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 소설류는 대부분 일제시대와 해방, 6.25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민족의 한과 비극을 다루고 있다.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옛날 지리산을 무려 17회나 탐승한 남명 조식 선생은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긴'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조식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임란을 겪었다면, 지리산이 무릉도원으로 보였을까. 박경리는 소설 '토지'의 서문에서 "악양 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정작 지리산에 대해서는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땅이다."라고 적었다. 박경리의 지적처럼 현대문학에서 지리산은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다. 탄압받는 민중, 힘없는 민중, 억울한 죄인, 세상에 실망한 지식인, 이념적 궁지에 몰린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 무릉도원을 꿈꾸며 절규하던 공간이다.지리산 남쪽 악양 평야는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과 생명의 젖줄 섬진강 사이에 있는 널찍한 '무딤이 들판'이다. 악양 평야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평사리에서 최참판 일가가 조선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무렵까지 겪는 애증을 그린 대하소설 토지는 서희와 길상, 조준구 등 다양한 부류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삶의 조건과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조정래의 지리산은 섬짓하다. 산도 붉고 사람도 붉은 곳으로 유명한 지리산 피아골은 조정래에게 더 이상 아름다운 골짜기가 아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마지막 편에서 피아골의 붉은 경치를 이렇게 해석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피아골은 특히나 유별났다. 〈중략〉그러나 피아골의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죽어간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떠도는 말은, 연곡사 아래서부터 섬진강 어름까지 물줄기를 따라가며 양쪽 비탈에 일구어 낸 다랑이논 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정래의 지적처럼 약한 자 민초들의 한 서린 피눈물은 지리산 주변 800리 자락을 타고 천년 만년 흘러내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존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리무중 지리산 속을 진군해 가다 어느 날 벌어진 전투에서 총탄에 사라져간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가슴을 짓누르며 분노케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소백산을 따라 남진하던 중 군경과의 교전 및 전염병으로 600여명이 사망, 사기가 크게 저하된 부하들을 향해 "북으로 가는 길만이 살 길이 아니다. 남진하여 지리산까지 가면 그곳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며 독려한다. "남부군은 다시 행동을 일으켜 둔철산을 넘어 서진의 길을 시작했다. 경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섰을 때이다. 앞서 걷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고 감격어린 소리로 외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중략〉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남부군은 드디어 그 긴 여로를 겪어 목적한 곳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수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신비로운 웅봉(雄峰)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략〉박태영으로서도 감회가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썼던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이 된 감정으로 넋을 읽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이병주. 지리산)어느 전투에서 빨치산의 총탄에 쓰러진 풋내기 경찰의 품에서 획득한 수첩에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적은 빨치산 홍행기도 곧 토벌대의 총탄에 사살되고 마는 비극의 현장 지리산의 단풍은 조정래의 해석처럼 핏빛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빨치산과 토벌대의 쫓고 쫓기는 살육전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초들이 있었다. 경남 거창과 산청, 함양, 전북 남원, 구례, 함양 등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이 양민을 대거 학살했다.경남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시비에서 군산 출신의 시인 문효치는 이렇게 읊고 있다. "님 앞에 서 있기가 부끄럽습니다퍼부어오는 총탄이 우리의 양심을 사살할 때그 양심의 갈래 끝에서 산화된 님이시여〈중략〉이제 저 붉은 낙조의 순간처럼더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꿈만 꾸소서아픈 기억에 떨고 있는 이 땅을 지켜 주소서"(문효치. 저 하늘의 별이 되신 님이시여)또 시인 이원규는 '지리산 멧돼지'에서 순종을 고집하다 결국 죽어간 지리산 빨치산들의 운명을 이렇게 노래한다.〈중략〉"반종의 멧돼지처럼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보지만순도 백의 혁명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순결한 야인을 꿈꾸지만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이원규. 지리산 멧돼지)지리산 문학이 모두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수필가 백남오는 '겨울밤 세석에서'란 수필에서 겨울밤 세석평전에 깃든 태고의 신비를 바라보는 감동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세석은 하얀 눈을 덮어 쓴 채로 바람의 폭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중략) 문제는 달빛입니다. 그 천지개벽 같은 혼돈의 현장을 말릴 생각도 않은 채, 달빛은 교교하고도 무심하게, 바람의 횡포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달빛까지 함께 어우러진 세계, 이것이 천상인지, 지옥인지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제게는 아무래도 없습니다.'

