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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산대첩과 빨치산 전투

왜적 북상로·남부군 은신처… 암울한 현대사 상흔 오롯이

▲ 1952년 1월 14일 전주교도소로 이송되는 빨치산들.

해발 1915m,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리산은 아름답고 신령스럽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핏빛 현대사가 자리잡고 있다.

 

지리산 일대는 남해안에 상륙해 북진하는 왜적을 저지하기 위한 중요 전략적 방어선이었다. 남원 운봉의 팔량치, 진안의 웅치,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 전남 구례의 석주관은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으로서 왜구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때부터 주요 왜적 저지선이었다. 예부터 한반도를 침범한 왜적의 주요 북상로가 지리산의 동서 지역이었던 탓이다. 남해안에 상륙한 왜적의 한 갈래는 경남 진주에서 산청, 함양, 운봉, 남원, 전주로 북진했다. 또 한 갈래는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줄기를 타고 구례, 남원을 거쳐 북상했다. 또 6.25전쟁을 전후하여 6년여 동안 군경에 저항하다 숨진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 그리고 믿었던 아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의 억울함이 스며있는 암울했던 현대사의 현장이다.

 

△황산대첩

 

고려 말에 지리산 북동쪽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지리산 일대에 주둔, 약탈과 살생을 일삼던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전투였다.

 

고려 말기인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진포(군산과 서천 앞바다. 금강)를 통해 침입, 백성을 살해하고 물자를 약탈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당시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을 사용한 대포로 공격, 왜선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수많은 왜구들은 불에 타거나 금강에 빠져 죽었고, 천행으로 살아난 패잔병들은 선단이 불타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갈길 잃은 왜구들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약탈하고 살생했다.

 

지리산 아래 함양에 집결한 왜구의 약탈이 악랄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순찰사로 임명, 운봉 황산(해발 697m) 일원에서 왜구를 섬멸했다. 당시 이성계군이 왜장 아지발도를 쓰러뜨리며 무찌른 왜구의 피가 운봉 남천에 가득 흘렀고, 왜구의 피로 물든 '피바위가' 남천 하상에 남아 당시의 격전상을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승전 다음해인 1381년 황산을 찾아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다. 또 조선은 1577년(선조 10년) 운봉읍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워 전승을 기렸다. 하지만 일제는 이 암벽과 비를 폭파하고 정으로 쪼아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해방 후 정부는 대첩비를 다시 세우고, 폭파된 비석 파편을 모아 '파비각'을 세워 역사를 바로 세웠다. 남원시 운봉읍 양재우씨는 "올해 28회째인 '황산대첩축제'를 매년 열어 600년 전 황산대첩의 쾌거를 기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석주관칠의사묘

 

정유재란 당시 왜병 수만 명이 경남 하동 방면에서 북진해 오자 전남 구례지방의 선비 왕득인(王得仁)과 그 아들 왕의성 등이 의병을 모아 석주관에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1598년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 때 전투에서 의병들이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는데,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 지리산 피아골은 이 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805년(순조5) 조정은 당시 전사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했고, 1946년 지방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세워 그 장렬한 뜻을 추념하고 있다.

▲ 뱀사골 남원 충혼탑에서'빨치산과 토벌대'전시관을 관람한 후 묵념하고 있다.

석주관 전투가 치열했던 정유재란 때 지리산 반대편인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도 민관이 왜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부녀자들까지 결사 항전하고 나선 황석산성 전투에서 7000여명의 아군은 7만 5000여명에 달하는 왜군을 맞아 5일간 결사 항전하다가 끝내 장렬하게 전사했다. 아군보다 10배가 많은 정규군을 이끌고 황석산성을 공격한 왜군의 피해가 사망 3만 4000여명, 부상 1만 4000여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아군의 승리였다.

 

남원성과 진주성 전투의 비극 등 지리산 자락은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빨치산 전투

 

지리산은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의 패잔병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사라진 역사 현장이다. 토벌에 나선 군경들이 빨치산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고통을 당하던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군에 의해 몰살되기도 한 비극의 땅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과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청함양사건기념비'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탐방안내소- 빨치산과 토벌부대 전시관' 등이 당시의 비극을 대변한다. 지리산에서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을 한 세력은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여수·순천반란사건 패잔병들이다. 이들은 반란부대장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1949년 4월 사살되면서 대부분 토벌됐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지리산에서 숨어 지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하산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이 1950년 9월15일 인천에 상륙한 후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인민위원회 지지자들이 지리산으로 피신,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면서 '신빨치'들의 활동이 시작됐다. 당시 월북하던 중 공산당으로부터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명령받은 이현상이 남부군을 조직, 지리산에서 활동하면서 빨치산 활동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1950년 10월, 백선엽이 이끄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토끼몰이 토벌에 나서는 등 군과 경찰이 수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급격하게 괴멸됐다. 1952년 1월17일 대성골 전투에서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92사단, 그리고 경남도당 57사단의 절반가량이 사상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우두머리인 박종하,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방준표(전북도당위원장), 김선우(전남도당 유격대장), 남도부(하준수),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 등 우두머리들이 사살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1954년 남도부와 김선우, 이현상 등 거물급이 검거·사살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완전 괴멸했다. 1955년 4월1일 국군은 지리산 입산통제를 해제, 지리산 빨치산 사태는 종결됐다.

 

해방 후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 그 혼란 속에서 벌어진 지리산 빨치산 전투는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박았다. 군경은 빨치산 토벌을 내세워 양민까지 집단 학살했다.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을 비롯, 경남 함양·산청과 거창 등 지리산 둘레 마을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만이 당시 죽임을 당한 주민, 그리고 유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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