  • 기획
  • 김재호
  • 2013.10.04 23:02

웅장한 자연 모습 수많은 역사 점철

섬진강 동쪽에 붙은 하동 땅. 지리산 자락의 셀 수도 없는 청계수가 모여들어 언제 인지도 모를 먼 과거로부터 하나 되어 흐르다 화동 화개에 이르러 강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울창한 송림을 거쳐 포구를 휘감고 도는 물길이 닿는 곳 여기저기엔 고운 백사장이 생겨나고 둔치의 갈대숲을 이루며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 된 강물을 남쪽 바다로 흘려보낸다. 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약면 평사리 마을 앞 둔치 장승이 있는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은 유난이도 정겨움이 묻어나는데 얼핏 흐름이 멈춘 듯 온 사방이 적막감에 깊이 빠져든다.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은 지난 과거에도 흘렀었고,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쉼 없이 흐를 것이기에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으리라. 무심코 흐르는 강물이기에 얽매임도 집착도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로의 치달음도 아예 필요치 않을 것이다. 원래 마음이 무심이라 했다지만 생각 많고 말 많은 이 중생은 언제쯤이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조금도 머무는 바 없이 무심이 지어가는 저 강물을 닮아 볼까. 지리산에서 수많은 전설과 설화가 탄생한 배경도 이렇지 않을까. 아마도 가락국의 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는 섬진강 물길을 따라 이곳 칠불사에 정착했을 것이다. 웅장함과 뜻 모를 적막감이 가득한 강의 무거운 의미를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전에 깨달았다.

  • 기획
  • 기고
  • 2013.09.13 23:02

11. 민중 정서 담아낸 각종 설화 - 시간이 멈춘듯 수천년간 녹아든 옛 이야기들

설화는 특정지역이나 문화권에서 구전돼 오는 이야기의 총칭이다. 설화는 자연발생적이고 집단적임과 동시에 평민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특정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감정, 풍습, 신념 등을 반영한다. 따라서 한 개인의 창작이기보다는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으며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과 정서를 담고 있다. 또 설화는 신화와는 달리 구체적인 지역성과 역사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신화가 까마득한 태초 역사시대 이전의 이야기라면 설화는 멀지 않은 시대에 특정지역에서 발생한 이야기다. 지리산권에서 탄생한 설화도 이런 일반적인 특징들을 가지면서도 종교역사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특히 불교설화가 풍부하고 무속과 관련된 설화는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화엄사 각황전 중수기전남 구례군 화엄사 경내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각황전이 있다. 이 건물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조선 중기 1699년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 당시 임금인 숙종이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장육전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벽암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임을 받아 장육전 중창불사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건축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계파스님은 밤새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기도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다음날 계파스님은 간혹 절에 와서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인를 보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시주를 청했다. 스님의 간청이 이어지자 가진 재산이 없었던 노인은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를 내리소서"라고 말한 뒤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계파스님은 멀리 도망쳤고 몇 년간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서울에 이르렀다. 이때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이 꼭 쥐어 진 채 펴지지 않았는데 계파스님이 손을 만지자 신기하게도 펴졌다. 그리고 손 안에는 '장육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해 장육전을 지었다고 한다. △칠불사 일곱왕자와 허황후지리산 반야봉 동남쪽 해발 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던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한 뒤 모두 성불했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린다. 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았다. 두 사람은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명의 왕자들은 출가해 아유다국에서 함께 건너온 허황옥의 오빠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불교에 정진해 수로왕 103년 모두 성불했다. 칠불사에는 이들이 수행했던 운상원터와 수로왕과 허황옥이 간접적으로나마 물에 비친 아들들의 모습을 봤던 연못이 남아있다. △달궁계곡 정장군 황장군 지리산에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주검들이 묻혀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이야기는 멀리 삼한시대까지 올라간다. 마한진한변한은 부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진한군에 쫓기던 마한의 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금의 달궁 계곡으로 들어왔다가 최후를 맞는다. 당시의 상황들은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에 그대로 담겼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의 험준한 산세를 지키기 위해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했는데 인근의 재 이름은 '팔랑재'다. 서쪽에는 정장군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령치'이며, 동쪽은 황장군이 주둔했다 해서 '황령재'다. 남쪽은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해 지키게 했기 때문에 '성삼(姓三)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때 쌓은 성의 흔적들 또한 고리봉에서 정령치,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아직도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3.09.13 23:02

10. 풍수지리

풍수지리는 자연이 만들어 낸 갖가지 형상과 기운을 인간의 건강하고 복된 삶에 최적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냈다. 그런 측면에서 풍수지리 세계에서 지리산은 교과서적인 곳으로 알려진다. 수많은 고산준령들이 산 아래 멀리까지 수십 수백 갈래로 여인의 치마폭처럼 펼쳐 내린 산줄기와 계곡 주변에는 풍수지리에 얽힌 사연들이 즐비하다. 지리산은 험한 산세 곳곳에 인간의 터전을 허락했고, 인간은 그곳을 지혜롭게 가려내어 대대손손 삶을 영위하고 있다비보진압풍수남원에서 구례로 이어지는 국도 오른 쪽에 범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호랑이가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가면 밤재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빠져 나가면 구례 땅이다. 밤재터널이 있는 산 이름은 묘하게도 견두산(犬頭山)이다. 개 머리 형상을 한 산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와 관련 풍수전문가 최낙기 교수(선문대교수)는 견두산이 남원을 노려보는 형상이어서 남원에게 부정적인 형세라며 남원 광한루의 호랑이 석상이 견두산을 향해 배치된 것은 개의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범실이란 마을이름도 견두산의 나쁜 기운을 방어하기 위해 붙여진 것일 수 있다. 금환락지 명당지리산의 서쪽 구례에는 금환락지 명당이 있다는 입소문과 함께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구례 명당으로 알려진 곳은 쌍산재(雙山齋)와 곡전재(穀田齋), 운조루(雲鳥樓)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국도 좌측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에 위치한 쌍산재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초승달형 명당이다. 노고단에서 곧게 흘러내린 산줄기가 넓은 들판 건너편 구례에서 하동쪽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목전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좌청룡 우백호를 형성한 곳, 바로 이 천혜의 명당에 상사마을과 하사마을이 위치하고, 그 명당의 가장 중심에 쌍산재가 있다. 최낙기 교수는 쌍산재의 안채는 노고단에서 내려온 기가 뭉쳐 혈을 이룬 곳에 절묘하게 위치하고 있다. 혈을 이루고 난 여기(餘氣)가 안채 10여미터 앞에서 당몰샘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혈 앞에 여기가 만들어준 샘을 진응수(眞應水)라고 하는 데, 진응수가 있는 혈을 큰 명당으로 친다.고 설명했다. 진응수가 풍수에서 말하는 계수즉지(界水則止-산줄기를 타고 뻗어온 기운이 물을 만나면 멈춘다)의 역할도 수행하여, 쌍산재 안채에 기가 몰려 있게 된다. 제대로 된 진응수는 물이 맑고 수량이 사시사철 일정해야 하며 물맛이 좋아야 한다. 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야 하는데, 당몰샘은 진응수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그래서 인지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받아가는 당몰샘물은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쌍산재 자손 오경영씨는 터가 명당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요. 당몰샘 물이 좋다며 전국에서 물을 떠가는데, 아마 미네랄 성분이 적당히 함유돼 있어 건강에 좋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산면 사도리의 좌청룡 건너편에 있는 토지면 오미리에는 금환락지형(金環落地形) 곡전재와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운조루가 자리잡고 있다. 최낙기 교수는 곡전재는 풍수지리적으로 금환락지의 전형적인 저택이라며 풍수지리적으로 많은 것이 고려됐다고 분석했다. 최교수에 따르면 금환락지는 산자락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들판에 볼록한 형태로 생긴 터다. 이 때문에 곡전재는 섬진강을 따라 생긴 바람길 선상에 놓이게 됐고,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일반 담장이 아닌 2m50㎝에 달하는 돌담을 둘러쳤다. 집 뒷산에서 호시탐탐 집안을 노리고 있는 규봉(窺峰-도둑 봉우리)으로부터 집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뒷담에는 울창한 대나무숲을 만들었다. 또 대로(19번 국도)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진입로를 내지 않고, 곡전재 옆 담장길을 따라 드나들었다. 집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뒷산 규봉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풍수적 조치다. 혹은 도둑(규봉)에게 인적을 확인시켜주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최교수는 담장을 집 처마까지 높게 올려 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지만 곡전재는 바람으로 인해 저택이 너무 건조해지는 것(습도 유지)까지 고려해 건축됐다고 덧붙였다. 비보진압(裨補鎭壓-부족한 것은 보충하고 강한 것은 누른다) 풍수인 것이다. 곡전재 윗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또 하나의 명당 운조루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본다.)에 금구몰니형 저택으로 분석된다. 뒷산 자락이 끝나는 지점에 멀리 들판 너머 섬진강을 두고 있다. 최교수는 운조루는 대문 앞에 뒷산의 계곡물을 끌어 도랑을 만들고, 또 작은 연못도 조성했다며 이는 근본적으로 풍수지리적 조치다라고 말했다. 즉 풍수에서 기(氣)는 승풍즉산(乘風則散), 계수즉지(界水則止)다. 주산에서 흘러온 기가 집터를 지나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물길을 만들었고, 섬진강 바람 길을 따라 저택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니까 집 주변의 습도를 높여줄 목적으로 도랑과 연못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명당으로서 갖추어야 할 부족한 조건을 보충하기 위해 연못과 도랑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천평마을도 금환락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으로 꼽힌다. 시천면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지리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천천이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는 분지 지형이다. 주민 조성배씨는 이 곳이 금환락지 지형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금환락지 명당터를 찾아서 집을 지어오고 있다. 그러나 어느 곳이 진짜 금환락지 집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10년 전 도로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대한 바윗돌에 금환락지를 새겨 마을 대로변에 세워놓고 금환락지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최 교수는 시천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 자체가 금가락지 모양을 하고 있고, 지형을 살펴볼 때 금환락지비가 서 있는 곳 주변이 명당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과의 치열한 기싸움지리산에는 일본의 기운과 관련된 풍수지리적 사연도 많다. 얼마 전 남원문화원이 운봉읍 노치마을에서 발굴해 공개한 목돌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단절하기 위해 풍수적으로 백두대간의 목 부분에 설치했던 거대한 잠금석이다.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회덕마을에는 일본으로 가는 지리산의 맥을 끊기 위해 세 개의 연못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 앞에서 3대째 바리때를 만들고 있는 목공예가 김을생씨는 고려 말기에 한 고승이 실상사에 머물던 중 지리산 기운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큰 솥을 만들어 부연폭포에 집어넣어 기를 막았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3.09.06 23:02

9. 당대 사회상 담은 고전문학

심란할 때 산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탐방하고 지은 유람록은 약 70편, 시기별로 보면 후대에 갈수록 양이 많아진다. 이는 날로 치열해지는 계파 간 정쟁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지리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이 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람록이나 시편들을 보면, 자아에 대한 성찰은 물론 산이 가진 역사적 배경을 거울삼아 당대 사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문화인문학적 의미를 통찰했던 것이다. 수많은 역사문화 이야기를 품은 지리산은 이들에게 최고의 인문학적 수양관이었던 셈이다. 남명 조식 선생이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본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하동군 화개동 일대를 탐방했던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이 남긴 유람록의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진감선사대공탑비로 본 유불 논쟁△남효온(1454~1492) : 고운(최치원) 선생님. 쌍계사 앞에 광계(光啓) 3년(887) 7월에 세운 진감선사비명(국보 47호)이 있습니다. 이 비는 선생님이 교서를 받들어 비영을 짓고 글씨를 쓰고 전액한 것이 맞죠?△최치원(857년~?) : 그렇다네.△남효온 : 선사 혜소(慧昭)가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이 절을 세웠는데 그는 임금을 위해 기도하고 염불을 하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생님이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합니다. 선사는 문자선(文字禪글을 통해서 선지를 깨닫는 것)을 한 사람이 아닐까요. △김일손(1501~1572) : 동감합니다. 선생님의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고 산수 사이에 노닐던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명문이지만,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선생님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모시고 다니며 홀로 외로이 떠돌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최치원 : 옥을 캐는 사람이 험준한 곤륜산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사람이 깊은 여룡의 동굴을 기피하지 않는 것처럼 해야 그 빛이 오승(五乘불교의 다섯 가지 가르침)을 융합하는 불타의 지혜로운 횃불과 그 맛이 육경(六經여섯 가지 유교경전)에 배부른 선유의 아름다운 반찬을 얻게 되네. 그런데 배우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불타와 공자의 가르침은 유파가 다르고 본체가 상이하다.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각자 한쪽만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네. 청학동 찾다 도착한 불일암불일폭포△유몽인(1559~1623) : 남명(조식) 선생님. 세상 일이 힘들때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는다지요.(유몽인은 지리산을 찾기 2년전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내려왔다)△조식(1501~1572) : 맞는 말이네. 앞서 많은 선인들이 청학동을 찾았지. △유몽인 : 하지만 사람들이 청학동의 위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조식 : 내가 살던 시대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지. 자네보다 50년 전에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했네. 암자는 허공에 매달린 듯 했고 동쪽으로 가파른 향로봉, 서쪽으로는 낭떠러지에 우뚝 솟은 비로봉 사이로 청학 두세 마리가 날아다녔지. 이곳이 곧 청학동이었네.△유몽인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 새겨진 불일폭포가 있었습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의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쯤 됐습니다.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開成)의 박연폭포만한 것이 없는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긴 듯 합니다. 그 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조식 : 그렇지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네.

  • 기획
  • 김정엽
  • 2013.08.23 23:02

8. 황산대첩과 빨치산 전투

해발 1915m,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리산은 아름답고 신령스럽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핏빛 현대사가 자리잡고 있다.지리산 일대는 남해안에 상륙해 북진하는 왜적을 저지하기 위한 중요 전략적 방어선이었다. 남원 운봉의 팔량치, 진안의 웅치,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 전남 구례의 석주관은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으로서 왜구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때부터 주요 왜적 저지선이었다. 예부터 한반도를 침범한 왜적의 주요 북상로가 지리산의 동서 지역이었던 탓이다. 남해안에 상륙한 왜적의 한 갈래는 경남 진주에서 산청, 함양, 운봉, 남원, 전주로 북진했다. 또 한 갈래는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줄기를 타고 구례, 남원을 거쳐 북상했다. 또 6.25전쟁을 전후하여 6년여 동안 군경에 저항하다 숨진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 그리고 믿었던 아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의 억울함이 스며있는 암울했던 현대사의 현장이다.△황산대첩고려 말에 지리산 북동쪽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지리산 일대에 주둔, 약탈과 살생을 일삼던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전투였다. 고려 말기인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진포(군산과 서천 앞바다. 금강)를 통해 침입, 백성을 살해하고 물자를 약탈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당시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을 사용한 대포로 공격, 왜선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수많은 왜구들은 불에 타거나 금강에 빠져 죽었고, 천행으로 살아난 패잔병들은 선단이 불타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갈길 잃은 왜구들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약탈하고 살생했다. 지리산 아래 함양에 집결한 왜구의 약탈이 악랄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순찰사로 임명, 운봉 황산(해발 697m) 일원에서 왜구를 섬멸했다. 당시 이성계군이 왜장 아지발도를 쓰러뜨리며 무찌른 왜구의 피가 운봉 남천에 가득 흘렀고, 왜구의 피로 물든 '피바위가' 남천 하상에 남아 당시의 격전상을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승전 다음해인 1381년 황산을 찾아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다. 또 조선은 1577년(선조 10년) 운봉읍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워 전승을 기렸다. 하지만 일제는 이 암벽과 비를 폭파하고 정으로 쪼아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해방 후 정부는 대첩비를 다시 세우고, 폭파된 비석 파편을 모아 '파비각'을 세워 역사를 바로 세웠다. 남원시 운봉읍 양재우씨는 "올해 28회째인 '황산대첩축제'를 매년 열어 600년 전 황산대첩의 쾌거를 기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석주관칠의사묘정유재란 당시 왜병 수만 명이 경남 하동 방면에서 북진해 오자 전남 구례지방의 선비 왕득인(王得仁)과 그 아들 왕의성 등이 의병을 모아 석주관에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1598년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 때 전투에서 의병들이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는데,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 지리산 피아골은 이 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805년(순조5) 조정은 당시 전사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했고, 1946년 지방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세워 그 장렬한 뜻을 추념하고 있다.석주관 전투가 치열했던 정유재란 때 지리산 반대편인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도 민관이 왜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부녀자들까지 결사 항전하고 나선 황석산성 전투에서 7000여명의 아군은 7만 5000여명에 달하는 왜군을 맞아 5일간 결사 항전하다가 끝내 장렬하게 전사했다. 아군보다 10배가 많은 정규군을 이끌고 황석산성을 공격한 왜군의 피해가 사망 3만 4000여명, 부상 1만 4000여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아군의 승리였다. 남원성과 진주성 전투의 비극 등 지리산 자락은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빨치산 전투지리산은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의 패잔병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사라진 역사 현장이다. 토벌에 나선 군경들이 빨치산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고통을 당하던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군에 의해 몰살되기도 한 비극의 땅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과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청함양사건기념비'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탐방안내소- 빨치산과 토벌부대 전시관' 등이 당시의 비극을 대변한다. 지리산에서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을 한 세력은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여수순천반란사건 패잔병들이다. 이들은 반란부대장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1949년 4월 사살되면서 대부분 토벌됐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지리산에서 숨어 지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하산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이 1950년 9월15일 인천에 상륙한 후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인민위원회 지지자들이 지리산으로 피신,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면서 '신빨치'들의 활동이 시작됐다. 당시 월북하던 중 공산당으로부터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명령받은 이현상이 남부군을 조직, 지리산에서 활동하면서 빨치산 활동은 극에 달했다.그러나 1950년 10월, 백선엽이 이끄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토끼몰이 토벌에 나서는 등 군과 경찰이 수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급격하게 괴멸됐다. 1952년 1월17일 대성골 전투에서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92사단, 그리고 경남도당 57사단의 절반가량이 사상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우두머리인 박종하,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방준표(전북도당위원장), 김선우(전남도당 유격대장), 남도부(하준수),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 등 우두머리들이 사살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1954년 남도부와 김선우, 이현상 등 거물급이 검거사살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완전 괴멸했다. 1955년 4월1일 국군은 지리산 입산통제를 해제, 지리산 빨치산 사태는 종결됐다. 해방 후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 그 혼란 속에서 벌어진 지리산 빨치산 전투는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박았다. 군경은 빨치산 토벌을 내세워 양민까지 집단 학살했다.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을 비롯, 경남 함양산청과 거창 등 지리산 둘레 마을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만이 당시 죽임을 당한 주민, 그리고 유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3.08.16 23:02

7. 유교·기독교 유적 - 천왕봉처럼 솟은 기상 실천한 '남명학파' 산실

지리산권에서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종교가 성행과 쇠퇴를 반복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성행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성행했다. 조선 건국 직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지리산권 곳곳에 지방관들에 의해 향교가 세워져 유교 경전을 비롯한 선현들의 글이 체계적으로 전수됐다. 그런가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리산에 휴양촌을 만들어 심신을 다졌다. 이처럼 지리산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종교를 포용해왔다. 특히 유교문화는 지리산권에서 불교문화 못지않게 크게 성행했다. 남원, 구례, 함양, 산청, 하동 등 5개 시군에 향교와 서원 등의 유적이 무려 63개소에 달한다. 15세기 말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 16세기 중엽 남원의 안처순, 함양의 노진, 산청의 조식 등이 대표적 인물. 이중 남명 조식은 실천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를 만들어 지리산 일대와 경상우도 지역, 그리고 순천 남원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또 1920년대 남장로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휴양을 위해 세워진 휴양촌도 56동의 건물이 들어설 만큼 성행했다.△남명 조식 혼 깃든 산천재덕천서원덕천강 너머로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위치한 산천재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1세 때 이주해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열 번이 넘게 지리산을 유람했고, 12번째 유람을 마친 뒤 '유두류록'을 지을 만큼 지리산 사랑은 남달랐다. 또 그는 '천왕봉이 하늘 가까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兄愛天王近帝居)'라는 시구를 통해서도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처럼 지리산은 남명에게 우뚝한 기상과 기절의 표상을 보여줬고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며 '남명학파'의 사상을 다져갔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은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과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 정신을 여느 학파보다 더 두드러지게 추구한 경향을 보였다. 이는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거둔 것이 증명한다. 산, 사람, 사상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지리산과 남명 및 남명학파에서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리산 동쪽 자락에 건립한 덕천서원은 지리산과 남명학파가 함께 이뤄낸 문화경관의 집결체다. 덕천서원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지리산에 맺히고 다시 낙남정맥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징의 문집인 '창주집(滄州集)'에는 '물이 감아 돌아나가는 것은 먼 듯, 가운 듯 그윽해 서원이 들어서기에 천혜의 조건을 이뤘고 무엇 하나 더할 필요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명당 자리에 들어선 것. 남명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덕천서원은 1575년 최영경 하응도 윤근수 등의 문인들이 결의해 창건됐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가 1870년 서원 철령에 의해 다시 헐어졌고 다시 1926년 준공됐다. 덕천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상정에 향사를 올리고 8월 18일에는 남명제를 개최한다. 덕천서원의 향사는 지금도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거행되고 있으며 향사를 통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 선교사에게도 매력적 휴양지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장로회 소속 개신교 선교사들은 과로와 열악한 환경으로 죽거나 건강이 악화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휴양시설을 건립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들이 선택한 곳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지리산이었다.1922년부터 노고단 일대에 일부 건물을 짓고 1923년에는 동경제국대학과 교섭해 본격적으로 건축에 나섰다. 1931년에는 건물 32동에 이용자 149명 규모의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휴양촌으로 발전했고 왕시리봉 인근으로까지 발전해 그 규모는 건물 56동에 달했다. 이후 일제와 갈등을 빚은 선교사들이 1940년 한국을 떠난 뒤 휴양촌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노고단 인근의 유적은 대부분 소실됐지만 왕시리봉 인근에 있는 유적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 유적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숫자나 규모면에서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문화적 가치는 충분하다. 국내 유일의 산중 개신교 유적인 이곳은 단순한 휴양시설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 전쟁 등 개신교의 수난과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3.08.09 23:02

덕천서원서 만난 조식 14대손 조종명씨 "남명 선생은 조선시대 진보적 지식인"

"남명 조식 선생은 조선시대 이기론이 주를 이루던 시절 실천을 강조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습니다."남명 조식의 14대손인 조종명씨(73·산청군 문화관광 해설사). 남명의 혼이 깃든 덕천서원에서 만난 그에게서 선비의 강직함과 곧은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말년에 지리산을 찾아 자신의 사상을 다졌던 남명의 모습 그대로였다."16세기 기호학파(율곡학파), 강우학파(남명학파), 강좌학파(퇴계학파) 등 3개의 학파가 조선의 주류였습니다. 그러다 인조 반정 때 남명학파가 몰락한 뒤 정조에 이르러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바른 소리를 하고 나아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남명학파는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행동과 실천을 중시한 만큼 역사적 순간에 남명학파와 관련된 인물이 많았고 최근에는 '경상대 남명학 연구소'와 '서울대 남명학회' 등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 '산천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오는 9월 준공을 앞두고 있어 남명과 관련된 연구의 폭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진주 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이 남명학과 연관성이 깊다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몇몇의 학자들은 조선 후기 실학의 단초를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남명의 저술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불의를 참지 못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자랑해왔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당시 산천재를 중심으로 한 산청지역의 일반 백성들에까지 영향을 미쳐 역사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양명학 노장학 불교 등 모든 사상에 유연한 태도로 접근한 남명의 철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지리산과 결합된 남명의 철학이 현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3.08.09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